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니들 혹시 연애하니?’
‘뭐, 뭐래, 얘가! 무슨 소리야?’억지로 웃음기를 띠며 손사래를 쳐봤지만 그마저도 힘이 없었다. 순간 방금 전 좁은 부엌 안에서 우석이 냉장고에 반찬통을 차곡차곡 넣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손끝이 스치고, 눈길이 겹쳐지고, 낯설 만큼 다정했던 공기의 온도까지.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의 일상처럼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쿵!
연두의 내쏘듯 던진 한 마디가 가슴에 쾅 박힌 채로 좀처럼 빠져나갈 기미가 없었다.
단영은 차에 몸을 싣고도 한동안 멍하니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우석은 무심한 듯 담담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차창 밖은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까 그 친구, 연두 씨였나?”
불쑥 말을 꺼낸 건 우석이었다.
“기억하네.”
“가장 친한 친구라며.” “내가 그런 얘길 했었나?” “응. 전에.”단영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단영이라는 여자에 대하여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우석은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헤어지고 난 뒤, 가끔은 그 의외의 모습에 귓불을 파르르 떨리게 만들 때가 있는데 지금도 그랬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단영이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 바라보았다. 바람 결에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지만 마음은 무거운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여행 갈래?”
순간 단영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뭐?”
“학교에서 수아 친구들이 체험학습 같을 걸 간다나 봐. 방학이 아니어도 엄마 아빠랑 같이 여행을 다녀온다고.” “수아가 가자고 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가고 싶은 눈치.”우석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그저 흘려들은 이야기들을 건네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단영이 누구보다 잘 알아챌 수 있었다.
단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말속에서 수아를 세심하게 지켜보고 챙기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기 때문이다.
아이의 작은 눈빛 하나, 표정 뒤에 숨어 있는 작은 바람까지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사람.
수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늘 밖으로만 돌길래 부성 따위는 없는, 아이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우석은 생각보다 세심했다.
수아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읽어내고, 엄마의 부재로 이따금 울적해지는 수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풀어주는 사람이 지금 이 사람이었다.
단영의 귓가에는 아직도 연두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이혼한 남녀가 왜 서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그런 짓들을 하느냐고!’
맞는 말이었다.
더는 얽히지 않는 게 옳다는 걸 알면서도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우석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짧은 침묵 끝에 단영은 겨우 입술을 열었다.“생각해볼게.”
말을 마친 단영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눈부셨다.
어느 덧 달리던 차가 집 앞에 도착하고, 모처럼 만에 모녀가 한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 만에 나타난 엄마의 등장에 이전처럼 환호성을 지르고 달려들진 않았지만 수아도 단영의 주변을 맴돌며 엄마의 부재 속에 부족했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석의 모친 희주도 겉으로는 자주 좀 오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과일 한 접시를 예쁘게 깎아 단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잖아도 손녀가 클수록 엄마를 닮아간다 생각했는데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단영의 판박이라는 생각과 함께.
“엄마 이거 봐! 나 수학 단원 평가 백점!”
“우와, 우리 딸 잘했네!” “시험만 봤다하면 백점이야. 책을 그렇게 끼고 살더니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풀고.”기특하다는 듯 우석도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문젠데 어려운 게 어디있어?”
“그래? 아빤 좀 어렵던데?” “공부 유전자가 X 염색체에 있다고 그러던데 난 아무래도 엄마 머릴 닮았나 봐.” “그래, 그랬을 것 같다.”우석의 기꺼운 수긍에 희수도 웃었다. 하루종일 어린애한테 시달려 피곤할 법도 한데 밤만 되면 스탠드 불을 밝히며 공부하던 단영의 모습을 기억해 기꺼이 그 말에 수긍했다.
뭐든 지나간 뒤에 후회한다고 놓쳐버린 며느리가 새삼 아깝다는 생각도 해보면서.
“엄마, 안 풀리는 문제가 있는데…… 아무래도 답안지가 잘못된 것 같아. 엄마가 한 번 봐줘.”
“그래? 그런 문제가 있어?”수아가 손을 잡고 단영을 밖으로 이끌었다. 희수가 농담처럼 우석에게 물었다.
“수아가 너한텐 수학 문제 안 물어보지?”
“나 예체능인 거 수아도 알아. 애가 너무 똑똑해.”식사 준비를 위해 일어서던 희수가 깔깔 웃었다. 점점 말수가 없어지는 손녀를 돌보면서 유일하게 마음 편하게 웃는 날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단영이 오는 날.
주방에선 단영과 수아가 잘 먹는 김치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희수가 밥을 푸다 말고 말했다.
“점심 먹고, 셋이서 나갔다 와.”
“글쎄. 주중에 내내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데 피곤하지 않을까. 좀 졸다 갔음 좋겠는데.” “그런 배려도 할 줄 알고, 너도 이제 나이를 먹나 보다.”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어려서도 속이 깊은 아이였지만 자라면서 마음 쓰는 게 더욱 제 아버지를 닮아가는 우석이었다.
인생에서 딱 한 번 크나큰 실수를 하고 난 뒤,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을 때 희수도 더는 그 잘못에 대해 책망하기를 그만두고 단영과 수아를 받아들였다.
삶이라는 게 꼭 뜻하는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서 어린 두 사람이 결정한 성급한 이별이 아쉽기만 한 희수였다.
그때 수아가 방문을 살포시 닫고 나왔다.
“아빠! 할머니! 엄마 자!”
“잔다고?” “응. 꾸벅꾸벅 졸더니 내 침대에서 자.” “밥도 안 먹고?”단영이 잠들었단 소리에 막 식사 준비를 마친 희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수아의 방에서 수아가 요즘 배우는 책들을 살펴보던 단영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다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것이다.
“병원 생활이 피곤하긴 한 모양이다. 지금 인턴이랬지.”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더라고.” “그러니 얼마나 피곤할 거야.” “수아야, 엄마 좀 수아 침대에서 자게 둘까?”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해결했고?”
“응. 수아 천재야. 엄마가 답안지가 잘못됐대. 출판사에 메일 보내준대.” “오.”우석이 야무진 수아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수저를 건넸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거니까 일단 우린 먹고, 엄마는 일어나면 다시 챙겨주자.”
수아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맑게 웃는 수아를 보니 우석은 새삼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 한 쪽이 쓰라렸다.
아직 수아는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 사실을 모른다. 그냥 엄마가 바빠서 병원에 있느라 주말에만 집에 오는 거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이해시켰다.
다행히 단영도 동의했고. 최대한 환경의 변화를 주지 않기 위해 수아가 자라온 집에서 희수와 함께 지내고는 있지만 워낙에 똑똑한 아이라 언제까지 거짓말로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할머니, 저 김치 찢어주세요.”
희수가 길게 찢어 숟가락에 올려주자 우석이 고기 한 점을 수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음, 맛있어. 학교 급식은 왜 이런 맛이 안 나나 몰라.”
수아가 입이 미어지도록 음식을 삼키더니 오물거리며 중얼거렸다.
“학교 급식은 영양사 선생님이 고루 영양가 있게 만들어 주실 텐데 할머니가 아무렇게나 만든 음식이랑은 다르지.”
“왜 아무렇게나 만든 음식이야. 할머니가 정성이랑 사랑으로 만들어 주신 음식이지.” “요 잔망진 게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하니?” “감성은 아빠. 아이큐는 엄마, 이큐는 아빠. 외모는 믹스.” “어이구, 잘나셨네.”열 살에 접어들며 말수가 확 줄었는데, 오늘처럼 단영이 집으로 오는 날은 예외였다. 다시 대여섯 살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작은 입술을 고시랑거리며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이 영락없이 우석과 희수를 웃게 만들었다.
“뭐가 믹스야?”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 단영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깼어?”
“죄송해요. 깜박 잠들었어요.”수아의 침대에서 잠이 들어버린 게 민망한 듯 단영이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자 밥을 다시 데우려 일어나던 희수가 마음이 짠해져 물었다.
“피곤한데 잠들 수도 있지. 졸리면 더 자. 눈 떴으니 아예 먹고 자도 되고. 수아 자고 나서 밤늦게 나가는 거 늘 마음이 안 좋았는데 아예 자고 내일 가든가. 난 약속이 있어서 안 그래도 나가려던 참이었어. 편하게 있다 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없는 약속도 만드는 희수를 보며 단영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차라리 원망하고 욕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이혼 뒤 어쩌면 전보다 더 살가워진 희수의 태도가 단영의 마음을 못내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자꾸만 죄스럽고, 잘못했다는 마음이 들게.
“약속 장소가 어딘데? 모셔다 드릴게.”
“얘는. 모셔다 드리긴 뭘 모셔다 줘. 가차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먹고, 그릇이나 씽크대에 넣어 놔.”희수는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나가버렸다. 정확히는 자리를 피해준 것이라고 봐야 했다. 우석도, 단영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나 게임 해도 돼?”
함께 사는 아빠와는 달리,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면 많은 부분이 허용적이 되는 단영에게 수아가 물었다.
우석은 고개를 저었지만, 단영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수아는 신이 나서 방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배고프지?”
식탁 위 그릇들을 정리하며 우석이 단영이 먹을 식사를 차려 놓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왔다.
캔 따는 소리에 이어 첫 모금을 시원하게 삼키는 우석을 보며 단영이 물었다.
“나도 하나만.”
“그럴래?”우석은 선뜻 맥주 한 캔을 꺼내와 입이 닿는 부분을 깨끗한 냅킨으로 닦아주며 캔까지 따서 단영에게 내밀었다.
“시원하네.”
“가끔은 커피 말고 이게 당길 때가 있지.”그 말에 단영이 싱겁게 웃었다.
“그런데, 너 소개팅 나갔어?”
불쑥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우석 스스로도 너무 대놓고 묻는 건 아닐까 싶어 순간 후회했지만 이미 화살은 발끝을 떠났다.
그가 가볍게 맥주 캔을 기울이는 동안 단영은 움찔했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갔는데, 박차고 나왔고?”
“그걸 어떻게…….” “아까 연두 씨. 목소리가 동네 사람 다 알릴 기세던데.”우석은 태연한 척 웃어 보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날 밤, 단영이 소개팅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가 혹시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정말로 다른 누군가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교차하며 목구멍이 바짝 말라왔다.
“그건 그냥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단영이 짧게 토해내듯 말하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마치 ‘너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라는 걸 강조하듯 서둘러 삼킨 그 말 속에서 우석은 오히려 더 명확하게 감정을 읽어냈다.
지금도 단영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
“그럼 누구 마음에 둔 상대는 있고?”
의도치 않게 목소리에 뾰족한 기운이 섞였다. 우석은 애써 감췄지만 속내는 금세 드러나 버렸다.
없다고, 그 한 마디만 해주라. 그러면 됐어.
“대답 안 해도 되지?”
단영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 속에는 방어와 동시에 미묘한 흔들림이 깃들어 있었다. 말투는 냉랭했지만 캔을 꼭 쥔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꼭 있는 것 같잖아.”
우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차피 헤어진 사이였다. 이혼을 했으니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게 맞는 일이었고 서로가 누굴 만나 연애를 하든 말든 그게 뭐 그리 큰 일 일까.
세상의 시선은 그랬다.
하지만 우석의 마음은 그렇진 못했다. 머리로는 수없이 되뇌었지만 가슴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애써 놓았던 손이 이제 와서 후회스럽게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너무 교만한 결정은 아니었는지 우석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둘 사이를 채운 건, 얇은 침묵과 베란다 문 사이로 불어드는 봄바람이었다.
캔 속 맥주는 줄었고, 얼굴에는 붉은 기가 올라왔다. 서로의 시선은 자꾸만 닿으려다 불안한 듯 멀어졌다.
“좀 걸을래?”
우석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그냥 산책이 아니었다. 더는 이렇게 앉아 있다가는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키고 싶었다.
“수아는 어떡하고?”
단영이 묻자, 우석은 방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수아야, 엄마랑 아빠랑 잠깐 나갔다 올게.”
모처럼 신 나게 게임에 열중인 수아에게서 ‘그럼 아이스크림 사와!’ 라는 흔쾌한 대답이 떨어졌다.
슬며시 미소를 짓곤 ‘아이스크림’ 다섯 글자를 되뇌던 우석이 단영을 재촉했다.
“나가자. 나가서 좀 걷자.”
우석의 말에 단영은 망설였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된다. 별 의미 없어. 그냥 봄밤 공기 좀 쐬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심장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요동쳤다.
걷다 보면 취기가 좀 가실 줄 알았는데, 아련한 봄밤의 분위기가 기분을 더 몽롱하게 만들었다.
“행복해?”봄의 절정, 흩날리는 꽃눈의 한 가운데에서 우석이 물었다. 담담하려 했는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밤, 포근하고 부드러운 봄밤의 정취가 자꾸만 지나간 감정을 끄집어낸다.
단영은 그 순간 눈가가 아련하게 젖어들었다. 취기에 마비된 이성이 불러온 참사였다.
분명 헤어짐을 결정한 건 그녀였는데. 무심결에 마주 선 이 순간조차 그 얼굴을 보는 게 쉽지가 않다. 흔들린다는 표현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지만, 언제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우석의 목소리가 여전히 아릿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나한테서 벗어나서…… 행복하니?”
단영은 대답을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영아. 오단영.”
우석이 자꾸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처음 수아 가진 걸 알게 됐을 땐 세상이 그대로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숨 쉬고 살아있으니 행복하다고 해야 되는 건가?”
단영은 우석의 눈길을 마주하며 담담히 말했다.
“나도 하나만 묻자. 이제 와 이런 말,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아는데…… 사실 진짜 이런 말, 진짜 자존심 상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술의 힘이었다. 취기를 빌려 단영은 우석의 앞에서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내놓았다.
“너……왜 나 한 번도 안 건드렸어?”
“뭐?”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 순간 우석의 눈빛이 충격을 받은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단영은 애써 냉정한 표정으로 떨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아슬아슬하게 그 동안 속으로만 삼키던 생각을 쏟아냈다.
“알아, 나도. 네 마음. 충분히 짐작은 해. 나만 아니었으면, 그 일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서로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무서웠겠지. 무언갈 책임진다는 게 어느 날 갑자기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도 있었으니까.”
그 순간 단영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뱉는 말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가시가 되어 우석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왜, 인생 망쳤다 싶었어?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꼬리표 달고 무언가에 구속된다는 게 그렇게도 끔찍하게 싫었니? 그래도 나는 있잖아……! 나는 우석아……!”
순간 단영의 눈동자를 덮고 있던 흐릿한 무언가가 점점 형태를 이루더니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그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던 우석이 더는 듣고만 있지 못하고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당황한 우석이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미치겠다.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어. 생각해 봐. 네가 싫었음, 마주치는 것조차 끔찍 했음 내가 어떻게 널 받아들여? 생각하고 말고 없이 너랑 수아는 세상 내 전분데!”
“그런데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이 나쁜 자식아!”이혼을 말하던 순간에도 담담하기만 했던, 잘도 무심하게 남의 일들을 얘기하듯 말을 한다 싶었던 단영에게서 꾹꾹 억눌러온 감정이 손가락 새로 터져 나왔다.
우석은 서럽게 우는 단영을 보며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널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라.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날 원하지 않았던 건 너야. 날 끔찍해 했던 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고!”
점점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우석은 단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억울함을 토해내듯 외쳤다.
“나 때문에 인생 망쳤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던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왜 한 번도 안지 않았냐고? 네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우석의 외침에 단영은 오열했다. 서럽게 흐느꼈고, 양손으로 가린 얼굴에서 그 동안 말하지 못한 슬픔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이른 시간 출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겠다는 단영을 달래고 우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이든 수아의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희수가 앉아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네.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부러 멋쩍은 미소를 짓곤 애교를 부리며 수아를 번쩍 안아 드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희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임 여사, 지금 울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우석은 정색을 하며 희수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구나? 혹시 어디 아파?” 희수의 앞에 바짝 얼굴을 마주댄 우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맑고 선한 눈동자, 절대 나쁜 짓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는 건지 좀 말해 보지?” 어려운 얘기였지만 말을 꺼내야만 했다. 희수는 간신히 운을 떼었다. 쉽지 않은 얘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희수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우석에게 변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그래서 식당이든 커피숍이든 우석에게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주고 싶어 남아 있던 아버지의 유산과 살고 있던 집을 담보해 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황망한 결론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주변보다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대출금은 다 날린 거야?” 우석이 정신을 차리려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지, 우석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 희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석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겉돌기만 하던 시간을 거스르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마
“오 선생님 기다린 남자분 꼭 연예인 같아요. 맞죠? 일반인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생겼지? 키도 엄청 크고요!” “난 지난번에 본 적 있지. 그때도 ER에 왔었어. 오 선생님 당직 때. 아마 오 선생님 전 남편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련의 시절에도, 한결이 호감을 가진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처음엔 그런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구나. 가끔은 그런 관심을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쏠려 있을 때라면. 한 번 마주하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 처음 태성의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그 남자, 연우석의 몸에는 이상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고작 배우지망생 주제에 눈빛은 대담했고, 상대의 속을 꿰뚫듯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수십 년씩 내공을 쌓은 배우들의 그것처럼 만만치 않은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으니까. 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외모며 분위기는 또 어떠했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같은 남자인 한결의 눈에도 첫인상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재수 없게도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왜 아직도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런데, 그래서 뭐? “거 일들 안 하나?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 있을 때 차트도 정리하고 어? 환자들 상태도 체크하고, 어!?” 애먼 데로 화살이 돌아갔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며 한결은 결국 연두를 호출했다. 엄마 친구 딸인 이유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사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엄친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 준 탓에 요즘 그의 심사가 이토록 사납다. “바쁘신 교수님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언제 보아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연두 앞에서 한결은 대뜸 말을 꺼냈다. “에프터 서비스.” “에고. 단영이 일이라면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결은 테
“나 일하는 곳 처음 와 보지? 한 번 구경할래?” 그날 밤, 단영은 처음으로 우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JULY를 찾았다. 단영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손님맞이 단장을 마친 라이브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태성은 놀라움이 넘어서 경탄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그런 단영의 모습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나 처음 본다. 맞지? 그…….” 처음으로 우석이 가게에 데려온 여자였다. 우석과 함께 등장한 단영을 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태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호칭을 고르는 새 우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무대 위 기타가 놓인 스툴 앞에 앉았다. “나 여기서 노래해. 옆에선 소극장 공연도 하고 있고.” 우석은 그동안 밤마다 늦었던 이유를 변명이라도 하듯 기타를 둘러매며 중얼거렸다.“어우, 우석이 노래 잘해요. 완전 가수! 가수! 우리 카페 스타죠. 스타!” 그러나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려 기를 쓰는 태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난 번에 명함 받아둔 걸 전해주려 그랬는데…… 내가 어디다 뒀더라?” 태성이 주머니며 카운터 앞을 부산하게 뒤적거리는 동안, 기타 튜닝을 마친 우석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형, 나 그런 거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좀 받지? 아니, 받아야 돼, 너!” 태성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하나도 아니고 수 개의 기획사 명함을 단영에게 건넸다. 막 기타 연주를 시작한 우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얼결에 명함을 받아든 단영의 눈이 이게 뭔가 싶어 휘둥그레지자 태성은 자기가 마치 우석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떠들어댔다.“막 스무 살이나 됐을까. 어디서 기가 막히게 잘생긴 놈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땐 아직 가게가 자리도 잡지 않았을 땐데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했죠. 노래 같은 거 못해도 무대에 그냥 세워 놓기만 해도 완전 그림이 되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실력은 더 기가 막히네? 보니까 한예종 학생이래. 키 크지,
“간단한 처치예요. 봉합, 소독 제가 하겠습니다.” “됐고, 오 선생은 가서 허기나 채우고 오지? 십분만 쉬겠다면서?” 환자 하나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이례적일 정도로 ER 내부가 고요했기 망정이지 옥신각신하는 한결과 단영을 잠자코 보던 우석의 눈빛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스페셜 리스트까지는 됐고, 간단한 처치라니 여기, 오단영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는 친근한 표현에 한결의 눈빛이 일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해 나갔다.“개인적인 친분이라면 나도 좀 있지 않나? 우리, 서로 구면인 것 같은데. 배우 지망생 씨.” 태성의 가게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우석도 한결의 존재가 JULY에서 잠시 스쳤던 남자와 동일인이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우석은 굳이 단영을 사이에 두고 엮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한결은 먼저 당당히 알은 체를 해왔다. 그 분위기가 묘했다. 단영은 그 틈을 비집고 다가와 우석의 치료에 열중했다.“많이 베었네. 어쩌다 그랬어?” “사과 깎다가. 수아가 사과 먹고 싶대서.” 밥은 왼손으로, 글씨는 오른손으로, 양손을 쓰기는 하나 배트를 잡는다던가 공을 던진다던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이다 보니 우석은 칼질이 몹시 서툴렀다. “어머니께 좀 부탁하지 그랬어.” “잠깐 외출하신 틈에.” “몇 바늘 꿰매야 할 거야. 덧나지 않게 약 잘 챙겨 먹어.” 성가시다는 듯이 얘기하곤 있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우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고, 단영은 손을 이렇게 다쳐 가지고 와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우석이 얄미워 힐긋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료와 함께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줄곧 느껴지던 어색하고도 따가운 시선. 그 눈빛의 출처를 감지한 단영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술 한 잔 할래?’ 한 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와주는 고마운 벗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리고만 단영은 심장병 환자처럼 여전히 상기된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단영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뜸 들여 준 것 같은데? 자, 말하라! 뭐가 문제야?” 그녀가 이혼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도 이쯤 술이 들어간 뒤였다. 연두의 재촉은 집요했다. “설마 너 연우석 때문은 아니지?”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였다. 덩달아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연두가 잔을 드는데 그 순간 단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좋대.” 갑작스런 고백에 연두의 두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헐. 이제와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어? 설마 그 말에 흔들려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야?” “이해 안 되지. 이해 못할 거야 넌. 나 역시 이런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아는데…….” 후회! 뒤늦은 회환! 단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었다. 단영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쓴맛을 악무는 그 입매가 너무 씁쓸해보여서 연두는 잠시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연우석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힘들었고, 그래서 더 겁이 나. 여전히 그 애를 보면 설레는 내가 겁이 나 죽겠어. 나 어떡하니.” 무너지는 친구를 보며 연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이내 원망이 차올랐다. “이 바보야! 그럴 거 뭐하러 독하게 이혼은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너 진짜!” “연두야. 나 말이야. 나 있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석이랑 살면서……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었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연우석…… 날 한 번도 안지 않았거든
「미안해. 내일은 못 갈 것 같아.」 금요일 밤 JULY에서의 무대를 모두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하던 우석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태성이 슬며시 스트레이트잔을 건네자 우석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드디어 터질 게 터진 건가.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직감적으로 우석의 문제를 알 것 같았던 태성이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그럴 거면 합의해주지 말지 그랬어.”태성의 한 마디에 우석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형이…… 어떻게?”형이 이혼 이야기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던 사실을 태연히 짐작하고 먼저 말을 꺼내오는 태성의 모습에 우석은 말없이 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모르냐. 널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태성은 우석의 빈 잔에 독한 럼주를 다시 채우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네가 그동안 기획사로부터 받은 숱한 러브콜들을 거절한 이유. 나는 다 알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말은 못 하지.” “형!” “그래도 우석아. 그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너무 너만 다 포기하고, 양보하려 들지 말아. 때때로 욕심낼 건 욕심내고 갖고 싶은 게 있음 갖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정작 당사자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심을 태성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런두런 꺼내놓았다. “솔직히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그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꺼내 놓지 않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었다.“솔직히 좀 놀랐어. 이렇게 쉽게 갈라설 줄이야.” 그건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은. 우석은 독한 술을 한 모금 입에 가져가며 단영이 이혼 얘기를 꺼내던 때를 떠올렸다. ‘이혼하자.’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여서 저도 모르게 흠칫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그 날.‘뭐, 뭘해?’ ‘이제…… 그만하자고.’ 재차 담담한 투로 일관하는 단영을 보면서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