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가짜 결혼, 진짜 신분
가짜 결혼, 진짜 신분
Author: 윤소정

제1화

Author: 윤소정
결혼 2년 차인 어느 날, 강지현은 서랍을 정리하다 실수로 혼인신고서를 찢어버렸다.

재발급받으려고 구청에 가서 직원에게 말했더니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객님, 시스템에 조회가 안 되는데요. 고객님 혼인 등록 정보가 없습니다.”

“네? 그럴 리가요. 저 이제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요?”

강지현이 찢어진 혼인신고서를 내밀었다.

이에 직원도 인내심 있게 세 번이나 더 확인했지만 결국 컴퓨터 화면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정말 등록 정보가 없어요. 그리고 이 도장도 비뚤었네요... 아마도 위조된 혼인신고서 같아요.”

강지현은 넋이 나간 채로 구청을 나섰다. 별안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강지현 씨. 저는 강지현 씨 아버님의 위임 변호사 안범수입니다. 재산 상속 관련 서류에 서명하셔야 하는데 권성 로펌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웬 사기 전화라 생각하며 이제 막 끊으려는데 상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강지현 씨 어머님 성함이 강서영 맞으시죠? 20년 전에 강지현 씨를 해원 보육원 앞에 두고 가셨는데 조사 결과 강지현 씨가 전 해원시 갑부 주승호 씨의 유일한 혈육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곧장 로펌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변호사에게 평생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강지현의 친아버지인 주승호는 재벌 총수인데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 주식, 부동산, 회사를 합쳐 자산이 수십조 원에 달했고 강지현은 그의 유일한 딸이라고 했다.

머릿속이 윙윙거릴 때, 변호사가 대뜸 질문을 건넸다.

“강지현 씨 혼인 관계는 어떻게 되시죠?”

그 순간 남편 이도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방 안에 찢어진 가짜 혼인신고서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펜을 꽉 잡았다.

“일단 두 시간만 기다려 주세요. 먼저 가서 확인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로펌에서 나온 그녀는 곧장 남편 회사로 향했다.

이도운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 이제 막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성숙하고 매혹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운아, 우리 결혼한 지도 벌써 5년이나 됐는데 대체 언제 관계를 공개할 거야?”

강지현은 순간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너무나 익숙한 이 목소리, 바로 그녀와 이도운의 대학 시절 지도 교수였던 백하린이었다.

백하린은 이도운보다 여섯 살 연상이지만 나이만 제외하고 외모와 몸매 전부 여신급이었다.

학교에서도 늘 인기가 많았고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며 전교에서 가장 훌륭한 여자 지도 교수라는 명예까지 얻었다.

강지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곧이어 남편의 늘 자상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사가 곧 상장을 앞두고 있어서 아직 지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하린이 너를 집에 들여선 안 된다는 유언을 남기셨어. 지금 공개했다가 할머니가 우리 자기 못살게 굴기라도 하면 나 마음 아프단 말이야...”

강지현은 귓속에 굉음이 울려 퍼지고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행여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그녀는 다 찢어진 혼인신고서를 조심스럽게 맞춰서 가방에 소중히 넣어두기까지 했는데 애초에 자신이야말로 저들에게 놀아난 광대였다니.

강지현은 빠른 걸음으로 회사를 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음을 가다듬고서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변호사님, 재산 상속 관련 서류에 지금 바로 사인할게요. 아 그리고 저는 현재 미혼이고 자녀도 없어요. 모든 유산은 저 혼자 상속받겠습니다.”

상속 절차를 마친 강지현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다가 추돌 사고를 냈고 이마를 살짝 다쳤다.

응급실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문득 뭔가 생각나 산부인과로 향했다.

검사 결과를 본 그녀는 마음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니까... 제 자궁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결과만 보면 아주 건강하십니다.”

“제가 임신할 수 있다고요?”

“물론입니다.”

“부부 생활에도 전혀 지장이 없고요?”

강지현의 질문에 지긋한 나이의 여의사마저 얼굴을 붉혔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결혼 전에 건강검진을 했을 때 이도운은 그녀에게 검진 결과를 보여주면서 자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임신은커녕 정상적인 부부 생활조차 그녀 몸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힐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난 너랑 결혼할 거야.”

그때 이도운은 강지현의 손을 꼭 잡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 생에 내게 여자는 오직 너뿐이야.”

그 약속 하나를 믿고 두 사람은 이씨 가문 어른들의 거센 반대에도 끝까지 버텼다.

시아버지는 찻잔을 집어 던지며 노발대발했었고...

“애도 못 낳는 년을 데려와서 우리 가문의 대를 끊을 셈이냐?”

시어머니는 가족 연회에서 친척들에게 눈물로 하소연했었다.

“우리 도운이가 어쩌다 저런 여자한테 홀렸는지...”

하지만 그때마다 이도운은 늘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있잖아.”

2년 동안 시어머니가 공공연히 퍼붓던 비난의 말들은 가슴 속 깊이 박혀서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었다. 알도 못 낳는 암탉이라는 둥, 아이도 못 낳는 년이랑 결혼해서 뭐 하냐는 둥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악담이었다.

...

강지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이도운은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180이 훌쩍 넘는 훤칠한 몸매의 남자가 흰 셔츠를 입고서 황급히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함께한 6년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두 사람은 지도 교수인 백하린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의 자료를 대신 전달해주러 갔는데 이도운과 백하린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이도운은 예의 바르게 눈인사만 건넬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뒤로 이 남자의 4년간 맹렬한 구애가 펼쳐졌다.

이도운은 학교 킹카였던 터라 외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공부도 잘했으며 집안 형편 또한 넉넉했다.

거기에 구애 방식이 거침없는 데다가 자상하기까지 해서 그에게 넘어가지 않을 여학생이 별로 없었다.

물론 강지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 없이 자라 성격이 차갑고 괴팍한 그녀였지만 이도운의 열정적인 대시에 끝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도운이 계속 말을 걸어도 강지현이 아무 반응이 없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줄로 여기며 품에 안으려 하는데 별안간 그녀가 팔을 홱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이만.”

강지현은 짧게 내뱉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는 따뜻하고 안정감을 줬던 그의 품이 이제 마냥 역겹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탄 후에도 이도운은 여전히 그녀의 상태를 걱정했다.

“무슨 일 있었어? 평소에는 항상 조심해서 운전하더니 오늘은 어떻게 된 거야?”

“...”

강지현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손에 머물렀는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이도운은 무시당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이에 그녀가 다시 한번 피했다.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더 강요하지 않을게. 오늘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셔서 아줌마더러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했어. 맛있는 거 먹고 기분 좀 풀어.”

이 남자는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럴수록 강지현은 오히려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

“화내지 말고 기분 풀자, 응? 이 고비만 넘기거든 계속 옆에 있어 줄게. 요즘 회사 상장을 앞두고 있어서 나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이도운은 그녀가 기분이 풀린 줄 알고 덩달아 웃었다.

“그러게. 나 기분 엄청 좋아. 인생이 정말 다채로워졌다고나 할까?”

말 속에 숨겨진 뜻이 있었지만, 이도운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씨 가문 저택은 해원시에서 가장 비싼 지역인 레이 파크에 있는데 별장 부지만 거의 170평에 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강지현이 졸업 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이도운과 함께 회사에서 발로 뛰며 일군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와 부드럽고 달콤한 여자 목소리였다.

남자아이는 강지현과 이도운이 금방 결혼했을 때 입양한 아이였다. 올해 다섯 살이고 이름은 이윤후였다.

강지현이 고개를 들자 예상대로 백하린이 보였다. 그녀는 무려 5년 만에 나타났다.

파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긴 웨이브 머리를 한 백하린은 서른이 넘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20대 초반처럼 앳돼 보였고 몸짓마다 성숙미가 물씬 풍겼다.

“지현아, 누가 왔는지 봐봐.”

이도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낮고 깊은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담겨 있었다.

강지현은 이 인간이 이렇게 들뜬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평상시에 그녀에게 아무리 다정하고 잘해준다 해도 이렇게까지 흥분하진 않았었다.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남자의 원초적인 애정이었다.

“백 교수님?”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척했지만, 속으로는 역겨움이 극에 달했다.

눈앞의 백하린은 단정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사무실에서 보여줬던 애교 넘치는 모습과는 아예 딴판이었다.

“지현아, 오랜만이야.”

백하린은 이윤후의 손을 잡고 서둘러 위층에서 내려오더니 강지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강지현의 시선은 이윤후에게 향했다.

이도운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지현이 예전에 지냈던 보육원에서 남자아이를 입양하자면서 이름은 이윤후로 짓자고 상의했었다.

아이를 입양하면 이씨 가문의 어른들을 상대하기 수월할 것이고 부모님도 더는 강지현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강지현은 이도운이 자신을 배려한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동의했었다.

하지만 이윤후를 키우는 2년 동안 그녀는 엄청나게 고생했다.

아이의 성격이 난폭해서 기분이 잡칠 때마다 강지현에게 물건을 마구 내던졌다. 꼭 마치 그녀에게 깊은 적대심이라도 품은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어느 한번은 강지현이 보는 앞에서 이도운에게 친엄마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화가 난 강지현이 양육을 포기하겠다고 할 때마다 이도운은 그녀를 설득했다.

이윤후가 엄마가 없어 불쌍하다며 더 너그러이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그 마음도 굳이 꼭 끄집어내곤 했다.

이윤후가 백하린의 손을 꽉 잡은 모습과 이도운의 일련의 행동들을 떠올리니 강지현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결혼한 지 5년이 되었고 이윤후도 이제 5살이다.

이씨 가문에서 백하린을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도운은 그녀를 방패막이로 삼아 수년간 모진 고생만 짊어지게 했다.

식사할 때 이도운과 이윤후는 백하린에게 반찬을 집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기애애한 세 사람이야말로 한 가족 같았고 옆에서 조용히 식사하는 강지현은 외부인이 돼버렸다.

“지현아, 교수님이 요즘 육아 관련 서적을 집필하고 있는데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대. 마침 회사도 바쁘고 너도 할 일이 많으니까...”

이도운이 적절한 타이밍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어투로 강지현에게 말했다.

“교수님을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는 건 어때? 너 대신 윤후도 잘 돌봐줄 수 있고, 이 녀석도 교수님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

‘하! 5년 동안 몰래 만나다가 이젠 대놓고 집에까지 들이겠다고?’

강지현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천천히 밥만 먹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도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지현아? 내 말 들었어?”

탁 소리와 함께 강지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하린이 덥석 가로챘다.

“미안해. 내가 괜히 두 사람 곤란하게 했지. 지현아, 오해하지 마. 도운이는 그저 네가 일하랴 집안 살림까지 챙기랴, 거기에 또 윤후까지 돌보느라 너무 힘들까 봐 나더러 도와주길 바란 거야...”

“아니야, 난 하린 이모랑 같이 있을래.”

백하린의 옆에 앉아 있던 이윤후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젓가락을 던지고 식탁을 마구 내리쳤다.

“윤후야, 이러면 안 돼.”

“이윤후, 버릇없이 굴 거야?”

순간 아이를 말리는 백하린의 목소리와 엄하게 꾸짖는 강지현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윤후는 강지현을 노려보더니 컵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그대로 끼얹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강희숙
넘 재밌네요 다음화도 기대하겠습니다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6화

    “왜 말이 없어졌어요?”주단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현다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는 주단우가 더 이상 거짓말을 이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주단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눈꼬리 쪽으로 흘러내릴 듯 고였고 그는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재빨리 닦아냈다.“무슨 말을 더 해? 할 수 있는 설명은 다 했어. 네가 믿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현다영은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 주단우가 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가방을 집어 들고 곧장 룸을 빠져나왔다.술집을 나온 현다영은 주단우가 금방이라도 뒤쫓아올 것만 같아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그녀는 창문을 내렸다.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그제야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드디어 주단우가 무너지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봤다.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원망을 쏟아낸 뒤 남은 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허무함뿐이었다....다음 날 오후, 주상 그룹 사내 게시판에 인사 발령 공지가 올라왔다.주단우는 부대표직에서 해임됐고 후임 자리는 회사의 원로 임원이 임시로 맡게 됐다.현다영은 각 부서를 돌며 서류를 전달하던 중 직원들이 주단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들었어요? 오늘 아침에 회사 앞에 경찰차 왔던 거.”“네, 저도 봤어요. 부대표님이 차에 올라타던데요.”“주단우요? 퇴사한 거 아니었어요?”“무슨 퇴사예요. 조사받으러 간 거래요. 엄 대표를 도와 회사 자산을 꽤 많이 빼돌렸고 회사 관련 규정도 심각하게 위반해서 범죄 혐의까지 있다던데요. 엄 대표가 해외에서 조사받고 있으니까 주단우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모양이에요.”“그러면 감옥 가는 거 아니에요?”“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해원시에서 제대로 자리 잡기는 힘들겠죠.”현다영은 원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5화

    주단우는 원래 누구에게도 자신을 변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보여주고 싶은 정도였다.이게 모두 업보인 걸까.그동안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고 사랑을 장난처럼 대했던 대가.그래서 이제야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는데 자신의 마음이 짓밟히는 것조차 당연한 일인 걸까.“현다영, 똑똑히 들어. 천루비가 사랑했던 남자는 내가 아니야.”“난 그 아이를 3년 동안 후원했어. 편지도 여러 번 주고받았고 좋은 아이였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병을 앓고 있었어. 오랫동안 그 아이를 다독였지만 결국 끝까지 붙잡지는 못했어.”“독한 말을 했던 것도 인정해.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야.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려는 선택을 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주단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하지만 내가 가장 후회하는 건... 그 아이가 내게 몇 안 되는 진심 어린 친구였는데도 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거야. 정작 가장 힘들어할 때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거고.”주단우의 말을 들은 현다영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거의 1분 가까이 굳어 있었다.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목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정말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다영은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이야기를 참 잘도 지어내네요. 주단우 씨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3년씩이나 후원했다고요?”“정말 대단하네요. 그런 거짓말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하마터면 저도 감동할 뻔했잖아요.”현다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내뱉으며 주단우를 비웃었다.주단우는 끝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성큼 다가가 현다영을 테이블 모서리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인 뒤, 그녀의 양팔을 꽉 움켜쥐었다.“끝까지 안 믿겠다는 거야?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 천루비 가족을 직접 찾아가서 증명이라도 해야 해?”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4화

    한때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 없던 다섯 살 아이에게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현다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곧 친구가 떠올랐다.주단우의 뼛속 깊이 밴 냉정함과 엄경미에게서 배운 교활함을 생각하자 더 이상의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지금 그가 겪는 고통 역시 결국 자신이 선택해 온 길의 결과였다.“엄경미는 주상 그룹 안에 비밀 계좌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요. 자산을 빼돌릴 때마다 그 계좌들을 이용했고요. 그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부대표님뿐이에요.”현다영이 차분하게 말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주단우는 모든 의미를 깨달았다.엄경미의 자산 이전은 지금까지 줄곧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그가 엄경미를 배신하는 순간, 자신 역시 공범이라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강지현이 겨눈 칼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주단우는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엄경미는 아직 도주 중이었기에 당분간 그녀에게는 그 비밀 계좌들이 필요할 것이다.자신은 엄경미에게 직접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지현이라면 가능했다.주단우는 다시 한번 씁쓸하게 코웃음을 쳤다.고개를 들자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현다영의 시선과 마주쳤다.그 눈빛에는 아주 희미한 연민이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짙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 혐오였다.현다영이 차갑게 말했다.“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고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직접 복수하세요.”“물론이지.”한참 만에 입을 연 주단우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강지현이 이렇게까지 기회를 만들어줬는데 실망하게 할 수는 없잖아.”설령 그가 엄경미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주상 그룹 안에서 그의 퇴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현다영은 그의 눈동자 깊숙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할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현다영.”그때 주단우가 그녀를 다시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3화

    “두 사람이 죽어야만 비밀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다섯 살이었던 부대표님은 마침 엄경미와 주승호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빈자리를 채워줄 수도 있었죠. 어릴 때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믿게 만들기도 쉬웠고요. 그야말로 엄경미에게는 가장 다루기 쉬운 패였던 거예요.”주단우는 서류봉투 안에 들어 있던 오래된 사진을 바라봤다.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현장 사진이었다.단 한 장만 확인했을 뿐인데도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주단우는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모두 내려놓더니 있는 힘껏 옆으로 밀쳐냈다.마치 그 안에 담긴 모든 진실을 자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밀어내려는 사람처럼.“무슨 증거로... 그 사람이 했다고 단정하는 거야? 어쩌면 정말 사고였을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았...”“주단우 씨, 지금 확실한 증거를 통해 그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당신이 엄경미에게 뭘 할 수 있는데요?”현다영이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녀는 지금 주단우의 머릿속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었다.그가 애써 외면하려 할수록 그 진실은 오히려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주단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충혈된 눈으로 현다영을 바라봤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현다영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했다.엄경미에게 주단우는 처음부터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설령 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필요할 때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현다영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증거가 뭐냐고 물었죠? 차량 감정 보고서도 안에 들어 있어요. 직접 확인하면 알겠지만 당시 차량에는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적어도 그 사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건 증명할 수 있죠.”“그리고 엄경미는 엄씨 가문 사람 중 가장 먼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진술은 이랬죠. 두 분이 죄를 두려워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부대표님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2화

    현다영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주단우 앞으로 밀어놓았다.“당시 엄경미는 주승호와 교제 중이었고 엄씨 가문과 주상 그룹은 첫 협력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엄씨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그 틈을 이용해 자신도 이득을 챙기려 했던 엄경미는 부대표님 부모님을 이용해 거액의 자금을 빼돌렸고 엄씨 가문을 통해 주상 그룹의 핵심 자료까지 빼냈죠.”“나중에 그 일이 드러나자 엄경미는 자신만 교묘하게 빠져나갔어요. 엄씨 가문과는 선을 긋고 주씨 가문과 단독으로 접촉하면서 부대표님 부모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죠.”현다영은 한 문장씩 또렷하게 말을 이어갔다.주단우는 한동안 굳은 채 서류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건넨 자료를 펼치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강지현은 오래전부터 엄경미가 주단우를 입양한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주단우의 부모가 사건에 연루돼 도주했고 엄경미는 그 직후 아이를 입양한 뒤 주승호와 결혼했다.어떻게 보아도 누군가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강지현은 주단우 같은 사람이라면 진실의 실마리만 던져줘도 엄경미를 의심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엄경미에게 남은 정이 여전히 깊었다.오랜 시간 그녀를 믿고 따르며 살아온 탓인지 결국 그녀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이번에 주호석이 엄씨 가문을 압박하면서 엄경미의 범죄 증거 역시 대거 확보됐다.살길이 급해진 엄씨 가문은 모든 책임을 엄경미에게 돌리려 하고 있었다.당시 엄경미는 주승호와 함께하게 된 뒤, 엄씨 가문에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엄씨 가문과 주상 그룹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척하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처럼 꾸몄지만 실제로는 그 협력으로 엄씨 가문에 큰 손해를 입힐 생각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주승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엄씨 가문이 더 이상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하지만 엄경미의 계산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주씨 가문을 이용해 엄씨 가문에 타격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일로 인해 엄씨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1화

    하지만 주단우는 자신이 결국 엄경미에게 버려지는 패가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엄경미는 돌연 그의 모든 카드와 자산을 동결했다. 그가 엄경미를 대신해 관리하던 사업 자금마저 회수가 막히면서 머지않아 막대한 빚을 떠안을 처지가 됐다.그리고 별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모든 책임은 결국 그의 몫으로 돌아올 터였다.지금 주단우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강지현 쪽의 소식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 강지현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녀가 순순히 자신을 도와줄 리는 없었다.주단우에게 남은 선택지는 현다영뿐이었다.그가 술집에서 세 번째 잔을 비울 무렵, 현다영이 도착했다.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그를 향해 말했다.“조용한 룸 없어요?”주단우는 바 테이블에 앉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현다영을 바라보다가 턱짓으로 종업원에게 신호를 보냈다.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고 주변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됐다. 방 안의 분위기 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주단우의 시선이 무심코 현다영의 손목에 머물렀다.“아직도 아파?”그날 현다영이 보였던 행동은 그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과 얽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하면 그 역시 상처받았다.현다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부대표님, 농담도 다 하시네요. 이미 다 나은 상처가 어떻게 아직도 아프겠어요?”“하지만 난 아직도 아픈데.”주단우는 한숨을 내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쉽게 감추지 못한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현다영은 그런 그의 태도가 불쾌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를 부르신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그럼 내가 왜 널 불렀을 것 같아?”주단우는 서두르지 않고 되물었다.“엄경미.”현다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저한테 어머니의 행방을 물으려고 했던 거 아닌가요?”“그걸 알려주려고 일부러 온 거야?”주단우의 눈빛에 문득 웃음기가 번졌다.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시선에는 여전히 능청스러운 여유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