INICIAR SESIÓN도진은 아침 6시가 넘어서야 옷을 갈아입기 우해 집에 들어왔다.
주방에서는 가정부가 무미건조한 소리를 내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수가 현관까지 뛰어나와 "여보 왔어?"라며 겉옷을 받아 들었을 시간이었다. 밤새 고생했다며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둔 욕조로 그를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거실은 적막했고 욕조는 차갑게 비어 있었다.
" 이 사람, 어디 갔어요?"
도진의 물음에 가정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 사장님 오셨어요? 사모님은 주무시는지 방에서 안 나오시네요."
그말을 들은 도진은 지수가 게을러졌다고 생각하며 신경질 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주인 없는 침대 위, 축축하게 젖은 베개와 바닦에 팽개쳐진 이불만이 지수가 홀로 견뎌낸 지옥같은 밤의 흔적을 증언 있었다.
"이 여자가 아침부터 어디 간거야?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방 꼴이 이 모양이야"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미팅 스케줄이 급했다. 도진은 대충 샤워를 미친 뒤, 지수가 미리 챙겨두었던 와인색 와이셔츠와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 짙은 남색 넥타이로 무장했다. 지수의 손길이 닿은 완벽한 차림새를 하고서도 그는 분풀이를 멈추지 않았다.
" 아줌마 아침 하지 마세요. 나는 나가야 하고 그 사람은 집에도 없으니까."그는 신경질적으롬 누을 닫고 집을 나섰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그것이 단지 자신의 완벽한 루틴을 망친 지수의 '태만'때문이라고 결론 지었다.
밤새 복수를 빼고 응급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지수는 지어이 입원 치료를 결정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차오르는 복수 때문에 이대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 했다. 그때, 병실의 적막을 깨고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남편'
지수는 잠시 망설이다 습관처럼 남은 희망을 붙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
"너 어디야! 니가 없어서 아침에 해장국도 못 먹고 반신욕도 못 해서 내 컨디션이 엉망이 되었어! 오늘 중요한 미팅인데 망치면 니가 책임질거야!"
도진의 날 선 책망을 지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지수위 안위를 걱정하는게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일상이 어긋난 것에 화가나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한 구석이 또 다시 난도질 당했다.
예전의 도진은 지수가 친구만 만난다고 해도 " 어디서 만나? 누구랑 만나? 언제 헤어져? 내가 데릴러 갈께"라며 그녀를 세상의 중심에 두던 남자였다.지수의 안색을 살피고 그녀가 집에 없는 날엔 무슨을은 없는지 안달 복달하더 그 다정하던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도진씨, 나 병원이야. 전화 받기 힘드니까 나중에 하자."
지수는 그 말만 남긴 채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끊어진 화면을 보며 도진은 잠시 '병원'이라는 단어에 멈짓했으나 이내 이기심에 걱정을 집어삼켰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넘기며 짜증을 냈다.
"하 이전 먼저 전화도 끊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봐"
도진은 지수의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올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경리단길에서 살짝 벗어난 후미진 골목의 공방. 유진은 어두운 작업대 조명 아래 홀로 앉아 핀셋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작업대 구석에는 수진이 던져두고 간 현금 천만 원이 담긴 봉투와, 제 영혼의 처분권을 넘기겠다는 불공정 계약서가 비참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태블릿 화면 속에는 수진이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그려놓은 백금 덩굴과 잎사귀 도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유진의 눈앞에 불과 3개월 전,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날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심장병을 앓는 가온이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유진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강수한 회장의 저택을 찾았었다. 비에 젖은 몸으로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유진은 가온이가 회장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내밀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서늘한 멸시였다. 강 회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1억이 든 봉투를 발치에 던지며 짧게 뱉었다.“이 돈이면 아이 수술비는 충분할 터이니, 다시는 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그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회장님, 여기 친자 확인 서류가……!”유진의 처절한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강수한의 곁을 지키던 김미자가 달려들어 유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그 서류가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 있어? 그리고 너 같은 것들을 내가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아이가 아프다는 것도 거짓말일지 내가 알게 뭐야. 어디서 감히 근본도 모르는 핏덩이를 들이밀어!”
수진은 퀵으로 배달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류 봉투를 거칠게 뜯었다.윤유진의 뒷조사 결과였다. 하얀 종이 위를 빽빽하게 메운 문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수진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띠며 점점 크게 번뜩였다.윤유진. 지방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당시에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CB의 모회사에서 강도진의 아버지 강수한 회장의 비서로 비참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여자. 유순하고 귀염성 있는 미모를 가졌던 유진에게 더러운 검은 손길을 뻗은 것은 다름 아닌 강수한이었다. 회식을 빙자해 억지로 술을 먹이고 저지른 성폭행, 그리고 그 끔찍한 비극의 대가로 세상에 태어난 원치 않는 핏줄이 바로 유진의 딸 가온이었다.가온은 현재 신경모세포종으로 수진과 도진이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러 다니는 바로 그 대학병원의 소아청소년과에서 하루하루 숨을 헐떡이며 치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유진이 감당할 수 없는 비싼 치료비 때문에 제 딸의 목숨을 담보로 핏줄이라는 명목 하에 강수한을 찾아갔지만, 강수한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기는커녕 단돈 1억 원을 쓰레기처럼 던져주며 비참하게 내쫓았다는 비하인드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이러니 내가 도진 씨 본가에 갔을 때, 그 아줌마가 그렇게 발작하듯 예민하게 굴었네.’수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진의 생모인 김미자가 왜 수진을 처음 대할 때부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며 경계했는지, 왜 사생아나 첩의 존재에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발작했는지 비로소 모든 퍼즐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평생 남편 강수한의 유구하고 지저분한 여성편력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김미자였으니, 젊은 비서 출신으로 도진의 아이를 덜컥 임신해 안방을 차지하겠다고 기어들어 온 수진이 고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동시에 수진의 입가에 묘한 승리감과 함께 거대한 우월감이 차올랐다.자신에게는 아들이면 200억, 딸이어도 100억이라는 거액의 정착금을 조건으로 내
작업대 위에는 미세하게 늘어난 은사와 금사 실타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얇고 날카로운 금속 선에 쓸리고 찔려 살갗이 허옇게 일어난 지수의 손끝은 이미 성한 곳이 없었다. 손끝의 통증이 머리를 찌를 때마다 지수는 짓무른 손가락에 밴드를 칭칭 감아가며 다시 정을 쥐고 선을 골랐다.지수는 박 장인에게 배운 전통 세공 기법과 조밀한 매듭법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조립했다.‘현대의 세공은 원석을 깎아 고정하는 프레임에만 집착해. 하지만 전통 매듭은 품어 안는 법을 알지.’지수는 가느다란 은사와 부드러운 금사를 양손에 쥐고 손가락을 정교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장인에게 배운 격자 모양의 ‘가시 매듭’과 전통 장신구의 기품을 더하는 ‘국화 매듭’의 원리가 지수의 손안에서 엉키고 설켰다. 금속 선은 실과 달라서 조금만 힘을 잘못 주면 꺾이거나 끊어지기 십상이었다. 수십 번 은사가 툭 끊어져 나가고 손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박혔지만, 지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다시 첫 선을 고정했다.한 올, 또 한 올. 밤이 깊어갈수록 지수의 손끝에서 정교한 은빛과 금빛의 매듭 그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기계로 찍어낸 완벽한 대칭이 아니었다. 손의 압력과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굵기가 달라지는, 오직 사람의 손으로만 자아낼 수 있는 비정형의 유연한 주머니였다. 지수는 주머니 모양으로 얼기설기 짜인 매듭 망 안으로 안젤라이트 원석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화덕의 은은한 불빛 아래로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스스로 벼려낸 차가운 은사와 금사의 그물망 틈새로 안젤라이트의 거친 단면
수진은 거칠게 드로잉 펜을 놀렸다. 머릿속에서 유진의 진열장에 놓여 있던 침수정과 러프 다이아몬드의 파편들이 깨지며, 수진의 정형화된 도안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매끄럽게 깎고 다듬을 생각만 하니까 안젤라이트가 그저 평범한 돌덩이처럼 죽어버렸던 거야.’수진의 날카로운 디자이너 본능이 연필 끝을 타고 무섭게 폭발했다. 차가운 백금을 얇고 정교한 실처럼 뽑아내어, 손목과 귀끝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덩굴 줄기를 거침없이 그렸다. 귀걸이는 귓가를 타고 섬세하게 드롭되는 백금 덩굴 끝에 우아한 꽃망울이 맺힌 형상이었다. 수진은 안젤라이트 꽃수술을 움켜쥐는 백금 프레임을, 유진의 공방에서 보았던 가느다란 바늘 내포물처럼 무질서하게 뻗어 나오도록 설계했다. 가시 돋친 침 사이 깊숙한 곳에 안젤라이트를 가두듯 박아 넣자,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가시 틈새로 일렁이는 광채가 극도로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텐션을 뿜어냈다.이어 팔찌 도면 위로 펜촉을 굴렸다. 손목을 감싸는 덩굴 위로 잎사귀들을 얹으며, 매끄럽던 백금의 표면을 지워냈다. 대신 그 자리에 정제되지 않은 러프 다이아몬드의 단면들을 촘촘히 흩뿌려 서늘한 질감을 부여했다. 그 차가운 어둠 위에 아침 이슬처럼 투명하고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안젤라이트를 세팅했다. 러프 다이아몬드의 거친 질감과 대비되는 안젤라이트 본연의 신비로운 광채가 비로소 눈이 시리게 타올랐다.유진의 뼈대를 훔쳐 제 살을 붙여 완성해 낸, 수진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각성의 순간이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수진의 태블릿에는 전날과는 전혀 다른 오직 수진만의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도진 씨!”수진은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도진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도진은 태준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다 노크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수진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태준은 굳은 얼굴로 서류를 정리해 일어섰고, 수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들으라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명백
수진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경리단길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진의 뺨이 수치심과 고양감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전날 밤, 도진에게 들었던 가차 없는 악평에 자존심이 바닥을 치다 못해 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수진 자신도 완벽히 만족하지 못한 조잡한 디자인을 급한 마음에 내보인 것이 패착이었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안온한 가정주부로 지내며 자신의 트렌디한 감각이 뒤떨어졌다는 차가운 현실 자각은 쓰디썼다. 한때 촉망받던 디자이너로서 제 실력에 자부심을 품고 있던 수진이었기에, 그 패배감은 뼈아픈 분노가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딸랑.’낡은 공방의 현관을 여는 맑은 종소리에, 연필로 대충 머리를 틀어 올린 채 작업에 열중하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완벽한 미인상은 아니었지만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닌 귀염상의 얼굴이었다. 다만 눈가에는 숨기지 못한 짙은 피로가 묻어나고 있었다.“어서 오세요. 물건은 편하게 구경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이 없으시면 개별 디자인도 해드리니 언제든 이야기해 주세요.”ARS 기계음처럼 내뱉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유진은 제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태블릿 화면 위로 드로잉 펜을 바삐 놀렸다. 수진은 저 여자가 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계산대의 높이가 살짝 높은 데다 태블릿이 절묘한 각도로 놓여 있어 화면을 훔쳐볼 수는 없었다. 수진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공방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한수진은 넓은 펜트하우스의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제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임신 5개월 차. 이제는 옷 위로도 살짝 부푼 티가 나는 배는 수진에게 이 화려한 세상을 약속하는 동아줄이자, 동시에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는 공포를 자극하는 서늘한 칼날이었다.최근 도진의 태도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지수와 그녀가 입양하겠다던 아이, 예인의 존재를 언급할 때마다 도진의 눈동자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동요를 포착한 뒤로 수진은 매일 밤잠을 설쳤다. 자신이 겨우 손에 쥐기 시작한 완벽한 안주인의 자리가 언제든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 있다는 조바심이 목을 죄어왔다.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 CB 그룹이 대대적으로 선포한 ‘새로운 태양 디자이너 공모전’ 소식은 수진의 심장을 세차게 뒤흔들었다.‘Z의 자리를 대신할 총괄 디자이너.’그 왕관만 차지할 수 있다면. 내가 도진의 가장 아픈 구멍을 메워주고 그의 비즈니스적 구원자가 된다면, 도진의 곁에서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다질 수 있을 터였다. 수진은 수입 명품 펜을 쥐고 거실 테이블 가득 고가의 드로잉 북을 펼쳤다. 방안에 틀어박혀 밤을 새워가며 선을 긋고 색을 칠했다. 이번 공모전의 핵심 원석은 안젤라이트였다.그 누구보다 이 원석의 가치를 잘 아는 수진이었다. 각도에 따라 핑크와 블루가 오묘하게 교차하는 그 압도적인 화려함에 반해, 루체른과의 원석 공급 계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밀어붙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수진은 자신이 반했던 그 화려한 색감을 어떻게든 제 도안 위에 구현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원석에 매료된 욕심이 과했던 탓일까. 수진은 안젤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