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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결혼, 진짜 신분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윤소정

제1화

윤소정
결혼 2년 차인 어느 날, 강지현은 서랍을 정리하다 실수로 혼인신고서를 찢어버렸다.

재발급받으려고 구청에 가서 직원에게 말했더니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객님, 시스템에 조회가 안 되는데요. 고객님 혼인 등록 정보가 없습니다.”

“네? 그럴 리가요. 저 이제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요?”

강지현이 찢어진 혼인신고서를 내밀었다.

이에 직원도 인내심 있게 세 번이나 더 확인했지만 결국 컴퓨터 화면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정말 등록 정보가 없어요. 그리고 이 도장도 비뚤었네요... 아마도 위조된 혼인신고서 같아요.”

강지현은 넋이 나간 채로 구청을 나섰다. 별안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강지현 씨. 저는 강지현 씨 아버님의 위임 변호사 안범수입니다. 재산 상속 관련 서류에 서명하셔야 하는데 권성 로펌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웬 사기 전화라 생각하며 이제 막 끊으려는데 상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강지현 씨 어머님 성함이 강서영 맞으시죠? 20년 전에 강지현 씨를 해원 보육원 앞에 두고 가셨는데 조사 결과 강지현 씨가 전 해원시 갑부 주승호 씨의 유일한 혈육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곧장 로펌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변호사에게 평생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강지현의 친아버지인 주승호는 재벌 총수인데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 주식, 부동산, 회사를 합쳐 자산이 수십조 원에 달했고 강지현은 그의 유일한 딸이라고 했다.

머릿속이 윙윙거릴 때, 변호사가 대뜸 질문을 건넸다.

“강지현 씨 혼인 관계는 어떻게 되시죠?”

그 순간 남편 이도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방 안에 찢어진 가짜 혼인신고서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펜을 꽉 잡았다.

“일단 두 시간만 기다려 주세요. 먼저 가서 확인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로펌에서 나온 그녀는 곧장 남편 회사로 향했다.

이도운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 이제 막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성숙하고 매혹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운아, 우리 결혼한 지도 벌써 5년이나 됐는데 대체 언제 관계를 공개할 거야?”

강지현은 순간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너무나 익숙한 이 목소리, 바로 그녀와 이도운의 대학 시절 지도 교수였던 백하린이었다.

백하린은 이도운보다 여섯 살 연상이지만 나이만 제외하고 외모와 몸매 전부 여신급이었다.

학교에서도 늘 인기가 많았고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며 전교에서 가장 훌륭한 여자 지도 교수라는 명예까지 얻었다.

강지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곧이어 남편의 늘 자상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사가 곧 상장을 앞두고 있어서 아직 지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하린이 너를 집에 들여선 안 된다는 유언을 남기셨어. 지금 공개했다가 할머니가 우리 자기 못살게 굴기라도 하면 나 마음 아프단 말이야...”

강지현은 귓속에 굉음이 울려 퍼지고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행여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그녀는 다 찢어진 혼인신고서를 조심스럽게 맞춰서 가방에 소중히 넣어두기까지 했는데 애초에 자신이야말로 저들에게 놀아난 광대였다니.

강지현은 빠른 걸음으로 회사를 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음을 가다듬고서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변호사님, 재산 상속 관련 서류에 지금 바로 사인할게요. 아 그리고 저는 현재 미혼이고 자녀도 없어요. 모든 유산은 저 혼자 상속받겠습니다.”

상속 절차를 마친 강지현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다가 추돌 사고를 냈고 이마를 살짝 다쳤다.

응급실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문득 뭔가 생각나 산부인과로 향했다.

검사 결과를 본 그녀는 마음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니까... 제 자궁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결과만 보면 아주 건강하십니다.”

“제가 임신할 수 있다고요?”

“물론입니다.”

“부부 생활에도 전혀 지장이 없고요?”

강지현의 질문에 지긋한 나이의 여의사마저 얼굴을 붉혔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결혼 전에 건강검진을 했을 때 이도운은 그녀에게 검진 결과를 보여주면서 자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임신은커녕 정상적인 부부 생활조차 그녀 몸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힐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난 너랑 결혼할 거야.”

그때 이도운은 강지현의 손을 꼭 잡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 생에 내게 여자는 오직 너뿐이야.”

그 약속 하나를 믿고 두 사람은 이씨 가문 어른들의 거센 반대에도 끝까지 버텼다.

시아버지는 찻잔을 집어 던지며 노발대발했었고...

“애도 못 낳는 년을 데려와서 우리 가문의 대를 끊을 셈이냐?”

시어머니는 가족 연회에서 친척들에게 눈물로 하소연했었다.

“우리 도운이가 어쩌다 저런 여자한테 홀렸는지...”

하지만 그때마다 이도운은 늘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있잖아.”

2년 동안 시어머니가 공공연히 퍼붓던 비난의 말들은 가슴 속 깊이 박혀서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었다. 알도 못 낳는 암탉이라는 둥, 아이도 못 낳는 년이랑 결혼해서 뭐 하냐는 둥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악담이었다.

...

강지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이도운은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180이 훌쩍 넘는 훤칠한 몸매의 남자가 흰 셔츠를 입고서 황급히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함께한 6년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두 사람은 지도 교수인 백하린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의 자료를 대신 전달해주러 갔는데 이도운과 백하린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이도운은 예의 바르게 눈인사만 건넬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뒤로 이 남자의 4년간 맹렬한 구애가 펼쳐졌다.

이도운은 학교 킹카였던 터라 외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공부도 잘했으며 집안 형편 또한 넉넉했다.

거기에 구애 방식이 거침없는 데다가 자상하기까지 해서 그에게 넘어가지 않을 여학생이 별로 없었다.

물론 강지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 없이 자라 성격이 차갑고 괴팍한 그녀였지만 이도운의 열정적인 대시에 끝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도운이 계속 말을 걸어도 강지현이 아무 반응이 없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줄로 여기며 품에 안으려 하는데 별안간 그녀가 팔을 홱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이만.”

강지현은 짧게 내뱉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는 따뜻하고 안정감을 줬던 그의 품이 이제 마냥 역겹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탄 후에도 이도운은 여전히 그녀의 상태를 걱정했다.

“무슨 일 있었어? 평소에는 항상 조심해서 운전하더니 오늘은 어떻게 된 거야?”

“...”

강지현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손에 머물렀는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이도운은 무시당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이에 그녀가 다시 한번 피했다.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더 강요하지 않을게. 오늘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셔서 아줌마더러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했어. 맛있는 거 먹고 기분 좀 풀어.”

이 남자는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럴수록 강지현은 오히려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

“화내지 말고 기분 풀자, 응? 이 고비만 넘기거든 계속 옆에 있어 줄게. 요즘 회사 상장을 앞두고 있어서 나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이도운은 그녀가 기분이 풀린 줄 알고 덩달아 웃었다.

“그러게. 나 기분 엄청 좋아. 인생이 정말 다채로워졌다고나 할까?”

말 속에 숨겨진 뜻이 있었지만, 이도운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씨 가문 저택은 해원시에서 가장 비싼 지역인 레이 파크에 있는데 별장 부지만 거의 170평에 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강지현이 졸업 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이도운과 함께 회사에서 발로 뛰며 일군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와 부드럽고 달콤한 여자 목소리였다.

남자아이는 강지현과 이도운이 금방 결혼했을 때 입양한 아이였다. 올해 다섯 살이고 이름은 이윤후였다.

강지현이 고개를 들자 예상대로 백하린이 보였다. 그녀는 무려 5년 만에 나타났다.

파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긴 웨이브 머리를 한 백하린은 서른이 넘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20대 초반처럼 앳돼 보였고 몸짓마다 성숙미가 물씬 풍겼다.

“지현아, 누가 왔는지 봐봐.”

이도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낮고 깊은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담겨 있었다.

강지현은 이 인간이 이렇게 들뜬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평상시에 그녀에게 아무리 다정하고 잘해준다 해도 이렇게까지 흥분하진 않았었다.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남자의 원초적인 애정이었다.

“백 교수님?”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척했지만, 속으로는 역겨움이 극에 달했다.

눈앞의 백하린은 단정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사무실에서 보여줬던 애교 넘치는 모습과는 아예 딴판이었다.

“지현아, 오랜만이야.”

백하린은 이윤후의 손을 잡고 서둘러 위층에서 내려오더니 강지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강지현의 시선은 이윤후에게 향했다.

이도운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지현이 예전에 지냈던 보육원에서 남자아이를 입양하자면서 이름은 이윤후로 짓자고 상의했었다.

아이를 입양하면 이씨 가문의 어른들을 상대하기 수월할 것이고 부모님도 더는 강지현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강지현은 이도운이 자신을 배려한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동의했었다.

하지만 이윤후를 키우는 2년 동안 그녀는 엄청나게 고생했다.

아이의 성격이 난폭해서 기분이 잡칠 때마다 강지현에게 물건을 마구 내던졌다. 꼭 마치 그녀에게 깊은 적대심이라도 품은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어느 한번은 강지현이 보는 앞에서 이도운에게 친엄마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화가 난 강지현이 양육을 포기하겠다고 할 때마다 이도운은 그녀를 설득했다.

이윤후가 엄마가 없어 불쌍하다며 더 너그러이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그 마음도 굳이 꼭 끄집어내곤 했다.

이윤후가 백하린의 손을 꽉 잡은 모습과 이도운의 일련의 행동들을 떠올리니 강지현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결혼한 지 5년이 되었고 이윤후도 이제 5살이다.

이씨 가문에서 백하린을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도운은 그녀를 방패막이로 삼아 수년간 모진 고생만 짊어지게 했다.

식사할 때 이도운과 이윤후는 백하린에게 반찬을 집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기애애한 세 사람이야말로 한 가족 같았고 옆에서 조용히 식사하는 강지현은 외부인이 돼버렸다.

“지현아, 교수님이 요즘 육아 관련 서적을 집필하고 있는데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대. 마침 회사도 바쁘고 너도 할 일이 많으니까...”

이도운이 적절한 타이밍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어투로 강지현에게 말했다.

“교수님을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는 건 어때? 너 대신 윤후도 잘 돌봐줄 수 있고, 이 녀석도 교수님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

‘하! 5년 동안 몰래 만나다가 이젠 대놓고 집에까지 들이겠다고?’

강지현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천천히 밥만 먹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도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지현아? 내 말 들었어?”

탁 소리와 함께 강지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하린이 덥석 가로챘다.

“미안해. 내가 괜히 두 사람 곤란하게 했지. 지현아, 오해하지 마. 도운이는 그저 네가 일하랴 집안 살림까지 챙기랴, 거기에 또 윤후까지 돌보느라 너무 힘들까 봐 나더러 도와주길 바란 거야...”

“아니야, 난 하린 이모랑 같이 있을래.”

백하린의 옆에 앉아 있던 이윤후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젓가락을 던지고 식탁을 마구 내리쳤다.

“윤후야, 이러면 안 돼.”

“이윤후, 버릇없이 굴 거야?”

순간 아이를 말리는 백하린의 목소리와 엄하게 꾸짖는 강지현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윤후는 강지현을 노려보더니 컵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그대로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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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mentare (1)
goodnovel comment avatar
강희숙
넘 재밌네요 다음화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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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552화

    사실 그런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악성도가 낮다고는 해도 결국 악성 종양이었기에 임상적으로 완전히 전이되지 않고 완치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그저 당장은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김태하는 의사의 말에 서린 망설임을 눈치채고 차갑게 말했다.“숨기거나 가릴 필요 없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세요.”“김 대표님, 숨기는 거 없습니다. 다만...”“완치될 희망이 아주 낮다는 뜻이군요?”김태하가 담담하게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마음에 머물던 불안감이 마침내 바닥으로 가라앉자 김태하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다행이었다. 다행히 강지현을 보내고 나서 검사받으러 온 보람이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지난 며칠 동안 둘이 함께 보낸 시간마저 고통으로 허비했을 터였다.의사는 김태하의 얼굴에 도는 뜻밖의 미소를 보며 한층 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김 대표님, 정 불안하시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수술을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수술 후 예후가 보존 치료보다는 확실하긴 합니다만...”이 말은 방금 의사가 김태하에게 이미 한 차례 설명했던 내용이었다.수술 치료가 더 신속하긴 하겠지만 그는 현재 위 부위에 옛 상처가 있어 해당 조직이 유착된 탓에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자칫하면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수술한다 해도 완치 확률은 60%에 불과했다.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지금은 먼저 보존 치료를 진행하는 편이 나았다.치료 효과가 좋다면 수술하지 않아도 되었고 혹은 수술을 잠정 보류할 수도 있었다.“약물로 버틴다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태하가 말을 잘랐다.“그건...”의사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종양이 전이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약물 조절만 잘된다면 만성 질환처럼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치료하면서 살 수도 있어요.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많은 환자분이 그렇게 지내고 계시고요. 물론, 이건 가장 이상적인 경우입니다.”“그러면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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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550화

    주단우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현다영이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꼭 의도적인 도발처럼 느껴졌다.엄경미는 어릴 때부터 주단우에게 채찍질을 했다. 똑똑히 기억하라는 이유였다.살점이 터져도 바로 치료해주지 않았다. 이틀쯤 꼬박 앓아야 버릇이 고쳐진다는 게 엄경미의 지론이었다.그렇게 남은 흉터가 하나둘 쌓여 지금의 몸이 되었다.엄경미는 오히려 주단우의 흉터를 흡족해했다. 남자는 몸에 상처가 좀 있어야 뚝심 있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주단우가 조금이라도 나약한 기색을 보이는 건 무엇보다 싫어했다.“약이나 바르지, 말이 왜 이렇게 많아.”주단우는 대답을 피했다.현다영은 더 묻지 않고 묵묵히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현시우는 따뜻한 물을 가져와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현다영이 조심스럽게 주단우의 상처를 소독하는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현다영은 집중해서 상처를 닦아냈다.그녀의 손길은 섬세했고 조심스러웠다. 주단우는 따가움보다 묘한 안도감을 먼저 느꼈다.그는 시선을 낮춰 현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상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다정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주단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상처가 깊지 않아 치료는 금세 끝났다. 주단우는 조금 더 현다영을 보고 싶었지만 현다영은 곧장 약품을 챙겨 일어섰다.“부대표님, 오늘 저희 찾아와서 난동 부린 사람들, 부대표님 쪽 집안사람들이죠?”현다영은 방금 주단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짐작했던 대로였다. 이 모든 소란은 주단우와 연결되어 있었다.그런데 왜 하필 자신과 현시우를 노린 걸까. 게다가 그 사람들은 주단우에게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아 보였다.“그래.”주단우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광대뼈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해성 그룹 일 잊었어? 네가 내 어머니를 화나게 했잖아. 강지현이 없는 틈에 너한테 본때를 보여주려던 거야.”현다영은 고개를 돌려 주단우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최근 자신을 괴롭힐 만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549화

    그들은 며칠 동안 주단우뿐 아니라 현다영까지 미행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리고 알아낸 내용을 엄경미에게 낱낱이 보고했다.그 사실을 알게 된 주단우는 곧장 남매에게 달려왔다.엄경미가 어떤 수를 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 부하들에게 붙잡히면 현다영과 현시우는 해원시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뻔했다.하지만 주단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엄경미의 명령을 어기고 조직원들에게 맞서 두 사람을 구해낸 대가가 얼마나 클지.때로는 순간적인 충동 하나가 목숨까지 앗아가는 법이었다.주단우는 눈을 감았다. 공포는 어느새 피로와 통증에 묻혀 희미해졌다. 지금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몸을 회복한 뒤, 다시 대책을 세워야 했다.현시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형,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주단우는 현시우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내저었다.“좀 자면 괜찮아질 거야.”괜찮았다.몸 하나는 워낙 튼튼했다. 매번 맞고 깨져도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 나아 있었으니까.“옷 벗어요.”막 잠이 들려던 순간, 현다영의 목소리가 들렸다.현시우는 현다영이 들고 온 구급상자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방금 전 누나가 말없이 자리를 피한 건 매정해서가 아니라 약을 찾으러 갔던 것이다.“형, 조금만 참아요. 우리 누나가 약 발라줄 거예요!”주단우가 겨우 눈을 떴다.현다영은 이미 구급상자를 앞에 두고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현시우는 현다영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따뜻한 물을 떠왔다.“왜 가만히 있어요?”현다영은 솜과 연고를 꺼내놓고 주단우를 바라보았다.주단우는 잠시 현다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고 상의를 벗었다.현다영은 그저 상처를 확인하려던 것뿐이었다. 아까부터 주단우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어깨와 가슴을 문지르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런데 상의를 벗자 생각지도 못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주단우의 몸에는 자잘한 흉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등 쪽은 더 심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548화

    게다가 방금 전까지 현시우는 주단우를 위해서라며 현다영에게 싫다는 말까지 했다.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주단우를 향해 남아 있던 일말의 걱정마저 차갑게 식어버렸다.20분 뒤, 차는 현다영의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현다영은 결국 현시우를 학교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다.오는 길 내내 현시우가 주단우 걱정에 울먹이는 걸 보니, 억지로 학교에 보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주단우의 안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밤새 난리를 피울 게 뻔했으니까.집에 도착하자마자 현다영은 주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시우가 오는 길에 몇 번이나 걸었지만 받지 않았던 번호였다.이번에도 신호음만 이어지다 끊겼다. 잠시 뒤 다시 걸자,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거봐! 형한테 무슨 일 생긴 게 분명해!”“경찰서에서 연락 올 거야. 그냥 배터리가 나갔을 수도 있고.”현다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현시우를 다독였다.“일단 너부터 씻어. 잠자리 봐줄게.”현다영은 침구를 정리하러 돌아섰다.너무 태연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현시우가 결국 울컥했다.“이제 알겠어. 누나가 왜 형을 그렇게 오해하는지!”현시우가 씩씩대며 소리쳤다.“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사람이니까 그런 거잖아!”현시우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거기 서!”현다영이 엄하게 꾸짖었지만 이번에는 현시우도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문밖에 주단우가 서 있었다.입고 있던 재킷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셔츠 깃은 뜯겨 나갔고 옷 여기저기는 찢겨 있었다.목덜미와 입가, 뺨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평소의 말끔한 귀공자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은 영락없는 거리 싸움꾼 꼴이었다.“형...”현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하지만 주단우는 대꾸할 힘도 없는 듯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현다영은 주단우를 보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현시우는 서둘러 문을 닫고 주단우에게 달려갔다.“형, 괜찮아요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547화

    현다영이 망설이자, 주단우가 소리쳤다.“빨리 가! 나 오래 버티지 못해!”앞서 얻어맞은 사내 둘은 주단우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주단우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했다.그러나 현시우를 붙잡고 있던 사내들까지 합세하자, 주단우는 혼자서 그들을 막아내야 했다.현시우는 난전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붙잡힌 손을 뿌리쳤다. 주단우도 쇠파이프를 휘둘러 현시우 앞을 막아선 사내를 밀쳐냈다.곧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섰다.“단우 형!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현시우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주단우가 나타난 순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나중에 얘기해! 정신 똑바로 차려.”“곧 누나가 차 끌고 올 거야. 내가 길 열면 앞뒤 보지 말고 뛰어. 바로 차에 타. 알았어?”“형은요?”현시우가 발길질하며 불안하게 물었다.목이 잔뜩 쉰 주단우가 짧게 답했다.“이놈들이 나한테 뭘 어쩌겠어? 너희 먼저 가.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진짜죠?”현시우가 머뭇거리는 사이, 주단우가 먼저 돌진했다. 주단우가 쇠파이프를 휘두르자 사내들이 겁을 먹고 사방으로 흩어졌다.“뛰어!”주단우가 고함치자, 현시우는 곧장 길가로 내달렸다. 마침 현다영이 차를 몰고 달려왔다.차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현시우는 뒤쫓아오던 사내들에게 붙잡히기 직전, 가까스로 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현다영은 현시우의 다리가 다 들어오기도 전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가 그대로 튀어나갔다.현다영은 신호등을 몇 번이나 무시하고 달렸다. 한참을 달린 뒤에야 겨우 속도를 조금 줄였다.현시우는 내내 창문에 매달려 뒤를 살폈다.차가 너무 빠르게 달린 탓에,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뒤쪽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누나! 형을 그냥 두고 오면 어떡해? 혼자서 괜찮겠어?”현시우가 애가 타서 소리쳤다.“우리 다시 가서 형 구하자!”“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현다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그녀는 현시우보다 훨씬 차분했다. 아니, 차분해지려 애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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