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순간 연두의 눈이 충격으로 일렁였다.
“그러니까 지금 둘이 같이 자질 않았단 소리야? 같이 살면서 한 번도? 그게 가능해?”
“수아 가진 거 알고 나서 우리집 어땠는지 알지. 내쫓기듯 버림받고 구걸하다시피 그 집에 들어갔던 나야.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린 정상적인 시작일 수 없었어. 10년 가까운 시간을 한 집에 머무르다시피했지만 그게 다야. 우린 단 한순간도 부부였던 적이 없었어. 물론 마음까지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단영은 웃고 있었다.
자조하듯 웃는 그 웃음은 벗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다.마치 몸의 중심이 땅속 깊이 박혀버린 것처럼 연두는 친구에게서 조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헤어지자 그랬어. 더는 그 얼굴을 보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이번 만큼은 연두도 아무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잠자코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밖엔.
“겨우 좀 숨통이 트이나 했는데 정말 지독하지? 여전히 그 애는 날 안 놓아준다. 이렇게 또 흔들어 놓음 난 어쩌라고…… 난 어떻게 살라고…….”
단영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태껏 잠자코 친구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던 연두가 진심을 운운하는 단영의 안타까운 모습에 더는 갑갑함을 참지못하고 감정을 폭발시켰다.“그러는 넌? 너는 솔직하게 네 마음 보여준 적 있어? 연우석한테 한 번이라도 네 마음 보여준 적 있냐고! 네 말처럼 서로 얼굴 보는 게 괴로워 피할 줄만 알았지 널 진심으로 원한다고 네 마음 털어 놓은 적은 있니?”
단영은 얼마 전 우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날 원하지 않았던 건 너야! 날 끔찍해 했던 건 너였다고! 왜 한 번도 널 건드리지 않았냐고? 네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남들 대학갈 때 아이 키우고, 남들 놀 때 혼자 공부하고, 그러면서 애 끓이고 낮아졌던 네 자존감이 다시 입시 준비하고, 대학 생활하고 하면서 솔직히 난 좀 회복한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 연우석이 아니라 네가 문제였네. 아직도 진창에서 헤매고 있는 네 바닥 같은 자존감이 널 갉아먹고 있는 거라고!” 좋아하면 하는 거고, 사랑하면 하는 거지, 고작 그 따위 연애 감정 따위가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란 말인가.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서 남부러울 것 없이 똑똑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가 이렇게 눈물 바람을 해야 하는 건지.
연두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그래, 두 사람 분위기가 내가 봐도 좀 이상하다 했어. 연우석이 네가 좋대? 그럼 질러! 너도 좋다고, 만나고, 연애하고 다 해 봐! 복잡하게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대체 뭔데?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데?”
“진심이 아니면 어떡해?”
이번에는 단영도 날을 세웠다. 연두는 그 모습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이 바보! 어우, 이 바보야! 진심이 아니면 이혼한 전처를 왜 집까지 데려다 주고 데리러 와? 진심이 아님, 왜 네가 요구하지도 않은 위자료를 꼬박꼬박 모아다 갖다 바쳐? 애초에 진심이 아님 너랑 수아, 못 받아들였어!”
연두의 속터지는 고함이 그대로 단영의 귓전에 날아들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한 집에 살면서 한 번도 잠자리를 안 할 수가 있지? 건드리지 않는 놈은 뭐고 건드리지 않는다고 가만있는 건 또 뭐야?”연두는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에라이!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 이것들아!”
비록 표현은 다소 격했으나 그 마음 한구석에는 단영의 마음이 보다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 * * 이튿날, 전날의 숙취를 달랠 새도 없이 유독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바쁜 ER에서 밥 먹을 새도 없이 숨가쁘게 일하고 있던 단영이 잠시 스툴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는데, 그 시선과 정확히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전날 밤에도 집 앞까지 찾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돌아갔던 남자.퇴근 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저도 모르게 어지러워 한 번 휘청하고 말았는데,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을 들춰 안고 응급실로 달렸던 그 남자.
바로, 서한결 교수였다.
단영은 잽싸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부러 무시하곤 그 길로 자리를 털고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십분만요. 잠깐 허기만 채우고 올게요.”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곤 재빨리 복도를 빠져 나가려는데, 안타깝게도 덜미를 잡혔다.
“그 허기, 나도 같이 채웁시다.”
불편한 대화, 불필요한 만남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던 단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영은 한결에게 붙잡힌 팔을 빼어내며 일고의 가치도 없이 거절의 뜻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묵직한 인기척을 느꼈다.
복도 저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익숙한 실루엣, 기시감이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가 어젯밤의 공기를 떠올렸다.‘좋아……해!’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고백 이후, 아직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당황했던 나머지 도망치듯 집으로 달아났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이 지나서야 연두를 만나러 나섰다. 그러니 이렇게 마주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기실 우석은 단영이 ER의 출구를 나올 때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환한 복도 끝, 고무줄 하나로 묶은 머리에 핏기없이 핼쓱한 그 얼굴을 보면서 멀리서도 단영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았다. 그리고 그 곁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 또 다른 그림자 역시도 우석은 똑똑히 알아 보았다.바로, 어젯밤의 그 남자.
우석은 들끓는 속을 감추곤 담담하게 말했다.
“…… 나 다쳤어.”
너무 뜬금없는 한 마디에 단영은 멍하니 눈만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가늠할 겨를도 없이 우석이 조심스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명한 붉은 빛으로 물든 가재손수건. 단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친 손을 본 단영이 더는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곤 감정을 터뜨리며 소리쳤다.“손은 또 뭔데? 왜 그랬는데!?”
다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복도를 크게 복도를 울렸다. 우석은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걱정과 혼란, 자신을 향해 애틋한 무언가가 섞여 있음을 본 순간 묘한 위안이 스쳤다. 다행이라는 안도, 더 깊이 묶이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올랐다.우석은 담담히 입꼬리를 굳히곤 낮게 웃듯 내뱉었다.
“화는 다음에 내고 나 좀 치료해주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영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망설일 여유조차 없었다.
단영은 숨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걸 느끼며 우석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들었다. 따뜻한 체온과 진득하게 스며든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그렇게 단영이 막 손수건을 풀어 상처를 확인하려는 순간,
“아뇨, 환자분 손은 이 인턴 말고, 스페셜리스트인 제가 봅니다.”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긴 하루였다. 이른 시간 출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겠다는 단영을 달래고 우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이든 수아의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희수가 앉아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네.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부러 멋쩍은 미소를 짓곤 애교를 부리며 수아를 번쩍 안아 드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희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임 여사, 지금 울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우석은 정색을 하며 희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구나? 혹시 어디 아파?” 희수의 앞에 바짝 얼굴을 마주댄 우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맑고 선한 눈동자, 절대 나쁜 짓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는 건지 좀 말해 보지?” 어려운 얘기였지만 말을 꺼내야만 했다. 희수는 간신히 운을 떼었다. 쉽지 않은 얘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희수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우석에게 변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래서 식당이든 커피숍이든 우석에게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주고 싶어 남아 있던 아버지의 유산과 살고 있던 집을 담보해 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황망한 결론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주변보다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대출금은 다 날린 거야?” 우석이 정신을 차리려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지, 우석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 희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석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겉돌기만 하던 시간을 거스르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마
“오 선생님 기다린 남자분 꼭 연예인 같아요. 맞죠? 일반인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지? 키도 엄청 크고요!” “난 지난번에 본 적 있지. 그때도 ER에 왔었어. 오 선생님 당직 때. 아마 오 선생님 전 남편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련의 시절에도, 한결이 호감을 가진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처음엔 그런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가끔은 그런 관심을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쏠려 있을 때라면. 한 번 마주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 처음 태성의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그 남자, 연우석의 몸에는 이상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고작 배우지망생 주제에 눈빛은 대담했고, 상대의 속을 꿰뚫듯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수십 년씩 내공을 쌓은 배우들의 그것처럼 만만치 않은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으니까. 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며 분위기는 또 어떠했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같은 남자인 한결의 눈에도 첫인상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재수 없게도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왜 아직도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런데, 그래서 뭐? “거 일들 안 하나?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 있을 때 차트도 정리하고 어? 환자들 상태도 체크하고, 어!?” 애먼 데로 화살이 돌아갔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며 한결은 결국 연두를 호출했다. 엄마 친구 딸인 이유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사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엄친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 준 탓에 요즘 그의 심사가 이토록 사납다. “바쁘신 교수님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언제 보아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연두 앞에서 한결은 대뜸 말을 꺼냈다. “에프터 서비스.” “에고. 단영이 일이라면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결은 테
“나 일하는 곳 처음 와 보지? 한 번 구경할래?” 그날 밤, 단영은 처음으로 우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JULY를 찾았다. 단영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손님맞이 단장을 마친 라이브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태성은 놀라움이 넘어서 경탄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그런 단영의 모습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나 처음 본다. 맞지? 그…….” 처음으로 우석이 가게에 데려온 여자였다. 우석과 함께 등장한 단영을 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태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호칭을 고르는 새 우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무대 위 기타가 놓인 스툴 앞에 앉았다. “나 여기서 노래해. 옆에선 소극장 공연도 하고 있고.” 우석은 그동안 밤마다 늦었던 이유를 변명이라도 하듯 기타를 둘러매며 중얼거렸다.“어우, 우석이 노래 잘해요. 완전 가수! 가수! 우리 카페 스타죠. 스타!” 그러나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려 기를 쓰는 태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난 번에 명함 받아둔 걸 전해주려 그랬는데…… 내가 어디다 뒀더라?” 태성이 주머니며 카운터 앞을 부산하게 뒤적거리는 동안, 기타 튜닝을 마친 우석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형, 나 그런 거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좀 받지? 아니, 받아야 돼, 너!” 태성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하나도 아니고 수 개의 기획사 명함을 단영에게 건넸다. 막 기타 연주를 시작한 우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얼결에 명함을 받아든 단영의 눈이 이게 뭔가 싶어 휘둥그레지자 태성은 자기가 마치 우석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떠들어댔다.“막 스무 살이나 됐을까. 어디서 기가 막히게 잘생긴 놈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땐 아직 가게가 자리도 잡지 않았을 땐데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했죠. 노래 같은 거 못해도 무대에 그냥 세워 놓기만 해도 완전 그림이 되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실력은 더 기가 막히네? 보니까 한예종 학생이래. 키 크지,
“간단한 처치예요. 봉합, 소독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오 선생은 가서 허기나 채우고 오지? 십분만 쉬겠다면서?” 환자 하나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이례적일 정도로 ER 내부가 고요했기 망정이지 옥신각신하는 한결과 단영을 잠자코 보던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스페셜 리스트까지는 됐고, 간단한 처치라니 여기, 오단영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는 친근한 표현에 한결의 눈빛이 일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해 나갔다.“개인적인 친분이라면 나도 좀 있지 않나? 우리, 서로 구면인 것 같은데. 배우 지망생 씨.” 태성의 가게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우석도 한결의 존재가 JULY에서 잠시 스쳤던 남자와 동일인이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우석은 굳이 단영을 사이에 두고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한결은 먼저 당당히 알은 체를 해왔다. 그 분위기가 묘했다. 단영은 그 틈을 비집고 다가와 우석의 치료에 열중했다.“많이 베었네. 어쩌다 그랬어?” “사과 깎다가. 수아가 사과 먹고 싶대서.” 밥은 왼손으로, 글씨는 오른손으로, 양손을 쓰기는 하나 배트를 잡는다던가 공을 던진다던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보니 우석은 칼질이 몹시 서툴렀다. “어머니께 좀 부탁하지 그랬어.” “잠깐 외출하신 틈에.” “몇 바늘 꿰매야 할 거야. 덧나지 않게 약 잘 챙겨 먹어.” 성가시다는 듯이 얘기하곤 있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우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고, 단영은 손을 이렇게 다쳐 가지고 와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우석이 얄미워 힐긋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료와 함께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줄곧 느껴지던 어색하고도 따가운 시선. 그 눈빛의 출처를 감지한 단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 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 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 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