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거실은 조용했다.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진은 한숨을 쉬며 방에서 나왔다.
“…!”
우진의 눈이 커졌다. 주방에서 물컵을 가지고 나오는 도희와 마주쳤다. 우진은 저도 모륵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눈알을 굴렸다.
도희가 우진의 얼굴을 살폈다. 눈 주변이 빨개져 있었다.
우진은 빠르게 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먹어야죠.”
“….”
도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쳐다봤다.
우진이 냉장고를 열었다. 한참이나 안을 들여다보더니 계란이며 채소 따위를 꺼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울었어요?”
질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날카로운 도희의 물음에 우진의 손이 멈췄다. 들키기 싫었는데. 애초에 들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닌데.”
“눈 빨개졌는데.”
“피곤해서 그래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괜히 우겨봤지만 소용 없었다.
도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더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내가 할게요.”
“뭘요?”
“저녁.”
이번에는 우진이 놀란 듯 도희를 응시했다.
“그냥요. 피곤하다면서요.”
도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냉장고에서 재료를 하나씩 꺼냈다.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우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잘 커서 다행이라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들어가 있어요. 감사할 거 아니면.”
도희가 우진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도희가 주방을 둘러봤다.
-
“저녁 먹어요.”
우진이 식탁에 앉았다.
“카레 싫어해요? 있길래 했는데.”
“아니요, 좋아해요.”
그렇게 말한 것치고 우진의 숟가락은 꽤 분주했다.
밥을 한 숟갈 뜨고, 그 위에 얹힌 당근만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한 번.
두 번.
도희가 그 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다가 물었다.
“뭐해요?”
“뭘요?”
“당근 왜 골라내요?”
우진이 숟가락 끝에 걸린 당근을 내려다봤다.
“싫어해서요.”
“다 큰 어른이 편식도 해요?”
핀잔처럼 던진 말이었다.
접시를 내려다보던 그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요.”
“….”
“난 아직 어른이 덜 됐나 봐요.”
도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근 몇 조각 때문에 하기에는 이상한 말이었다.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요.”
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열네 살에는 어른이 되기만 하면 모든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도희를 데리고 나올 수도 있고, 지켜줄 수도 있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수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서른하나가 된 지금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강인구가 무서웠고, 여전히 도희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우진은 골라낸 당근 하나를 숟가락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입에 넣었다.
“싫으면 먹지 마요.”
“아니에요.”
우진이 꾸역꾸역 씹으며 말했다.
“먹어야 어른 되죠.”
자정이 지난 시각. 우진이 도희의 방으로 들어왔다.
도희는 곤히 자고 있었다.
우진은 침대 곁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잠든 얼굴은 어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우진은 문득 일기장에 적혀 있던 여름날을 떠올렸다.
꽃집을 하고 싶다던 열두 살짜리 아이는 정말 꽃을 다루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꽃은 여전히 같은지, 무엇을 먹을 때 가장 행복한지, 힘들 때 누구를 찾았는지도.
십칠 년은 생각보다 길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도희와 지금 눈앞에 있는 도희 사이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우진은 줄곧 자신이 도희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열네 살의 자신은 어른이 되면 도희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자신이 한 짓은 도희를 납치해 이곳에 가둔 것이었다.
우진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하나도 못 컸네.”
잠든 도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이불의 끝을 끌어올려 주었다.
이번에는 꼭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만큼은 지켜야 했다.
강인구에게 했던 약속과는 달리, 이것은 누구에게 강요받는 것도 아니었다.
도희가 안전해지면 보내줄 것이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자신이 없는 곳으로.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저렸다.
우진은 한참 동안 도희의 얼굴을 살폈다.
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다음 날 아침.
시끄러운 소리에 도희가 눈을 떴다. 벽시계를 보니 오전 7시 15분이었다.
“뭐해요?”
우진이 현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드릴 소리가 요란했다.
“잠금장치, 풀었어요.”
“갑자기 왜….”
“글쎄요.”
우진이 드릴을 내려놓았다.
“근데 난 도희 씨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희가 말없이 그를 빤히 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우진이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이번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문이 순순히 열렸다.
아침 햇살이 열린 문틈으로 길게 들어왔다.
“이제 나갈 수 있어요.”
“….”
“나가고 싶으면 나가요.”
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잡지 않을게요.”
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네가 저놈이랑 도망쳤다가 잡혀갔더구나.”순간 머릿속에 끊어졌던 기억이 스쳤다.오두막. 거칠게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던 손. 그리고 멀리 서 있던 어린 우진.‘오빠 도망가!’도희가 숨을 삼켰다.그날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감각이 아직도 팔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우진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희는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몸이 뒤로 끌려갔다.그 뒤의 기억은 여전히 흐릿했다.“원장님이… 나를 데려간 거예요?”“그래.”“그럼 당신은요?”도희가 물었다.“그때 어디 있었는데요?”강인구의 시선이 우진에게 향했다.“여기.”“….”“네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강우진 옆에.”우진의 얼굴이 굳었다.강인구가 희미하게 웃었다.“도희를 찾아주겠다고 했지.”도희가 우진을 돌아봤다.십칠 년 전
도희는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그제야 현관 쪽을 바라봤다. 신발이 없었다.“설마….”창밖을 확인했다. 늘 세워져 있던 우진의 차도 사라지고 없었다.도희의 얼굴이 굳었다.“안 간다며.”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안 간다며, 진짜….”또였다.십칠 년 전에도 그랬다.가지 말라고 했다. 우진은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두고 가버렸다.화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그날처럼 우진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아니, 이번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진이 사라질 것 같았다.도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그 순간 희미한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산길. 커다란 운동화.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조금만 더 가면 돼.’어린 우진이 앞에서 자신을 끌어주고 있었다.도희가 눈을 떴다.“…길.”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냐고요.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도희가 다시 물었지만 우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그때였다.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우진의 휴대전화였다.화면을 확인한 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도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짧은 문자 하나가 떠 있었다.[내일, 그 오두막.]도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두막.불과 몇 분 전까지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던 장소였다. 십칠 년 전, 자신과 우진이 함께 도망쳤던 곳. 그리고 자신이 사라졌던 곳.“누구예요?”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만으로 충분했다.“그 사람이에요?”“….”“선생님?”“도희 씨.”“맞죠?”우진은 끝내 부정하지 않았다. 도희는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봤다.“내일이면… 내일 가라는 거잖아요.”“….” 
도희가 그를 바라봤다.“제가요?”“네.”우진은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아무리 찾아도 없었어요.”산 아래에서 약을 구해 올라왔을 때 오두막 문이 열려 있었다. 우진은 처음에는 도희가 밖에 나간 줄 알았다.“도희야.”대답이 없었다.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불은 흐트러져 있었고, 도희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도희야!”밖으로 뛰쳐나갔다. 주변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나무 뒤도 보고, 산길도 내려다봤다. 목이 쉴 때까지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도희야!”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현재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꼭 그날로 돌아간 사람 같았다.도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가.”우진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어요.”“….”“도희 씨 목소리.”도희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직 듣지도 않았는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희도 재촉하지 않았다.창밖에서는 어느새 비가 완전히 그쳐 있었다. 처마 끝에 맺힌 빗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조용한 거실을 채웠다.“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한참 뒤 우진이 입을 열었다.“처음부터요.”도희가 말했다.“내가 기억 못 하는 데부터.”우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결국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우리는 사랑 보육원에서 같이 지냈어요.”도희의 손끝이 멈췄다.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직접 듣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같이… 얼마나 오래요?”“몇 년.”“친했어요?”우진이 아주 작게 웃었다.“도희 씨는 저를 오빠라고 불렀어요.”“….”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오빠.며칠 전 갑작스럽게 떠올랐던 목소리가 또 머릿속을 스쳤다.자신의 목소리였다.어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젖은 옷부터 갈아입었다.먼저 거실로 나온 건 우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희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머리는요?”우진의 말에 도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어서 젖은 머리는 그대로였다. 긴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말리면 되죠.”“그러다 감기 걸려요.”“누가 할 소리.”도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비를 두 시간씩 맞고 있던 사람이.”우진은 대꾸하는 대신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마른 수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앉아요.”“왜요?”“머리 말려줄게요.”“됐어요. 내가 할 수 있어요.”도희가 수건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우진은 순순히 내어주지 않았다.“찾으러 나왔다가 다 젖었잖아요.”“그건 내가 알아서 나간 거고.”“그러니까 제가 알아서 미안해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