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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봄은어디
전화 너머로 깜짝 놀란 유시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혼하겠다고? 갑자기 왜? 송여준이랑 싸웠어?”

유하늘은 휴대전화를 꽉 쥐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냥 갑자기 힘들어져서. 이젠 여준 씨랑 살기 싫어졌어.”

지난 7년간 유하늘은 그에게 연락해서 늘 좋은 일만 전했었다.

어쩌면 자신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송여준이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장난기 많은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유하늘은 유시훈에게 하소연 한번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유시훈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매라 마음이 통하는 걸까? 유시훈은 유하늘의 말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 언제 올 거야? 내가 직접 너랑 우주 마중 나갈게.”

유하늘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우주는 안 데려갈 거야.”

유시훈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괜찮겠어? 무서워하지 마. 정말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내가 양육권 가져올 수 있게 도와줄게.”

“아니, 됐어. 일 다 처리하고 나면 다시 연락할게.”

유시훈이 혹시나 캐물을까 봐 걱정되었던 유하늘은 떨리는 손끝으로 힘주어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힘이 빠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가 생긴 뒤로 유하늘은 단 한 번도 송여준과 헤어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희망까지 박살 낸 사람이 아들이 될 줄도 몰랐다.

비록 유시훈에게 이쪽 일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사실 딱히 처리할 것도 없었다. 혼인신고 자체가 되어 있지 않으니 말이다.

유하늘이 해야 하는 일은 그저 짐을 챙겨 홀연히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송여준, 송우주와 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었다.

유하늘은 정신을 가다듬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송우주가 장난감을 들고 들어왔다.

유하늘이 옷을 정리하고 있자 송우주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엄마, 왜 짐을 정리하고 있어요? 어디 가요?”

유하늘은 고개를 돌려 송우주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녀가 낳은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여행 좀 가려고.”

송우주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요? 언제 가요?”

아이는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러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유하늘은 순간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금방 떠날 거야. 아마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야.”

송우주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잘 다녀오세요!”

송우주는 폴짝폴짝 뛰면서 밖으로 나간 뒤 권아람에게 연락해 이 좋은 소식을 알리려고 했다.

유하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송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곱 시 넘었는데 너 숙제...”

송우주는 짜증을 냈다.

“잔소리 좀 하지 말아요! 예전에는 여덟 시에 엄마가 같이 숙제해 줬잖아요. 아직 여덟 시 안 됐는데 왜 재촉해요?”

유하늘은 입술을 깨물다가 자조하듯 웃었다.

“미안해.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송우주는 오늘따라 엄마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이었다면 내일 선생님께서 숙제를 검사할 테니 일찍 끝내고 일찍 자는 게 좋다면서 잔소리를 이어갔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우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화가 났다는 것을 티 내려고 문까지 쾅 닫고 나갔다.

유하늘은 책상 옆으로 걸어가더니 평소 송우주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 썼던 책들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중요한 부분은 유하늘이 전부 표시해 두었다. 초등학교 1학년 문제까지 전부 말이다.

송여준은 평소 송우주의 공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를 가르치는 중요한 일은 유하늘이 홀로 도맡아서 했는데 송우주는 오히려 그녀를 원망했다.

지난 6년 동안 유하늘은 송우주를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는 건강한 아이로 키웠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희생과 헌신은 장난감을 사주고 실컷 놀게 한 권아람의 방임보다 못했다.

눈물이 힘없이 추락했다.

그러나 유하늘은 곧바로 눈물을 닦은 뒤 송우주의 모든 물품을 정리하여 종류별로 라벨까지 붙였다.

저녁 여덟 시, 유하늘은 옆방으로 가서 송우주에게 숙제하라고 하지 않았다.

송우주는 유하늘이 시간을 잊었을 거로 생각하고 내심 기뻐하면서 방에서 게임을 했고 그러다 지쳐서 어느샌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집사는 유하늘이 송우주를 잘 돌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저녁 아홉 시, 송여준이 회사에서 돌아왔다.

유하늘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자기도 모르게 문자를 쓰다가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작성을 마치고 의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수술 예약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 수술 안 하고 해외로 나가서 항암치료 받으려고요.]

송여준은 안으로 들어가 다이닝룸 쪽 식탁을 힐끗 보았다. 식탁 위에는 유하늘이 매일 준비해 주던 국수가 없었다.

송여준은 자주 야근하고 제때 밥을 먹지 않아 위가 좋지 않았기에 유하늘은 매일 그를 위해 직접 국수를 해주었다.

송여준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유하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오늘은 국수 없어?”

유하늘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송여준을 바라보았다.

“몸이 안 좋아서 안 했어.”

송여준은 넥타이를 풀다가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요즘 몸이 약해져서 그런가? 최근 들어 코피도 자주 흘리고 안색도 예전보다 많이 창백해진 것 같아. 가정부 두 명 더 고용할까? 넌 너무 뭐든 본인이 직접 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러다 쓰러져.”

송여준은 손에 들고 있던 걸 유하늘의 앞에 내려놓으며 따뜻하면서도 건조한 손바닥으로 유하늘의 이마를 짚었다.

유하늘은 송여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송여준이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늘 자신에게 쌀쌀맞았던 걸 떠올렸다.

그러나 약을 탄 술을 마신 그날 밤에는 마치 맹수처럼 덤벼들어 유하늘의 몸에 많은 멍을 남겼었다.

다음날 잠에서 깼을 때, 늘 도도하고 차갑던 송여준은 쑥스러움에 귀가 빨개지면서도 애써 침착한 척하며 유하늘이 떠나지 못하게 막으면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했었다.

그 뒤로 송여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차갑게 대하며 오직 그녀에게만 다정하게 굴었다.

“열은 안 나는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지?”

송여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벚꽃 모나카 먹을래?”

유하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멍한 표정으로 핑크색의 모나카를 보았다.

그것은 유하늘이 가장 좋아하는 벚꽃 모나카였다.

보해시는 서북쪽에 있어 벚꽃을 보기 힘들었는데 오로지 유명한 제라미에서만 매주 수요일 한정 수량을 판매했다.

유하늘은 5년 전 우연히 벚꽃 모나카를 먹어본 뒤로 줄곧 그 맛을 잊지 못했고, 그 후로 송여준은 5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매주 수요일마다 직접 제라미로 가서 그것을 사 왔다.

유하늘은 매우 감동했다. 그녀는 송여준이 표현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그렇지, 자신을 꽤 신경 쓰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모두 착각이었다.

5년 동안 빠짐없이 벚꽃 모나카를 사 오면 뭐 어떤가? 애초에 결혼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유하늘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송여준은 유하늘이 가만히 있자 물었다.

“안 먹을 거야?”

유하늘은 정신을 차렸다.

“입맛이 없어서.”

송여준이 뭔가 질문하려는데 마침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지퍼가 열려 있고 검사결과지가 반쯤 나와 있었다.

송여준은 잠깐 망설였다.

“검진받았어?”

송여준이 손을 뻗어 검사지를 집으려는 순간 옷깃이 잡혔다.

유하늘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별문제 없대. 요즘 좀 무리해서 그렇대.”

송여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하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아주머니한테 삼계탕 끓여달라고 부탁할게.”

유하늘은 주먹을 움켜쥐며 송여준에게 물었다.

“여준 씨, 만약 언젠가 내가 죽을병에 걸려서 시한부가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송여준은 우뚝 멈춰 서면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몸이 안 좋으면 나랑 같이 병원 가자. 네가 죽을병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야.”

유하늘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결혼한 지 7년 됐는데 나한테 뭐 숨기는 건 없어? 지금 얘기하면 다 용서해 줄게.”

송여준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너한테 숨기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유하늘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생각을 너무 많이 했나 봐. 어쨌든 나는 남한테 속는 거 싫어해. 만약 날 속인다면 나는 여준 씨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질 거야. 그리고 우리 세 사람 평생 다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송여준은 당황했고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송여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한껏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하늘아, 우리는 절대 평생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나는 우주 보러 갈게.”

송여준은 송우주의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유하늘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젠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유하늘은 미리 준비해 둔 차 키와 집 키, 그리고 편지 하나를 꺼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이혼할 필요도 없고 이혼합의서를 작성해서 사인할 필요도 없으며 재산분할도 할 필요가 없었다.

집도, 롤스로이스도 모두 송여준이 그녀에게 사준 것이었다.

그것들을 돌려준다면 깔끔히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유하늘은 키와 편지를 송여준의 서재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챙겨 밖으로 나가 짙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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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생겼다고 왜 말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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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짓말쟁이의 참회   제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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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하늘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앞만 바라보았다.송여준이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지만 무시했다.몇 개만 봤을 뿐인데 벌써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차가 한 요양기관 앞에 멈추자 유하늘이 내렸다.이때, 간호사 두 명이 다가와 짐을 들어주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차에서 내리는 유시훈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유시훈은 우두커니 서서 꿈쩍도 안 했다.이내 주먹을 쥐고 말을 꺼내려다 멈칫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몸 잘 챙겨.”유하늘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뒤 곧장 센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시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잠시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 차에 올랐다.집에 막 돌아오자 두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보고하기 시작했다.“저희가 알아보니까 송여준 친구, 홍이수라는 사람이 별장 단지 안에 집을 하나 임대했더라고요. 아마도 송여준이 애 데리고 오래 살 곳을 찾는 것 같아요.”유시훈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고, 짜증이 그대로 드러났다.“하늘도 없는데 집을 빌려서 뭐 하겠다는 건데? 오늘 밤 송여준 부자 다 쫓아내. 제 발로 안 나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보내.”경호원들이 서로 눈을 맞췄다.“하지만... 아이는 위독한 상황이라 병원을 떠나기 어려워요.”“내 알 바 아니야. 하늘이가 다시는 보기 싫다는데 여기 머물게 놔둘 수는 없잖아. 애가 버티지 못하고 죽으면 시체라도 끌어내!”유시훈은 주먹을 쥐고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했다.그의 말에 겁을 먹은 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곧장 송여준을 찾아가 인정사정없이 내쫓기 시작했다.“저희 아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여기 남아 있어도 다시는 못 볼 테고, 당신은 장례식에 참여할 권리도 없죠!”송여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늘 자정까지 이 도시를 떠나요. 안 그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낼 거니까 알아서 해요.”두 경호원의 말이 끝나자 송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시종일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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