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금 내리실 정류장은...」
버스 안내 방송에 은주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매만지던 손가락의 저릿함은 여전했지만 현실로 돌아오자 서서히 사라졌다.
손가락 끝에 있는 상처는 그날 그녀가 저항하다가 어디에 베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처였다.
하지만 그녀가 긴장할 때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방아쇠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은주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그 과거의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신체가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반사작용이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다.
지금 은주가 앉아 있는 버스의 시트에 남은 젖은 흔적처럼.
긴장되는 상황을 만나면 바로 반응하는 손가락의 저릿함.
그와 동시에 그녀는 과거로 소환되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밑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그래서 평소 답답해도 꼭 팬티 라이너를 착용하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놓치고 말았다.
평소 아껴두었던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느라 옷매무새를 망치지 않으려고 팬티 라이너를 착용하지 않은 것이다.
은주는 핸드백에 손을 넣어 물티슈 한 장을 꺼냈다.
핸드백을 세워 사람들의 시선을 가린 뒤 치마를 닦는 척하며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재빨리 시트를 닦아냈다.
다행히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쳐다보거나 하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이럴 때면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렇게 반응을 해버리는 자신의 몸이 밉기까지 했다.
은주는 다른 사람들보다 성욕이 강했다.
과거 그 일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위든 섹스든 그 끝은 항상 과거의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절정의 입구에서 성태의 그 얼굴이 보였다.
희미한 미소를 띈 것 같은 묘한 표정의 그 얼굴.
은주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길에 눅눅한 속옷의 느낌이 불쾌했지만 비서실장으로서의 첫 출근을 망치지 않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명찰을 목에 걸었다.
입구를 통과해 비서실에 들어가자 먼저 출근한 직원들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한다.
“인사는 나중에 할께요. 오늘은 첫 출근하시는 사장님을 잘 맞이하고 업무 파악하실 수 있게 도와드리는 일에 집중하죠. 자, 파이팅 합시다!”
그녀의 말에 비서실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잠시후 인터폰이 울리고 로비의 인포 데스크 직원으로부터 알림이 왔다.
“사장님 도착하셨습니다.”
직원들은 사장실 복도에 도열했고, 그 끝에 은주가 꽃다발을 들고 섰다.
잠시후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장 최종우가 등장했다.
1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
짙은 눈썹이 인상을 강하게 했지만 비교적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가 복도를 걸어오자 은주가 힘찬 걸음으로 다가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앞으로 사장님을 모시게될 비서실장 노은주입니다.”
사장이 미소지으며 꽃다발을 받아들자 도열해 있던 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최종우가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잠시후 수행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종우 역시 사장실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은주가 그의 재킷을 받아들고 한쪽에 마련된 옷장에 재킷을 걸어 두었다.
최종우가 말했다.
“비서실장도 오늘이 처음이죠?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죠?”
“노은주입니다. 어제 비서실장으로 발령 받았습니다.”
“그래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일상적인 대화였다.
하지만 종우의 시선이 재빠르게 은주의 몸을 훑고 지나간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은주가 선택한 타이트한 원피스는 그녀의 굴곡진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라인,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무릎 위 하얀 허벅지가 종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비서실장은 사장의 모든 컨디션을 체크해야 한다.
은주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오늘 오전에는 각 부서 본부장님들과의 짧은 티타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회장님과의 오찬, 그 이후에는 신규 사업 보고서 검토후 승인해 주시면 됩니다.”
은주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정확했다.
신뢰감을 주는 낮은 톤이었지만, 종우에게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고막을 간지럽히는 자극으로 다가왔다.
종우는 책상 위의 펜을 만지작거리며 은주를 훑었다.
그녀의 단정한 올림머리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종우는 그녀가 비서로서 완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억눌린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본능적인 육감이었다.
“노 실장님, 커피는 내가 직접 타 마실 테니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종우의 명령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은주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순간, 원피스의 가슴팍이 살짝 벌어지며 풍만한 가슴골이 종우의 시야에 잡혔다.
종우는 눈동자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녀의 단정한 옷감을 찢어내고 그 속의 살결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은주는 비서실로 돌아와 서류를 정리하며 자신의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저릿함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종우와 단둘이 있을 때 그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시선이 단순한 상사의 관찰이 아니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축축했다.
원피스 안쪽에서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액체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치스러웠지만, 동시에 뇌 깊숙한 곳에서는 알 수 없는 묘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비록 강압적이긴 했어도 그의 아들인 재윤의 육체를 만지며 흥분했다는 죄책감.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다는 감정과 그로 인한 두려움.하지만 이 모든 도덕적 금기가 오히려 그녀를 더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 은주를 미치게 만들었다.'도망쳐야 해. 당장 사장님께 전화해서, 간병인을 구했다고 하고 여기를 떠나야 해.'이성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은주의 발은 욕실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재윤의 그 깊고 시커먼 눈동자.자신이 도망치려 할수록 그가 어떤 짓을 벌여 더 끔찍한 덫으로 자신을 이끌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그리고…심장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이 위험하고도 짜릿한 긴장감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기형적인 피학의 욕구.'미친...'은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너... 미쳤어... 그는... 종우씨의 아들이야... 은주야, 정신차려!’은주는 세면대 물을 잠그고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파묻은 채, 소리 없는 오열을 삼켰다.완벽한 피난처였던 종우가 만들어준 성벽이, 이제는 그녀를 가두는 가장 끔찍한 감옥으로 변해 버렸다.그날 밤.VIP 병실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병원은 9시가 되면 일제히 소등하도록 되어 있었다.이제 방 안을 밝히는 것은 창밖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간접 조명 하나뿐이었다.은주는 환자용 베드옆에 마련된 보호자용 소파베드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담요를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 등을 돌려 누웠지만, 잠은 한숨도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워있는 재윤의 숨소리가 병실의 고요한 공기를 타고 은주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색색거리는 일정한 호흡.수액을 통해 주입되는 진통제 때문에 그는 얕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하지만 은주는 그가 깨어있는지 잠들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어둠 속을 뚫고 자신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은주의 하얀 손바닥이, 스물한 살 사내의 단단하고 노골적인 욕망 위를 덮고 있었다.얇은 면직물은 그 엄청난 열기를 가려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오히려 직물의 얇은 두께감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핏대의 굴곡마저 적나라하게 전달하고 있었다."흐읏… 아…."은주의 억눌린 신음이 병실안에 울려 퍼졌다.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떨렸고, 동공은 방향을 잃은 채 미친 듯이 흔들렸다.당장이라도 이 끔찍한 접촉을 끊어내야 마땅했다.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치고, 그의 뺨을 내리치고서라도 이 병실을 뛰쳐나가야 했다.하지만 은주의 몸은 마치 독에 쏘인 것처럼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자신의 손목을 틀어쥔 재윤의 거센 악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은주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기형적인 생리적 반응이었다.과거의 지독한 트라우마.젊은 남성의 육체 앞에서 극도의 공포와 쾌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망가져 버린 그녀의 몸이, 이성을 배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은주의 굳게 닫힌 두 다리 사이로는 이미 수치스러운 애액이 왈칵 쏟아져 나와 허벅지 안쪽을 적시고 있었다.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과, 금기를 넘나드는 배덕한 흥분감이 뒤엉켜 그녀의 호흡을 뒤엉키게 만들었다."재… 윤 씨… 놔요… 제발…."은주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눈꼬리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하지만 침대 헤드에 기대어 상체를 비스듬히 숙인 재윤은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헝클어진 앞머리 아래로 번뜩이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공포와 쾌감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은주의 표정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왜 울어요, 실장님."재윤이 나직하게 속삭였다.그의 짙은 목소리는 깁스에 묶인 환자의 것이라기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여유롭고 지배적이었다."아프게 한 것도 아닌데. 너무 좋아서 그래요?""아, 앗…! 무슨 소리를… 윽…!"재윤이 은주의 손목을 잡은
환자복 바지는 그의 온전한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로 완전히 벗겨져 있었고, 공중에 매달린 왼쪽 다리의 깁스 주변으로는 헐렁하게 걸쳐져 있었다.그리고 병실의 밝은 조명 아래, 짙은 네이비색 트렁크 팬티 한 장만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스물한 살 사내의 하반신이 고스란히 은주의 시야에 쏟아져 들어왔다.은주는 마른침을 삼켰다.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오른쪽 다리부터… 닦겠습니다."은주는 짐짓 사무적인 톤을 꾸며내며, 침대 아래쪽으로 다가가 재윤의 멀쩡한 오른쪽 발목을 조심스레 붙잡았다.따뜻한 물기를 머금은 수건이 그의 굵은 발목을 감싸고, 종아리를 타고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농구 코트를 누비던 탄탄하고 길게 뻗은 다리 근육이 수건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선명하게 도드라졌다.은주의 손끝에 닿는 재윤의 피부는, 며칠 동안 씻지 못했다는 그의 변명과 달리 매끄럽고 뜨거웠다.수건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로 진입하자, 은주의 숨결이 눈에 띄게 가빠졌다.오른쪽 허벅지 안쪽의 연한 살결을 닦아낼 때마다, 그녀의 시야 가장자리에는 짙은 네이비색 트렁크 팬티의 밑단이 아른거렸다.수건을 쥔 은주의 손등이 아주 얇은 면직물을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좁혀갔다."흐읏…."병실의 적막을 뚫고, 재윤의 입술 사이로 아주 억눌린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그 소리에 은주의 어깨가 굳어졌다.고개를 들어 올리자, 침대 헤드에 기댄 재윤의 고개가 뒤로 살짝 젖혀져 있었다.그의 턱관절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고, 굵은 목대를 타고 목젖이 크게 위아래로 일렁였다.그것은 단순히 상처의 통증을 참아내는 표정이 아니었다.예민한 피부 위를 스치는 부드러운 수건의 마찰과, 타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감각에 온 신경이 곤두선 수컷의 적나라한 반응이었다.은주는 재윤의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세워두었던 '간병인'이라는 논리적인 방어벽이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왼쪽 중지 지
이성으로는 수십 번도 더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복부의 단단한 굴곡을 따라 내려가던 은주의 손길은 알 수 없는 자력에 이끌린 듯 점점 더 은밀하고 느릿한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다.은주의 치마 속 갈라진 틈 사이에서는 이미 끈적한 액체가 배어 나와 허벅지 안쪽을 서서히 적시고 있었다.그때였다.은주의 물수건이 재윤의 탄탄한 하복부, 환자복 바지의 허리선이 걸쳐진 바로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도달했을 때.재윤의 성한 왼손이 불쑥 허공을 가르고 올라와 수건을 쥐고 있던 은주의 손목을 낚아챘다."앗…!"예상치 못한 접촉에 은주가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르며 굳어버렸다.재윤의 악력은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인하고 뜨거웠다."실장님 손…."재윤이 쉰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그의 까만 눈동자가 은주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피할 틈도 없이 깊숙이 옭아맸다."실장님 손이 예쁘네요."재윤의 짙은 목소리가 병실의 적막을 가르고 떨어졌다.은주의 손목을 쥔 재윤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얇은 피부 아래로 요동치는 맥박을 아주 느릿하고 농밀하게 쓸어내렸다.은주는 숨을 쉴 수 없었다.재윤의 하복부 근처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손을 쥐고 있는 젊고 위험한 사내의 체온.시야에 가득 찬 그의 단단한 상체와 아슬아슬한 텐션 속에서, 은주는 황급히 굳어버린 입술로 뭔가를 말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재윤이 먼저 은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그리고 아주 느릿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여기도 닦아 주실래요?"은주의 시선이 재윤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향했다.재윤의 멀쩡한 왼손이 자신의 환자복 바지 허리춤에 머물러 있었다.'……!'은주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재윤은 은주의 굳어진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온전한 한 손을 이용해 헐렁한 환자복 바지의 고무줄 밴드를 아래로 끌어내리려 했다.오른쪽 팔은 두꺼운 깁스에 묶여 가슴 위에 얹혀 있었고, 왼쪽 다리 역시 거대한 고정 장치에
사무적인 말투를 유지하며, 개인적인 감정이나 연민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식사를 돕고, 약을 챙기고, 병실의 온도를 맞추는 그녀의 동작은 기계처럼 오차가 없었다.하지만 재윤은 그 틈을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파고들었다."실장님. 물 좀 마시게 도와주시겠어요?"한쪽 팔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재윤의 부탁에, 은주가 컵에 빨대를 꽂아 그의 입가로 가져가면, 재윤은 물을 마시는 내내 은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의 까만 눈동자는 은주의 굳게 닫힌 입술과,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목선을 노골적으로 핥아내리듯 응시했다.때로는 빨대를 잡고 있는 은주의 손가락 위로, 자신의 성한 왼손을 슬며시 포개어 오기도 했다."고마워요. 실장님이 옆에 있으니까… 하나도 안 아픈 것 같네요."순수한 소년의 감사 인사처럼 포장되어 있었지만, 은주의 손등을 문지르는 재윤의 엄지손가락에는 은밀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은주가 흠칫 놀라며 손을 빼내려 하면, 재윤은 다친 팔의 통증을 호소하는 척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했다.은주는 미칠 노릇이었다.철저히 선을 그으려 할수록 재윤은 '환자'라는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를 무기 삼아 은주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이 고립된 VIP 병실 안에서, 누가 진짜 약자인지 재윤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시간은 더디고 느리게만 흘러갔다.은주는 밤이 되어서야 재윤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아침이 되어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병실 안의 공기는 어젯밤보다 한층 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오전 회진을 마친 간호사가 은주에게 조심스레 말했다."수술 직후라 환자분께서 땀을 많이 흘리셨을 거예요. 샤워는 한동안 불가능하니, 실장님께서 좀 닦아주시는 게 좋겠습니다."간호사가 자리를 비우고, 병실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은주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졌다.지금까지는 그저 식사를 돕고 약을 챙기는 수
은주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재윤이 쥐고 있던 자신의 옷자락을 빼내었다."……!"손끝이 베인 것처럼 날카로운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은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을 쳤고, 창백한 얼굴로 도망치듯 VIP 병실을 빠져나왔다.자동으로 열고 닫히는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은주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에어컨이 돌아가는 병원 복도였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방금 전까지 연민으로 가득했던 가슴속이 이제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혼란으로 뒤엉켰다.깁스에 묶인 채 꼼짝도 못 하는 그 육체 안에, 자신을 범하고 싶어하는 젊고 위험한 사내의 집착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재윤은 자신의 텅 빈 모성을 무기로 삼아 은주가 스스로 덫에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은주는 보기 좋게 발을 디딘 셈이었다.은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재윤의 상태를 보고해야하고 또 그의 목소를 들어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은주는 서둘러 종우의 번호를 눌렀다.기나긴 신호음만이 적막한 복도를 채웠다.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연결되지 않는 전화를 붙잡고 복도를 서성이는 은주의 발걸음이 애처롭게 흔들렸다.다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집요하고 시커먼 눈동자를 마주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그렇게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화면에 뜬 '사장님'이라는 세 글자를 확인한 은주는 쫓기는 사람처럼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사장님. 노은주입니다.""노 실장. 재윤이는 좀 어때?"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종우의 낮고 견고한 목소리.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은주는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한 것을 꾹 참아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네. 수술은 방금 전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우측 전완골과 좌측 대퇴부 복합 골절로 철심을 박았고, 현재는 우리 계열사 병원 VIP 병실로 이송하여 마취에서 깨어난 상태입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