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의 비행 끝에 일행은 다음 날 드디어 Y국에 도착했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강하리는 경호팀 사이로 걸어 나오는 노진우를 보고 당황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노진우가 웃었다.“구 대표님께서 강하리 씨 안전이 걱정돼서 진 장관님께 저를 경호팀에 배치하라고 하셨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이번 여행에서는 안전과 경호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국방부 요원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부에서도 특별히 경호원을 배치해 줬기 때문이었다.구승훈이 노진우를 보낸 건 주해찬과 함께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개자식, 강하리는 속으로 한 마디 욕설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노진우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주해찬은 비행기에서 내려 곧장 강하리 옆으로 걸어오다가 노진우를 보고 발걸음이 살짝 멈췄다.“이분은...”노진우는 웃으며 주해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주해찬 씨, 전 강하리 씨 전담 경호원입니다.”주해찬이 강하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별다른 설명 없이 손에 든 짐을 노진우에게 건넸다.“가요, 여기까지 왔으니 시키는 대로 해요, 규칙 어기지 말고.”노진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은 두 사람 뒤에 서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구승훈, 되게 조심스럽네.주해찬은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걸음을 옮겨 따라갔다.대사관에서 마련해준 숙소에 체크인을 마친 강하리는 휴대폰을 꺼내 가장 아름다운 노을 사진을 골라 구승훈에게 보냈다.그런데 잠시 후 구승훈에게서 전화가 왔다.“방금 도착했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노진우 씨가 다 얘기했죠?”구승훈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답했다.“난 정말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래.”강하리도 알면서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앞으로 한동안 아주 바쁠 것 같아요.”구승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알아, 네 일은 늘 바쁘잖아.”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일 끝나면 며칠
심문석은 살짝 당황했고 강하리의 말에 협상팀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문연진은 시선을 내린 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뭣도 모르는 건 어딜 가나 똑같다.이런 협상에서 자기가 끼어들 생각을 한다니.하지만 심문석이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문연진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강하리를 돌아보니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체 없이 유물의 유래와 역사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그 말을 듣던 문연진의 눈에 조롱 섞인 기색이 번쩍였다.이 상황에서 강하리가 대체 얼마나 그럴듯한 제안을 할까 싶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일 줄이야.이 유물들은 국내 시장에 유통된 적이 없다. 오기 전에 할아버지께도 구체적으로 물어봤지만 안타깝게도 할아버지조차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할아버지도, 심문석도 잘 모르는 걸 강하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나.그렇게 생각한 문연진은 강하리가 망신당하는 걸 지켜보려 했다.심문석을 뒤따르던 협상 팀원들도 조금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강하리 씨, 모르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하지만 강하리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협상 팀원들은 불안해졌고 강하리의 말을 끊으려는 순간 심문석이 그들을 말렸다.그는 강하리가 헛소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오기 전에 미리 공부했던 그는 이 청동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봤고 심지어 이 청동기가 국내 암시장 거래에 나온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외로 불법 반출된 대부분의 문화재가 그렇듯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환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런데 강하리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문득 증거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친 강하리가 휴대폰에서 사진을 찾아냈는데 바로 오늘 회수할 청동 그릇을 찍은 것이었다.사진을 찍은 장소는 한눈에 봐도 국내 유물 거래 시장 중 하나였다.현장에서 문연진은 말할 것도 없고 심문석마저 깜짝 놀랐다.그는 사진을 건네받고 반나절 동안 살펴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얘야, 이 사진은 어
협상이 끝난 후 외교부와 박물관은 공동으로 협상 과정을 온라인에 공개했고 협상 회의에서 큰 성과를 거둔 강하리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미녀 통역사'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인기 검색어에 ‘미녀 통역사’와 함께 ‘강국의 기세’, ‘웰컴 백홈’ 등 말들이 나타났는데 전부 강하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또한 이번 문화 유물 회수 과정은 국내 문화 유물 회수 협상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강하리는 그날 밤 백아영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 백아영은 한바탕 그녀를 칭찬하기 바빴다.문연진은 높아지는 강하리의 인기에 점점 더 화가 났다.애초에 그녀의 눈에 강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놀잇감에 불과했고 자신은 집안도, 재능도 뛰어나고 구동근이라는 든든한 조력자도 있으니 강하리가 구승훈의 곁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구씨 가문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승훈의 마음도 얻고 싶었다.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줄 기회를 찾으며 강하리보다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하지만 거듭해서 강하리의 들러리가 되자 문연진은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특히 심씨 가문 어르신까지 강하리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자 문연진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문씨 가문은 B시에서나 대단했지 심씨 가문에 비하면 여전히 한 발 뒤처져 있었다.그동안 문씨 가문에선 여러 번 그녀를 백아영의 밑으로 보내려 했지만 백아영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백아영이 강하리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고 심문석마저 강하리를 편애하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이 열망하던 모든 건 강하리가 전부 차지한 것 같았다.문연진은 이를 악물고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전에 승훈 오빠가 Y국에 온다고 한 거 사실인가요? 정확히 몇 시예요? 데리러 가고 싶어요.”그날 저녁 구승훈이 탄 비행기가 Y국 공항에 착륙했고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 하늘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반가움이 숨겨져 있었다.“어떻게 연락도 없이 여기 왔어요?”구승훈의 목소리는 원망으로 가득했다.“내 전화 받을 시간은 있고?”강하리는 괜히 마음에 찔렸다.“그동안 너무 바빴어요.”며칠 동안 줄곧 낮에는 협상, 밤에는 회의가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깊은 밤이 되곤 했다.그래서 한동안 구승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손에 꼽혔다.“그렇게 바쁜데 주해찬이랑 웃고 떠들고, 밥도 먹었어? 선배 앞에서는 안 바쁜가 봐.”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일 얘기 했어요.”구승훈은 그래도 심통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제 막 만난 터라 주해찬 때문에 괜히 기분 잡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나 안 보고 싶었어?”확인받고 싶은 어린아이 같았다.강하리의 심장이 세차게 뛰며 가볍게 답했다.“보고 싶었어요.”멈칫하던 구승훈은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마저 열기로 가득했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여 그녀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거친 입맞춤에 그의 목을 감싼 채 겨우 버티고 있었다.구승훈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치마 지퍼를 열어젖혔고 큰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파고들어 탐욕스럽게 움켜잡았다.남자의 크고 거친 손이 그녀의 연약한 피부를 조금씩 문지르자 그 손길에 강하리도 몸을 떨었다.“구승훈 씨...”강하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아래를 타고 내려가던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납작한 배에 머문 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강하리가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는 더욱 단단히 옭아맬 뿐이었다.갑자기 따뜻한 물이 쏟아지며 구승훈은 거추장스러운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조금 전 거칠게 문질렀던 부위에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휴대폰 무음으로 해놨어요.” 요즘 회의가 많아서 강하리의 휴대폰은 며칠 동안 거의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었다.주해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 바에 있으니까 준비하고 와.”강하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그녀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반면 문 앞에 서 있던 주해찬은 눈가에 담긴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강하리는 너무 급하게 나온 탓인지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그는 피식 웃고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구승훈 씨, 당신... 앗!”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고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남자의 힘에 의해 세면대 쪽으로 밀려났다.“나 회식 있어요, 그만해요.”하지만 구승훈은 못 들은 척 그녀의 옷을 들치며 등에 키스를 퍼부었다.“일단 한번하고, 응?”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는 동시에 구승훈이 안으로 파고들었다.거친 숨소리와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입가에 흘러나오는 소리를 억누르며 다리마저 달달 떨렸다.하지만 구승훈은 굶주린 사나운 짐승처럼 거세게 몰아붙이더니 갑자기 그녀의 목 뒤쪽을 세게 물었다.“또 주해찬이야, 짜증 나는 자식!”강하리는 그의 멈추지 않는 움직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칠 뿐이었다.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가자 밖에는 이미 환한 불빛이 켜졌다.강하리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린 듯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안고 씻는 것을 도왔다.강하리는 문득 그가 이번에 콘돔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물어보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원래도 임신이 쉽지 않은 데다 지난번 일을 겪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 같은 몸이면 콘돔을 쓰든 안 쓰든 어차피 똑같았다.순간 그녀의 가슴에 상실감이 밀려왔다.그녀는 일어나서 수건을 꺼내 몸을 감쌌다.“가서 얼굴 좀 비춰야겠어요.”
구승훈의 목울대가 살짝 움찔하다가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공항에서 봤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의 몸을 돌리며 설명했다.“하리야, 나랑 걔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내 말 믿어줘. 난 오늘 널 보러 온 거고 걔가 어떻게 공항에 나타났는지 몰라.”강하리는 꽉 막힌 마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물었다.“그 여자가 당신 Y국에 온 건 어떻게 알아요?”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아직 몰라. 알아낼 테니까 화내지 마, 응?”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걔가 오늘 나를 안았는데 내가 바로 밀어냈어. 하리야, 못 믿겠으면 공항 카메라 돌려봐도 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봤다.그를 믿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마음속에 무언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송유라는 그녀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었다.그 죽일 놈의 첫사랑이 자신과 구승훈 사이를 떼어놓는 장애물이었다.그걸 뛰어넘으려 애썼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넘어섰다고 생각할 때마다 장애물은 다시 나타났다.“사람 보내서 걔 감시하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힐끗 보았다.“정말 그 여자를 통제할 수 있어요? 그 여자가 죽으면 상관 안 해도 되잖아요.”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았다.“나 그렇게 못 믿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외교부 사람들이 계속 그녀를 재촉했다.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구승훈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뒤따랐다.두 사람이 술집에 도착했을 때 술집 안은 시끌벅적했다.강하리가 들어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늦었으니까 벌주 세잔 마셔야지!”“맞아, 후래자 삼배.”강하리는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고 주해찬이 강하리를 보고 물었다.“뭐 마실래? 내가 주문할게. 저 사람들은 무시해. 마실 필요 없어.” 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주위에서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동 너무 뻔히 보이는
“나 오늘 당직이야. 너 기분 안 좋을까 봐 그러지. 계속 전화를 안 받길래 걱정했어.” “정말 괜찮아.” 강하리는 손연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고 손연지는 그녀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냥 친구?” 강하리가 힐끗 돌아보았다.“아니면 뭔데요?”구승훈은 너무 화가 나서 그녀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하리야, 아직 내 물건이 네 몸 안에 있잖아!” 강하리의 몸이 움찔하더니 홱 고개를 들어 뻔뻔한 개자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구승훈은 웃기만 했다.“넌 친구랑 그런 짓을 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전에는 우리 직장 동료였어요. 동료끼리는 해도 되는데 친구는 안 돼요?” 구승훈은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쓴웃음을 짓던 그는 마음속으로 이 모든 것을 자초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과거에 저질렀던 죗값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고 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유라의 문제를 쉽게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침대에 올라갔다.강하리는 그를 무시한 채 돌아와서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한 잔을 주문해 혼자서 마셨다. 문연진은 옆에 앉아 두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싸웠다. 설마 송유라 때문인가?쓰레기 송유라가 아직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강하리와 주해찬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미소가 번뜩였다.“강하리 씨, 저랑 건배해요. 이번 일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 주해찬 씨랑 두 분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예비 남자 친구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하지만 문연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왜 그래요, 왜 다들 절 보세요?”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강하리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홀짝일 뿐 문연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연진도 흥미를 잃은
그 질문에 사람들은 굳어버렸다.문연진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당사자의 예비 남자 친구가 자리에 있는데도 계속해서 주해찬을 끌어들였다.주해찬은 피식 웃었다.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었다.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이미 강하리와 구승훈이 이 정도 사이로 발전했기에 그가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그는 술잔을 들고 연달아 세 번 마셨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주해찬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다들 재밌게 노세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밖으로 나가자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하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구승훈이 옆에서 비웃었다.“속상해?”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술을 들이켰다.속상한 게 아니라 화가 날 뿐이다.오늘 밤 문연진의 도발은 너무 뻔했다.그녀는 이 관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주해찬을 굳이 끌어들였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무시하고 문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문연진 씨,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가서 스피치 연습이나 하세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허튼짓하지 마시고. 나중에 미션 나갈 때 창피하지 않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자 구승훈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문연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강하리, 지금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비꼬는 거야?자기가 무슨 자격으로?그저 업무상 능력이 조금 뛰어날 뿐이잖아.주변 사람들은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문연진을 바라봤다.그 사람 중에는 문연진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전에 봤던 그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 오늘 밤엔 어딘가 미쳐있는 사람 같았다.그러니 강하리처럼 성격 좋은 사람도 그녀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지.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을 끌어당겨 그대로 그의 턱을 콱 물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다해.구승훈은 고통에 낮게 신음하며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품에 안았다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