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 씨!”“하...그만 하세요...”“음...음...”방에서는 부끄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다행히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알파카 두 마리가 침실 주위를 맴돌며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침대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고 있었지만, 옷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양시연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셔츠의 단추는 풀어졌고 속옷도 흐트러져 있었다.양시연은 한 손으로 흘러내리려는 셔츠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연정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연정훈의 힘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연정훈의 오른손은 지금 순간 악행을 벌이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철저히 지배당했다.미세한 소리가 양시연을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온몸에 퍼지는 쾌감은 그녀로 하여금 삶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게 했다.양시연은 한 송이의 꽃처럼 연정훈의 지배하에 천천히 피었다.‘기분이 좋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어깨에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천천히 양시연의 주의를 흩트렸다. 연정훈의 움직임은 그녀가 자극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았고 흐릿해진 시선은 초점을 잃은 듯했다.연정훈은 갑자기 멈췄다.양시연은 가볍게 소리를 냈다.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만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누우라고 하고 무릎으로 고정하자 그녀의 그녀의 다리가 살짝 벌어졌다.연정훈이 셔츠를 벗는 모습을 보자 양시연은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는 다시 입맞춤을 시작했다. 양시연의 손을 잡은 채 연정훈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밀치며 말했다. “안돼요! 정훈 씨, 그만 멈춰요!”‘멈추라니!’연정훈은 양시연이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스스로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양시연의 손을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양시연은 눈을 꼭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그런데 다음 순간 가슴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양시연이 피하려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양시연은 힘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우리 집에 가서 뭐 하시려는 거예요?”“청혼 하려고.”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가세요. 엄마 집에 있어요.”‘엄마가 정훈 씨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9시 정각에 너희 집에 갈게.”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망설였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괜히 걱정되었다.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양지원이 있으니 연정훈이 간다고 한들 좋은 일이 생길 리 없었다.‘흥.’연정훈은 욕실로 가서 욕조에 물을 채운 뒤 다시 침대 옆으로 와 양시연을 자연스럽게 안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이 귀찮았다.“집에 가서 씻을게요!”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속으로 미칠 것 같았다.지금은 그와 다툴 기운도 없고 끈적거리는 몸이 너무 불편했다. 연정훈은 아까 끝까지 하지 않았으니 욕실에서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욕실 문이 닫히자 양시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세요. 씻을 거예요.”연정훈은 대답 대신 그녀를 욕조 안으로 들어 올렸다.“내가 씻겨줄게.”그는 수건을 그녀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올렸다.“난....”연정훈은 샤워 헤드를 켜서 부드러운 물줄기를 양시연의 땀에 젖은 얼굴 위로 흘렸다.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아. 정훈 씨는 정말 귀가 먹었나? 점점 더 짜증 나네!’그러나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따뜻한 물과 섬세한 손길로 그녀를 조심스레 씻겨주었다.몸에 닿는 적당한 힘과 온기에 그녀는 점점 졸음이 밀려오는 듯했다.눈을 반쯤 감은 채 참지 못하고 물었다.“정훈 씨, 혹시 몇 년 동안 마사지 샵에서 근무했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밤새 그들은 엉뚱한 대화를 이어가며 얼떨결에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양시연은 이불을 모두 차지했고 연정훈은 화내는 대신 다른 이불을 꺼내 덮었다.밤은 고요했고, 양시연은 술에 취한 몸이 한층 편안해지며 달콤한 잠에 빠져
양씨 가문의 저택 앞 작은 마당까지 호화로운 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양시연은 조심스럽게 세어보았다. 적어도 열 대 이상의 차량이 있었다. 각 차의 트렁크는 모두 열려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모든 짐은 집 안으로 옮겨진 듯했다.양옆에 서 있는 경호원들은 위압감을 자아냈다.‘무슨 일이야? 큰 인물이 양석진 씨를 방문하기라도 하는 건가?’그녀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집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테이블 위에는 온갖 선물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고 바닥에도 선물 꾸러미가 가득했다.몇몇 아주머니들이 선물을 정리하려 분주히 움직였지만,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분위기였다.“여 아주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여 아주머니는 양지원이 어릴 적부터 돌봐온 보모로 양씨 가문에서 오래도록 일해온 사람이었다.그녀는 양시연의 질문을 듣고 잠시 손을 닦으며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위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양시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계단을 올려다보았다.‘연정훈 씨?!’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나비 앞에 몸을 가리며 섰다.나비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천진난만하게 바라보았다.‘안녕, 아빠.’양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나비의 머리를 살짝 눌러 자리에 앉혔다.연정훈은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포멀한 복장이었다.서서히 계단을 내려오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양시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정훈 씨,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예요?”연정훈은 계단 중간에서 잠시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어제 너한테 말했잖아.”양시연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머릿속에서 떠올리려 했다.‘청혼?!’그녀는 즉시 긴장하며 집 안의 물건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이놈이 감히...!’양시연은 급히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양지원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내려온 사람은 양홍두였다.양홍두는 연정훈에 대해 항상 좋은 인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연정훈의 능력과 미래를 높이 평가했고 인품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
“표세연 씨! 당신 아들이 연씨 가문의 재산을 전부 털어가고 있어요. 요양 자금을 다 날리고 싶지 않으면 빨리 물건이나 가져가세요!”양씨 가문의 양지원이 처음으로 전화 속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그 반대편 표세연은 거실에 앉아 무표정하게 전화를 들고 있었다.표세연이 원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연정훈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말릴 수 없었다.거기에 세운의 그 여자는 문제가 터졌을 때 누구보다 신이 나더니 이제 와서 자기 차례가 되자 세운에서 나오지도 않고 양시연의 신분을 의심하며 양씨 가문과의 관계를 꺼리기까지 했다.‘문제가 있다. 분명히 문제가 있다.’표씨 가문은 이렇게 복잡한 일이 없었는데, 연정훈은 미친 짓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연정훈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성격 때문이었다.“지원 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듣고 싶지 않아요! 당장 물건이나 가져가세요!”표세연은 차분히 침묵했다.“...”그는 큰 잔에 차를 가득 따르며 천천히 말했다.“예전에는 내 잘못이 있었지만, 그게 연정훈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정훈이는 절대 시연이가 출신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람을 깔본 건 나였지 내 아들은 아니에요.”양지원은 비웃듯 되물었다.“...연정훈이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고요? 연정훈은 단지 예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마음이 흔들린 것뿐이죠!”“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표세연은 서둘러 아들을 변호하며 급히 덧붙였다.“소현주 일도 제 잘못입니다.”양지원은 조용히 쏘아붙였다.“소현주랑 표세연 씨가 사귀었어요?”양지원이 비꼬듯 말했다.“그건 아니죠...”표세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비위를 맞췄다.“당시 내가 사람을 보냈었어요...”...아래층에서 들리던 양지원의 목소리는 점차 부드러워졌다.한편 양시연은 침대에 엎드려 나비와 함께 과자 한 봉지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정상적이지 않은 연정훈 씨랑 같이 지내면서 그동안 참 힘들었을 거야.”나비는 과자를 천천히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응?”양시연은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정색하며 물었다.“연정훈 씨, 혹시 무슨 숨겨진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양지원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딸과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연정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그러게 말이다.”양지원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제정신이 아니니까 미친 듯이 너와 결혼하려고 하는 거겠지.”양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은 나비를 만지작거렸고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감동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단순한 허영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양시연은 스스로 생각했다.연정훈이 아니라도 권력 있고 우수한 누군가가 이렇게 간절히 다가왔다면 양시연은 비슷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양지원은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딸의 입에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네 마음은 어떠니?”양시연은 눈길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했다.“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진심이니?”“그 사람 요즘 너무 성가셔요.”양지원은 한동안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그래도 결국은 네 선택이지.”양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양시연에게 자기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거울을 하나 건네주고 싶었다. 그녀가 성가신 건지 아니면 부끄럽고 화가 난 건지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뜻에서였다.양지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혁수는 아마 희망이 없겠구나.’양시연은 옆으로 다가가 양지원을 살며시 껴안으며 작게 말했다.“저 정말 지금 결혼할 생각 없어요. 집에 온 건 뭔가 제대로 해보려고 결심한 거예요.”양지원은 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아니에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딸이 아니라면 연정훈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아예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양지원은 단호히 말했다.“‘만약’
정인 그룹에서.연정훈은 방금 부승원을 배웅하고 돌아왔다.부승원은 초안을 훑어본 뒤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안 되겠다. 너희 엄마한테 부탁해서 무당이라도 불러야겠어. 넌 귀신 들린 게 틀림없어.”정인 그룹의 규모를 생각하면, 최대 주주의 변경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연씨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상업에서 쌓아온 자산을 고작‘혼수’로 내놓는다니 이건 완전히 풋내기나 할 법한 무모한 짓이었다.게다가 상대방이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굴욕적이었다.비서실장은 연정훈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충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춘 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연정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서랍 깊숙한 곳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이 반지는 예전에 양시연이 그에게 돌려보낸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지를 들고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조심스레 반지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연정훈은 미친 게 아니고 단지 처음으로 자신감이 부족했을 뿐이었다.그래서 서둘러 승부수를 던졌다. 양시연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고 싶었다.양시연은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겨 있었다.양혁수는 양시연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연정훈은 자신에게 뚜렷한 강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양시연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을 품을 때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 후에는 매일 그녀와 함께하며 부족했던 부분을 채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연정훈은 책상으로 돌아와 만약 양시연이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하기 시작했다.양시연은 늘 그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적했지만, 정작 연정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양시연이 거절할 때마다 연정훈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고, 그는 그저
“반우희는 주스를 마시며 물었다.“부승희 씨, 연 대표님 편을 안 들어주시나요?”부승희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저는 항상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이에요. 이치에 맞는 걸 도울 뿐 가족 편은 들지 않죠.”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역시 부승희 씨다!’“그런데 말이에요.”부승희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양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네가 연정훈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이제 연정훈을 안 좋아해서야? 아니면 연정훈에 대한 앙금 때문이야?”양시연은 잠시 망설였다.그때 반우희가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재빨리 끼어들었다.“2초 이상 망설였어요!”부승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승희는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멈췄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생각 중이었어요.”“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먹으며 천천히 말했다.“너무 오랫동안 연애 문제를 멀리하다 보니 조금 서툴러졌나 봐요.”부승희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군요.”양시연은 헛기침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반우희는 털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아직 조금은 좋아하지만, 그렇게 많이 좋아하진 않는 거죠. 앙금도 조금은 있지만, 굳이 앙갚음할 마음은 없어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반우희는 자신만만하게 양시연에게 물었다.“제 말이 맞죠. 양시연 언니?”양시연은 말없이 달콤한 수프를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많이 먹어. 이거 맛있어.”“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음식을 맛보았다.“사실 이해는 가요. 전 애인이 쫓아오면 누구라도 망설이겠죠.”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물었다.“이승우가 승희 씨한테 다시 대시하면 받아줄 거예요?”부승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양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
“됐거든요.”양시연이 숟가락을 쥐고 낮게 중얼거렸다.“돈이 많으니까 돈으로 날 사려는 것 같아요. 누가 누구를 잡아두는 건지도 모를 일이죠.”“오늘 아침이었어요.”그녀는 말하다가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우리 집에 선물 잔뜩 들고 와서 청혼한다고 하더니 내 앞에서는 여전히 뻔뻔하게 굴더라니까요.”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반박했다.“뻔뻔하다고 해서 초조하지 않다는 건 아니죠!”양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초조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요.”부승희는 양손을 뻗으며 말했다.“안 초조했으면 천천히 시연 씨를 설득했겠죠. 이렇게 대대적으로 단기전으로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양시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연정훈의 행동이 분명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부승희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잠깐만! 부승희 씨, 너 뭔가 스파이 같은 느낌이 있어요.”반우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뭔가 수상해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연정훈 씨한테 뭔 얘기 듣고 날 부른 거 아니죠?”부승희는 의자를 바짝 당기며 허리를 곧게 펴더니 말했다.“무슨 소리예요. 난 그냥 옛 친구가 그리워서 온 거라고요!”부승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생각이 너무 많아졌네요. 역시 신분이 달라지더니 우리 같은 가난한 친구들은 다 의심부터 하네요.”양시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희는 양시연이 믿지 않는 걸 보자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며 말했다.“봐요. 직접 확인해요. 나랑 연정훈이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정말 한참 전이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이 굳이 확인하지 않을 거라 속으로 확신했다.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막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면 연정훈과의 카톡 채팅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