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아는 일부러 조성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 말을 꺼냈다.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조성우의 얼굴에서는 긴장이나 놀람 같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보니 둘이 미리 짠 게 틀림없었다.‘하나같이 다 못돼먹은 인간들이란 말이지.’하지만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강연찬이 혼자서는 버겁지 않을까 걱정됐는데 이렇게 강력한 동료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안심이 된 것이다.조성우는 곧장 남설아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게 다름 아닌 식당이라는 사실에 남설아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조성우를 바라봤다.“여긴 왜 온 거예요?”“그 믿을 수 없는 남편이 밥도 안 챙겨줄 것 같아서 내가 사주려는 거예요.”조성우는 전혀 머뭇거림 없이 내뱉었다. 둘은 원래부터 대학 동문이었기 때문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가게 안으로 들어선 뒤, 남설아도 마찬가지로 아무 거리낌 없이 메뉴판을 펼치고는 가장 비싼 요리를 골랐다.그리고 메뉴판을 내려놓은 뒤, 살짝 찡그린 얼굴로 조성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불러낸 거 진짜 그냥 밥 사주려고 그런 거예요? 다른 얘기 있는 거 아니고요?”“다른 건 없고 그냥 어떤 사람 덕분에 밥 한 끼 사는 거예요.”조성우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다가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남설아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웃으며 말했다.“원래 저래, 입이 좀 싸거든. 너무 신경 쓰지 마. 진짜 화내면 안 돼.”강연찬이 갑자기 곁에 나타나자 남설아는 잠깐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강연찬의 뺨을 꼬집어봤고 진짜라는 감각이 전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물었다.“회사에서 회의 중 아니었어? 어떻게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야?”“혹시라도 너 혼자서 곤란한 일 겪을까 봐 힘 좀 실어주려고
남설아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하여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뿜을 뻔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성우를 바라봤다.“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돌려 말해요? 설아 씨도 배건 그룹이 쫄딱 망하길 바라고 있잖아요. 우린 그 뒤에 나눠 가질 생각이고요.”조성우는 눈빛에 흥분이 서린 채 웃으면서 말했다.그 모습에 남설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강연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엔 의문이 가득했다.그걸 본 강연찬은 괜히 민망해져서 조성우를 한 대 딱 때리며 투덜거렸다.“말 좀 조심해서 해요, 네?”“내 말이 틀렸어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건 초대형 케이크라고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잖아요?”사무실에 있을 때만 해도 조성우가 이렇게 직설적인 성격인 줄은 정말 몰랐다.남설아는 피식 웃고는 이마를 살짝 두드리듯 하며 말했다.“맞는 말이긴 하네요. 배건 그룹은 지금 확실히 군침 도는 먹잇감이긴 해요. 근데 아시죠? 사업이라는 건 전쟁이에요. 우리가 탐내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노리고 있다는 뜻이죠?”이 말을 듣고 조성우는 상황을 곧장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보니까 우리가 설아 씨를 너무 얕잡아봤던 것 같은데요?”“그쵸. 그렇게 쉽게 다 들키면 재미없잖아요.”이렇게 말하며 남설아는 가방에서 주식 양도 계약서를 꺼냈다.“난 지금 배건 그룹 지분 51% 가지고 있어요. 아직은 이 회사 좀 값어치가 있죠. 내가 두 사람한테 각각 15%씩 넘길게요. 대신 현금으로 주세요. 어때요?”강연찬은 그 주식 계약서를 보는 순간 멍해지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갑자기 왜 현금화하려는 거야? 무슨 일 있어?”“아무 일도 없어. 그냥 돈이 필요해서.”“지금은 배건 그룹이 값어치가 있으니까 이 주식도 돈이 되지만 나중에 회사가 무너지면 이 종이 쪼가리들도 다 쓸모없어지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그때 가
어두운 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이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찍어냈고 곧 서유라는 해당 영상을 전달받았다. 영상은 매우 선명했고 편집이 가해진 티가 분명했다.서유라는 그 영상을 바로 배서준에게 가져갔다.“서준아, 봐. 설아 씨가 배건 그룹 지분을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어!”영상은 교묘하게 앞뒤 내용이 잘려 있었다.서유라는 알고 있었다. 앞부분 내용 따윈 배서준이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걸.하지만 ‘배건 그룹’이라는 단어만큼은 그의 심장을 건드릴 것이 분명했다.배서준은 영상을 본 순간 눈빛이 확 바뀌었고 두 손을 꼭 쥔 채 핏대가 설 정도로 분노를 억누르다 못해 결국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힘껏 던져버렸다. 깨진 조각이 바닥으로 튀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며 그 자리를 떠났다.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흘끗 보고는 냉소를 흘렸다.애정 같은 건 그저 흐릿한 감정에 불과하다. 이 남자에게 진짜 치명적인 건 ‘이익’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번엔 남설아가 제대로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었다.남설아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아침에 자기 방을 청소했던 객실 청소 아주머니를 신고했고 바로 증거 영상까지 함께 제출했다. 그녀가 호텔에서 해고되자마자 남설아는 그 여자가 훔쳐 갔던 USB를 되찾았다.우는 아주머니를 마주하고서도 남설아의 눈빛엔 단 1도 흔들림이 없었다.그녀는 감정에 휘둘리는 성인군자 따위가 아니었다. 누구든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USB를 손에 든 채 방으로 들어서자 문을 열자마자 무거운 기류가 밀려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배서준을 보자 남설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들어왔어요?”“남설아, 이 나쁜년!”배서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다가와 남설아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현관문에 내리찍듯 밀쳤다.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말 그대로 이를 갈고 있었다.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설아야’라는 말 한마디에 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닭살이 다 돋을 정도였다. 믿기 힘든 눈빛으로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어떻게 저토록 혐오스러운 말이 저 입에서 나올 수가 있지?’남설아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싸늘하게 말했다.“내 딸은 죽었어요. 그런데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냥 치기 어린 짓이라고 생각해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죠? 배서준 씨, 그렇게 돈이 많으면 거울부터 좀 사서 보세요.”“알아. 그 아이 일은 네가 마음속에 못 놓는 매듭이란 것도. 근데 아이를 좋아한다면 우리 다시 낳으면 되잖아.”배서준은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지금은 이미 남설아의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에 어떻게든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당연하다는 듯 굴고 있는 배서준을 보며 남설아는 그저 우스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사실 그녀는 배서준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건 오히려 과거의 자신이었다.예전에는 배서준이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결국 그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의 ‘사랑’이 그에게 후광을 씌운 것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사랑이 사라졌고 후광도 함께 꺼졌다. 남은 건 그저 허세만 가득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서준 씨, 지금 당장 나랑 이혼해요. 줘야 할 거 주고 우리 깔끔하게 끝내요.”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남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부어오른 눈 때문에 그녀의 얼굴조차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배서준은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뿌리 깊은 혐오감만큼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이혼 못 해.”배서준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 여자를 어떻게든 떼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요즘의 남설아는 정말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니까.배씨 가문의 아내로 이런 여자가 있다는 건 어디 내놔
바닥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남설아는 다리에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저릿저릿해진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일어서려던 그 순간 문이 갑자기 바깥에서 세게 걷어차이더니 쾅 소리와 함께 열려버렸다.그 충격에 남설아는 한참이나 밀려 나가며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고통에 찬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자 건장한 남자 넷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당신들 누구예요? 뭐 하자는 거예요?!”남설아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 했지만 조금 전의 충격에 스프레이는 이미 멀리 튕겨 나가 있었다. 결국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나무 조각 하나를 움켜쥐며 그녀는 저항하려 했다.하지만 그 네 명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다가왔고 남설아가 쥔 나무 조각을 발로 차서 날려버리더니 곧바로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머리카락이 뽑힐 듯 당겨지며 남설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떻게든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분명 이곳은 5성급 호텔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하늘도 땅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놔요!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불법인 거 몰라요?!”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그러자 남자 중 한 명이 성가시다는 듯 남설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기 직전 남설아는 그들 중 한 명이 내뱉은 거친 욕설을 희미하게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땐, 손과 발이 모두 꽁꽁 묶인 상태였다.한참이나 지나서야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고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누구인지, 목적이 뭔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저 온몸이 아팠고 뼛속까지 피로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남설아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떻게든 좀 편한 자세를 찾아내고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이렇게 대놓고 들이닥친 걸 보니 분명히 배경이 있는 놈들일 테고 당장 죽이지 않았다는 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시간이
남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목숨이 걸린 일에 비하면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이에 굳이 형식 따질 것도 없잖아요.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역시 똑똑하네. 내 이름은 송우민이야. 누가 내게 이 억대 돈을 주면서 네 목숨을 원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널 죽이기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이 말을 하며 송우민은 주머니에서 수표 한 다발을 꺼내더니 남설아 얼굴 쪽으로 그대로 던졌다.하얀 수표들이 눈처럼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고 몇 장은 남설아 눈앞에 닿았다.남설아는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봤다. 수표 하단에 적힌 이름을 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인연이라는 게 끊으려 해도 지저분하게 엮여 있네요. 감방에 들어가면서도 날 끌어들이는 거 보니 진짜 내 좋은 외삼촌 맞다니까.”남설아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눈빛 속에 담긴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여자의 이런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낀 송우민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강제로 얼굴을 들게 했다.“대체 누가 네 목숨을 노리는지 궁금하지도 않아?”“혹시 알고 있어요?”남설아는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진짜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 꽤 멍청한 인간이겠네요.”송우민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잠깐 멈칫했다. 이 여자가 이런 수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는 손을 거둬들이며 무표정하게 옆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를 바라봤다.그러자 ‘기태’라 불리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남설아의 몸에 묶여 있던 줄을 풀어주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순순히 협조해. 안 그러면 진짜로 죽는다?”“믿어요. 한 방이면 제 머리통을 돌아가게 할 힘은 있으시잖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그의 힘을 인정해줬다.전기태는 그간 수많은 인질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유쾌한 인질은 처음이었다.그는 피식 웃으며 송우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다 나가 있어. 이 여자랑 단둘이 얘기 좀 할게
“뭐? 그 자식이 널 안 좋아한다고?”송우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바라보며 이 사람을 상대로 한 게 실수였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아요.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여자가 있어요. 난 그냥 가문에서 정해준 결혼 상대였을 뿐이에요. 원래는 그냥저냥 살려고 했죠. 하지만 내 딸을 죽게 만든 그 일 때문에 더는 용서할 수 없고 절대 가만두지도 않을 거예요!”남설아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단호히 말했다.“송씨 가문을 다시 되찾고 싶다면서요? 그럼 우리 손 잡는 게 어때요?”“손을 잡자고?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송우민은 코웃음을 치며 얼굴에 대놓고 경멸을 드러냈다.바보도 아니고 이 여자가 지금 일부러 말을 끌고 시간을 벌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나 배건 그룹 지분 51% 가지고 있어요. 원하면 다 줄게요.”남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그녀 입장에서 이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았다.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내줄 각오가 돼 있었다.그 말을 들은 송우민은 예상치 못한 정보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결정까지 딱 15분 남았어요.”“곧 누군가 이곳을 포위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나랑 손잡자는 말은 없던 일로 할 거예요.”남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송우민에게 흔들어 보였다.“다음에 납치할 때는 신원조사 꼭 하고 해요. 나 기술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든요. 온몸에 장비 장착하고 다녀요.”“이 시계 안에는 내가 만든 GPS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요. 특수 기능도 하나 있죠. 자동 신고.”이제 놀 만큼 놀았다고 생각한 남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긋 웃었다.자신의 마지막 패를 스스럼없이 공개한 것이었다.그 당당한 표정에 송우민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15분이라... 과연 내가 먼저 포위당할까, 아니면 네가 먼저 내 손에 죽을까?”그 말에도 남설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내 생각엔 그쪽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죽고 싶진 않을 거예요. 나같이 이
“노트북 하나 줘요.”남설아는 울다가 웃은 얼굴로 말했다.사실 처음에 이 프로그램 만들 때는 중간에 해제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설정해 둔 거라 지금 와서 해제하려니 꽤나 번거로웠다.송우민은 별말 없이 부하에게 눈짓해 노트북을 가져오게 했다.남설아는 손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프로그램을 조작했고 결국 5분 안에 경보 시스템을 해제해냈다.그런 다음 송우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실 이 경보 시스템, 꽤 비싸요.”“죽고 싶어?”송우민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남설아는 입만 열면 꼭 사람 속을 긁는 말만 골라서 했다. 거슬리고 짜증 나고 아주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송우민이 진심으로 화난 걸 느낀 남설아는 한숨을 쉬며 작게 말했다.“그럼 우리 이제 자리 좀 옮겨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긴 좀... 애매해서요. 편하지도 않고.”“그래, 따라와.”송우민 역시 이 공간이 다음 대화를 나누기엔 부적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카페에 앉는 순간까지도 남설아는 이게 현실이 맞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자기를 납치한 범인과 이렇게 한자리에서 커피 마시며 대화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 웃긴 상황이었다.커피잔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쉰 남설아는 송우민을 바라보며 물었다.“결국 돈이 목적이에요? 아니면 목숨이에요?”“둘 다.”송우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송가는 배씨 가문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그러니 배씨 가문 역시 똑같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자본의 세계가 피 냄새 나는 법이라는 걸 남설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 답변이 전혀 의외는 아니었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럼 확실히 말해두죠. 그 사람 죽이고 나서는 나 건드리면 안 돼요. 지금 우리는 부부라고는 하지만 껍데기뿐인 관계예요. 곧 남남이 될 거고 나까지 엮이면 안 돼요.”“진심이야?”송우민은 더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말한 게 진심이라는 증거들을 하나둘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
연회장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손님들은 잔을 부딪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수정 샹들리에는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며 연회장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남설아와 강연찬이 연회장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뒤 춤을 추기 시작했다.강연찬은 부드럽게 남설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이끌며 연회장에서 빙그르르 돌았다.남설아의 스텝은 가볍고 우아했으며 마치 나비가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드레스 자락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거리며 활짝 핀 제비꽃처럼 보였다.두 사람의 호흡은 놀라울 만큼 잘 맞았고 모든 동작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그들의 춤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단숨에 연회장의 중심이 되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서준은 남설아의 모습을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강연찬의 품에서 행복한 미소를 띠며 춤을 추는 남설아를 바라보며 설명하기 힘든 질투와 상실감에 사로잡혔다.“서준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서유라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오며 배서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배서준의 달라진 표정을 눈치채고 불쾌함을 느꼈다.“아무것도 아니야.”배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감정을 감추려 애썼다.“서준아, 혹시 아직도 남설아 생각하고 있는 거야?”서유라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말투에는 질투심이 스며 있었다.“아니야.”배서준은 날카롭게 부인했다.“서준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서유라는 약간 서운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네 마음속에 아직 그 여자가 있는 거 알아.”“유라야,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배서준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터무니없는 소리 아니야.”서유라는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며 말했다.“서준아, 혹시 후회하는 거야? 나랑 있는 거 후회해?”“유라야, 그런 거 아니야.”배서준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들며 말했다.“후회하는 건 아니야. 그냥... 머릿속이 좀 복잡해.”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무척 심란했다.“서준
“나는 그냥 여자는 가정에 더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유라는 약간 우쭐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결국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 잘 키우는 게 여자의 본분이잖아.”“유라 씨 생각은 꽤 보수적이네.”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그래? 그럼 설아 씨는 여자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보는 거야?”서유라는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물었다.“여자는 자립심을 가지고 자기 일과 꿈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남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남자에게 의지하거나 남자의 부속품이 되어서는 안 되지.”“설아 씨 생각 참 특이하네.”서유라는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근데 나는 여자가 너무 강한 것도 별로라고 생각하거든.”“강한 게 나쁘고 약한 건 좋은 건가?”남설아가 되물었다.“유라 씨는 자신이 어떤 쪽이라고 생각해?”“나는...”서유라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만해, 유라야. 그만 말해.”배서준이 더는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거고 우리는 그걸 존중해야 해.”“서준아, 나는 그냥...”서유라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배서준이 말을 잘랐다.“됐어, 그만하자.”배서준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우리 저쪽 가보자.”서유라는 배서준이 화가 난 걸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그녀는 남설아를 노려보듯 쏘아보더니 배서준을 따라 자리를 떴다.남설아는 그런 서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서 회장 부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서 회장님, 사모님, 제가 하나 제안해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들어보실 의향 있으신가요?”남설아가 말했다.“오? 무슨 제안인가요?”서기찬이 흥미롭게 물었다.“저는 두 분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습니다.”남설아는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그 프로젝트는...”그녀는 자세하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고 서 회장 부부는 그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남 대표님의 아이디
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배서준과 서유라를 한번 훑고 지나갔다.“정말 우연이네.”“배 대표님, 요즘 회사는 잘 돌아가시죠?”강연찬이 배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럭저럭요.”배서준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다행이네요.”강연찬은 짧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주변 공기가 어색해졌다.“자, 다 같이 한잔하시죠.”서기찬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앞으로의 좋은 협력을 위해!”“건배!”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 마셨다.파티는 계속 이어졌고 남설아와 강연찬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많은 이들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고 함께 협력할 기회를 엿보려 했다.배서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서준아, 무슨 생각해?”서유라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아무것도 아니야.”배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우리 저쪽도 좀 둘러보자.”“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배서준이 도망가기라도 하는 듯 배서준의 팔을 꼭 끼고 있었다.두 사람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지만 끝내 이 열기 속에 어울리지는 못했다.배서준은 이미 마음이 떠 있었고 시선은 자꾸만 남설아 쪽으로 향했다.반면 서유라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주변의 시선과 부러움을 즐기며 자부심에 젖어 있었다.남설아는 능숙하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뛰어난 사교 능력과 비즈니스 감각을 드러냈고 강연찬은 항상 그녀 곁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서유라는 그런 광경을 보며 더욱 만족스러워했다.배서준의 팔을 끼고 있는 자신이 마치 이 파티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하지만 차혜미가 자신에게는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 남설아에게는 유난히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불쾌한 기분이 들고 질투심이 일었다.“사모님, 남설아 씨랑 오래 알고 지내셨어요?”서유라는 조심스레 떠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네, 설아 씨와는 좀 됐죠.”차혜미는 예의를 갖춰 대답했지만 더 이상 깊이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설
차 안으로 돌아온 서유라는 여전히 드레스를 고른 기쁨에 들떠 있었다.“서준아, 우리 이번 파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커플이 되지 않을까?”그녀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그럴 거야.”배서준이 대답했지만, 말투에는 영혼이 없었다.“다행이네.”서유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아, 네가 이렇게 같이 와줘서 정말 좋아.”그녀는 배서준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배서준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 남설아의 모습이 떠올랐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파티 당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행사장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분위기 또한 고급스럽고 활기찼다.남설아와 강연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남설아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자태를 뽐냈고 강연찬은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여유롭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두 사람은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었고 자연스럽게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남 대표님, 강 대표님, 파티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서 회장 부부가 반갑게 맞이했다.“서 회장님, 사모님, 축하드립니다.”남설아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남 대표님께서 참석해 주시다니 저희가 정말 영광이에요.”서 회장의 부인인 차혜미가 남설아의 손을 잡으며 따뜻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사모님.”남설아가 정중하게 답했다.“이분이 바로 강 대표님이시죠?”서기찬이 강연찬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 회장님.”남설아가 소개했다.“저의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좋은 친구인 강연찬 대표님이에요.”“강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서기찬이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서 회장님.”강연찬은 예의를 갖춰 악수했다.“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자리를 미리 준비해두었어요.”서기찬이 손짓했다.“감사합니다.”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세 사람은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조금 떨어진 곳에 배서준과 서유라도 행사장
배서준은 서유라가 들뜬 모습으로 웃고 있는 걸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괜히 불편하고 답답했다.그는 말없이 남성복 코너로 가서 대충 눈에 들어오는 정장을 집어 들었다.“손님, 정말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건 저희 매장에서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신상이에요. 이탈리아산 원단으로 수제 재단된 제품이라 고객님 체형에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점원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배서준은 아무 말 없이 검은색 정장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정장을 갈아입고 거울을 바라본 그는 문득 거울 속 자기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저 사람이 정말 내가 맞아?’한때 야망으로 가득하고 세상을 거머쥘 듯 당당했던 배서준은 이제는 서유라의 기대와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서준아, 다 입었어?”서유라가 탈의실 밖에서 재촉했다.“응.”배서준은 문을 열고 나왔다.“와, 서준아, 너 이 정장 입으니까 진짜 멋있다.”서유라는 마치 영화 속 배우를 보는 듯 눈에 감탄이 가득했다.“진짜 영화배우 같아.”배서준은 가볍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유라가 이런 말들을 듣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이걸로 할게.”배서준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매장 입구 쪽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남설아와 강연찬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배서준의 시선은 남설아에게 고정되었고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남설아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주었고 살짝 올려 묶은 머리 사이로 드러난 목선과 쇄골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그녀는 마치 한 송이 활짝 핀 제비꽃 같았다. 요란하지 않지만, 눈에 띄는 아름다움이었다.배서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그녀의 당당함과 여유는 서유라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강 대표님과 설아 씨도 드레스 고르러
“그날 같이 가자.”“응.”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배서준 역시 서 회장 부부가 주최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았다.그는 원래 서유라와 함께 참석해 둘의 관계와 입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유라야, 서 회장 부부가 비즈니스 파티를 연대. 우리 둘 다 초대했어.”배서준은 초대장을 들고 서유라에게 말했다.“같이 갈래?”“당연히 가야지.”서유라는 웃으며 말했다.“이런 기회에 좋은 인맥도 많이 만들 수 있잖아.”“그래.”배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같이 가자.”“응.”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아. 넌 정말 다정해.”서유라는 배서준의 품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배서준은 남설아도 그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뭐? 남설아도 간다고?”배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대표님.”천기준이 답했다.“서 회장 부부가 남 대표님도 초대했답니다.”배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설아가 강연찬과 함께 파티에 나타나는 모습을 상상하자 괜히 기분이 불편해졌다.“서준아, 무슨 일 있어?”서유라는 그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물었다.“아니야.”배서준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남설아가 올 줄은 몰랐어.”“오면 어때.”서유라가 말했다.“우리가 남설아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잖아.”“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야.”배서준이 대답했다.“그냥...”그는 어떻게 얘기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그저 가슴이 무척 답답했다.“됐어, 너무 신경 쓰지 마.”서유라가 달래듯 말했다.“우리 둘이 함께 가서 보여주자. 우리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그래, 그게 좋겠다.”배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유라야,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서유라는 배서준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먼저 제안했다.“서준아, 이런 자리에는 내가 같이 가야지.”그녀는 부드럽게 말하며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네 연인이니까 함께 이겨내야 할 책임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