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오 선생님 기다린 남자분 꼭 연예인 같아요. 맞죠? 일반인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지? 키도 엄청 크고요!”
“난 지난번에 본 적 있지. 그때도 ER에 왔었어. 오 선생님 당직 때. 아마 오 선생님 전 남편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련의 시절에도, 한결이 호감을 가진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처음엔 그런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가끔은 그런 관심을 즐긴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쏠려 있을 때라면.
한 번 마주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 처음 태성의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그 남자, 연우석의 몸에는 이상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고작 배우지망생 주제에 눈빛은 대담했고, 상대의 속을 꿰뚫듯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수십 년씩 내공을 쌓은 배우들의 그것처럼 만만치 않은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으니까.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며 분위기는 또 어떠했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같은 남자인 한결의 눈에도 첫인상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재수 없게도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왜 아직도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런데, 그래서 뭐?
“거 일들 안 하나?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 있을 때 차트도 정리하고 어? 환자들 상태도 체크하고, 어!?”
애먼 데로 화살이 돌아갔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며 한결은 결국 연두를 호출했다.
엄마 친구 딸인 이유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사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엄친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 준 탓에 요즘 그의 심사가 이토록 사납다.
“바쁘신 교수님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언제 보아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연두 앞에서 한결은 대뜸 말을 꺼냈다.
“에프터 서비스.”
“에고. 단영이 일이라면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한결은 테이블의 맥주를 단숨에 비우곤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퍼부었다.
“두 사람, 잘 알아? 알면, 어느 만큼?”
뜻밖의 물음이었다.
연두는 이 사람이 설마 진심인가 싶어 한결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나 한결은 그런 연두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캐물었다.
“보니까 똑똑은 해보이던데 어쩌다가 그런 놈을 만난 거야?”
“똑똑, 누구요? 아, 단영이? 그렇지. 우리 단영이가 예쁜데다 똑똑도 하지. 과고 출신에 고등학교 때도 세 손가락에 드는 수재였으니까. 비록 사정이 그래서 졸업은 못했지만.”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왜?” “뭐, 수재는 수재였는데 부뚜막에 조금 먼저 올라 간 수재였다고 해야 하나. 연우석 매력에 푹 빠진 거죠.” “매력은 무슨. 변변한 직장도 없는 놈이”한결은 속으로 씹듯 중얼거렸다.
그랬다. 생각해 보니 정말 거죽만 멀쩡한 놈이었다. 키만 멀대같이 커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단숨에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는 게 그게 더 괘씸했다.“지금 질투하십니까?”
“질투는 무슨.” “질투 맞는데, 뭘. 미안해요, 오빠. 소개팅은 없었던 일로 합시다. 원래 예쁜 애 옆에 예쁜 애라고 동창 중에 예쁜 애들 많으니까 내가 다른 친구…….”연두가 새로운 소개팅 상대 물색을 위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자 한결은 잔을 들던 손을 탁 내려놓으며 말을 잘랐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만났는데, 알아버렸는데. 그게 어떻게 없던 일이 될 수 있나. 원망이 배어든 표정이 저절로 드러났다.“됐고, 그럼 두 사람 이혼은 언제 한 거야? 결혼, 이혼 경력 있다면서.”
“그게…… 한 4개월 쯤 됐나. 헤어지기 전까지는 둘이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대화 중에 말허리를 잘라먹는 건 분명 한결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단영의 이야기는 잠자코 기다릴 수만 없게 된다. 그 사실이 한결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게 분명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요즘은 뭐랄까. 자꾸 연애 처음 하는 사람마냥 둘이 썸을 탄다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단영이 마음이 그래요. 여전히 그쪽에 가 있는 거지.”연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결은 우석의 지긋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결국 그의 뒤를 따라나섰던 단영의 뒷모습까지 함께 겹쳐지자 알 수 없는 불쾌와 굴욕이 가슴을 치받았다.
“마음에 안 드네, 정말.”
솔직히 이쯤 듣고 나면 자연스레 머리가 맑아질 거라 생각했다. 오랜만의 소개팅이라 그런 거려니. 오단영이라는 인턴에 대한 미련도 자연스레 정리가 될 거라 여겼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묘한 승부욕이 자꾸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석이가 좋아한다 그랬대요. 그래서 더 흔들리는 것 같고. 아무래도 자식까지 나눈 사이니까 어떻게 하루 아침에 무 자르듯 인연이 딱 끊기겠어요, 안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정 미련이 남으면 만나 봐라. 다시 연애도 해보고 질러 봐라.”
“거참 무책임한 친구네.”연두는 한결이 무얼 탓하는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런 사람을 소개시켜 준 걸 탓하고 있는 건가, 아님, 단영의 등을 떠밀어 준 걸 질책하는 건가.
하지만 한결은 더 묻지 않았다. 술값을 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생각했다.
들을 건 다 들었다. 더는 친구란 이름으로 제3자의 입을 통할 단영의 얘기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단영이 올린 휴가 신청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을 반려해 두었다. 추후 다시 올라온다 해도 승인할 생각은 없었다. 치기라면 치기였고, 이기심이라면 이기심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결심이 확고했다. 단영과 우석, 두 사람의 얼굴이 눈앞에 겹쳐 떠오르는 한,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결심이 확고하기로는, 두 사람의 사정도 비슷했다.
오늘 밤 함께 있겠다는 우석의 간절한 마음이 걸음을 단영의 집으로 이끌었고, 비좁아 서로의 숨결이 더 잘 들리는 방 안에 두 사람을 세워두웠다.
문을 닫자마자 방 안에 고여 드는 더운 공기.
서로의 숨소리가 한층 더 선명하게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 그 친밀함이 오히려 더 어색한 기류를 만들어냈다.
사소한 말 한 마디조차 잘못 꺼내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맥주 마실래?”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스스럼없이 툭 흘러나온 우석의 말에 단영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저도 모르게 허를 찔린 듯 황급히 냉장고로 향해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우석이 캔을 따서 건네주는 순간,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금속과 묘하게 지난 밤의 기억이 겹쳐졌다.
벚꽃이 흩날리던 밤, 그 알싸한 기억들이.
‘너랑 연애도 할 거고, 잠도 잘 거야. 하고 싶은 거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스스로 입 밖에 낸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늦은 밤 자신의 방 안에, 자신의 침대 위에서 나란히 맥주를 마시고 있는 상대가 우석이라는 사실은 솔직히 더 현실감이 없었다.
“네가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 그날 네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으니까.”
우석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맥주를 마시는 동작조차 조심스럽게 여겨질만큼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고르고 또 고르는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널 놓쳐버리는 선택을 한 게 나라는 걸 매일 후회해.”
그 고백이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단영의 귓가에서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눈앞에서 타오르는 우석의 눈빛이 너무 뜨겁고 진중해서 단영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단영아, 나 봐.”
한 뼘 거리를 좁혀온 우석의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단영의 심장은 마치 몸을 찢고 튀어나올 듯 쿵쿵 뛰었다.
“…… 정말 한 번도 날 원한 적이 없어?”
그 말이 단영의 귓속에서 오래 울렸다.
동공이 흔들리며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둔 진심을 더는 버틸 수 없게 했다. “아니!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네가 뭘 알아? 네가 내 마음을 알아? 그래! 널 원망했던 건 사실이야. 부인하지 않을게. 헤어짐을 결심했을 만큼 네가 미울 때도 있었어. 그런데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게 뭔 줄 알아? 네가…… 날 원하지 않는단 거야!”마침내 터져 나온 고백에 단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을 감아버린 건 더 이상 우석의 뜨거운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우석은 그 말에 전류라도 흐르듯 가슴이 저릿해졌다. 미움보다 더 깊은, 자신을 향한 갈망이 여전히 단영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 그 깨달음이 치명적인 희망이 되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길처럼 솟구쳤다.
내가 너를 안아도 될까. 다시,너를.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단영의 떨리는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누른 순간, 오래 억눌러온 갈망이 폭발하듯 타올랐다. 단영도 그 열기에 휘말려 눈을 감았다.
우석의 키스는 집요하면서도 간절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고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더 격렬하게 뛰었다.
우석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는 고요 속에 남아 있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뜨겁게 이어지던 감각이 순식간에 멈추자 그녀는 그 자리에 홀로 내던져진 듯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우석의 시선.
깊고 간절한 눈빛이 단영을 사로잡았다.“말해 줘. 날 원한다고.”
그가 내뱉는 목소리는 낮게 떨렸고, 그 떨림에는 오랜 기다림과 갈증이 실려 있었다.
단영은 숨조차 멎어버린 듯 목이 바짝 말랐다. 귀를 가득 채우는 심장 고동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우석의 눈동자가 단영을 파고들었다.
“날 원한다고 말해주라.”
그의 재촉은 강요가 아니었다.
그저 수없이 기다려 온 순간, 이제는 듣고야 말겠다는 절박한 호소였다.단영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가 힘없이 풀어 내렸다. 머뭇거릴 이유가 더는 없었다. 그토록 오래 눌러왔던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 올랐다.
단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해. 전부. 다.
그 기꺼운 승낙에 우석의 숨이 거칠게 흔들렸다. 기다림 끝에 풀려난 사람처럼 그는 단영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 망설임처럼 걸려 있던 옷자락이 그의 손끝에서 무력하게 흘러내렸다.
거추장스럽던 장벽이 하나씩 벗겨지려던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를 가르고 우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어서 단영의 핸드폰도 몸살을 해댔다.
수아였다.
핸드폰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멈칫 굳어진 동작에 웃음이 터졌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린 단영은 침대에 그대로 뻗어 버렸고, 우석은 허탈함에 털썩 단영의 곁에 몸을 뉘였다.
단영이 전화를 받았다.
“으응. 수아야.”
- 엄마 지금도 일해? “아니.” - 그럼 지금 수아한테 와 줄 수 있어? “엄마 보고 싶어?” - 보고 싶지. 아빠도 아직이야. 아빠도 엄마 보고 싶댔는데. “그랬어?”단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우석을 바라보았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석도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듯 웃음기를 숨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가 갈까?”
- 진짜? “아빠랑 같이!”우석과 단영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수아의 목소리에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단영의 눈동자가 우석의 곁에서 안온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이른 시간 출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겠다는 단영을 달래고 우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이든 수아의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희수가 앉아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네.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부러 멋쩍은 미소를 짓곤 애교를 부리며 수아를 번쩍 안아 드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희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임 여사, 지금 울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우석은 정색을 하며 희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구나? 혹시 어디 아파?” 희수의 앞에 바짝 얼굴을 마주댄 우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맑고 선한 눈동자, 절대 나쁜 짓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는 건지 좀 말해 보지?” 어려운 얘기였지만 말을 꺼내야만 했다. 희수는 간신히 운을 떼었다. 쉽지 않은 얘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희수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우석에게 변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래서 식당이든 커피숍이든 우석에게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주고 싶어 남아 있던 아버지의 유산과 살고 있던 집을 담보해 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황망한 결론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주변보다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대출금은 다 날린 거야?” 우석이 정신을 차리려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지, 우석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 희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석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겉돌기만 하던 시간을 거스르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마
“오 선생님 기다린 남자분 꼭 연예인 같아요. 맞죠? 일반인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지? 키도 엄청 크고요!” “난 지난번에 본 적 있지. 그때도 ER에 왔었어. 오 선생님 당직 때. 아마 오 선생님 전 남편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련의 시절에도, 한결이 호감을 가진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처음엔 그런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가끔은 그런 관심을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쏠려 있을 때라면. 한 번 마주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 처음 태성의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그 남자, 연우석의 몸에는 이상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고작 배우지망생 주제에 눈빛은 대담했고, 상대의 속을 꿰뚫듯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수십 년씩 내공을 쌓은 배우들의 그것처럼 만만치 않은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으니까. 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며 분위기는 또 어떠했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같은 남자인 한결의 눈에도 첫인상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재수 없게도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왜 아직도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런데, 그래서 뭐? “거 일들 안 하나?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 있을 때 차트도 정리하고 어? 환자들 상태도 체크하고, 어!?” 애먼 데로 화살이 돌아갔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며 한결은 결국 연두를 호출했다. 엄마 친구 딸인 이유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사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엄친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 준 탓에 요즘 그의 심사가 이토록 사납다. “바쁘신 교수님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언제 보아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연두 앞에서 한결은 대뜸 말을 꺼냈다. “에프터 서비스.” “에고. 단영이 일이라면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결은 테
“나 일하는 곳 처음 와 보지? 한 번 구경할래?” 그날 밤, 단영은 처음으로 우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JULY를 찾았다. 단영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손님맞이 단장을 마친 라이브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태성은 놀라움이 넘어서 경탄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그런 단영의 모습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나 처음 본다. 맞지? 그…….” 처음으로 우석이 가게에 데려온 여자였다. 우석과 함께 등장한 단영을 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태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호칭을 고르는 새 우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무대 위 기타가 놓인 스툴 앞에 앉았다. “나 여기서 노래해. 옆에선 소극장 공연도 하고 있고.” 우석은 그동안 밤마다 늦었던 이유를 변명이라도 하듯 기타를 둘러매며 중얼거렸다.“어우, 우석이 노래 잘해요. 완전 가수! 가수! 우리 카페 스타죠. 스타!” 그러나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려 기를 쓰는 태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난 번에 명함 받아둔 걸 전해주려 그랬는데…… 내가 어디다 뒀더라?” 태성이 주머니며 카운터 앞을 부산하게 뒤적거리는 동안, 기타 튜닝을 마친 우석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형, 나 그런 거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좀 받지? 아니, 받아야 돼, 너!” 태성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하나도 아니고 수 개의 기획사 명함을 단영에게 건넸다. 막 기타 연주를 시작한 우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얼결에 명함을 받아든 단영의 눈이 이게 뭔가 싶어 휘둥그레지자 태성은 자기가 마치 우석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떠들어댔다.“막 스무 살이나 됐을까. 어디서 기가 막히게 잘생긴 놈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땐 아직 가게가 자리도 잡지 않았을 땐데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했죠. 노래 같은 거 못해도 무대에 그냥 세워 놓기만 해도 완전 그림이 되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실력은 더 기가 막히네? 보니까 한예종 학생이래. 키 크지,
“간단한 처치예요. 봉합, 소독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오 선생은 가서 허기나 채우고 오지? 십분만 쉬겠다면서?” 환자 하나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이례적일 정도로 ER 내부가 고요했기 망정이지 옥신각신하는 한결과 단영을 잠자코 보던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스페셜 리스트까지는 됐고, 간단한 처치라니 여기, 오단영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는 친근한 표현에 한결의 눈빛이 일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해 나갔다.“개인적인 친분이라면 나도 좀 있지 않나? 우리, 서로 구면인 것 같은데. 배우 지망생 씨.” 태성의 가게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우석도 한결의 존재가 JULY에서 잠시 스쳤던 남자와 동일인이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우석은 굳이 단영을 사이에 두고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한결은 먼저 당당히 알은 체를 해왔다. 그 분위기가 묘했다. 단영은 그 틈을 비집고 다가와 우석의 치료에 열중했다.“많이 베었네. 어쩌다 그랬어?” “사과 깎다가. 수아가 사과 먹고 싶대서.” 밥은 왼손으로, 글씨는 오른손으로, 양손을 쓰기는 하나 배트를 잡는다던가 공을 던진다던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보니 우석은 칼질이 몹시 서툴렀다. “어머니께 좀 부탁하지 그랬어.” “잠깐 외출하신 틈에.” “몇 바늘 꿰매야 할 거야. 덧나지 않게 약 잘 챙겨 먹어.” 성가시다는 듯이 얘기하곤 있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우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고, 단영은 손을 이렇게 다쳐 가지고 와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우석이 얄미워 힐긋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료와 함께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줄곧 느껴지던 어색하고도 따가운 시선. 그 눈빛의 출처를 감지한 단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 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 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 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