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황제는 말을 마치자 그대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원래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대로 소녕전에 남아 금영과 더 있다가는 정말 화병이 날 것 같았다.금영은 황제가 일부러 토라져서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오히려 웃음까지 터뜨렸다.황제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은데 어찌 저리 마음이 급한지.젊은 사람처럼 툭하면 발끈하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그때 곁에 있던 복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화가 나서 가신 듯한데 정말 괜찮으시옵니까?”해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아직 뭘 모르는구나. 저게 어디 화가 난 거겠어? 부부 사이의 정다운 장난이지.”부부가 매사 서로 예의만 차리고 깍듯하게 대한다면 오히려 서먹해 보일 터였다.게다가 황제가 어떤 사람인가.자신들의 마마 앞에서 기쁨이며 노여움이며 온갖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마음속에서 마마가 몹시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이 정도 화가 난 것이 대수겠는가.해수는 제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있었다.자신의 마마가 황제를 어찌나 화나게 했는지, 황제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고 온몸에서 살기까지 뿜어져 나왔었다.그런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마의 눈가가 붉어지자, 황제는 결국 제왕의 위엄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달래지 않았던가.이런 것이 부부 사이의 정취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정월 보름은 황제의 생신이기도 했다.그래서 오늘도 궁 안에서는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현비는 일부러 연회 장소를 매화원으로 정했다.궁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매화가 마침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이번에 놓치면 머지않아 봄이 시작될 터라 더는 매화를 즐길 기회도 없었다.황실 연회는 한낮에 열릴 예정이었다.금영은 아기 황자를 데리고 나가 찬바람을 쐬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더구나 아기 황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악의를 품은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다.그래서 평소처럼 아기
예전에 작산 행궁에서 금영은 자신이 이미 지아비를 둔 몸이라 말해 황제를 거의 분통 터지게 만든 적이 있었다.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달라진 지금, 자신이 바로 그 지아비가 되어 있을 줄이야.세월이 흘러 운명이 결국 정해진 자리로 두 사람을 이끌어 온 듯한 기분에 황제는 문득 묘한 감회에 젖었다.황제는 이미 옷을 모두 갖춰 입고 허리띠만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금영은 자연스럽게 다가가 황제의 허리띠를 매어 주었다.금영의 두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자, 황제의 코끝으로 은은한 연꽃 향이 스며들었다.황제의 목울대가 살짝 움직였다.목소리에도 어느새 옅은 쉰 기운이 배었다.“금영아,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이 설마 짐을 홀리기 위해서냐?”금영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별빛처럼 맑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폐하! 어찌 늘 신첩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시옵니까!”“신첩이 언제 폐하를 홀렸다고 그러시옵니까? 분명 폐하께서 스스로 절제를 못 하신 것이면서, 어찌 신첩 탓을 하시옵니까?”말을 마친 금영은 황제를 가볍게 밀고 그 힘을 빌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황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금실 무늬가 놓인 검은 허리띠는 어느새 반듯하게 매어져 있었다.그런데 허리춤에는 못 보던 작은 주머니 하나가 더 달려 있었다.손이 제법 많이 간 듯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진 주머니였다.황제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이것은 무엇이냐?”금영이 대답했다.“지난해 폐하의 생신을 맞아 신첩이 준비했던 선물이옵니다. 하지만 그 뒤에……”그 뒤로 이 선물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아니.어찌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그날 밤, 이보다 훨씬 귀한 것을 이미 내어 주지 않았던가.그날 밤 있었던 일을 떠올린 순간, 금영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본래도 고운 얼굴에 수줍은 기색까지 더해지니 한층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금영의 말을 듣자 황제 역시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지난해 생신을 앞두고 그는 금영에게 자신이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다고 은근히 내비친 적이
림 소의는 서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엄하게 경고했다.“명심하거라. 이 후궁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하지만 주 소의마마께서는……”서묵은 말을 잇지 못했다.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림 소의는 서묵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너무 매정한 사람처럼 보이느냐?”“주 소의가 내게 잘해 준 것을 어찌 모르겠느냐. 나도 다 알고 있다.”“하지만 이 후궁에서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 감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림 소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게다가 나도 주 소의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화를 당했는지 알지 못한다.”“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그날 주 소의가 본 사람이 원비마마였다면 어쩌겠느냐?”그 생각에 이르자 림 소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아무튼 이 일은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거라. 그저 주 소의가 깊은 궁 안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생각하자꾸나.”림 소의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에 관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그저 살아남고 싶을 뿐이었다.*소녕전.해수가 금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마마, 혹 무언가 수상한 점을 발견하셨사옵니까?”금영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은 없네.”“다만 본궁은 아무래도 림 소의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 같네. 무언가 알고 있으면서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하지만 그런 의심이 든다 한들, 림 소의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금영이 사람을 붙잡아 심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황제에게 이 일을 말하기도 애매했다.그저 자신의 직감뿐인데, 주 소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황제에게 말한다면 너무 근거 없는 추측처럼 들릴 터였다.황제는 국사만으로도 바쁜 사람이었다.이런 근거조차 희박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금영 역시 공연히 일을 키워 말썽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림 소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
림 소의는 곧바로 대답했다.“신첩은 슬프지 않사옵니다.”금영은 림 소의를 흘끗 바라보았다.‘슬프지 않다고?’림 소의는 불안한 얼굴로 서둘러 설명하기 시작했다.“신첩과 주 소의는 같은 유광재에서 지냈사옵니다. 이제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유광재 어디를 보아도 음산하게만 느껴지옵니다.”“신첩은 혹 주 소의가 저승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신첩을 데리러 올까 봐 두렵사옵니다.”금영은 곧장 물었다.“그렇다면 죽기 전에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가?”림 소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어…… 없었사옵니다. 신첩과 주 소의가 요 며칠 사이 조금 다투는 바람에, 벌써 이틀째 말도 섞지 않고 있었사옵니다.”말을 하던 림 소의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마마, 신첩과 주 소의가 다투기는 했지만, 설마 신첩 때문에 우물에 몸을 던진 것은 아니겠지요?”결국 제 결백부터 변명하는 말이었다.림 소의의 모습을 본 금영은 더 물어봐도 별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애초에 금영 역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그저 혹시라도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림 소의를 불러 물어본 것뿐이었다.하지만 림 소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무엇을 물어도 아는 것이 없다고만 했다.금영도 이내 흥미를 잃었다.그렇다고 림 소의를 괜히 겁줄 생각은 없었기에 한마디 달래 주었다.“본궁은 이 일이 자네와 관련 있다고 한 적 없네. 그저 아직 젊은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워 물어본 것뿐이야.”두 소의가 입궁한 것은 벌써 오 년 전이었다.궁에 들어온 뒤 황제의 부름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것도 서러울 텐데, 이제는 목숨까지 허망하게 잃었으니 생각할수록 딱한 일이었다.금영이 다시 말했다.“되었네. 돌아가 보게.”림 소의는 금영이 이렇게 쉽게 자신을 보내 주자 오히려 더욱 두려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곧바로 금영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금영은 그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했다.“림 소의를 불러오게.”해수는 의아한 얼굴로 금영을 바라보았다.“마마, 어찌하여 그러시옵니까?”금영이 말을 이었다.“본궁은 아무래도 주 소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네. 림 소의가 주 소의와 가장 가까이 지냈다니, 혹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노비가 곧 사람을 보내 림 소의를 모셔오게 하겠사옵니다.”소녕전에서 소의 한 사람을 부르는 일에 해수가 직접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다.해수가 손탁에게 말을 전하자, 손탁이 곧 사람을 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림 소의가 잔뜩 긴장한 채 방 안에 들어와 서 있었다.그사이 금영은 단장을 모두 마치고 아침 수라를 들고 있었다.금영은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수라도 제법 간소했다.림 소의가 들어오는 것을 본 금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입을 헹군 뒤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 나서야 눈앞의 림 소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오늘 림 소의의 차림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회분홍빛 옷은 얼핏 보기에도 몇 해는 묵은 듯한 옷감이었고, 머리에 꽂은 장신구 역시 몹시 수수했다.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대량 후궁의 소의라는 것을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느 궁에서 시중드는 궁비라고 여길 정도였다.일전에 납매나무 아래에서 보았던 림 소의와는 완전히 딴사람 같았다.그날은 림 소의도 주 소의도 눈부실 만큼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어화원에서 눈장난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혹시 황제가 지나가기라도 하지 않을까, 운 좋게 황제의 눈에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림 소의가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 해도, 입궁해 소의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다.어찌 집안 배경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친정의 힘만으로도 이토록 초라하게 지낼 이유는 없었다.더구나 서 황후가 후궁을 다스릴 때든 현비가 맡고 있을 때든, 두 사람 모두 겉으로는 온화하고 현숙한 모습을 중히 여겼다
금영은 얼굴을 붉힌 채 괜스레 고집을 부리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지아비.”“그래.”“지아비.”“그래.”운우가 모두 잦아들었을 무렵, 본래 맑고 청아하던 금영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옅은 쉰 기운이 배어 있었다.황제는 밖을 향해 한마디 분부했다.“물을 들여라.”그러면서 금영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황제의 가슴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금영은 천천히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대었다.‘폐하께서 황제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그저 평범한 집안의 지아비와 아내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지만 아쉬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세상에는 그리 많은 가정이 존재하지 않았다.황제는 결국 황제였다.황제인 이상, 영원히 오롯이 그녀 한 사람만의 지아비가 될 수는 없었다.*지난밤 금영은 몹시 지쳐 있었다.그 탓에 또 늦잠을 자고 말았다.다행히 궁 안에서 총애받는 비빈인 금영에게는 나름대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이를테면 황제가 그녀를 마음껏 늦잠 자게 내버려두어, 굳이 어느 궁에도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태후마마께서조차 금영이 수강궁에 좀처럼 들르지 않는다며 대놓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황제는 금영의 편을 들어 주었다.금영은 궁에 들어와 비빈이 된 뒤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지만, 좀처럼 분수를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황제의 마음이 자신에게 머무는 동안이야 조금 선을 넘거나 제멋대로 굴어도 황제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일 터였다.하지만 언젠가 황제의 총애가 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그동안 저질렀던 모든 분수 넘는 행동이 그대로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이었다.그러고 보면 늦잠을 자느라 문안 인사를 가지 않는 것 정도가 금영이 총애만 믿고 부리는 유일한 응석이었다.그렇다고 금영을 탓할 수도 없었다.굳이 누군가를 탓하라면 황제를 탓해야 했다.그런 일에 어찌 그리도 절제가 없는지.처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