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송이나경
정은소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매서운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깊은 겨울 아침이었다. 창호를 비집고 스며든 희끄무레한 햇살 아래, 고시언은 검은 비단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백옥대를 두르고 있었다. 꼿꼿이 선 모습은 갓 칼집에서 뽑아 든 검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문 앞을 막아선 것만으로도 비좁은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듯했다.

변방에 있을 때보다 피부는 조금 희어졌지만, 반듯한 미간에는 전보다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눈 밑에 희미하게 번진 푸른 기색은 그가 오랫동안 편히 잠들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고시언의 묵직한 시선이 정은소에게로 향했다. 그 눈길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무거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은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러온 배가 움직임을 더디게 했으나,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장군을 뵙습니다.”

목소리는 잔잔했고 몸가짐은 반듯했다. 지나치리만큼 차분한 모습이라 어디에서도 흠을 찾아낼 수 없었다.

고시언의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갔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으로 미처 감추지 못한 놀라움이 한순간 스쳤다.

그가 개선해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꼬박 한 달이었다. 그러나 정은소를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별채로 오는 동안 그는 정은소가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보자마자 달려와 다리를 붙들고 어째서 이제야 찾아왔느냐며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다. 혹은 눈시울을 붉힌 채 변방에서 나눈 정을 벌써 잊었느냐고 원망하거나, 그동안 겪은 설움을 늘어놓으며 명분을 달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정은소는 예상 밖으로 얌전했고, 기이할 만큼 평온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시언의 눈빛에 이내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정은소가 권세가에게 빌붙으려는 여인들처럼 한때의 총애만 믿고 방자해지거나, 자신의 신분을 잊을까 줄곧 염려해 왔다. 그러나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정은소는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조용히 분수를 지킬 줄도 알았다. 그 정도라면 앞으로도 누구에게 골칫거리가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고개를 들거라.”

고시언은 낮게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찬 공기가 옷자락을 따라 스며들자, 가뜩이나 희미하던 방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다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낯빛을 굳혔다.

별채는 생각보다 훨씬 초라했다. 낡은 세간만 띄엄띄엄 놓여 있었고, 방 안에는 향긋한 차 냄새는커녕 사람 사는 온기조차 희미했다. 심지어 탁자 위에는 따뜻한 물 한 모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시종들이 감히…….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불러 호되게 질책하고 싶었으나, 고시언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의자에 앉은 뒤 정은소를 향해 턱짓했다.

“너도 앉거라. 아이를 가진 몸이니 계속 서 있을 필요 없다.”

정은소는 조용히 대답하고 그의 아랫자리에 놓인 낮은 의자에 앉았다. 두 손으로 불러온 배를 가볍게 감싼 채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손끝에는 차가운 방 안의 냉기가 배어 있었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으로 마른 나뭇가지가 겨울바람에 긁히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시언은 말없이 앉아 있는 정은소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가볍게 헛기침했다.

“도성으로 돌아온 뒤 처리할 일이 많았다. 워낙 바쁘다 보니 너를 보러 올 겨를이 없었구나.”

“장군께서는 공무가 우선이시니 이해합니다.”

정은소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눈가까지 닿지 못한 채 얇게 머물렀다.

“괘념치 마십시오. 저는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 탈 없이 잘 지낸다고?

고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변방에 있을 때도 정은소는 얌전하고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녀의 눈에는 언제나 맑고 따스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가 막사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설 때마다 정은소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은 꼭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 강아지처럼 순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오늘의 정은소에게서는 그때의 빛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은소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고요하다 못해 한 줄기 파문조차 일지 않는 죽은 연못 같았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낯설고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강이 별채 근처에 몰래 사람을 붙여 두지 않았다면, 고시언도 그녀가 정말 아무 탈 없이 지냈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곧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정은소가 이토록 얌전히 분수를 지킨다면 번거로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에게도, 혼례를 앞둔 장군부 전체를 위해서도 그것이 가장 좋은 결과였다.

훗날 부족하지 않도록 보상해 주면 그만이었다.

“참으로 기특하구나.”

고시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뒤면 나와 조 소저의 혼례다. 그전까지는 부저가 몹시 어수선해 네 쪽까지 세심히 돌보기 어려울 테니, 며칠만 더 참고 지내거라.”

혼례…….

그 두 글자가 귓가에 떨어지는 순간, 정은소의 손끝이 자신도 모르게 배 위에서 움찔했다.

고시언이 먼저 혼례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가슴 한복판으로 무겁고 둔한 통증이 서서히 번져 갔으나, 그녀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며 얼굴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고시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바로 그날, 예부상서의 여식인 조청아와 함께 입궁해 황제에게 포상을 받았다고 했다.

크게 기뻐한 황제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혼례일까지 정해 주었다. 석 달 뒤, 긴 겨울이 물러가고 봄바람 속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무렵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정은소는 별채 문 앞에서 고시언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밤의 냉기가 옷자락을 파고들고 손발의 감각이 무뎌질 때까지, 그녀는 문밖을 바라보며 꼬박 밤을 새웠다. 그러나 고시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날이 밝도록 기다린 그녀에게 닿은 것은 그가 곧 혼인한다는 소식뿐이었다.

정은소는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일렀다.

조청아는 명문가의 규수였고 오래전부터 고시언과 혼약을 맺은 사이였다. 반면 자신은 고작 통방 몸종에 불과했다. 그의 곁에서 잠시 총애를 받았다고 한들, 질투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 보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정은소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곁에서 시중들던 몸종은 하루아침에 다른 곳으로 보내졌고, 대신 성질 사나운 어멈 하나가 붙었다. 그 뒤로는 물을 긷는 일부터 방을 치우고 끼니를 마련하는 일까지 모두 제 손으로 해야 했다. 매일 들어오던 음식은 눈에 띄게 줄었고, 새 옷은커녕 해진 옷을 기워 입어야 할 때도 있었다. 심지어 시종들은 마주칠 때마다 알 수 없는 경멸과 호기심을 담아 정은소의 불러온 배를 훑어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아이를 무사히 낳고 고시언의 곁에 남는 것뿐이었다. 정식으로 이름을 얻지 못하더라도,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며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작은 희망마저 잔인하게 짓밟아 버렸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아이를 빼앗으려 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그녀의 목숨마저 거두려 했다.

정은소는 배 위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고시언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창백한 입가에 애써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장군의 경사에 아직 축하 인사도 올리지 못했군요. 장군과 조 아가씨께서 백년해로하시기를 바랍니다.”

더없이 진심 어린 말투였다. 마치 정말로 그의 혼인을 기뻐하고 축복하는 사람처럼 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시언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우려마저 내려놓았다.

정은소는 진심으로 분수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탐내지도, 눈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고시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윽고 마치 커다란 은혜라도 베푸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느릿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이를 낳으면 너를 첩으로 올려 주마. 그러니 앞으로도 안심하고 부저에서 머물며 아이를 기르도록 하거라.”

첩으로 올려 주겠다.

그 말이 무딘 칼날처럼 정은소의 가슴을 천천히 도려냈다. 단숨에 베어 버리는 날카로운 고통이 아니라, 살갗을 조금씩 짓이기며 파고드는 질긴 아픔이었다.

정은소는 눈앞의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변방의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보살피고, 남몰래 깊이 연모했던 사내였다. 그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수없이 밤을 지새웠고, 그가 건넨 짧은 말 한마디와 무심한 눈길 하나만으로도 오래도록 가슴 설레곤 했다.

그런데 지금 마주한 고시언은 더없이 낯설었다.

낯선 것을 넘어 우습기까지 했다.

고시언은 첩이라는 자리 하나가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라고 여기는 걸까?

자신이 온갖 고생을 견디며 그의 아이를 품고, 노부인의 냉대를 감내하고, 부저 시종들의 멸시까지 묵묵히 참아 온 이유가 고작 그의 첩이 되기 위해서라고 믿는 것일까?

정은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았다. 웃고 싶었으나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식어 버린 마음만큼이나 차가운 조소가 얇게 얼어붙었다.

“장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내리깔아 모든 감정을 감추었다.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다름없이 공손하고 차분했다.

고시언은 그런 정은소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자락에서 희미한 냉향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문을 열자 바깥의 찬 바람이 다시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문턱을 넘으려던 고시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몸조리 잘하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거라.”

그 말을 끝으로 고시언은 별채를 떠났다.

무거운 발소리가 뜰을 가로질러 서서히 멀어졌다. 이윽고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별채의 대문이 닫히자, 한바탕 차가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 뜰 안에는 다시 숨 막히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정은소는 그 자리에 선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멀리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에서 녹은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작은 물소리가 고요한 별채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은소는 가슴속에 막혀 있던 것을 토해 내듯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입가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거짓 미소도 마침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여태껏 고시언이 이토록 위선적인 사람인 줄 몰랐다.

안심하고 부저에서 머물라고?

자신더러 아이를 기르라고?

그들은 이미 자신을 장군부의 치욕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이를 빼앗은 뒤 어떻게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릴지 궁리하고 있으면서, 굳이 이토록 다정한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속이 울렁거렸다.

역겨웠다.

정은소는 눈을 감고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에 뜨거운 기운이 몰렸으나,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솟구치는 눈물을 꾹 눌러 삼켰다.

울어서는 안 된다.

눈물은 아무것도 바꾸어 주지 못한다.

지금 그녀에게 눈물만큼 쓸모없는 것은 없었다.

잠시 뒤 정은소는 눈을 뜨고 몸을 돌렸다. 천천히 장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연 뒤,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둔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부인이 처음 내어 준 은자 삼백 냥은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집으로 보냈다.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는 노부인도 이따금 사람을 시켜 물건을 보내 왔다. 빛깔이 고운 옷감 몇 필과 은비녀 두 자루, 매끄러운 옥팔찌 한 쌍이었다.

크게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품질이 나쁘지도 않았다. 정은소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손대지 않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채 장 깊숙한 곳에 가지런히 보관해 두었다.

그녀는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살피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셈을 해 보았다.

어떻게든 장군부 밖으로 한 번 나가야 했다. 가능하다면 집에도 다녀와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의 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정은소의 시선이 만삭에 가까워진 배로 향했다.

이토록 몸이 무거운 데다 부저의 단속마저 엄했다. 시종 하나 없이 홀로 대문을 나서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곳에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정은소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꺼내 놓았던 물건들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장 안에 넣었다. 문을 단단히 닫은 뒤에는 작은 부엌으로 가 손수 불을 지피고 밥을 지었다.

마른 장작이 타들어 가며 희미한 연기 냄새를 피워 올렸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밥을 겨우 몇 술 떠먹고 나니, 긴장으로 팽팽했던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한낮이 되자 더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고 허리도 묵직하게 욱신거렸다.

정은소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누였다. 얇은 이불 속에는 온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지친 몸은 곧 깊은 잠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그런데 막 의식이 희미해지려던 순간, 굳게 닫아 두었던 방문이 또다시 벌컥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이치며 이불 끝자락을 흔들었다.

정은소는 놀라 눈을 떴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평소에는 누구 하나 찾지 않던 쓸쓸한 별채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북적이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30화

    정은소는 장군부에서 점점 멀어졌다.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작은 길만 골라 다녔다. 좁은 골목과 구불구불한 뒷길을 돌고 또 돌며, 야간 순찰을 도는 관병과 마주칠 만한 곳은 모조리 피했다.배가 불러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했다.그래도 상관없었다.다시 붙잡혀 장군부로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느려도 계속 걸을 수 있었다.그런데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일까.조금 전부터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줄곧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은소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하지만 어두운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마른 잎 몇 장만이 바람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다가 청석길 위로 떨어졌다.아무도 없었다.정은소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또다시 들었다. 어둠 속에 무언가가 몸을 숨긴 채 서두르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조용히 따라오는 듯했다.정은소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모퉁이를 돌아서자 앞에는 더욱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양옆으로 높은 담장이 솟아 있어 달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았다. 눈앞의 길만 희미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정은소는 한 손으로 담을 짚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다 발밑의 흔들리는 돌을 잘못 밟아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다급히 중심을 되찾고 양팔로 배부터 감쌌다.바로 그때, 골목 깊은 곳에서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정은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 숨을 죽였다.이윽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골목 안쪽에서 휘청거리며 나타났다.온몸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몇 번씩 옆으로 기울었다. 입으로는 가락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웅얼거리고 있었다.술에 취한 사내였다.정은소는 그가 먼저 지나가도록 몸을 옆으로 돌렸다.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취객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그의 시선이 정은소의 몸을 훑었다.크게 불러온 배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9화

    문을 밀자 경첩에서 희미한 삐걱 소리가 흘러나왔다.작은 소리에 불과했지만, 깊은 적막에 잠긴 밤에는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정은소는 숨을 죽인 채 몸을 옆으로 틀어 좁게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갔다.후문 밖은 장군부 뒤편의 인적 없는 거리였다. 깊숙이 이어진 골목에는 등불 하나 밝혀져 있지 않았다. 머리 위에 걸린 초승달만이 싸늘한 빛을 흘리며 청석이 깔린 길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정은소는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보퉁이를 든 채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만삭에 가까운 배가 무거워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씩 신중하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장군부를 나왔다.마침내…… 그 장군부를 벗어났다.정은소의 눈가가 갑자기 시큰해졌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조금이라도 더 멀리, 더 멀리 가야 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걸어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곳에 닿은 다음, 어머니와 동생이 기다리는 작은 마을로 가야 했다.그러나 정은소가 별채를 떠난 직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한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정은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고, 다른 한 사람은 고시언의 처소를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두 사람은 주강이 별채 주변에 배치해 둔 암위였다.*앞마당의 서재는 늦은 시각까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손님 몇 사람을 배웅하고 막 돌아온 주강은 자신을 기다리던 암위에게 가로막혔다.“주 부장!”암위가 다급히 다가와 주강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주강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나갔다는 게 무슨 말이냐?”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급히 되물었다.“지금 이 시각에?”암위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정 낭자가 보퉁이를 들고 혼자 몰래 별채를 빠져나왔습니다. 그 모습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달아나는 듯했습니다.”주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성큼성큼 서재로 달려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장군!”고시언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8화

    고시언은 문득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깊은 눈동자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욕망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변방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돌이킬 때마다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정은소의 탄탄한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던 감각이었다.그 감각에 한 번 맛을 들인 뒤로는 몇 번을 품어도 만족할 수 없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실 자신에게는 정은소 하나면 충분했다.고시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언젠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정은소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끝났다.고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줄지 않은 음식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먹는 양이 너무 적구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정은소도 따라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예, 명심하겠습니다.”고시언은 정은소를 잠시 바라보았다.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는 정확히 짚어 낼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에게는 온 신경을 쏟아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 큰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장군부 전체가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멸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시언은 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정은소에게 몸을 잘 돌보라고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정은소는 문 앞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고시언의 뒷모습은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이내 샛문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정은소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이제 정말 작별이에요.’어멈은 남은 그릇들을 모두 치운 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정은소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눈을 크게 뜬 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캄캄한 휘장만 바라보며 미동도 하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7화

    이제 움직일 때였다.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이 위험천만한 곳을 떠나야 했다.그날도 겉보기에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정은소는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마당을 두 바퀴 거닐었다. 방으로 돌아와 한나절 동안 책을 읽고 잠시 낮잠을 잔 뒤, 오후에도 의서를 몇 장 더 넘겼다.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멈이 저녁상을 가져왔다.쌀죽 한 그릇과 소박한 반찬 두 접시, 향긋한 계화떡 한 접시가 전부였다.정은소가 막 젓가락을 들었을 때 문발이 걷히며 고시언의 훤칠한 모습이 나타났다.그는 대나무 잎처럼 푸른빛이 도는 평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달빛처럼 흰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평소의 날카롭고 위압적인 모습은 한결 누그러지고 드물게 여유로운 기색이 감돌았다.뜻밖의 등장에 놀란 정은소는 들고 있던 젓가락까지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고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찌 그리 놀라는 것이냐?”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주강은 손에 든 찬합을 열어 음식을 한 접시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윤기가 흐르도록 푹 조린 돼지족발과 담백한 농어찜, 따뜻한 닭고기탕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제비집죽까지.하나같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다. 고소하고 진한 냄새가 퍼지자 소박했던 저녁상이 순식간에 풍성해졌다.“먹거라.”고시언은 제비집죽을 정은소 앞으로 밀어 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운 것을 보니 기분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정은소는 눈앞에 놓인 제비집죽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고시언은 일부러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아니면 다른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일까?혹시 자신이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정은소는 고시언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까 두려워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죽을 조금씩 떠먹었다.고시언도 젓가락을 들어 농어 살점을 한 점 집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6화

    정은소는 고시언이 손을 뻗는 것을 알아차리자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거두어 이불 아래로 감췄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예법에 어긋났음을 깨닫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허공에 멈춘 고시언의 손이 잠시 굳었다. 이윽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다.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까?낮에 집으로 가던 길을 가로막아 억지로 장군부에 데려왔기 때문에?고시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정은소가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한다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려 했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았겠는가.물론 정은소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있었다.그저 바쁜 자신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고시언은 이 여인이 때로는 지나치게 손이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혼자 감당하고 참아 내니, 오히려 그가 알아차릴 틈조차 없었다.“되었다. 밤이 깊었으니 일찍 쉬어라.”고시언은 더 다가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돌아가겠다.”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문발 너머로 사라지는 고시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이불 아래에 감췄던 손을 천천히 꺼냈다.가느다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두려워서가 아니었다.조금 전 고시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자신이 보인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가 남아 있었다.정은소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에 번지는 쓰라림을 애써 깊숙이 눌러 삼켰다.*그 뒤 며칠 동안 정은소는 모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대부분의 시간은 방 안에 머물며 책을 읽었다. 고명원이 가져다준 의서도 어느새 절반 이상 읽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 두었다가, 다음에 고명원이 찾아오면 물어볼 생각이었다.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5화

    정은소는 잠시 침묵했다.고명원에게만큼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연아가 한 짓이 아니에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제가…… 일부러 먹은 거예요.”“뭐라고 하셨소?”고명원이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곧바로 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정은소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직접 먹었다고 했소? 제정신이오? 그 약초는 성질이 몹시 차서 조금만 잘못 먹어도 산모와 아이, 둘 다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소. 그걸 몰랐던 것이오?”“알고 있었어요.”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고명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단단했다.“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양을 미리 계산했어요.”고명원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으나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동안 자신이 보아 온 정은소는 언제나 온순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묵묵히 참으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고명원은 정은소에게서 광기마저 느껴질 만큼 단호한 결의를 처음으로 보았다.“어째서…….”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오? 연아를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었잖소. 무엇 때문에 자신과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연아는 아가씨의 사람이고, 아가씨는 곧 장군의 정실이 되실 분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장군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물론 겉으로 내세운 말에 불과했다.정은소는 알고 있었다. 고시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어도 그는 자신을 위해 연아를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로 조청아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고명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공자.”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안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