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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9 07:23:54

수혁의 집에 도착한 서린은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넓은 창 너머로 어둑해진 서울의 야경이 길게 번져 들어왔다.

수혁은 셔츠 목깃을 느슨하게 풀며 웃었다.

“아, 땀 냄새 난다. 나 먼저 좀 씻고 올게.”

운동장에서 아이들이랑 한참 뛰고 온 탓에 머리카락까지 땀에 젖어 있었다.

“배고프면 뭐라도 먼저 먹고 있어. 금방 나올게.”

서린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응?”

“노트북… 잠깐 써도 될까요?”

수혁은 별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써.”

그는 거실 테이블 위 노트북을 밀어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린은 천천히 가방을 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안에서 작은 은색 USB 하나를 꺼냈다.

5년 전.

직접 숨겨두고, 단 한 번도 남에게 넘기지 않았던 마지막 조각.

USB를 연결하자 오래된 파일 목록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도면.

영문 계약서.

낯선 해외 법인 이름.

그리고.

베트남 법인.

서린의 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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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30화.

    집무실에 도착하자 한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 지시하신 건 찾았습니다.”“보고해.”수혁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물었다.한 실장의 표정이 평소보다 심각했다.“5년 전, 공지안 씨 사고 관련 데이터입니다. 한도오토링크 구형 서버 백업본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가져와.”“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수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직접 봐야 할 정도라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가자.”수혁은 곧바로 한도오토링크 본사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그는 서린에게 짧게 문자를 남겼다.[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나갔다 올게. 혼자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한도오토링크 지하 전산실.서늘한 기계음만이 감도는 그곳에서 수혁은 모니터 앞에 앉았다.화면에는 5년 전 폐차 처리된 차량의 블랙박스 복원 영상과 ECU(전자제어장치) 로그 기록이 떠 있었다.“재생해 봐.”한 실장이 키보드를 두드렸다.치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비가 쏟아지는 밤거리.운전석 시점이었다.핸들을 잡은 하얀 손이 보였다.서린의 손이었다.그런데 갑자기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어? 왜 이래? 브레이크가……!영상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안, 아니 서린의 목소리였다.[경고: 제어 시스템 응답 없음][외부 침입 신호 감지: 조향 장치 강제 잠금]로그 기록이 붉게 점멸했다.수혁이 화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이게 무슨 뜻이지?”“사고 직전 차량 제어 시스템에 외부 접속이 있었다는 뜻입니다.”한 실장이 로그 한 줄을 확대했다.“처음에는 단순 오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접속 기록을 시간대별로 대조해 보니 이상했습니다. 사고가 나기 직전부터 브레이크와 조향 장치에 순차적으로 명령이 들어갔습니다.”수혁의 시선이 화면에 박혔다.“운전자가 조작한 게 아니라는 거야?”“네. 운전석에서 들어온 명령과는 별개입니다.”한 실장이 다음 로그를 띄웠다.[제동 명령 차단][조향 제어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29화.

    수혁의 집에 도착한 서린은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넓은 창 너머로 어둑해진 서울의 야경이 길게 번져 들어왔다.수혁은 셔츠 목깃을 느슨하게 풀며 웃었다.“아, 땀 냄새 난다. 나 먼저 좀 씻고 올게.”운동장에서 아이들이랑 한참 뛰고 온 탓에 머리카락까지 땀에 젖어 있었다.“배고프면 뭐라도 먼저 먹고 있어. 금방 나올게.”서린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대표님.”“응?”“노트북… 잠깐 써도 될까요?”수혁은 별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마음대로 써.”그는 거실 테이블 위 노트북을 밀어주고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서린은 천천히 가방을 열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 안에서 작은 은색 USB 하나를 꺼냈다.5년 전.직접 숨겨두고, 단 한 번도 남에게 넘기지 않았던 마지막 조각.USB를 연결하자 오래된 파일 목록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도면.영문 계약서.낯선 해외 법인 이름.그리고.베트남 법인.서린의 숨이 천천히 멎었다.민우가 그토록 찾았던 자금 흐름의 흔적이었다.수혁이 추적하던 기술 유출 증거.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이어졌다.우연이 아니었다.그날 강민재의 컴퓨터에서 봤던 자료들과,이 USB 안의 파일은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었다.서린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이제는 말해야 했다.잠시 후,씻고 나온 수혁은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밥 먹기 전에 가볍게 한 잔 하자.”코르크가 뽑히는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퍼졌다.수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에 와인을 따랐다.서린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왜 그래. 하품에서는 안 그렇더니.”수혁이 웃으며 잔을 밀어놓았다.서린은 손에 쥐고 있던 USB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금속음이 정적을 갈랐다.수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이거…….”서린이 마른침을 삼켰다.“오래된 자료입니다. 강민재 의원과 관련된.”수혁은 아무 말 없이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28화.

    한지우 실장은 5년 전 공지안의 사고 기록을 훑었다.경찰 조서에는 빗길에 미끄러진 차량이 가드레일을 뚫고 추락했다고 적혀 있었다.119 출동 기록과 사고 발생 시각도 일치했다.한 실장은 차량 번호를 확인해 이동 기록을 따라갔다.마지막으로 옮겨진 곳이 한도오토링크 폐차장이었다.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무렵, 수혁과 서린을 태운 차도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서울 외곽의 아동보호시설, ‘하품’.오랜만에 찾은 그곳은 여전히 따뜻하고 평화로웠다.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낡았지만 깨끗한 건물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어머, 서린씨! 아니, 대표님까지!”앞치마를 두른 김 권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뒤이어 정 목사도 인자한 미소를 띠며 모습을 드러냈다.“어서 오세요. 두 분 오신다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잘 지내셨어요?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서린이 고개를 숙이자 정 목사가 손사래를 쳤다.“죄송하긴요. 두 분 덕분에 우리 아이들 얼굴 핀 것 좀 보세요. 한도오토링크 취업 연계 프로그램 덕분에 아이들이 얼마나 의욕적인지 모릅니다.”정 목사가 운동장을 가리켰다.고등학생 아이들 몇 명이 작업복을 입고 기술 실습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 희망이 깃든 얼굴들이었다.“다행이네요. 아이들이 잘 따라와 줘서요.”“지난달 취업 연계 프로그램 진행 자료도 잠깐 볼 수 있을까요?”“그럼요. 참여 인원하고 실습 현황까지 정리해 뒀습니다.”“네. 이따 확인하고 갈게요.”수혁이 흐뭇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저 녀석들이 대표님 오면 농구 한 판 하자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졌던 게 분하다나 뭐라나.”김 권사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몸 좀 풀어볼까.”수혁이 소매를 걷어붙였다.아이들이 “와! 대표님이다!” 하며 우르르 몰려들었다.수혁은 금세 아이들 틈에 섞여 공을 튀기기 시작했다.흙먼지가 날리고, 웃음소리가 터졌다.서린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정 권사와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27화.

    한도전자 본사 25층 대표이사실.창밖으로 서울이 내려다보였다.한도오토링크 때보다 훨씬 높았다. 시야는 넓어졌지만, 그림자도 길어졌다.“부르셨습니까, 대표님.”문이 열리고 한지우 실장이 들어왔다.최유나 사건 이후 다시 불려 올라온 자리였다.신임이자 경고였다.“앉아.”한 실장이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적응은 좀 됐나?”“네. 업무 파악은 끝났습니다. 믿고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감사는 일로 해.”수혁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공식 업무 외에 따로 알아봐야 할 게 있어, 5년 전. 대선 직전 공대현 후보 딸, 공지안 사고.”한 실장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공식 발표 말고 과정이 필요해. 경찰 조서, 119 출동 기록, 사고 차량 이동 경로.그리고 한도오토링크 전산망도 확인해봐, 혹시 있을지도 모르니까. 폐차 기록, 부품 유통, 전부.”잠시 뜸을 들였다.“조용히.”“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습니다.”“그래.”한 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이것이 자신이 해야 할 ‘진짜 일’임을 직감했다.“알겠습니다. ”“그래. 나가봐.”한 실장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수혁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사고가 아니라면... 흔적은 남아 있겠지.”그 시각, 국회의원회관 의원실.“가져왔습니다, 의원님.”비서관이 봉투를 내려놓았다.겉면에는 [의료기록 관련 동선 1차 : 치과 진료] 라고 적혀 있었다.강민재는 펜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안에는 두 장의 파노라마 엑스레이 사진과 진료 차트 사본이 들어 있었다.하나는 5년 전, 공지안이 다녔던 청담동 치과의 진료 기록.다른 하나는 최근 공서린의 치과 진료 기록.그는 두 사진을 나란히 펼쳐 놓았다.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전문가 소견은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만… 사랑니 발치 위치와 하악 어금니 치료 흔적이 유사합니다. 최근에는 임플란트 시술이 추가돼 각도 차이가 있습니다.”“확정은 필요 없어.”강민재의 시선은 엑스레이 사진 위에 고정되어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26화.

    5년 전.서린은 날짜를 짚었다.“당시 한도전자 베트남 법인이 공장 증설을 진행했는데, 자금 집행 직전에 세무 조사를 받았습니다.”“세무 조사?”“네. 그런데 본사 감사 리포트에는 해당 내용이 없습니다. 조사 기록도, 결과 보고도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수혁의 시선이 서류 위를 훑었다.지워진 흔적은 보통 더 또렷하다.“그리고 조사 종료 직후, 현지 법인장이 교체됐습니다.”서린의 손가락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같은 시기에 ‘기술 제휴비’ 명목으로 해외 페이퍼컴퍼니에 100억 이상 송금됐습니다.”민우가 몸을 일으켰다.“기술 제휴비? 야, 그거 우리가 심재호 건 털 때 봤던 방식이랑 똑같잖아.”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에서 다른 장면이 겹쳐졌다.‘냄새가 난다.’출장 직전, 아버지가 했던 말.숫자는 맞는데 실물이 없다.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베트남.세무 조사.기술 제휴비.법인장 교체.그리고.수혁은 천천히 물었다.“이 서류, 어디서 찾았어.”“지하 문서고요. 파기 예정 박스에서요. 차윤호 회장님 재임 시기 자료였습니다.”파기 예정.수혁의 눈빛이 깊어졌다.“정리해보자.”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세무 조사 발생. 기록 삭제. 자금 이동. 인사 교체.”서린이 숨을 삼켰다.“그럼… 선대 회장님의 출장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인가요?”수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서린은 펼쳐진 자료를 다시 내려다 봤다.“이상하긴 해요.”“뭐가.”“없애려 했다면 이것도 같이 없어졌어야 하잖아요.”서린이 몇 장을 추려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았다.“그런데 여기에는 송금 승인 번호랑 현지 법인 계좌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민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본사 자료는 없앴는데, 이쪽까지는 손을 못 댄 건가?”“아니면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요.”정적이 흘렀다.수혁 앞에 있는 건 겨우 몇 장의 서류였다.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군가 감추고 싶어 했던 일이 있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서류를 보고 있자니,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25화.

    오후 2시.수혁의 개인 집무실 문이 짧게 두드려진 뒤, 곧바로 열렸다.민우가 들어섰다.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탁.봉투가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알아왔어.”민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평소처럼 가볍게 굴었지만, 눈빛은 미묘하게 진지했다.“결론부터 말할까?”수혁은 봉투를 열지 않은 채 민우를 바라봤다.“공도윤 군은 현 대통령의 아들이야. 가족관계증명서에도 부친 공대현, 모친 윤정희. 딱 나오더라.”담담한 보고였다.수혁의 표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가족은.”민우가 피식 웃었다.“없어.”그리고 덧붙였다.“있었는데, 없어.”그는 봉투 안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수혁 앞으로 밀어 넣었다.빛이 바랜 신문 기사 스크랩이었다.오래된 종이 특유의 노란 기색이 가장자리에 스며 있었다.[대선 후보 공대현의 외동딸, 빗길 차량 추락 사고로 실종][2주간 수색 끝에 시신 미발견… 급류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법원, 공지안 양에 대한 실족사 처리, 사망 인정]“외동딸 공지안.”민우가 기사 하단을 손끝으로 두드렸다.“당시 대학생. 캠프에서 활동도 했고, 이미지도 좋았어. 그런데 대선 직전에 사고로 실종. 시신은 못 찾았고, 법원에서 사망 인정.”수혁의 시선이 기사 속 사진에 멈췄다.흐릿한 인쇄 사진.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여자.눈매가 길었다.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꼬리.낯설지 않았다.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수혁은 기사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분명 서린과는 다른 얼굴이었다.그런데 이상했다.사진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온 국민이 애도했지.”민우가 말을 이었다.“유력 후보가 딸을 잃었다는 뉴스가 전국에 도배됐으니까. 동정 여론이 형성됐다는 분석도 있었고.”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기사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보듯이.사고.실종.급류.사망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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