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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연무
그렇게 숨 막히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었던 황제는 결국 강만여를 노려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저벅저벅, 황제의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강만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다른 궁녀들을 모아 함께 침전을 환기시키고 침구들을 정리한 다음, 구석구석 먼지 낀 곳이 없도록 깨끗이 쓸고 닦았다.

그렇게 모든 청소가 끝났고, 마지막으로 황제가 갈아입은 옷까지 정리한 뒤, 늦은 아침을 먹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정오가 되었고, 황제의 낮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업무가 바빴는지, 기양은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곧 수락간에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라는 전갈이 도착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왔다. 강만여는 다른 궁녀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침전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침에 이미 모든 청소를 끝낸 상태라 크게 건드릴 것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몰래 들어왔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황제는 적이 많았고, 침전궁녀의 역할은 침전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니 점검은 필수였다.

그리고 곧 출궁할 몸, 새로 배정될 궁녀들에게 침전궁녀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알려줘야 할 임무가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는 대신 손짓과 다양한 시범들을 보이며 최선을 다해 궁녀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손량언의 제자인 소복자(小福子)가 달려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강 상궁님, 어서 침전 정리 끝나는 대로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오늘 또 언니분께서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답니다.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사부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강만여는 놀랐지만, 평점심을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현을 했다.

소복자는 전달을 마친 뒤, 얼른 자리를 떠났고 강만여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업무를 마무리하고 침전을 나가려던 찰나, 황제가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강만여는 망연자실 한 채, 다른 궁녀들과 함께 나란히 문 옆으로 물러나 한 줄로 꿇어앉았다.

곧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오늘은 운이 안 따라주는 날인 것 같았다. 하필이면 출궁전에 최대한 피하려 했던 황제와 두번이나 마주치다니, 울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곧 기양이 침전 앞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정확히 궁녀들 속에 섞여 있던 강만여를 발견했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황제는 별 말없이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지나가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 안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침상, 누가 정리했지?"

황제의 옆에 있던 손량언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굳은 얼굴로 강만여를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궁녀들도 슬금슬금 그녀를 힐끔거렸다.

강만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침상 정리는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꾸준히 맡아서 한 일이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착오란 있을 수 없었다. 이건 황제가 의도적으로 트집을 잡기 위해 꺼낸 말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다른 궁녀들에게 물러가라는 표시를 한 뒤,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침전 안 쪽으로 들어섰다.

침상 옆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황제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강만여가 잔잔한 호수같이, 모든 것을 수용할 각오가 된 듯, 해탈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론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걸 황제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순종적이지도, 주어진 운명을 순응할 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침상 위에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져 있다. 누구의 것이냐?"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강만여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진짜 그의 말 대로 머리카락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시비를 걸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 표정을 읽은 황제가 기가 차는 듯 다시 말했다.

"짐이 한가한 줄 아느냐?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거라."

강만여는 그의 명령대로 침상 쪽으로 다가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침상은 매우 컸으며, 아름다운 푸른 빛 비단에 부귀단화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이불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 찾기란 모래 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 강만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찾기 시작했다.

황제는 말없이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들어온 모습, 가녀린 허리, 고개를 숙이나 훤히 드러난 목덜미, 집중한 듯 앙다물어져 있는 입술이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어루만지고 말았다.

강만여는 머리카락 찾는데 몰두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쳐내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곧 자신이 쳐낸 손이 황제였다는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숨막히는 시간이 지나갔고, 황제는 온몸에서 냉기를 뿜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강만여는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황제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5년, 황위 쟁탈전에서 네 형제 중에 셋이 그의 손에 죽었다. 살아남은 건 오직 한명, 그의 쌍둥이 형인 삼황자 기망(祁望)뿐, 하지만 그마저도 냉궁에 유폐되었다. 지옥을 연상시킬 정도로 참혹했던 전쟁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아직도 그때 악몽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모두가 기양을 두려워했다. 그건 강만여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강만여 어머니의 목숨을 볼모로 삼아 그녀를 궁으로 들여보냈다. 황제의 분노가 장녀인 강만당(江晚棠)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강만당의 부군이 기망이었다.

'황제는 왜 쌍둥이 형제 기망만 살려둔 것일까?'

강만여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쌍둥이라 애틋한 마음이 남았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 남겨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처지였다.

‘왜 하필 내가 희생양이 된 것일까?’

살기를 뿜으며 점점 다가오는 황제를 보며 강만여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번만큼은 정말로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문 쪽에서 손량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진왕비(晋王妃)마마께서 건청궁 앞에서 실신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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