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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01.07.2026 14:42:40

“차라리 솔직하군요.”

수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비웃음인지 미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보통은 ‘영업 이익을 늘리겠다’거나 ‘원가를 절감하겠다’고 떠들던데.”

“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익을 논하는 건 허상입니다.”

서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저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모른다?”

“네. 차종, 시세, 옵션, 저는 그런 건 모릅니다. 딜러들처럼 차 소리만 듣고 상태를 알 수도 없습니다.”

서린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터는 압니다. 차는 거짓말을 해도, 숫자는 흔적을 남기니까요. 저는 차를 보는 게 아니라, 그 흐름을 봅니다.”

수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공기의 밀도가 팽팽해졌다.

“하나만 묻죠.”

그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만약 내가-

그 흐름을 조작하라고 시키면?”

수혁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덧붙였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장부에 가짜 숫자를 채워 넣으라고 지시한다면.”

“.....?”

“어떻게 할 겁니까?”

‘생각보다 노골적인 질문이네.’

하지만, 서린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시하신다면, 따르지 않겠습니다.”

“이유는? 정의감 때문에?”

“아니요.”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조작은 균열을 만듭니다. 균열은 결국 구조를 무너뜨립니다.”

말을 잇는 서린의 눈에 빛이 스쳤다.

“가짜 숫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구멍을 냅니다. 한 번 메우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 구조가 무너집니다.”

서린의 대답에 수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처음으로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는 무너지는 배에는 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탄 배를 제 손으로 구멍 내지도 않습니다.”

서린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대표님도 그런 걸 원해서 저를 부른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서린이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작할 사람이 필요했다면-

저보다 멍청하거나, 더 욕심 많은 사람을 뽑으셨겠죠.”

수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것은 평가가 아니었다.

협상이었다.

서린은 자신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었다.

수혁의 표정에서 경계심이 거두어지고, 대신 기이한 만족감이 스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린도 따라 일어섰다.

“조만간 인사팀 통해 연락갈 겁니다.”

면접은 끝났지만 이상하게 결과를 묻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미 서로 확인할 것은 다 확인한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

그녀는 짧게 인사한 뒤 회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서린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질 때까지 수혁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회의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많은 중고차들이 햇빛 아래서 번쩍이고 있었다.

저 쇠붙이들 사이에서, 매일같이 거짓말과 싸우고, 의심하고, 뜯어먹히지 않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야 하는 삶.

그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서린의 이력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증명사진 속의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표정이 다르게 보였다.

비어 있는 게 아니다.

단단한 거다.

그는 사람을 믿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 이력서 따위는 더더욱.

좋은 말은 얼마든지 적을 수 있고, 화려한 경력은 돈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면접에서 서린은 끝내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 담담한 선이 수혁의 마음을 움직였다.

부서져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기이한 단단함.

자신과 닮은 냄새가 났다.

감상적인 위로나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차라리 차가워서 믿을 수 있는 온도.

수혁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이력서 상단, 공백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채용. 권한 위임.]

그는 펜 뚜껑을 닫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재밌네.”

지루하고 끈적거리던 일상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들어왔다.

그것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같이 가라앉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후-읍

건물 밖으로 나온 서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폐부 깊숙이 공기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확인했다.’

차수혁이라는 남자의 기준.

그는 서린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오직 ‘구조’와 ‘생존’만을 이야기했다.

그 건조함이

그 냉정함이

오히려 서린에게는 안전장치처럼 느껴졌다.

차수혁.

어젯밤 검색하며 찾아본 기사들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따라다니는 남자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예리한 칼을 숨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선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 남자도, 쉽게 무너질 사람은 아니라는 것.

서린은 가방을 고쳐 메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아스팔트 위로 또각, 또각, 명확한 리듬을 만들며 퍼져 나갔다.

그들은 아직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악수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는 확인했다.

상대 역시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그 문제가 단순한 회계의 오류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균열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균열이,

자신을 이 회사로 이끌었던 과거와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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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6화.

    서재에 있던 서린이 그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잘 쉬었어?”“네. 지금 가야 하는거죠? 겉옷만 걸치고 나올게요.”“천천히 해. 아직 시간 여유있어.”서린이 코트를 입고 나오자, 수혁이 손을 잡았다.“가자.”잠시 후, 두 사람은 관저에 도착하고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어서 와요, 차 대표!”윤정희 여사가 가장 먼저 환한 얼굴로 수혁을 맞이했다.공대현 대통령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다.“매형,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도윤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원탁에 차려진 식사는 화려한 연회식이 아니라, 정갈하고 따뜻한 가정식이었다.다섯 사람이 둘러 앉자, 윤 여사가 젓가락을 들어 수혁의 밥그릇 위에 큼지막한 갈비찜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많이 들어요, 차 대표.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잘 먹겠습니다.”“엄마, 나도 그 갈비찜 맛있어요.”“이 녀석이. 넌 손이 없어?”“손은 매형도 있는데요?”“뭐―?”하하하.식탁에서는 가벼운 농담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서린은 말없이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엄마와 아버지, 도윤이.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수혁.한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였다.죽은 사람이 되어 멀리서 그리워하기만 했던 가족과, 이제는 한 식탁에 앉아 웃고 있었다.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그대로 두었다.“차 대표 나 좀 보지.”식사를 마친 뒤, 공대현 대통령이 수혁을 따로 불렀다.두 사람은 서재에서 마주 앉았다.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신 공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으니, 남은 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일뿐이겠지.”“예. 다만 강민재보다 그 뒤에 있는 그가 누구인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증거가 없을 뿐입니다.”공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네. 곧 꼬리가 잡힐 거야.”잠시 말을 멈춘 공대현이 낮게 덧붙였다.“그리고 그 양반은 분명 그 꼬리를 자르려고 하겠지.”공대현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5화.

    아침 햇살이 하얀 이불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수혁은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지만, 자신의 팔을 베고 곤이 잠든 여자의 얼굴만 계속 보고 있었다.손을 뻗어 서린의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손 끝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어젯밤의 뜨거웠던 기억이 났다.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졌다.하지만 곧, 서린이 도로 한 복판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쯧―왜 위험하게 도로에서 그러고 있었어. 내가 조금만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면 어쩌려고.수혁은 그 때의 긴박했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듯 도로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여자. 그 절박함이 아직도 수혁의 심장 깊숙이 박혀 있었다.수혁은 다시 팔을 뻗어 서린의 몸을 당겨 안았다.“으음...”서린이 작게 뒤척이며 천천히 눈을 떴다.눈 앞에는 맨살의 가슴팍만 보였다. 고개를 젖혀 수혁의 얼굴을 보았다.초점이 맞춰지자 수혁과 시선이 얽혔다.“... 일어났어요?”잠긴 목소리로 묻는 지안의 입술에, 수혁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응. 일어났지.”“근데 왜 이러고 있어요? 얼른 씻어야 하지 않아요?”“네 얼굴 보느라고.”“피― 그게 뭐에요. 지금 얼굴 별로 안이뻐요.”서린이가 얼굴을 붉히며 수혁의 품에 더 깊이 안겨들었다.“왜― 보여줘. 더 봐야 돼. 내가 이 얼굴을 못봐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대표님...”서린이 얼굴을 들어서 수혁과 눈을 마주쳤다.“너 그렇게 되고, 찾아 헤매는데...”문득문득 그때 일이 떠오르고는 한다.“네 얼굴이 기억이 안났어.”잠들면 네가 나타나 울었어.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면 네가 없는 거야.“아주 그냥 돌아버리겠더라고.”캄캄한 날들이 이어졌던 아득한 시간들이.“...아.”“그래서 더 자주보고 더 많이 봐야돼.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수혁의 다정한 투정에 서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수혁은 서린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더 깊숙이 안았다.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4화.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자리가 되는 건가.생각해보니 묘한 기분이었다.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저번의 대통령과의 만남은, 서린을 지키기 위해 손을 잡은 전쟁 같은 자리였다.이제 남은 건, 검찰과 정치가 협력해서 움직일 차례였다.이 또한, 판은 다 만들어졌으니 크게 염려할 일은 없었다.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다 씻었어요.”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가볍게 털며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수혁의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가벼운 슬립을 입은 서린의 목선과 쇄골이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탓에 상기된 뺨과 익숙한 바디워시 향기가 훅 끼쳐왔다.수혁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출렁였다.“머리도 덜 말리고.”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린에게 다가갔다.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넘겨받아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에 서린은 눈을 반쯤 감은 채 그의 손길을 느꼈다.“아까, 누구 전화였어요?”“아버님.”“...이 밤에요?”“내일 관저로 같이 들어오라고 하시네. 밥 먹자고.”“무슨 일 있는거 아니죠?”“일이야 무슨, 좋은 일만 있지.”“몇 시에 가기로 했어요?”“12시까지. 점심시간을 비워두신대.”수혁이 드라이기를 켜고 수건으로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을 말렸다.“이제 다 말렸다.”수혁이 드라이기를 끄고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젖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울고, 도망치고, 두려워 하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여자.수혁은 서린을 일으켜 돌려 세우고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내일은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겠다.”수혁이 서린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이렇게 소중한 따님, 이제 나한테 달라고.”서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려고요?”“왜? 싫어?”“아니요. 그냥…… 이상해서요.”“뭐가?”서린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이런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3화.

    3분짜리 동영상의 여파는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한도그룹 회장실에까지 휩쓸었다.“이... 이 미친 새끼가, 지 혼자 죽지 왜 나까지 끌고 들어가!”차윤호가 이 동영상을 보게 된 건, 로비를 지날 때였다.어제까지만 해도 로비는 퇴근하는 직원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보면서 떠들기 바빴다.“장 비서, 저 직원들이 왜 저렇게 몰려 있는 거야?”“제가 알아보겠습니다.”곧이어 장 비서가 핸드폰으로 지금 송출되는 화면과 같은 영상을 차윤호에게 보여주었다.차윤호는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눈을 떼지 못했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 회장실로 올라와 다시 한번 그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시켰다.그리고—이 영상 하나가 자신을 어디까지 끌고 내려갈지 깨달은 순간, 차윤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장 비서. 장 비서-!”차윤호가 큰 소리로 장 비서를 불렀다.벌컥-문이 열리고 장 비서가 들어왔다.“지금 당장, 베트남 법인과 관련된 모든 서류를 폐기해라. 단 한 장의 서류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통장... 통장은 어떻게 하지?”“통장은 모두 대포 통장이라서 추적하지 못할 겁니다.”“그래, 그렇지.”차윤호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딛고 있는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강민재가 잡히면 자신까지 위험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날 줄은 몰랐다.더구나 영상에 나온 자료는 자신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가짜라고 우길 수는 있어도, 검찰이 원본을 확보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차윤호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한편, 수혁의 사무실은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분명히 기뻐할 일이었다.환호하고 소리쳐야 했다.그런데...그 기쁨이, 한 사람의 인생이 난도질당한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숨을 죽였다.영상 조회수가 1000만에 가까웠다.처음 300만이 되고 500만이 될 때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2화.

    공대현은 그 영상을 눈도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쳐다 봤다.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팔걸이를 붙잡았다.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내 딸이...저 기억을 가지고, 저런 공포와 싸워오고 있었단 말인가.강민재를 만나는 것도, 자기 이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극도로 꺼리는 딸아이를 안쓰럽게 여기기는 했다.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곧 털고 일어나리라 생각했다.그런데, 내가 안일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을 동안,내 딸은 지독한 기억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똑똑히 전했다.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고.수혁이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서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서린이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수혁이 서린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사랑해.”다정한 수혁의 목소리에 서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저도... 사랑해요.”그런 두 사람을 보던 민우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지금 대한민국을 벌집 쑤시듯 쑤셔놓고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말없이 지켜보던 감독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다른 직원들과 스텝들도 한결같은 마음이었다.세상이 모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로 코앞에서 봤다.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 사람은 죽다가 살아나 지독한 트라우마를 이겨냈고, 또 한 사람은 그녀의 곁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켜낸 거니까.업로드된 영상의 조회수가 300만을 돌파하고 500만이 가까워질 때였다.수혁의 핸드폰이 거칠게 울었다.[발신자 : 강민재]이게 미쳤나, 어디다 전화를 하는거야.서린이 수혁이 보여주는 화면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떴다.“받게요?”“그럼, 받아야지. 이렇게 친히 전화까지 주셨는데.”수혁은 핸드폰 화면을 슬쩍 밀었다.“이야― 이게 누구신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신 장본인 아니신가.”수혁의 큰 목소리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흥미로운 눈으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크크큭, 야 이 새끼야. 니가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81화.

    다음 날, 오후 2시 정각.한도전자 대표이사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하나의 모니터로 집중되었다.“렌더링 끝났습니다.”감독이 엔터키를 치며 말했다.수혁이 민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우가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도윤아, 유정 씨. 지금이야. 시작해.”수혁의 인맥을 동원한 대형 커뮤니티 관리자들.유정의 문화예술계 인플루언서 인맥.도윤이 조직한 대학가 네트워크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유튜브.대학가 커뮤니티.그리고 SNS.언론사는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이미 저들의 의도대로 보도하는 그들을 통할 필요가 없었다.영상 업로드 자체가 저들을 향한 선전포고와 같았으므로.오후 2시를 기점으로, 하나의 영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업로드되었다.영상의 제목은 단 한 줄이었다.[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화면이 천천히 밝아졌다.늦은 밤의 오피스텔.노트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여자는 무언가 불안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고,남자는 그런 그녀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웃고 있었다.하지만 장면은 오래가지 않았다.다음 화면.여자가 울먹인 얼굴로 오피스텔 밖으로 뛰쳐나왔다.“오빠, 이건 아니잖아!”남자가 다급하게 뒤를 따라 나갔다.짧은 화면들이 빠르게 이어졌다.차 안에서 심하게 말다툼하는 두 사람.무언가를 요구하듯 몰아붙이는 남자.점점 지쳐가는 여자.그리고—— [마지막 곡입니다.]차 안에 라디오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고.이어,빗길 속 블랙박스 영상이 재생되었다.— 어? 오빠, 차가 이상해! 브레이크가……!다급한 비명.동시에 계기판 위로 붉은 경고문이 떠올랐다.[시스템 제어 권한 상실][외부 침입 감지]차량이 통제를 잃은 채 회전했다.콰아앙—!차가 가드레일을 뚫고 빗속 도로를 벗어났다.곧이어 검은 바다 아래로 처박혔다.암전.그리고 이어진 낮고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 [저는 5년 전, 교통사고 실족사로 사망 처리된 공지안입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화면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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