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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서린화
배경천은 금영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그러나 영안후부는 본래 규율이 엄격한 집안이기에, 아무리 불만이 커도 지금은 더 말할 수 없는 배경천은 그저 냉소만 흘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자마자, 해수는 곧바로 문을 닫고 금영의 옷시중을 들려 했다. 하지만 금영은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너는 먼저 나가 있거라. 옷은 내가 알아서 갈아입을 테니.”

담담한 말투였지만, 해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제 설림에서 돌아온 뒤로 금영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 결국 준비해 온 옷가지들을 침상 곁에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방 안에 혼자 남자, 금영은 천천히 겉옷을 벗어냈다. 눈처럼 흰 살결 위로 퍼진 것은 온통 푸르스름한 흔적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얼굴이 미묘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회귀 전에도 그러했듯, 그녀는 여전히 어린 축에 속한 규수였고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그녀가 부추긴 탓도 있겠지만, 그 냉정해 보이던 황제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금영은 애써 어제 상황을 머리에서 지우며 재빨리 옷으로 몸에 남은 흔적을 모두 가렸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없는지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검은 비단처럼 윤기 나는 머릿결이 푸른 빛을 띠는 옷자락 위로 떨어뜨린 모습, 그녀는 어느 때보다 단정하고 청아했다. 어제 황제를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예법 준수에 아주 철저한 명문가 규수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겉모습일 뿐, 과거 규율과 순결을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그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었다. 순결, 명성, 규범이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깨부술 생각이었다. 다시는 가문의 체면 따위를 들먹이며 압박하려는 이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금영은 거울 앞에 앉은 채 결의를 다졌다. 그렇게 잠시, 밖에서 해수가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가씨, 다 준비되셨을까요?”

금영은 마지막으로 손에 들린 봉황 비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머리에 꽂았다. 태자비 자리는 더 이상 탐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순순히 양보할 생각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이 집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이용해 이들의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조용히 물러나도 표적이 될 터, 차라리 만천하에 자신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나았다.

고요한 방과 달리, 밖에는 매서운 눈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영은 차를 한 잔 더 마신 뒤 토끼털 망토를 걸치고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배경천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버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녀를 발견한 배경천은 얼굴이 굳어지며 억누르던 분노를 그대로 터뜨렸다.

“배금영, 당장 나와 함께 명월에게 사과하러 가자!”

그러면서 곧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금영은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합니까?”

배경천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네가 명월을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아버지께서 명월이 금풍대에 간 것을 어찌 알았겠느냐? 명월이는 너를 진심으로 언니로 여겨서 사실대로 말했을 텐데, 너는 그런 아이를 잔인하게 배신하지 않았느냐!”

“하, 잔인하다고요?”

금영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 가지고 잔인함을 운운한다면, 회귀 전에 이 집안 사람들이 그녀에게 저지른 일들은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의문이다.

가벼운 웃음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엔 상처가 묻어나왔다. 배경천은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살짝 흔들렸고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누그러뜨렸다.

“조… 조금 전엔 내가 말이 지나쳤다. 하지만 태자와 명월이가 만난 일을 아버지께 고한 건 분명 네가 잘못했다. 어젯밤에 그 아이가 필사를 하다가 촛대를 엎질러 손까지 데었다!”

그 말을 하며 배경천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때, 금영에게도 비춰주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라도 가서 사과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아이는 마음이 여리니 사과만 한다면 분명 용서해줄 것이다.”

찬바람에 실린 눈송이가 금영의 맑은 눈동자 위로 내려앉으며 녹아내렸다. 그녀는 점점 눈가가 촉촉하게 젖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찬 공기가 폐부까지 파고들자 뜨겁게 뛰던 심장은 단번에 식어 버렸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금영은 한껏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사과를 해야 합니까?”

배경천은 자신이 이 정도로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물러서지 않자 다시 분노가 끌어올랐다. 하지만 일단은 불만을 누르며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

“금영아, 갑자기 없던 동생이 나타나니 불편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네가 그동안 누렸던 모든 것들이 다 누구 덕인지 잊으면 안 된다. 명월이를 그만 괴롭히고 이제 화해하거라.”

금영은 담담히 대답했다.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리하지요.”

그녀도 이제 막 회귀한 참이었고 아직 많은 것이 낯선 상황이었다. 배경천이 무슨 이유로 찰떡같이 배명월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든 개의치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정말 고집불통이구나!”

배경천은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더 이상 금영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다짜고짜 거칠게 금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월에게 반드시 사과해야 해!”

배경천은 어렸을 적부터 무예를 익혀 힘이 남달랐다. 결국 금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고, 거의 끌려가다시피 눈보라를 맞으며 배명월의 거처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 뜻밖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태자가 배명월의 곁에서 아주 정성스럽게 약을 발라주고 있었던 것이다. 금영과 함께 그 광경을 목격한 배경천은 자기도 모르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모두가 배명월이 진짜 영안후부의 적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태자비 자리는 과거 조부가 직접 성지를 청해 결정된 것이었기에, 어떤 사정이 있든, 절대로 대상이 바뀔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금영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런데 태자와 배명월이 또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또다시 영안후에게 고자질하러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혼약자도 아닌 두 사람이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적녀의 자리에 배명월이 있었다면 태자비 자리도 금영의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배명월도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를 뵙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금영의 머리 위, 봉황 비녀가 꽂혀 있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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