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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이 없어졌어요?”주단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현다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는 주단우가 더 이상 거짓말을 이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주단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눈꼬리 쪽으로 흘러내릴 듯 고였고 그는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재빨리 닦아냈다.“무슨 말을 더 해? 할 수 있는 설명은 다 했어. 네가 믿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현다영은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 주단우가 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가방을 집어 들고 곧장 룸을 빠져나왔다.술집을 나온 현다영은 주단우가 금방이라도 뒤쫓아올 것만 같아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그녀는 창문을 내렸다.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그제야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드디어 주단우가 무너지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봤다.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원망을 쏟아낸 뒤 남은 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허무함뿐이었다....다음 날 오후, 주상 그룹 사내 게시판에 인사 발령 공지가 올라왔다.주단우는 부대표직에서 해임됐고 후임 자리는 회사의 원로 임원이 임시로 맡게 됐다.현다영은 각 부서를 돌며 서류를 전달하던 중 직원들이 주단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들었어요? 오늘 아침에 회사 앞에 경찰차 왔던 거.”“네, 저도 봤어요. 부대표님이 차에 올라타던데요.”“주단우요? 퇴사한 거 아니었어요?”“무슨 퇴사예요. 조사받으러 간 거래요. 엄 대표를 도와 회사 자산을 꽤 많이 빼돌렸고 회사 관련 규정도 심각하게 위반해서 범죄 혐의까지 있다던데요. 엄 대표가 해외에서 조사받고 있으니까 주단우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모양이에요.”“그러면 감옥 가는 거 아니에요?”“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해원시에서 제대로 자리 잡기는 힘들겠죠.”현다영은 원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단우는 원래 누구에게도 자신을 변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보여주고 싶은 정도였다.이게 모두 업보인 걸까.그동안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고 사랑을 장난처럼 대했던 대가.그래서 이제야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는데 자신의 마음이 짓밟히는 것조차 당연한 일인 걸까.“현다영, 똑똑히 들어. 천루비가 사랑했던 남자는 내가 아니야.”“난 그 아이를 3년 동안 후원했어. 편지도 여러 번 주고받았고 좋은 아이였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병을 앓고 있었어. 오랫동안 그 아이를 다독였지만 결국 끝까지 붙잡지는 못했어.”“독한 말을 했던 것도 인정해.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야.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려는 선택을 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주단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하지만 내가 가장 후회하는 건... 그 아이가 내게 몇 안 되는 진심 어린 친구였는데도 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거야. 정작 가장 힘들어할 때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거고.”주단우의 말을 들은 현다영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거의 1분 가까이 굳어 있었다.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목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정말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다영은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이야기를 참 잘도 지어내네요. 주단우 씨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3년씩이나 후원했다고요?”“정말 대단하네요. 그런 거짓말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하마터면 저도 감동할 뻔했잖아요.”현다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내뱉으며 주단우를 비웃었다.주단우는 끝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성큼 다가가 현다영을 테이블 모서리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인 뒤, 그녀의 양팔을 꽉 움켜쥐었다.“끝까지 안 믿겠다는 거야?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 천루비 가족을 직접 찾아가서 증명이라도 해야 해?”
한때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 없던 다섯 살 아이에게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현다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곧 친구가 떠올랐다.주단우의 뼛속 깊이 밴 냉정함과 엄경미에게서 배운 교활함을 생각하자 더 이상의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지금 그가 겪는 고통 역시 결국 자신이 선택해 온 길의 결과였다.“엄경미는 주상 그룹 안에 비밀 계좌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요. 자산을 빼돌릴 때마다 그 계좌들을 이용했고요. 그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부대표님뿐이에요.”현다영이 차분하게 말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주단우는 모든 의미를 깨달았다.엄경미의 자산 이전은 지금까지 줄곧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그가 엄경미를 배신하는 순간, 자신 역시 공범이라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강지현이 겨눈 칼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주단우는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엄경미는 아직 도주 중이었기에 당분간 그녀에게는 그 비밀 계좌들이 필요할 것이다.자신은 엄경미에게 직접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지현이라면 가능했다.주단우는 다시 한번 씁쓸하게 코웃음을 쳤다.고개를 들자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현다영의 시선과 마주쳤다.그 눈빛에는 아주 희미한 연민이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짙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 혐오였다.현다영이 차갑게 말했다.“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고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직접 복수하세요.”“물론이지.”한참 만에 입을 연 주단우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강지현이 이렇게까지 기회를 만들어줬는데 실망하게 할 수는 없잖아.”설령 그가 엄경미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주상 그룹 안에서 그의 퇴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현다영은 그의 눈동자 깊숙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할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현다영.”그때 주단우가 그녀를 다시
“두 사람이 죽어야만 비밀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다섯 살이었던 부대표님은 마침 엄경미와 주승호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빈자리를 채워줄 수도 있었죠. 어릴 때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믿게 만들기도 쉬웠고요. 그야말로 엄경미에게는 가장 다루기 쉬운 패였던 거예요.”주단우는 서류봉투 안에 들어 있던 오래된 사진을 바라봤다.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현장 사진이었다.단 한 장만 확인했을 뿐인데도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주단우는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모두 내려놓더니 있는 힘껏 옆으로 밀쳐냈다.마치 그 안에 담긴 모든 진실을 자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밀어내려는 사람처럼.“무슨 증거로... 그 사람이 했다고 단정하는 거야? 어쩌면 정말 사고였을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았...”“주단우 씨, 지금 확실한 증거를 통해 그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당신이 엄경미에게 뭘 할 수 있는데요?”현다영이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녀는 지금 주단우의 머릿속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었다.그가 애써 외면하려 할수록 그 진실은 오히려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주단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충혈된 눈으로 현다영을 바라봤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현다영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했다.엄경미에게 주단우는 처음부터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설령 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필요할 때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현다영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증거가 뭐냐고 물었죠? 차량 감정 보고서도 안에 들어 있어요. 직접 확인하면 알겠지만 당시 차량에는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적어도 그 사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건 증명할 수 있죠.”“그리고 엄경미는 엄씨 가문 사람 중 가장 먼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진술은 이랬죠. 두 분이 죄를 두려워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부대표님
현다영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주단우 앞으로 밀어놓았다.“당시 엄경미는 주승호와 교제 중이었고 엄씨 가문과 주상 그룹은 첫 협력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엄씨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그 틈을 이용해 자신도 이득을 챙기려 했던 엄경미는 부대표님 부모님을 이용해 거액의 자금을 빼돌렸고 엄씨 가문을 통해 주상 그룹의 핵심 자료까지 빼냈죠.”“나중에 그 일이 드러나자 엄경미는 자신만 교묘하게 빠져나갔어요. 엄씨 가문과는 선을 긋고 주씨 가문과 단독으로 접촉하면서 부대표님 부모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죠.”현다영은 한 문장씩 또렷하게 말을 이어갔다.주단우는 한동안 굳은 채 서류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건넨 자료를 펼치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강지현은 오래전부터 엄경미가 주단우를 입양한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주단우의 부모가 사건에 연루돼 도주했고 엄경미는 그 직후 아이를 입양한 뒤 주승호와 결혼했다.어떻게 보아도 누군가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강지현은 주단우 같은 사람이라면 진실의 실마리만 던져줘도 엄경미를 의심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엄경미에게 남은 정이 여전히 깊었다.오랜 시간 그녀를 믿고 따르며 살아온 탓인지 결국 그녀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이번에 주호석이 엄씨 가문을 압박하면서 엄경미의 범죄 증거 역시 대거 확보됐다.살길이 급해진 엄씨 가문은 모든 책임을 엄경미에게 돌리려 하고 있었다.당시 엄경미는 주승호와 함께하게 된 뒤, 엄씨 가문에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엄씨 가문과 주상 그룹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척하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처럼 꾸몄지만 실제로는 그 협력으로 엄씨 가문에 큰 손해를 입힐 생각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주승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엄씨 가문이 더 이상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하지만 엄경미의 계산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주씨 가문을 이용해 엄씨 가문에 타격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일로 인해 엄씨
하지만 주단우는 자신이 결국 엄경미에게 버려지는 패가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엄경미는 돌연 그의 모든 카드와 자산을 동결했다. 그가 엄경미를 대신해 관리하던 사업 자금마저 회수가 막히면서 머지않아 막대한 빚을 떠안을 처지가 됐다.그리고 별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모든 책임은 결국 그의 몫으로 돌아올 터였다.지금 주단우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강지현 쪽의 소식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 강지현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녀가 순순히 자신을 도와줄 리는 없었다.주단우에게 남은 선택지는 현다영뿐이었다.그가 술집에서 세 번째 잔을 비울 무렵, 현다영이 도착했다.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그를 향해 말했다.“조용한 룸 없어요?”주단우는 바 테이블에 앉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현다영을 바라보다가 턱짓으로 종업원에게 신호를 보냈다.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고 주변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됐다. 방 안의 분위기 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주단우의 시선이 무심코 현다영의 손목에 머물렀다.“아직도 아파?”그날 현다영이 보였던 행동은 그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과 얽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하면 그 역시 상처받았다.현다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부대표님, 농담도 다 하시네요. 이미 다 나은 상처가 어떻게 아직도 아프겠어요?”“하지만 난 아직도 아픈데.”주단우는 한숨을 내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쉽게 감추지 못한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현다영은 그런 그의 태도가 불쾌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를 부르신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그럼 내가 왜 널 불렀을 것 같아?”주단우는 서두르지 않고 되물었다.“엄경미.”현다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저한테 어머니의 행방을 물으려고 했던 거 아닌가요?”“그걸 알려주려고 일부러 온 거야?”주단우의 눈빛에 문득 웃음기가 번졌다.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시선에는 여전히 능청스러운 여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