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화

Author: 서린화
금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봉황이 새겨진 비녀를 살짝 고쳐 쥐었다. 그 비녀는 선대 영안후가 금영을 위해 사혼 교지를 받아낼 때, 황후가 내려준 것으로 태자비의 신분을 상징하는 신물(信物: 상징적 물건)이었다. 또한 회귀 전, 그녀가 스스로를 해치는 데 사용했던 물건이기도 했다.

태자는 금영을 본 순간, 잠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가 금영을 태자비라 여겼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금영의 앞에서 다른 여인과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니,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태자였다. 그는 짧은 동요를 누른 뒤, 곧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냐? 설마 나 때문에 온 것이냐?”

이 말과 함께 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명하는 말투에는 엷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

“명월이가 손을 다쳤다고 들어 잠시 들렀을 뿐이다. 괜한 생각하지 말거라.”

금영이 입을 열었다.

“괜한 염려이십니다. 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제 의지로 온 것이 아닙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강제로 끌고 오신 겁니다.”

금영은 분명하게 말했다. 괜히 태자 때문에 이곳에 온 것처럼 오해받는 피곤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영의 말에 배경천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금영을 데리고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이 떠오르자, 그는 곧바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명월에게 사과하지 않을 셈이냐!”

금영은 배경천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잘못한 게 없으니, 사과할 일도 없습니다.”

“아직도 인정 못하는 것이냐? 네가 아니었으면 명월이가 이렇게까지 다칠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

배경천이 성급하게 따져 물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벌을 받다가 촛대를 엎질렀는데, 왜 그 책임을 저에게 돌리는 것입니까?”

금영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네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이란 말이냐! 네가 일러바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알았겠느냐!”

“둘째 오라버니, 저 때문에 언니와 다투지 마세요. 저로 인해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아지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요.”

배명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경천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잘못이 맞습니다. 태자 전하와 언니가 먼저 약속을 잡은 줄도 모르고 금풍대에 가자고 졸랐으니까요. 제가 경솔해서 언니의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그러니 제가 사과해야 마땅하죠. 죄송해요, 언니. 몰라서 그런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그 말과 함께 배명월은 갑자기 금영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녀의 태도는 지극히 진지하고 공손했다.

그 장면을 본 금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배명월에게 사과를 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녀린 배명월이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는 모습에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배경천은 노골적으로 금영을 향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배금영! 정말 오라비로서 너무 너에게 실망이다!”

배경천이 분노에 차 외쳤다.

태자 또한 배명월을 부축한 다음, 심기 불편한 얼굴로 금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월은 잘못한 것이 없다. 정말 잘못을 했다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너에게 상처 준 나일 것이다.”

그리고는 차갑게 덧붙였다.

“불만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거라. 괜히 명월을 몰아붙이지 말고.”

금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때 모두 깊이 존경하며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피를 나눈, 같이 자란 오라비였고, 또 다른 이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나누며 혼인을 약조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마치 그동안 함께해왔던 세월이 없었던 듯 금영을 몰아세우며 한 목소리로 배명월을 두둔하고 있었다.

금영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이들에게 한순간이라도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말이다.

금영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이어 담담하게 덧붙였다.

“아직 남아 있더라도, 자중해주십시오.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

그 말만 남기고 금영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멈춰라! 누가 가도 된다고 했느냐!”

바로 그때, 배경천이 호통치며 그녀를 막았고, 금영은 냉소를 띠며 돌아보았다.

“제 몸에 붙은 다리로 제가 걷는 것도 허락이 필요합니까?”

배경천은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명월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오늘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하지만 금영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저도 말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계속 저를 몰아붙이신다면, 오늘 저 아이가 태자와 사사로이 만났다는 이야기까지 아버지 귀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너!”

배경천은 분노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둘째 오라버니께서 저를 고자질쟁이로 몰아붙였으니, 고자질쟁이답게 행동하려는 것뿐입니다.”

금영은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배경천과는 언성을 높여 다툴 수 있었지만, 태자와는 더 이상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영이 떠나자, 배명월의 눈가가 붉어졌다.

“둘째 오라버니, 언니가 정말로… 또 아버지께 가서 고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느냐.”

배경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배명월은 다시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걱정하거라. 말은 매서워도 속은 여린 사람이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자의 마음속에도 미묘한 불확실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 년 반 만에 다시 본 금영은 예전보다 훨씬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과 배명월이 조금 가까워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질투를 품고 앙금 갚음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옳지 않았다. 장차 태자비가 될 사람이 그렇게 속 좁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와 배명월 사이는 깨끗했다. 그는 그저 어린 시절 고생이 많았던 배명월을 가엾게 여겼을 뿐이었다.

금영은 배명월의 처소를 나선 뒤, 눈보라 속을 걸어갔다. 하지만 어쩐지 눈보라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한편, 서봉전(栖凤殿).

서 황후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최측근인 궁녀 환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마마, 어젯밤 폐하께서 위명을 보내 내무부에 명하시어 면설원(眠雪院)을 정리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어제 폐하께서 한 여인을 취하셨는데, 그 여인을 들이기 위한 준비인 듯하옵니다.”

환옥의 말에 서 황후가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냈느냐?”

환옥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들인 여인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서 황후가 다시 물었다.

환옥은 긴장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예… 그건…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서 황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면서, 너희를 대체 왜 있는 것이냐!”

그는 여색을 밝히는 황제는 아니었다. 후궁 또한 모두 정식 간택을 거쳐 들여온 이들이었고, 규례를 벗어나 함부로 여인을 들인 적이 없었다.

서 황후는 오랫동안 봉인(凤印: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이 새겨진 인장)을 쥐고 후궁의 모든 일을 손바닥 보듯 관리해 왔었는데, 황제가 그녀의 통제 밖에 있는 여인을 들이는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서 황후는 직감했다. 이 일은 결코 단순하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황제로 하여금 규례를 깨게 만든 여인이라면, 결코 평범할 리 없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서 황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today
8화- 이집이나 저집이나 줏대없고 단세포에다 재수없는 오라비들이 꼭 사달을 내요 준내 역겨운 집구석이다 부모란것들부터 하찮기 그지없는 약혼자까지 퉤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1078화

    금영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태후마마께서 과한 말씀을 하시옵니다. 폐하와 황후마마 사이의 일은 집안일이면서 동시에 나라의 일이옵니다. 신첩처럼 일개 후궁에 불과한 사람이 어찌 폐하의 결정을 좌우할 수 있겠사옵니까?”“신첩은 태후마마께서 황후마마를 아끼시는 마음이 크시다 보니 잠시 마음이 흐트러지신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그러니 방금 하신 말씀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겠사옵니다.”금영의 태도는 더없이 공손했고 말투 또한 너그러웠다.금영은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만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태후라 해도 지금 자신의 신분을 무시하고 함부로 죽이려 들 수는 없었다.기껏해야 벌을 조금 받고 억울한 일을 겪는 정도일 터였다.하지만 그것조차 금영에게는 딱히 손해가 아니었다.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할수록 황제는 더욱 마음 아파할 테니까.황제가 태후에게 직접 따져 묻지는 않는다 해도, 금영이 당한 만큼의 화살은 결국 몇 배가 되어 서 황후에게 돌아갈 터였다.태후가 서 황후를 위해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서 황후의 자리도 그만큼 더 위태로워질 것이었다.그러니 지금 금영이 이토록 태연하게 태후를 상대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금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다만 신첩은 황후마마가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태후마마처럼 친딸을 대하듯 아껴 주시는 어른이 곁에 계시니 말이옵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태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조금 전 금영이 은근히 비꼬았을 때조차 이 정도로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다.태후가 차갑게 말했다.“배금영, 끝까지 나와 맞서겠다는 것이냐?”금영은 조금 놀란 듯 태후를 바라보았다.말이 상당히 거칠었다.정말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가?금영으로서도 뜻밖이었다.아직 속에 쌓아 둔 말이 한참 남아 있었는데, 선황 때부터 후궁을 쥐고 흔들던 사람이 이 정도 말 몇 마디에 벌써 평정을 잃을 줄은 몰랐다.금영은 기세를 몰아 태후의 속을 조금 더 긁어 볼 생각이었다.바로 그때였다.옆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다급한 목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1077화

    “황제 앞에서는 그렇게 말도 잘하더니, 지금은 어째서 입을 다물고 있느냐?”태후가 금영을 흘끗 바라보았다.금영은 태후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눈매를 고분고분하게 내리깔았다.“신첩은 그저 이 일이 신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황후마마께서는 평소 신첩을 살뜰히 대해 주셨사오니, 신첩 또한 그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하지 않겠사옵니까. 어찌 황후마마의 후의를 저버릴 수 있겠사옵니까?”금영이 다시 공손히 말을 이었다.“그러니 태후마마께서 신첩을 오해하신 것이옵니다.”그제야 금영은 태후가 굳이 이곳에서 자신을 막아 세우고 곤란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아차렸다.태후는 일부러 자신이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자신이 불만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태후는 곧바로 쓰러진 뒤, 금영 때문에 기절했다고 몰아갈 수도 있었다.그렇게 되면 황제는 어떻게 생각할까?황제가 이번에도 금영을 감싸 준다 해도, 귀비인 그녀가 태후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만으로 조정의 신하들이 들고일어나 비난할 명분은 충분했다.황실에는 예로부터 후궁이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가 있었다.하지만 후궁에서 정말 패륜적인 일이 벌어지거나 요사스러운 여인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다면, 조정 신하들 역시 상소를 올릴 수 있었다.태후는 지금 제 몸을 직접 판에 올려놓은 것이었다.금영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서 황후를 위해서라면 태후도 참으로 몸을 아끼지 않는군.전에는 그저 태후와 서 황후가 각별한 데다 서가를 위해서라도 서 황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후가 서 황후를 아끼고 감싸는 정도는 이미 집안의 이익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정말 서 황후가 그토록 소중한 것일까?조금 전 금영의 말은 분명 태후를 은근히 비꼬는 것이었다.하지만 겉으로만 놓고 보면 어디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서 황후가 정말 온화하고 어질게 금영을 대해 주었다면 금영 역시 당연히 그 호의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1076화

    금영이 협방전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내관 차림의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길을 막았다.금영은 뜻밖이라는 듯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귀비의 자리에 오른 뒤로 궁 안을 제멋대로 드나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가 감히 그녀의 앞길을 함부로 막는 일도 거의 없었다.해수가 얼굴을 굳히며 호통쳤다.“방자하다! 지금 누구의 앞을 막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앞장선 내관이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소인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원 귀비마마이신 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폐하께서 여비마마께 근신을 명하셨으니 누구도 함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사옵니다.”금영은 그 말을 듣자 조금 우스워졌다.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니.그렇다면 어제 손 상궁은 어떻게 들어갔단 말인가?금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래도 본궁이 꼭 들어가겠다면 어찌할 테냐?”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등 뒤에서 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 귀비는 이제 궁규까지 무시할 셈이냐? 참으로 위세가 대단하구나.”목소리 자체는 더없이 온화했다.하지만 그 온화함 속에는 묘하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냉기가 배어 있었다.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운이었다.서 황후가 후궁에서 이제 막 도를 튼 요괴라면, 눈앞의 태후는 천 년은 묵은 요괴라 해도 과하지 않을 듯했다.금영은 곧 얼굴에 공손한 미소를 띠었다.몸을 돌린 그녀는 태후 앞에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태후마마를 뵙사옵니다.”태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감히 못하겠다고? 내가 보기엔 못 할 짓이 없어 보이는구나.”그러고는 금영을 한번 흘겨보며 물었다.“그런데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금영이 공손히 대답했다.“신첩이 어제 서봉전에서 여비마마를 거들어 몇 마디 했다가 오히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듯하여, 직접 찾아와 사과드리려 했사옵니다.”물론 되는대로 둘러댄 말이었다.허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하지만 금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1075화

    여비는 평소 영산도 앞에 향을 피우는 일만큼은 늘 직접 챙겼다.그만큼 각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여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은 향을 피우지 마라.”자운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예?”여비는 피곤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본궁이 좀 지쳤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자운은 오늘따라 제 주인이 유난히 이상하다고 느꼈다.손 상궁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다녀간 뒤로 여비는 한층 더 이상해졌다.몹시 괴로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전처럼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한 죽은 기색이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수강궁.밖에 나갔던 손 상궁이 돌아와 태후에게 복명했다.“태후마마, 분부하신 말씀은 모두 전하고 왔사옵니다.”손 상궁이 목소리를 낮춰 아뢰었다.그러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다만 여비마마께서는 원 귀비마마를 해칠 생각이 없는 듯하옵니다.”태후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곧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다.”손 상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태후마마, 예전에는 황후마마께 원 귀비마마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차라리 경춘궁 쪽을 더 경계하라 하지 않으셨사옵니까?”태후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조금 전 머리가 아프다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태후가 담담히 말했다.“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하지만 감히 여비와 손을 잡고 황후를 끌어내리려 들었으니, 나도 더는 저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지.”단순히 총애를 두고 다투는 정도였다면 태후 역시 굳이 나설 생각은 없었던 듯했다.하지만 오늘 금영과 현 귀비가 벌인 일은 태후가 정해 둔 선을 넘어 버렸다.태후가 싸늘하게 말했다.“황제는 이제 갈수록 황후를 용납하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황제가 그리 애지중지하는 계집애를 용납해 줄 이유가 없지!”태후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본 손 상궁이 얼른 달랬다.“태후마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태후의 표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1074화

    여비는 이미 협방전으로 돌아온 뒤였다.그녀는 전각 안에 걸린 영산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초점 잃은 눈빛은 마치 넋이라도 빠진 사람 같았다.곁에 있던 자운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마마, 대체 어찌 그러시옵니까?”“오늘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에게서 살점 한 조각이라도 뜯어내어 아기 황자의 혼백을 위로하자고 하지 않으셨사옵니까?”자운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여비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염주만이 떠올랐다.그리고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던 손 상궁의 말도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여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본궁은 태후마마를 뵙고 싶다.”자운이 순간 멈칫했다.“마마?”바로 그때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손 상궁께서 여비마마를 뵙고자 하시옵니다.”여비가 유폐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의 출입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게다가 손 상궁은 태후의 사람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손 상궁이 안으로 들어왔다.여비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손 상궁이 자운을 한번 바라보며 말했다.“물러가 있거라.”자운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노비가 여기 남아 마마를 모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손 상궁의 차가운 시선이 여비에게 향했다.그제야 여비가 자운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자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췄다.“노비, 물러가겠사옵니다.”전각 안에 아무도 남지 않자 여비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섰다.그녀는 손 상궁의 손을 덥석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그 염주가 어찌 태후마마의 손에 있는 것이냐?”손 상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태후마마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옵니다. 그 염주가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묻혀 있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시어 친히 아홉 해 동안 고이 보관해 오셨사옵니다.”말을 하던 손 상궁이 잠시 뜸을 들였다.“태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마마께서 고분고분 뜻을 따르신다면 훗날 반드시 그 염주를 온전한 모습 그대로 돌려주시겠다고 하셨사옵니다.”“하지만 마마께서 또다시 태후마마의 심기를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1073화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빛을 가라앉혔다.그러다 이내 입을 열었다.“되었네. 딱히 더 할 말도 없군.”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이상 평범한 사람처럼 마음속 감정을 남들 앞에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금영은 황제의 품에 기대어 있다가 나직이 물었다.“태후마마 때문이옵니까?”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순간 소녕전 안의 공기가 조금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금영은 황제의 가슴을 살짝 밀며 그의 품에서 일어나려 했다.“신첩이 쓸데없는 말을 하였사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지만 황제는 팔에 힘을 주어 금영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녀가 품에서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았다.잠시 뒤 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또 뭘 용서해 달라는 것인가?”“자네 마음속에서 짐이 그리도 속 좁은 사람인가? 고작 자네 말 한마디 때문에 죄를 물을 사람으로 보이는가?”금영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찌 되었든 신첩이 태후마마의 일에 함부로 말을 보태서는 안 되었사옵니다. 신첩이 분수를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옵니다.”황제의 목소리가 순간 서늘해졌다.“짐이 보기엔 분수를 지키지 못한 사람은 어마마마이시네.”황제가 이런 말을 남들 앞에서 입에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하지만 오늘 금영이 먼저 그의 속내를 정확히 짚어 내자, 황제 역시 더는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황제는 오늘 현청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눈빛을 깊게 가라앉혔다.그 모습을 본 금영은 금세 알아차렸다.황제는 이미 태후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금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폐하, 신첩은 오늘 태후마마께서 황후마마를 감싸신 일 때문에 폐하의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하지만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의 어머니이시지 않사옵니까. 세상의 어머니들은 대개 제 자식을 아끼는 법이옵니다.”금영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다시 이었다.“태후마마께서 그리하신 데에도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으셨을 것이옵니다.”“그리고 신첩은 믿사옵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