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
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
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
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
“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
‘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을.
사실 우석은 지난 날 단영이 보낸 숱한 불면의 밤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은 울며 보채는 어린 수아 때문에, 또 어느 날은 미래에 대한 막막함 때문에, 독하게 이를 악물고 매일밤 책과 씨름하며 단영은 거의 매일 불면의 밤들을 보냈더랬다.
우석은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단영이 하자면 하는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설령 이별이라 할지라도.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해 볼까?
어쩌면 그때, 우석은 단영이 먼저 이렇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곁에서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오단영이라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봐야 할 바에는 차라리 놓아주는 편이 더 낫겠다고.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었을 때, 우석은 당혹스러웠다.
원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눈앞만 깜깜할 뿐이었다.“다녀왔습니다.”
거실에 아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늦은 시각까지 아빠를 기다리느라 자는 둥 마는 둥 하던 수아가 ‘아빠’를 외치며 쪼르르 달려 나왔다.
“으윽, 아빠 술 마셨지?”
“미안. 술 냄새 많이 지독해?” “아니, 그래도 아빠니까 괜찮아.”대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석은 수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엄마 내일 몇 시에 온대?”
“그게…….” “엄마 빨리 왔음 좋겠다. 엄마 보고 싶어.” “그러게. 보고…… 싶네.”그 순간 부녀의 모습을 잠자코 보던 희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희수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식까지 나눈 두 사람이 그렇게 매정하게 헤어질 필요가 있었을까.
단영의 헤어지잔 말에 한 번 붙잡지도 않고 그러마로 일관한 아들이 못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 속은 오죽할까 싶어 한 번도 겉으로 내색을 하진 않았는데,그렇지. 보고 싶겠지.
도란도란 얘기하는 부녀간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찌릿찌릿 해져온다.
늦은 밤, 수아가 잠든 뒤 읽어주던 책을 내려놓고 우석은 다시 문을 나섰다.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아직 그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미루고 미루다가 그냥 이곳까지 왔다.단영의 집 앞.
이미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오피스텔 불빛은 대부분 꺼져 있고 바람에 나부끼는 간판 소리만이 적막을 흔들고 있었다.
무작정 택시를 타고 달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우석은 그저 단영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 말도 못한 채 발길을 돌리게 되더라도, 멀리서 얼굴 만이라도 보고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답답한 마음의 갈증이 조금은 해갈이 될 것만 같았다.그런데, 하필이면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아무리 교수님이라도 집 앞까지 찾아오시는 건 선을 넘으시는 거 아닌가요?”
“오, 역시 우리 MZ. 말은 참 잘하네. 맞아. 교수님이니까. 내 눈앞에서 쓰러진 사람이 치료도 안 받고 달아났는데 괜찮은 줄은 확인해야지. 말했잖아. 나는 내 식구의 복리후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이라고.”뭐, 쓰러졌다고?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우석은 귓가에 꽂혀드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쿵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은 바로 하시죠. 교수님과 제가 왜 식굽니까?”
“식구가 별거야? 밥 같이 먹음 식구지.”두 사람의 대화 중에 나온 ‘식구’라는 말이 가슴을 사악 할퀴고 지나갔다.
“구내식당에서 밥 좀 먹는다고 그게 ‘같이’는 아니죠. 엄밀히 말해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저는 저대로! 식구라는 말은 좀 불편합니다.”
“어쨌든! 이게 다 오 선생의 그 말도 안 되는 ‘당당당’의 후유증이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주말 오프는 없습니다. 내일 봅시다.”친밀하게 단영의 어깨를 툭 치고는 노골적인 사심을 내비치며 빠져나가는 저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저 남자를 어디에서 봤더라.
그렇게 취기에,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단영을 찾아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맞닥뜨린 우석의 기분은 지독히도 복잡해져 갔다.
야무지게 선을 긋는 단영의 모습이 한없이 기특하다가도 갑작스러운 불안이 한꺼번에 목을 조여 온다.
그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앞으로도 이 집 앞을 찾아오는 놈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체 뭘 믿고 저 손을 놓아버린 걸까.
우석은 끓어오르는 후회와 회한이 빚어낸 안타까움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앞으로 다가갔다.
“우, 우석아!”
그를 알아보고 당황한 단영의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그 눈동자에 담긴 한 토막을 보는 우석의 눈빛도 사정없이 일렁였다.
“야, 너는……! 내가 널, 이러라고 보내준 줄 알아?”
거친 숨이 목구멍을 태우며 터져 나왔다.
우석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단영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아팠으면 말을 하던가! 쓰러졌으면 말을 해야지 왜……!”
“별 거 아니었어.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단영이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우석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말들이 핑계처럼 들렸고, 이미 그를 잠식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이성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단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단영에게 머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더는 억누를 수 없다는 듯 우석은 천천히 다가섰다.
말없이 손끝이 그녀의 어깨 위에 닿았을 때, 그 따뜻한 온기가 단영의 숨결을 흔들었다.
애써 붙잡아두었던 마음이 스르르 무너져내리듯 그는 단영을 와락 끌어 안았다.
‘너 왜…… 나 한 번도 안 건드렸어? 왜 인생 망쳤다 싶었어?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꼬리표 달고 무언가에 구속된다는 게 그렇게도 끔찍하게 싫었니?’’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붉어진 눈가, 떨리는 어깨, 그리고 단영을 향한 절박한 숨결.
심장이 뜨겁게 울려 퍼졌다.“좋아…… 해.”
쿵!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단영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였다.
너무 늦은 고백이었지만 그 순간 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더는 미뤄둘 수 없는, 오랜 시간을 눌러온 그의 진짜 마음이었다.긴 하루였다. 이른 시간 출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겠다는 단영을 달래고 우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이든 수아의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희수가 앉아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네.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부러 멋쩍은 미소를 짓곤 애교를 부리며 수아를 번쩍 안아 드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희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임 여사, 지금 울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우석은 정색을 하며 희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구나? 혹시 어디 아파?” 희수의 앞에 바짝 얼굴을 마주댄 우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맑고 선한 눈동자, 절대 나쁜 짓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는 건지 좀 말해 보지?” 어려운 얘기였지만 말을 꺼내야만 했다. 희수는 간신히 운을 떼었다. 쉽지 않은 얘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희수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우석에게 변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래서 식당이든 커피숍이든 우석에게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주고 싶어 남아 있던 아버지의 유산과 살고 있던 집을 담보해 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황망한 결론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주변보다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대출금은 다 날린 거야?” 우석이 정신을 차리려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지, 우석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 희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석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겉돌기만 하던 시간을 거스르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마
“오 선생님 기다린 남자분 꼭 연예인 같아요. 맞죠? 일반인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지? 키도 엄청 크고요!” “난 지난번에 본 적 있지. 그때도 ER에 왔었어. 오 선생님 당직 때. 아마 오 선생님 전 남편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련의 시절에도, 한결이 호감을 가진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처음엔 그런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가끔은 그런 관심을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쏠려 있을 때라면. 한 번 마주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 처음 태성의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그 남자, 연우석의 몸에는 이상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고작 배우지망생 주제에 눈빛은 대담했고, 상대의 속을 꿰뚫듯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수십 년씩 내공을 쌓은 배우들의 그것처럼 만만치 않은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으니까. 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며 분위기는 또 어떠했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같은 남자인 한결의 눈에도 첫인상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재수 없게도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왜 아직도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런데, 그래서 뭐? “거 일들 안 하나?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 있을 때 차트도 정리하고 어? 환자들 상태도 체크하고, 어!?” 애먼 데로 화살이 돌아갔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며 한결은 결국 연두를 호출했다. 엄마 친구 딸인 이유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사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엄친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 준 탓에 요즘 그의 심사가 이토록 사납다. “바쁘신 교수님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언제 보아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연두 앞에서 한결은 대뜸 말을 꺼냈다. “에프터 서비스.” “에고. 단영이 일이라면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결은 테
“나 일하는 곳 처음 와 보지? 한 번 구경할래?” 그날 밤, 단영은 처음으로 우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JULY를 찾았다. 단영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손님맞이 단장을 마친 라이브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태성은 놀라움이 넘어서 경탄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그런 단영의 모습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나 처음 본다. 맞지? 그…….” 처음으로 우석이 가게에 데려온 여자였다. 우석과 함께 등장한 단영을 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태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호칭을 고르는 새 우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무대 위 기타가 놓인 스툴 앞에 앉았다. “나 여기서 노래해. 옆에선 소극장 공연도 하고 있고.” 우석은 그동안 밤마다 늦었던 이유를 변명이라도 하듯 기타를 둘러매며 중얼거렸다.“어우, 우석이 노래 잘해요. 완전 가수! 가수! 우리 카페 스타죠. 스타!” 그러나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려 기를 쓰는 태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난 번에 명함 받아둔 걸 전해주려 그랬는데…… 내가 어디다 뒀더라?” 태성이 주머니며 카운터 앞을 부산하게 뒤적거리는 동안, 기타 튜닝을 마친 우석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형, 나 그런 거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좀 받지? 아니, 받아야 돼, 너!” 태성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하나도 아니고 수 개의 기획사 명함을 단영에게 건넸다. 막 기타 연주를 시작한 우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얼결에 명함을 받아든 단영의 눈이 이게 뭔가 싶어 휘둥그레지자 태성은 자기가 마치 우석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떠들어댔다.“막 스무 살이나 됐을까. 어디서 기가 막히게 잘생긴 놈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땐 아직 가게가 자리도 잡지 않았을 땐데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했죠. 노래 같은 거 못해도 무대에 그냥 세워 놓기만 해도 완전 그림이 되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실력은 더 기가 막히네? 보니까 한예종 학생이래. 키 크지,
“간단한 처치예요. 봉합, 소독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오 선생은 가서 허기나 채우고 오지? 십분만 쉬겠다면서?” 환자 하나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이례적일 정도로 ER 내부가 고요했기 망정이지 옥신각신하는 한결과 단영을 잠자코 보던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스페셜 리스트까지는 됐고, 간단한 처치라니 여기, 오단영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는 친근한 표현에 한결의 눈빛이 일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해 나갔다.“개인적인 친분이라면 나도 좀 있지 않나? 우리, 서로 구면인 것 같은데. 배우 지망생 씨.” 태성의 가게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우석도 한결의 존재가 JULY에서 잠시 스쳤던 남자와 동일인이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우석은 굳이 단영을 사이에 두고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한결은 먼저 당당히 알은 체를 해왔다. 그 분위기가 묘했다. 단영은 그 틈을 비집고 다가와 우석의 치료에 열중했다.“많이 베었네. 어쩌다 그랬어?” “사과 깎다가. 수아가 사과 먹고 싶대서.” 밥은 왼손으로, 글씨는 오른손으로, 양손을 쓰기는 하나 배트를 잡는다던가 공을 던진다던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보니 우석은 칼질이 몹시 서툴렀다. “어머니께 좀 부탁하지 그랬어.” “잠깐 외출하신 틈에.” “몇 바늘 꿰매야 할 거야. 덧나지 않게 약 잘 챙겨 먹어.” 성가시다는 듯이 얘기하곤 있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우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고, 단영은 손을 이렇게 다쳐 가지고 와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우석이 얄미워 힐긋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료와 함께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줄곧 느껴지던 어색하고도 따가운 시선. 그 눈빛의 출처를 감지한 단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 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 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 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