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6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비밀
“한소이 선생이 끝까지 책임지세요.”
윤재혁이 떠난 뒤에도 그 말은 한동안 소이의 귀에 남아 있었다.
첫 환자.
단어만 놓고 보면 뿌듯해야 했다.
하지만 태블릿 화면에 빼곡한 검사 결과와 처방 목록을 마주하자 감격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김복순 환자는 간 절제술을 받은 지 사흘째였다. 활력징후는 안정적이었고 혈색소 감소 폭도 당장 문제 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배액관을 유지하고 있었고 식사는 아직 미음 단계였다.
소이는 수술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어디를 얼마나 절제했는지, 수술 중 출혈량은 얼마였는지, 유착은 없었는지, 수술 뒤 계획은 무엇인지 하나씩 따로 적었다.
“태블릿에 다 있는데 왜 또 손으로 써?”
박민우가 옆에서 물었다.
“제가 직접 적어야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적다가 환자 퇴원 전에 네 손목이 먼저 퇴원하겠다.”
“틀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윤 교수한테 한 번 털리더니 갑자기 모범생이 됐네.”
소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원래 모범생이었습니다.”
“빈 물잔 마시는 모범생?”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소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뭘?”
박민우는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이는 입을 다물었다.
맞선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들킨 줄 알고 괜히 뜨끔했다.
“아닙니다.”
“윤 교수한테 너무 긴장하지 마. 말은 저렇게 해도 첫날부터 환자 맡기는 거 흔하지 않아.”
“제가 잘해서 맡기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럼?”
“어디까지 못하나 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부정이라도 해 주세요.”
“외과에서는 희망보다 사실이 중요하거든.”
박민우는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소이는 다시 김복순 환자의 차트를 펼쳤다.
이제부터는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됐다.
오전 내내 소이는 병실과 스테이션을 오갔다.
김복순의 통증 정도를 확인하고, 배액량을 측정하고, 상처 부위를 살폈다. 처방된 진통제가 제대로 투여됐는지도 확인했다.
김복순은 소이가 들어올 때마다 비슷한 질문을 했다.
“이 관은 언제 빼요?”
“배액량하고 색을 조금 더 확인한 다음 결정할 겁니다.”
“오늘은 못 빼?”
“오늘 검사 결과를 교수님께 보고드린 뒤 말씀드릴게요.”
“윤 교수한테?”
“네.”
“그 사람 무섭던데.”
소이는 잠시 망설였다.
환자 앞에서 담당 교수를 무섭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말씀이 조금 짧으셔서 그렇지 환자분 상태는 꼼꼼하게 보십니다.”
“조금 짧은 게 아닌 것 같던데.”
옆에 있던 보호자가 작게 웃었다.
소이도 따라 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도 궁금한 건 저한테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확인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안 무서워서 좋네.”
그 말에 소이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첫 환자에게 적어도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다.
병실을 나온 소이는 곧장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혈색소는 9.7.
아침보다 아주 조금 올랐다.
간 수치는 수술 후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감소하고 있었다. 체온도 정상이었다.
소이는 내용을 정리해 윤재혁에게 보고할 준비를 했다.
문제는 그가 수술 중이라는 점이었다.
수술방 앞을 서성일 수는 없었다.
소이는 메신저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
[김복순 환자 혈색소 9.7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고하면 싫어한다고 했다.
그 뒤에 판단을 붙였다.
[배액량은 오전 대비 증가하지 않았고 활력징후도 안정적이어서 현재 활동성 출혈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됩니다.]
여기까지 쓰고도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너무 길면 왜 핵심만 말하지 않느냐고 할 것 같았다.
너무 짧으면 생각 없이 숫자만 전달한다고 할 것 같았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까지 세 번 확인하고 있을 때 박민우가 뒤에서 화면을 훔쳐봤다.
“연애편지 써?”
소이는 놀라 휴대전화를 가슴에 붙였다.
“환자 보고입니다.”
“보고 하나 보내는 데 왜 얼굴이 그렇게 심각해?”
“윤 교수님께 보내는 거니까요.”
“그냥 보내.”
“혹시 틀린 내용 있으면 어떡해요?”
“틀렸으면 고쳐 주겠지.”
“무섭게요?”
“대부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이는 결국 눈을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오 분.
십 분.
삼십 분이 지나도록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수술 중인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이 초조해졌다.
혹시 보고 방식이 잘못됐나.
호출을 해야 했나.
중요하지 않은 수치라고 생각해 확인하지 않는 건가.
소이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던 순간, 김복순의 보호자가 스테이션으로 나왔다.
“선생님, 엄마가 아까보다 배가 더 아프대요.”
소이는 곧장 병실로 뛰어갔다.
김복순은 배를 누른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디가 제일 아프세요?”
“여기. 아까부터 조금씩 아프더니 갑자기 더 아파.”
소이는 활력징후를 확인했다.
혈압과 맥박은 안정적이었다. 배액관의 양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복부를 조심스럽게 눌렀을 때 환자는 수술 부위 근처에서 통증을 호소했다.
진통제 투여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소이는 박민우에게 즉시 상황을 알렸다.
박민우가 환자를 확인한 뒤 말했다.
“복부 팽만이 심해진 건 아니고 활력징후도 괜찮아. 일단 처방 확인해서 진통제 조정하고 계속 보자.”
“윤 교수님께도 보고할까요?”
“지금 수술 중이니까 내가 연락할게. 당장 응급으로 보이진 않아.”
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통제를 조정한 뒤에도 병실을 떠나지 않고 환자 곁에 남았다.
십여 분이 지나자 김복순의 찌푸린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아까보다는 괜찮으세요?”
“응. 좀 낫네.”
소이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별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맡은 환자가 배가 아프다고 말한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선생님.”
김복순이 소이를 불렀다.
“네.”
“물 좀 마셔도 돼?”
소이가 시간을 확인했다.
“네. 한꺼번에 많이 드시지는 말고 조금씩 드세요.”
보호자가 물컵을 챙기는 동안 소이는 배액량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때 가운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윤재혁이었다.
[확인했습니다. 판단 근거까지 함께 보고한 건 맞습니다.]
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꾹 눌렀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호한 문장이었다.
그 아래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통증 증가했다는 보고 받았습니다. 수술 끝나고 바로 올라갑니다.]
박민우가 벌써 알린 모양이었다.
소이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현재 진통제 투여 후 통증 감소했고 활력징후 안정적입니다. 계속 확인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네.]
고작 한 글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소이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김복순의 통증은 다시 심해지지 않았지만 검사 결과를 재확인하고 보호자에게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두 시가 넘었다.
“밥 먹었어?”
박민우가 물었다.
“아직요.”
“또 커피만 마시게?”
아침에 받은 커피는 회진 전에 다 마셨다. 그 뒤로는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잠깐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구내식당 끝났어.”
“편의점이라도...”
소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술실 쪽 복도에서 윤재혁이 걸어왔다.
수술모를 벗은 머리가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마스크를 턱 아래까지 내린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빠르고 정확했다.
그는 소이를 지나쳐 곧장 김복순의 병실로 들어갔다.
소이와 박민우도 뒤를 따랐다.
윤재혁은 환자의 복부와 배액관을 직접 확인하고 통증의 양상을 물었다. 소이는 아침부터 달라진 내용과 투여한 약물, 이후 경과를 순서대로 보고했다.
“진통제 투여 뒤 통증 수치는 7점에서 3점으로 감소했습니다. 활력징후 변화 없고 복부 팽만이나 배액량 증가는 없습니다.”
“본인 생각은?”
“수술 부위 통증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통증이 다시 심해지거나 활력징후가 변하면 출혈이나 담즙 누출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검사하겠습니다.”
윤재혁이 잠시 소이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두 시간 뒤 다시 확인해서 보고하세요.”
“네.”
환자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한 재혁은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 나오자 박민우가 물었다.
“교수님, 다음 수술 바로 들어가십니까?”
“삼십 분 뒤에.”
“식사는요?”
“시간 없습니다.”
소이는 저도 모르게 재혁의 손을 봤다.
맞선 자리에서 스테이크를 정확한 크기로 자르던 손.
오늘은 긴 수술을 마친 탓인지 손가락 마디에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역시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을 가능성이 컸다.
윤재혁의 시선이 소이에게 향했다.
“한소이 선생은?”
“네?”
“식사했습니까?”
소이는 대답을 피하며 차트를 내려다봤다.
“김복순 환자 보고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안 했군요.”
박민우가 옆에서 태연하게 거들었다.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신 게 전부입니다.”
소이가 곧장 그를 쳐다봤다.
“선배.”
“사실이잖아.”
윤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둘 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소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박민우를 바라봤다.
“어디 가시는 거죠?”
“나도 모르지.”
“저희 기다리라고 하신 거 맞죠?”
“둘 다라고 했으니까 맞겠지.”
오 분쯤 지나 윤재혁이 종이봉투 하나와 커피 세 잔을 들고 돌아왔다.
병원 안 카페의 로고가 찍힌 컵이었다.
그는 박민우에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잔을 챙겼다.
마지막 컵이 소이 앞에 놓였다.
투명한 컵 안에 얼음이 가득했다.
소이는 반사적으로 컵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윤재혁이 무심하게 말했다.
“시럽 없이.”
소이의 손이 멈췄다.
맞선 자리에서 자신이 주문했던 음료였다.
그날 소이는 메뉴판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은 빼 달라고 주문했다.
병원에서는 윤재혁 앞에서 커피 취향을 말한 적이 없었다.
박민우가 자신의 따뜻한 커피와 소이의 잔을 번갈아 봤다.
“교수님.”
윤재혁이 종이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소이에게 건넸다.
“왜요?”
박민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소이 선생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복도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이는 커피를 든 채 굳어 버렸다.
윤재혁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 외전 5화. 이번에는 가족이 먼저입니다윤재혁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날.한소이는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지난번 윤재혁과 맞선을 봤던 곳과 같은 호텔이었다.처음에는 서로를 가장 빨리 잊고 싶어 했고, 두 번째에는 정식으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오늘은 양쪽 가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을 예정이었다.“왜 하필 여기예요.”소이는 로비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윤재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정확히는 약속 시간까지 이십칠 분이나 남아 있었으니 늦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혼자 기다리고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어머니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교수와 전공의라는 관계를 문제 삼으면.나이 차이가 크다고 걱정하면.혹시 결혼 이야기를 너무 빨리 꺼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긴장하자 생각이 많아졌고, 생각이 많아지자 말하고 싶은 문장들이 머릿속에 쌓였다.“한소이 씨.”익숙한 목소리에 소이가 고개를 들었다.윤재혁이 검은 정장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그의 뒤에는 윤서진이 꽃다발을 들고 따라왔다.“왜 둘이 같이 와요?”“오빠가 아침부터 너무 긴장해서 감시하러 왔어요.”서진이 대신 대답했다.“제가 긴장했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넥타이 세 번 바꿨잖아.”소이는 윤재혁의 넥타이를 바라봤다.짙은 남색 바탕에 작은 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다.“잘 골랐네요.”“첫 번째가 더 나았어.”서진의 말에 윤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그럼 그때 말했어야지.”“오빠가 물어봤어?”“네 의견이 필요해서 보여 준 거잖아.”“같이 결정해야지. 보여 주기만 하면 어떻게 알아?”소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재혁 씨도 당하네요.”“한소이 씨가 가르친 방식입니다.”그는 소이의 손에 들린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언제 왔습니까?”“방금요.”윤재혁의 시선이 얼굴 오른쪽으로 향했다.소이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눌렀다.“십 분 정도 됐어요.”“메시지는 왜 안
# 외전 4화. 남자 친구의 보호자 면담토요일 오후 네 시 오십 분.윤재혁은 한소이의 본가가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끄지 못했다.소이는 조수석에 앉아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도착했어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안 내려요?”“준비 중입니다.”“마음의 준비요?”“네.”윤재혁은 룸미러로 자신의 넥타이를 확인했다.평소 병원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집을 나선 뒤 벌써 네 번째로 매듭을 만지고 있었다.소이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그만 만져요. 그러다 목 졸리겠어요.”“많이 이상합니까?”“넥타이는 안 이상해요.”“그럼요?”“재혁 씨가 너무 긴장했어요.”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차량 뒷좌석에는 과일 바구니와 꽃, 견과류가 들어가지 않은 수제 양갱 세트가 놓여 있었다.처음에는 건강식품을 사겠다고 했고, 소이가 말렸다.그다음에는 한우를 준비하려 했고, 그것도 거절당했다.결국 김정숙이 좋아한다는 꽃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선물만 골랐다.그 과정에서 소이는 같은 말을 열 번 넘게 했다.“엄마 수술받는 거 아니에요.”그때마다 윤재혁은 같은 대답을 했다.“수술보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재혁 씨.”“네.”“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바로 잘못했다고 하지 마요.”“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인정해야 합니다.”“그건 맞는데, 우리 엄마는 질문하면서 답을 정해 놓는 사람이에요.”“한소이 씨와 비슷하군요.”소이의 눈이 가늘어졌다.“지금 들어가기 전에 싸울래요?”“아닙니다.”윤재혁은 바로 안전벨트를 풀었다.“가죠.”“도망 안 가고요?”“도망갈 생각 없습니다.”그가 뒷좌석의 선물을 챙겼다.소이는 차에서 내리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제가 옆에 있을게요.”윤재혁이 소이를 바라봤다.병원에서 환자 보호자에게 위험한 수술을 설명할 때도 흔들리지 않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네.”“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요
# 외전 3화. 맞선 주선자의 사후 관리한소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방바닥에 길게 번져 있었다.소이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더듬어 시간을 확인했다.오후 한 시 십이 분.“한 시?”그녀는 벌떡 일어나다가 이마를 감쌌다.밤샘 근무를 마치고 오전에 잠들었으니 오래 잔 것은 아니었다.문제는 오후 다섯 시가 마지막 입장 시간이었던 전시회였다.씻고 준비한 뒤 이동하면 늦지는 않겠지만, 식당 예약까지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했다.소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주방 쪽에서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들렸다.회색 티셔츠를 입은 윤재혁이 도마 앞에 서 있었다.식탁에는 달걀과 샐러드, 과일이 준비돼 있었다.소이는 주방 입구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뭐 해요?”윤재혁이 고개를 돌렸다.“깼습니까?”“네.”“몸은 괜찮고요?”“어깨가 조금 뻐근해요.”그의 시선이 즉시 소이의 어깨로 향했다.“어디가 불편합니까?”“밤새 일하고 소파에서 세 시간 자고, 여기서 또 잤으니 당연한 거예요.”“진통제 필요합니까?”“의사 말고 남자 친구처럼 물어봐요.”윤재혁은 칼을 내려놓고 소이에게 다가왔다.“많이 아픕니까?”“아니요.”“마사지해 줄까요?”소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해 본 적 있어요?”“해부학적 구조는 압니다.”“그건 믿음이 더 안 가는데요.”그의 손이 소이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여깁니까?”“조금 아래요.”윤재혁이 손가락으로 굳은 부위를 눌렀다.생각보다 정확한 위치였다.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소리를 냈다가 입을 다물었다.그의 손이 바로 멈췄다.“아픕니까?”“시원해서 그런 거예요.”“계속해도 됩니까?”“네.”소이는 그의 가슴 쪽으로 등을 기대었다.따뜻한 손이 목 아래부터 어깨를 천천히 눌렀다.“전시회 갈 수 있겠습니까?”“당연하죠.”“피곤하면 가지 않아도 됩니다.”“그 말 하면서 예약 시간 계속 확인했죠?”윤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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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1화. 두 번째 데이트의 조건두 번째 데이트는 세 번이나 미뤄졌다.첫 번째는 한소이의 응급외과 당직이 길어졌고.두 번째는 윤재혁의 수술이 예상보다 늦게 끝났으며.세 번째는 약속 장소로 출발하기 직전, 소이가 맡은 환자에게 갑작스러운 복통이 발생했다.“이번 주도 어렵겠네요.”금요일 밤 열한 시.한소이는 의국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윤재혁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CT 확인했고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은 아닙니다. 밤새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아요.”“그럼 병원에 남습니까?”“네.”소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왜 사과합니까?”“내일 아침부터 만나기로 했잖아요.”두 사람은 토요일 하루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오전에는 전시회를 보고, 점심은 소이가 고른 식당에서 먹고, 저녁에는 윤재혁의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수술 일정과 당직표를 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만든 계획이었다.“환자가 아픈 건 한소이 씨 잘못이 아닙니다.”“그래도 재혁 씨는 내일 휴일까지 바꿨잖아요.”“다음에 또 바꾸면 됩니다.”“실망 안 했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예전의 윤재혁이었다면 괜찮다고만 대답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싫은 것도 말하기로 했다.“실망했습니다.”소이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갔다.“역시 그렇죠?”“많이 기대했습니다.”“미안해요.”“하지만 소이가 환자를 두고 나오는 건 더 싫습니다.”윤재혁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러니까 실망한 것과 소이를 탓하는 것은 별개입니다.”소이는 말없이 휴대전화만 조금 세게 잡았다.이 사람은 여전히 정답처럼 말할 때가 있었다.다만 이제는 그 정답 안에 자신의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재혁 씨.”“네.”“병원으로 올래요?”“지금요?”“데이트는 못 해도 같이 야식은 먹을 수 있잖아요.”“근무 중 아닙니까?”“환자 검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 삼십 분 정도는 괜찮습니다.”전화기 너머
# 60화. 맞선은 근무 외입니다 [본편완결]이정훈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수술 다음 날 오후였다.진정제를 줄이자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한소이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정훈 환자분,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환자의 눈이 힘겹게 열렸다.초점이 흔들리던 시선이 소이의 얼굴에 멈췄다.기관 삽관 때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는 말에는 약하게 반응했다.“수술은 끝났습니다.”소이는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설명했다.“배 안에서 출혈이 많았고 비장이 크게 손상돼 제거했습니다. 지금은 출혈이 멈췄고 혈압도 안정되고 있습니다.”이정훈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아내분과 아드님도 병원에 와 계십니다.”그 말을 듣자 환자의 눈가가 붉어졌다.손이 무언가를 찾듯 움직였다.소이는 그 손을 잡았다.“아드님도 무사히 집에 돌아갔습니다.”환자의 손가락이 소이의 손을 힘없이 눌렀다.“약속을 못 지킨 게 아니라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아드님도 알고 있습니다.”이정훈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모니터의 숫자는 안정적이었다.이번에는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가족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긴장을 놓은 얼굴이었다.중환자실 밖으로 나오자 보호자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이 깨어났습니까?”“간단한 지시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치가 유지되면 호흡관도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남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 소매로 눈을 닦았다.“아빠가 저 때문에 다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환자분께는 학생이 무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소이는 아이의 앞에 앉았다.“학생도 아버님을 만나면 꼭 말해 주세요. 사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요.”남학생이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아버님이 회복하시면 직접 말씀드리세요.”그날 저녁 이정훈은 호흡관을 제거했다.처음 나온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우리 아들은요?”침대 옆에 있던 아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