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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응급의학과 교수 서한결

Autor: 엘리 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10 18:42:11

 평소 같았으면 수아가 잠들 때까지 곁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깊이 잠든 걸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감정으로 우석이 보는 앞에서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리고, 볼썽사납게 흔들려 버린 마음을 수습하지 못한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수아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감정의 잔해가 온몸에 널브러져 있는 것 같았다. 

 단영은, 결국 우석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그 자리에서 택시를 잡아타 버렸다.  

  단영아, 오단영!

 아직도 자신을 부르는 우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느낌 탓일까.

  이혼을 결정한 뒤로, 우석은 유난히 단영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잠깐의 만남과 헤어짐 사이의 순간마다, 그저 스쳐가는 인사에도, 그 목소리는 거의 매일 밤 단영의 귓가에 맴돌았다.  

 비단, 오늘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했다. 

 ‘단영아, 오단영!’

 벚꽃이 흩날리던 골목.

 그 떨림이 아직 손 끝에 남아 있는 듯 가슴은 벌벌 떨렸고 머릿속은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나 때문에 인생 망쳤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던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왜 한 번도 안지 않았냐고? 네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아냐,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널 원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모든 게 두렵고 갑작스러웠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두렵고, 바보 같이 겁이 나서 피하고만 싶었나 봐. 바보 같이…… 진짜 바보 같이…….’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수아, 아이스크림 먹고 자. 걱정하지 말라고.」

 우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단영은 핸드폰을 움켜쥐곤 다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하던대로 해! 그냥 너 하던대로 하란 말이야!”

 혼잣말처럼 쏟아낸 외침이 방 안에 메아리쳤다.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미안해하는 기색 하나 없던 그때처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무색하게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그때처럼!

 왜 이제 와서, 왜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굴어서 이렇게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나. 단영은 우석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이튿날 아침, 거울 속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휴대폰 알림이 또 울렸다.

 

「혹시 오늘 출근 안 하면 연락줄래? 수아가 엄마를 찾네.」

 단영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아한테 무슨 일 있어?”

- 아니. 수아가 아니고, 나한테.

“뭐?”

- 잘 됐다. 나 지금 거의 도착했는데, 반나절만 수아랑 시간 보내줄 수 있을까? 집에 엄마도 안 계시고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네.

“그, 그래! 내가 지금 나갈게!”

- 5분 뒤에 나와. 지하주차장.

 전화를 끊고난 뒤 단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늦잠이라도 자고 있음 어쩌려고, 병원에 출근이라도 했음 어쩌려고 무작정 수아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다니.

 막무가내인 건 여전했다.  

 그런데도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거울 앞에 서서 황급히 머리를 빗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단영은 기가 막혀 웃었다. 

 정말로 5분 뒤, 우석이 나타났다. 

 뭐가 그리 바쁜지 급히 수아만 내려주고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 길로 서둘러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엄마 병원 숙소가 여기야?”

 “응?”

 “아빠가 그랬어. 엄마가 주중에는 병원 일이 바빠서 숙소에서 지낸다고.”

 하여간에 둘러대는 건 선수였다. 수아는 아무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단영은 그 말 끝에 슬며시 조금 전 우석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빤 어디 가신데? 많이 바쁘신 것 같네.”

 “몰라. 어젯밤부터 이상해. 아빠 컴퓨터 이런 거 잘 못 하잖아. 그런데 어젠 밤새 내 방에서 컴퓨터를 하더라고. 뭘 계속 찾는 것 같던데, 모니터 불빛 때문에 잠도 잘 못 잤어.”

 단영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밤새 컴퓨터라니.’

 익숙지 않은 그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대학 시절, 단영이 입시 준비하며 노트북을 붙들고 살 때도 그는 필요없다며 아예 자기 것을 내주고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모니터 불빛 앞에 앉아 밤을 꼬박 새운다니.  

 

 잠시 후, 수아는 단영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엄마 냄새 난다”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단영은 그 작은 숨결을 지켜보며 지난 기억 속 우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며칠씩 밖에 있다가 돌아와선 소파에 웅크린 채 골아떨어져 잠들어버렸던 모습. 예민한 수아 때문에 자신의 집안에서조차 발소리도 죽이며 걷던 그. 이따금 보는 아빠의 모습에 어린 수아가 울음을 터뜨리면 어쩔 줄 몰라 단영을 바라보던 얼굴.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하나였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던 꿈 많은 학생으로 한창 반짝반짝 빛이 나야 했을 스무살 언저리 우석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영이 기억하는 우석은 늘 무언가에 늘 쫓기고, 바쁘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고작 스무 살에 지고 있던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이제 와서야 짐작할 뿐이었다. 

 점심 무렵,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아직 점심 전이지?」  

「안 그래도 수아 방금 일어나서 배고프대」

「내려 와. 지하주차장 왔어.」

 그러니까 지금, 셋이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는 거지? 

 가족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웠을 풍경이 단영에겐 낯설고 생경했다. 

 그동안 있었던 수아의 접견은 모두 우석의 모친 희수가 있는 집에서 이루어졌고 수아도 그걸 원했다. 한 번도 셋이서 어딜 나가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었던데다 그렇게 살가운 가족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바빠서 멀리는 못 갈 것 같고 가까운 일본은 어때?”

 “뭐?”

 “왜 전에 얘기했던.”

 수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어제 밤새 컴퓨터로 여행 일정 짠 거였어?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엄마!”

 단영은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인턴은 휴가 같은 거 못 쓰나?”

 “휴가가 있긴 한데, 상반기 휴가 일정이 이미 다 나와 있어서…….” 

 “그게 언젠데? 엄마 휴가 날짜에 맞추면 되잖아!”

 진심으로 불편하고 어색할 게 분명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수아가 저토록 기뻐하는데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알았어. 우선 출근해서 지도교수님이랑 상의해 볼게.”

  “예에!”

  순식간에 상황은 수아의 환호로 덮였다. 아빠와 딸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 앞에서 단영은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요즘 단영이 돌고 있는 과가 ER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교수님께 좋은 인상을 심어놓고, 타이밍을 봐서 휴가 얘기를 꺼내면…… 

 단영은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중앙 로비를 지나며 안면이 있는 동료 선생님들과 짧은 인사를 주고 받은 단영은 월요일 아침의 평소 루틴대로 본관 1층의 커피숍을 찾았다.

 억지로라도 당직을 자청해 몸을 소진시키고 그 대가로 얻어낸 주말 오프가 끝나면 월요일 아침은 늘 카페인의 힘으로 다시 전쟁터로 복귀하는 의식 같은 순간이었다.

 “에스 프레소 샷 세 개 추가. 얼음 가득 넣어서. 맞으시죠?”

 점원은 이제 그녀의 루틴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친절이었지만 단영은 무거운 어깨를 잠시 내려놓고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조금 이른 출근 덕분으로 반쯤은 마시고 갈 수 있겠다. 그 작은 여유에 들뜬 마음으로 자리를 둘러보던 순간 단영의 눈동자가 충격 으로 일렁였다.

 커피숍 한쪽, 햇살이 유리창을 스쳐 들어오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불과 사흘 전 만난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것도, 5분 여만에 파투를 내고 나온 소개팅 남의 얼굴을.

  서한결.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이름까지 기억나버린 남자는 금요일 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영이 차버리고 나온 바로, 그 남자였다. 

 “허, 에스프레소 샷 세 개 추가. 그러다 위장 다 버립니다.”

 무심히 툭 내던지던 목소리가 공간을 찔렀다. 단영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쪽이 여긴 어떻게…….”

 “뭐, 병원이니 대략 셋 중 하나 그 어디쯤 아니겠어요? 환자, 보호자, 의사.”

 “의, 의사 선생님이시라고요. 여기, 이 병원에……?”

 말끝이 떨렸다. 의식하지 않으려해도 공기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결은 그런 단영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눈가에 부드럽게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난 금요일 밤. 

 한결은 제 할 말만을 마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린 단영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첫 출근 한 장소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를 다시 마주한 순간 그 반가움은 더 배가 되었다.  

 “이런. 친구가 나에 대해 진짜 아무 말도 안 해줬나 보네.”

 그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시선은 단영의 모습을 깊이 읽으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보니까, 인턴?”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요즘 무슨 과 돌아요?”

 단영은 갑자기 작아졌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소개팅 자리에서 상대를 단박에 잘라내 버렸던 그녀였는데, 상황이 바뀌어버린 지금은 남자의 질문 하나에 어느새 공손한 인턴으로 돌아가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지금은 응급의학과 돌고 있습니다.”

 

 한결의 눈이 반짝였다. 단영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공석이었던 그 응급의학과 교수는 아니겠지.’ 

 단영의 속마음이 절박하게 현실을 부정하는 순간, 한결은 의도적으로 긴장을 풀어내듯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오단영 선생. 오늘자로 부임한, 응급의학과 교수 서한결입니다.”

 단영은 그가 내민 손을 선뜻 잡지 못했다. 

 서늘하게 다가오는 운명의 냄새가 아침의 카페인보다 더 묵직하게 그녀의 가슴을 눌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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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지금은 키스부터   #12. 말 잘 듣는 동네 개처럼

    긴 하루였다. 이른 시간 출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겠다는 단영을 달래고 우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이든 수아의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희수가 앉아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네.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부러 멋쩍은 미소를 짓곤 애교를 부리며 수아를 번쩍 안아 드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희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임 여사, 지금 울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우석은 정색을 하며 희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구나? 혹시 어디 아파?” 희수의 앞에 바짝 얼굴을 마주댄 우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맑고 선한 눈동자, 절대 나쁜 짓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는 건지 좀 말해 보지?” 어려운 얘기였지만 말을 꺼내야만 했다. 희수는 간신히 운을 떼었다. 쉽지 않은 얘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희수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우석에게 변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래서 식당이든 커피숍이든 우석에게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주고 싶어 남아 있던 아버지의 유산과 살고 있던 집을 담보해 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황망한 결론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주변보다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대출금은 다 날린 거야?” 우석이 정신을 차리려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지, 우석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 희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석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겉돌기만 하던 시간을 거스르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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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지금은 키스부터   #10. 그러니까 지금은... 키스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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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지금은 키스부터   #9. 내가 그 말에 설레기라도 해야 해?

    “간단한 처치예요. 봉합, 소독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오 선생은 가서 허기나 채우고 오지? 십분만 쉬겠다면서?” 환자 하나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이례적일 정도로 ER 내부가 고요했기 망정이지 옥신각신하는 한결과 단영을 잠자코 보던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스페셜 리스트까지는 됐고, 간단한 처치라니 여기, 오단영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는 친근한 표현에 한결의 눈빛이 일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해 나갔다.“개인적인 친분이라면 나도 좀 있지 않나? 우리, 서로 구면인 것 같은데. 배우 지망생 씨.” 태성의 가게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우석도 한결의 존재가 JULY에서 잠시 스쳤던 남자와 동일인이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우석은 굳이 단영을 사이에 두고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한결은 먼저 당당히 알은 체를 해왔다. 그 분위기가 묘했다. 단영은 그 틈을 비집고 다가와 우석의 치료에 열중했다.“많이 베었네. 어쩌다 그랬어?” “사과 깎다가. 수아가 사과 먹고 싶대서.” 밥은 왼손으로, 글씨는 오른손으로, 양손을 쓰기는 하나 배트를 잡는다던가 공을 던진다던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보니 우석은 칼질이 몹시 서툴렀다. “어머니께 좀 부탁하지 그랬어.” “잠깐 외출하신 틈에.” “몇 바늘 꿰매야 할 거야. 덧나지 않게 약 잘 챙겨 먹어.” 성가시다는 듯이 얘기하곤 있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우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고, 단영은 손을 이렇게 다쳐 가지고 와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우석이 얄미워 힐긋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료와 함께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줄곧 느껴지던 어색하고도 따가운 시선. 그 눈빛의 출처를 감지한 단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 그러니까 지금은 키스부터   #8. 나 좀 치료해주라

    ‘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 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 그러니까 지금은 키스부터   #7. 내가 널 이러라고 보내 준 줄 알아?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 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 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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