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분명 자신이 한 말인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과 달리 우진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도희가 지금 당장 저 문을 나서면 정말 붙잡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열어둔 현관문 너머로 익숙한 마당이 보였다. 도희가 몇 걸음만 내디디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십칠 년 전에도 그랬다. 잠깐이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왔을 때 도희는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까 봐 두려웠다.
그래도 그래야만 했다.
어젯밤 처음으로 그녀를 보내기 싫다고 생각했으니까.
우진이 애써 웃었다.
“대신….”
“…?”
“안 갔으면 좋겠어요.”
현관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우진이 집을 나선 뒤에도 도희는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몇 걸음이면 됐다. 마당을 지나 저 길로 나가면 정말 끝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도희가 문턱 가까이 다가갔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며칠 동안 창문 너머로만 보던 바깥이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됐다.
그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청해도 됐고, 경찰에 신고해도 됐다. 자신은 결혼식장에서 납치된 사람이었다. 돌아가야 할 이유라면 차고 넘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희가 뒤를 돌아봤다.
조용한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낯설었던 곳이었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고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문이 열리자 오히려 망설이고 있었다.
“미쳤나 봐….”
도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가지 않았다.
-
몇 시간이 지나 우진이 돌아왔다.
현관 앞에 차를 세우고도 한동안 내리지 못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은 금방 고요해졌다. 우진은 운전대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집을 바라봤다.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없어야 했다. 자신이 직접 나가라고 했으니까. 그런데도 문을 여는 손이 떨렸다.
도희가 정말 떠났다면 그건 자신이 바라던 일이었다. 사랑 보육원에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강인구에게도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차에서 내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우진은 천천히 현관 앞에 섰다.
닫혀 있는 문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혹시나.
말도 안 되는 기대가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우진이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여는 손이 떨렸다.
철컥.
우진이 그대로 굳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도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도희가 그곳에 있었다.
“왜….”
도희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안 갔어요?”
우진의 입에서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정말 가지 않은 도희를 보자 우진은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십칠 년 전에는 돌아왔을 때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있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우진은 한동안 현관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착각하지 마요.”
“….”
“당신을 믿어서 여기 남은 게 아니에요.”
우진의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억 때문에요.”
“기억이요?”
“내가 당신한테 가라고 했던 거. 당신이 나를 도희라고 불렀던 거. 그 오르골이랑 곡까지.”
도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역시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변명하듯 설명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나가지 않았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자신은 우진을 믿는 게 아니었다.
아직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
“그게 뭔지 알아낼 때까지만 여기 있을 거예요. 한쪽만 알고 있는 거, 불공평하니까….”
괜히 말끝을 흐리는 도희에 우진은 작게 웃었다.
“그래도…. 안 갔네요.”
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진도 더 묻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돌아왔는데, 도희가 있었다.
우진이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도희의 시선이 곧장 문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너무 자주 들었던 소리였다. 그때마다 문은 자신을 집 안에 가두는 벽이 되었다.
“잠근 거 아니죠?”
우진은 신발을 벗다 말고 그녀를 바라봤다.
“확인해봐요.”
도희가 정말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잠깐 망설였다. 며칠 동안 수도 없이 잡아당겼던 손잡이였다.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이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철컥.
문이 너무 쉽게 열렸다.
바깥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도희는 열린 문 너머를 감상하듯 쳐다봤다.
마당도, 그 너머의 길도 그대로였다.
이제 정말 어디든 나갈 수 있었다.
도희가 이내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진의 시선이 묘하게 흔들렸다.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얼굴이 아닌데.”
“그럼 어떤 얼굴인데요?”
도희가 빤히 우진을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웃다가도 순식간에 굳었고, 차갑게 굴다가도 자신을 바라볼 때면 이상할 정도로 약해졌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럼 됐네요.”
우진이 신발을 벗었다.
그제야 도희는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했다.
“그건 뭐예요?”
“저녁거리요.”
“사 왔어요?”
“네.”
“내가 있을 줄 알고?”
우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도희도 말을 뱉고 나서야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저녁거리는 왜 두 사람 몫일까.
자신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저녁거리는 왜 두 사람 몫일까.도희는 식탁 위에 놓인 장바구니를 내려다봤다.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 문을 열고 있었다. 마치 조금 전의 대화는 이미 끝난 일이라는 듯했다.
“강우진 씨.”
“네?”
“아까 저 보내주려고 했던 거 맞아요?”
우진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랬잖아요.”
“그럼 이건 뭐예요?”
도희가 장바구니를 가리켰다.
“저녁거리요.”
“그건 저도 알아요.”
“….”
“제가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두 사람 먹을 걸 사 왔어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냉장고 안에 넣으려던 우유를 다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혼자 먹으려고 했을 수도 있죠.”
“그럼 두 접시 다 혼자 먹으려고요?”
도희의 말에 우진이 장바구니 안을 내려다봤다. 잠시 후, 그가 작게 웃었다.
“많이 먹는 편이라.”
“장난하지 마요.”
웃음이 사라졌다. 도희는 자신이 왜 이 질문에 이렇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보내주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진짜 보내줄 생각이었으면….”
말끝이 흐려졌다.
우진이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도희는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더 묻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듣는 순간,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에 이름이 붙을 것 같았다.
우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아무거나요.”
“그럼 파스타?”
“또요?”
“싫어요?”
도희는 대답 대신 의자에 앉았다. 우진이 냄비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식탁 위에 놓인 우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우진은 화면을 확인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도희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
“무슨 일 있어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희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저녁 메뉴를 묻던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라져 있었다. 도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봉투로 향했다. 혼자 먹을 양이라고 하기에는 많았다.
우진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봉투를 내려다봤다.
“습관인가 보죠.”
“무슨 습관이요?”
“두 사람 거 사는 거.”
“우리가 같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습관이 생겨요?”
“….”
대답하지 못하는 우진을 보며 도희가 작게 웃었다. 저렇게 곤란한 얼굴을 하는 걸 보면 거짓말이 분명했다.
“거짓말 진짜 못하네요.”
“잘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납치범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진이 피식 웃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저런 웃음조차 불쾌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도희는 잠시 그 사실을 생각하다가 애써 무시하며 우진이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 들었다.
“뭐 사 왔어요?”
“이것저것.”
도희가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채소 몇 가지와 고기, 간단한 식재료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주황색이 눈에 들어왔다.
도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당근도 있어요?”
우진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그 반응이 너무 빨라 도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싫어하나 봐.”
“그걸 왜 샀지.”
“먹어야 어른 된다면서요.”
우진이 봉투 안의 당근을 못마땅하게 째려봤다.
“이미 어제 충분히 컸어요.”
“하루 만에?”
“네.”
“축하해요.”
도희가 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진은 곧바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자신이 더는 그녀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희는 너무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내일도 이곳에 있을 사람처럼.
“강우진 씨.”
“네?”
“이거 뭐 해 먹으려고 산 거예요?”
우진이 뒤늦게 주방으로 향했다.
“아무거나요.”
“또 아무거나.”
“그럼 도희 씨 먹고 싶은 거.”
“내가 물어봤잖아요.”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도희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같이 사는 사람이 피곤한 거예요.”
우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도희도 냉장고에 채소를 넣다 말고 멈췄다.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
“….”
묘한 침묵이 주방을 채웠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도희였다.
“아니, 같이 산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알아요.”
“납치돼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있는 거니까.”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기억 알아내면 바로 나갈 거예요.”
“네.”
“진짜예요.”
“알았어요.”
대답은 너무 쉬웠다. 붙잡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도희는 괜히 기분이 상했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몰랐다.
조금 전까지 분명 우진을 믿어서 남은 게 아니라고 선을 그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기억만 알아내면 나가겠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진이 순순히 받아들이니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희는 냉장고 문을 조금 세게 닫았다.
쾅.
우진이 눈을 깜빡였다.
“근데 왜 기분 나쁘지.”
“뭐가요?”
“몰라요.”
정말 몰랐다.
도희가 우진을 지나쳤다.
우진은 그런 그녀를 돌아보다 작게 웃었다.
그러다 열린 현관문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조금 전 도희가 직접 닫은 문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든 재차 열 수 있었다.
어제까지와 똑같은 집이었다. 같은 소파가 있었고, 같은 식탁이 있었고, 같은 방문이 있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 이곳에 자신이 가둬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가둬둔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진은 그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무서웠다.
잡아두었을 때는 언젠가 놓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자유롭게 해주고, 자신은 사라지면 그만이라고.
그게 도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스로 남은 사람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이미 한 번,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다.
도희는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그제야 현관 쪽을 바라봤다. 신발이 없었다.“설마….”창밖을 확인했다. 늘 세워져 있던 우진의 차도 사라지고 없었다.도희의 얼굴이 굳었다.“안 간다며.”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안 간다며, 진짜….”또였다.십칠 년 전에도 그랬다.가지 말라고 했다. 우진은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두고 가버렸다.화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그날처럼 우진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아니, 이번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진이 사라질 것 같았다.도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그 순간 희미한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산길. 커다란 운동화.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조금만 더 가면 돼.’어린 우진이 앞에서 자신을 끌어주고 있었다.도희가 눈을 떴다.“…길.”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냐고요.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도희가 다시 물었지만 우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그때였다.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우진의 휴대전화였다.화면을 확인한 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도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짧은 문자 하나가 떠 있었다.[내일, 그 오두막.]도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두막.불과 몇 분 전까지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던 장소였다. 십칠 년 전, 자신과 우진이 함께 도망쳤던 곳. 그리고 자신이 사라졌던 곳.“누구예요?”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만으로 충분했다.“그 사람이에요?”“….”“선생님?”“도희 씨.”“맞죠?”우진은 끝내 부정하지 않았다. 도희는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봤다.“내일이면… 내일 가라는 거잖아요.”“….” 
도희가 그를 바라봤다.“제가요?”“네.”우진은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아무리 찾아도 없었어요.”산 아래에서 약을 구해 올라왔을 때 오두막 문이 열려 있었다. 우진은 처음에는 도희가 밖에 나간 줄 알았다.“도희야.”대답이 없었다.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불은 흐트러져 있었고, 도희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도희야!”밖으로 뛰쳐나갔다. 주변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나무 뒤도 보고, 산길도 내려다봤다. 목이 쉴 때까지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도희야!”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현재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꼭 그날로 돌아간 사람 같았다.도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가.”우진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어요.”“….”“도희 씨 목소리.”도희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직 듣지도 않았는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희도 재촉하지 않았다.창밖에서는 어느새 비가 완전히 그쳐 있었다. 처마 끝에 맺힌 빗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조용한 거실을 채웠다.“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한참 뒤 우진이 입을 열었다.“처음부터요.”도희가 말했다.“내가 기억 못 하는 데부터.”우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결국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우리는 사랑 보육원에서 같이 지냈어요.”도희의 손끝이 멈췄다.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직접 듣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같이… 얼마나 오래요?”“몇 년.”“친했어요?”우진이 아주 작게 웃었다.“도희 씨는 저를 오빠라고 불렀어요.”“….”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오빠.며칠 전 갑작스럽게 떠올랐던 목소리가 또 머릿속을 스쳤다.자신의 목소리였다.어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젖은 옷부터 갈아입었다.먼저 거실로 나온 건 우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희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머리는요?”우진의 말에 도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어서 젖은 머리는 그대로였다. 긴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말리면 되죠.”“그러다 감기 걸려요.”“누가 할 소리.”도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비를 두 시간씩 맞고 있던 사람이.”우진은 대꾸하는 대신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마른 수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앉아요.”“왜요?”“머리 말려줄게요.”“됐어요. 내가 할 수 있어요.”도희가 수건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우진은 순순히 내어주지 않았다.“찾으러 나왔다가 다 젖었잖아요.”“그건 내가 알아서 나간 거고.”“그러니까 제가 알아서 미안해할게요.”
철컥.문이 열렸다.차가운 바람과 함께 빗물이 안쪽으로 들이쳤다. 도희는 문턱 앞에 멈춰 섰다. 지금 나가면 정말 끝이었다.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됐다. 강우진이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십칠 년 전 자신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모르는 채 살아도 됐다.그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그런데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금방 올게요.’마지막으로 봤던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금 전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그리고 집 앞에서 ‘선생님’을 발견했을 때의 얼굴. 겁에 질려 있던 얼굴이었다.도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다.그런데 만약 우진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미쳤나 봐.”도희는 현관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하지만 향한 곳은 경찰서도, 사람들이 있는 큰길도 아니었다.현관 한쪽에 세워져 있던 우산을 집어 들었다.철컥.문이 열렸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도희는 열린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처마 너머로 빗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