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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나는 죽었다
그해 봄, 나는 죽었다
Author: 송이나경

제1화

Author: 송이나경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장군부의 측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은소는 차가운 돌계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나무 대야에 담근 채로 손안의 옷가지를 한 번, 또 한 번 힘주어 문질렀다.

대야의 물은 진작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열 손가락은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었고, 부르튼 마디마다 가느다란 상처가 여러 갈래로 터져 있었다. 찬물이 갈라진 살갗에 스며들 때마다 뼛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정은소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심히 같은 동작만 되풀이했다.

회임한 지도 어느덧 여덟 달.

불러 오른 배의 무게 탓에 허리와 등이 끊어질 듯 쑤셨고, 퉁퉁 부은 두 다리는 오래 쪼그리고 있을수록 감각이 흐려졌다. 그러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자 정은소는 한 손으로 돌계단을 짚고 자세를 바꾸려 했다.

그 순간, 뱃속의 아이가 불안한 듯 세차게 발길질했다.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정은소의 몸이 움츠러들며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왜 이리 느려터진 것이냐! 옷 몇 벌 빠는 데 대체 얼마나 걸리는 게냐?”

곁에서는 어멈 하나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고, 바닥에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뱉은 껍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멈은 정은소의 불러 오른 배를 힐끗 바라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기껏해야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몸종 주제에,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느냐. 빨래 몇 벌 하면서 어찌나 꾸물거리는지.”

정은소는 젖은 옷가지만 내려다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시언이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정은소가 머무는 별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저 바쁜 탓이라 생각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장군이니 밀린 군무와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거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그 한 달 동안 정은소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들이 권세의 향방에 따라 얼마나 손쉽게 태도를 바꾸는지, 그리고 신분이 낮은 사람의 목숨이 이 장군부에서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아…….”

뱃속이 다시금 쥐어짜이듯 아파 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쥔 옷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잔뜩 늘어나 형체가 망가져 있었다.

정은소는 옷을 대야에 내려놓고 돌계단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래 쪼그려 앉아 있던 두 다리는 피가 통하지 않는 듯 저리고 무거웠다. 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 그녀는 계단 모서리를 꽉 움켜쥔 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멈.”

정은소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운 뒤,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는 어멈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 계속 배가 아픕니다. 번거롭겠지만 사람을 시켜 안태약 한 첩만 지어 오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멈은 입안에 남은 껍질을 퉤 뱉어 내고는 정은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윽고 주름진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안태약? 지금 장군부가 얼마나 바쁜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냐? 노부인께서 장군의 혼사를 준비하시느라 온 집안이 분주하다. 시종들이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는데, 누가 한가하게 네 약이나 지으러 다녀오겠느냐?”

정은소는 추위에 핏기를 잃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헌데 배가 너무 아파서…….”

“아프면 뭐 어쩔 것이냐?”

어멈은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툭툭 털었다.

“너도 이제는 네 처지를 똑똑히 알아야지. 장군과 조 소저의 혼례가 코앞이다. 곧 어엿한 정실부인이 들어오실 텐데, 몸종 하나가 아이를 무사히 낳든 말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느냐?”

말을 마친 어멈은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를 흔들며 뜰을 빠져나갔다.

정은소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갈라진 상처 위로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찬물에 얼어붙은 손끝은 통증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저런 모진 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만은 달랐다. 이 아이는 정은소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고시언의 핏줄이자 고씨 가문의 후손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외면한다 해도, 설마 고시언이 제 아이마저 모른 척할까.

정은소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시언의 처소를 향해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였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는 제 것이 아닌 듯 무거웠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둔중한 통증이 번졌고, 불러 오른 배가 아래로 쏠리는 듯했다. 회랑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더는 걷지 못하고 벽을 짚은 채 한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회랑 밖에서는 메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딪혀 가느다란 마찰음을 냈다. 정은소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발을 떼려 했다.

그때 앞쪽 모퉁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인과 고시언이었다.

“시언아, 청아와의 혼례 날짜도 정해졌으니 이제 그 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노부인의 목소리에는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시언의 낮은 목소리는 평온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별채에 머물고 있는 아이 말이다. 회임한 그 몸종.”

노부인은 마치 처리하기 번거로운 물건 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가 태어난 뒤까지 제 어미 곁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도 네 첫아이인데, 몸종이 낳아 길렀다는 소문이 돌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대로 청아에게 보내 기르게 하고, 청아의 자식으로 올리도록 하거라.”

정은소의 발이 바닥에 못 박힌 듯 굳었다.

회랑을 휘돌던 겨울바람이 옷자락 안으로 스며들었으나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몸 안을 흐르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어, 손끝과 발끝까지 싸늘하게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노부인은 잠시 뜸을 들인 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아이는…… 적당히 처리하거라. 그래야 청아의 마음에도 앙금이 남지 않을 것 아니냐.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다.”

뒤이어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는 네가 줄곧 변방에 있었고, 청아와의 혼담도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 내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고 말았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후회스럽구나.”

그 말을 끝으로 회랑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은소는 터져 나오려는 숨소리를 막으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몸을 지탱하려 차가운 벽에 어깨를 기댔지만, 무릎에서는 자꾸만 힘이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다렸다.

고시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단 한마디라도 자신과 아이를 위해 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저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당장 결정할 수 없으니 시간을 달라는 한마디만 해 준다면, 아직은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고시언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마치 정은소와 뱃속의 아이가 아니라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의 생사를 논하는 듯했다.

“할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가볍게 허공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정은소에게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되어 가슴 한가운데를 깊숙이 꿰뚫었다.

노부인은 고시언의 대답이 흡족한 듯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마지막 당부를 덧붙였다.

“다만 이 일은 아직 청아에게 알리지 말거라. 예전에 상서 댁에서 혼사를 차일피일 미루었으니, 이번에는 저들도 조금 애가 타게 두어야지.”

“할머니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돌아서서, 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까지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두 다리는 돌처럼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은소는 무너지지 않으려 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톱이 거친 벽면을 긁으며 깊은 자국을 남겼고, 부서진 가루가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어미의 절망을 느끼기라도 한 듯 뱃속의 아이가 세차게 몸을 뒤틀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아랫배에서 시작해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정은소는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허리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추웠다.

그녀는 장군부의 겨울바람이 이토록 차갑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정은소는 바깥채를 쓸고 닦는 허드렛일을 맡은 시녀에 불과했다. 어느 날 노부인을 모시는 주 어멈이 찾아와 변방으로 가 소장군의 시중을 들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정은소의 어머니는 중병으로 앓아누운 상태였다. 약값은 나날이 불어났고, 동생의 학비는 석 달이나 밀려 있었다. 아무리 끼니를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주 어멈은 변방으로 가기만 하면 노부인이 정착금으로 은자 백 냥을 내릴 것이라 했다. 만일 장군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면 이백 냥을 더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자 백 냥.

누군가에게는 그저 넉넉한 돈일지 몰라도 정은소에게는 가족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돈이었다. 어머니의 약을 사고, 정은호의 밀린 학비를 내고도 한동안 굶지 않을 수 있는 돈이었다.

정은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와 함께 변방으로 떠난 시녀는 두 명이 더 있었다.

하나는 노부인의 처소에서 일하던 큰시녀 춘화였다. 춘화는 용모가 단정하고 말씨와 몸가짐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래 고시언의 곁에서 시중들던 연아로,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울 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서 정은소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애초에 고시언의 눈에 들리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약값을 마련할 은자 백 냥은 이미 어머니의 손에 들어갔고, 동생의 밀린 학비도 치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변방에 도착한 뒤 아무리 고된 일을 시킨다 해도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시언의 눈에 든 사람은 춘화도, 연아도 아닌 정은소였다.

그와 함께한 변방의 나날은 정은소가 감히 꿈꿔 본 적조차 없을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드넓은 들판을 달릴 때면 고시언은 그녀의 뒤에 앉아 직접 고삐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밤이면 그녀의 손을 잡고 붓을 쥐는 법부터 글자를 쓰는 법까지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차가운 모래바람이 군막을 뒤흔드는 밤에는 정은소를 품에 안은 채 잠들었다. 심지어 군의 곁을 드나들며 약초와 침술을 익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까지 했다.

그 다정함은 척박한 변방에서 피어난 유일한 봄과도 같았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자 정은소는 도성으로 돌아와 태교를 시작했다.

그때의 그녀는 참으로 어리석고 순진했다. 마침내 평생을 맡겨도 좋을 사람을 만났다고 믿었다. 변방의 춥고 긴 밤을 함께 견뎌 낸 만큼 두 사람의 마음도 단단히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전, 승리를 거두고 장군부로 돌아온 고시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정은소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단 한 번도 별채를 찾지 않았다. 안부를 묻지도, 뱃속의 아이가 무탈한지 살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정은소는 그저 바쁜 탓이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으며 스스로를 속여 왔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변방에서 그가 베풀었던 온정도,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눈빛도,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보냈던 밤도 결국 거울 속에 비친 달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다.

고시언은 장군이었고, 정은소는 그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몸종이었다.

머나먼 변방에서 그에게는 외로움을 달래 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마침 정은소가 그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정은소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 믿었다. 마침내 자신에게도 기댈 곳이 생겼다고 여겼고, 뱃속의 아이는 두 사람이 함께 기다려 온 소중한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시언의 눈에, 그리고 이 장군부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그저 아이를 낳기 위해 쓰이다가 버려질 도구에 불과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마지막 쓸모마저 다할 터였다. 더구나 정실부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될 테니,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없애려 하고 있었다.

정은소는 벽을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손바닥에는 손톱이 파고든 붉은 자국이 선명했으나, 이제 그런 통증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한 걸음씩 되짚어 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듯했다. 배를 쥐어짜는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지만, 이제는 아픈 곳이 몸인지 가슴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목 놓아 울며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별채로 돌아온 정은소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았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끊기자 방 안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팔로 불러 오른 배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네 어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정은소는 한참 뒤에야 갈라진 목소리로 뱃속의 아이에게 속삭였다.

“너무 어리석었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 끝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지난 한 달 동안 견뎌야 했던 온갖 냉대와 설움도 고시언이 내뱉은 그 한 마디만큼 그녀를 깊이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

한편 회랑에서는 노부인이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겨울바람만 휑하니 지나가는 회랑에 고시언과 부장 주강만 남아 있었다. 변방에서 두 사람을 오래 지켜보았던 주강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끝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 정말로…… 정 낭자를 없애실 생각입니까?”

그로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변방에서 고시언이 정은소를 얼마나 아끼고 살뜰히 보살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고시언은 주강을 한 차례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이제는 정은소를 한번 찾아가 보아야 할 때였다.

*

정은소는 차가운 바닥에 앉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새 꺼지지 않던 등잔불이 가느다랗게 흔들리다 마침내 사그라들고, 창호지 너머로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번져 왔다.

이튿날 아침, 정은소는 동경 앞에 앉아 초췌해진 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과 핏기 없이 메마른 입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낯선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만큼은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던 슬픔이 조금씩 걷히고, 그 자리에는 차갑고 또렷한 이성이 자리 잡았다. 이윽고 정은소의 눈빛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이 서렸다.

그때, 고요한 뜰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묵직하고 익숙한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문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차가운 아침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문턱을 넘어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고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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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시언은 문득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깊은 눈동자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욕망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변방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돌이킬 때마다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정은소의 탄탄한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던 감각이었다.그 감각에 한 번 맛을 들인 뒤로는 몇 번을 품어도 만족할 수 없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실 자신에게는 정은소 하나면 충분했다.고시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언젠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정은소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끝났다.고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줄지 않은 음식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먹는 양이 너무 적구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정은소도 따라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예, 명심하겠습니다.”고시언은 정은소를 잠시 바라보았다.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는 정확히 짚어 낼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에게는 온 신경을 쏟아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 큰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장군부 전체가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멸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시언은 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정은소에게 몸을 잘 돌보라고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정은소는 문 앞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고시언의 뒷모습은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이내 샛문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정은소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이제 정말 작별이에요.’어멈은 남은 그릇들을 모두 치운 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정은소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눈을 크게 뜬 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캄캄한 휘장만 바라보며 미동도 하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7화

    이제 움직일 때였다.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이 위험천만한 곳을 떠나야 했다.그날도 겉보기에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정은소는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마당을 두 바퀴 거닐었다. 방으로 돌아와 한나절 동안 책을 읽고 잠시 낮잠을 잔 뒤, 오후에도 의서를 몇 장 더 넘겼다.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멈이 저녁상을 가져왔다.쌀죽 한 그릇과 소박한 반찬 두 접시, 향긋한 계화떡 한 접시가 전부였다.정은소가 막 젓가락을 들었을 때 문발이 걷히며 고시언의 훤칠한 모습이 나타났다.그는 대나무 잎처럼 푸른빛이 도는 평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달빛처럼 흰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평소의 날카롭고 위압적인 모습은 한결 누그러지고 드물게 여유로운 기색이 감돌았다.뜻밖의 등장에 놀란 정은소는 들고 있던 젓가락까지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고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찌 그리 놀라는 것이냐?”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주강은 손에 든 찬합을 열어 음식을 한 접시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윤기가 흐르도록 푹 조린 돼지족발과 담백한 농어찜, 따뜻한 닭고기탕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제비집죽까지.하나같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다. 고소하고 진한 냄새가 퍼지자 소박했던 저녁상이 순식간에 풍성해졌다.“먹거라.”고시언은 제비집죽을 정은소 앞으로 밀어 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운 것을 보니 기분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정은소는 눈앞에 놓인 제비집죽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고시언은 일부러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아니면 다른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일까?혹시 자신이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정은소는 고시언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까 두려워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죽을 조금씩 떠먹었다.고시언도 젓가락을 들어 농어 살점을 한 점 집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6화

    정은소는 고시언이 손을 뻗는 것을 알아차리자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거두어 이불 아래로 감췄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예법에 어긋났음을 깨닫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허공에 멈춘 고시언의 손이 잠시 굳었다. 이윽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다.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까?낮에 집으로 가던 길을 가로막아 억지로 장군부에 데려왔기 때문에?고시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정은소가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한다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려 했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았겠는가.물론 정은소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있었다.그저 바쁜 자신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고시언은 이 여인이 때로는 지나치게 손이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혼자 감당하고 참아 내니, 오히려 그가 알아차릴 틈조차 없었다.“되었다. 밤이 깊었으니 일찍 쉬어라.”고시언은 더 다가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돌아가겠다.”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문발 너머로 사라지는 고시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이불 아래에 감췄던 손을 천천히 꺼냈다.가느다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두려워서가 아니었다.조금 전 고시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자신이 보인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가 남아 있었다.정은소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에 번지는 쓰라림을 애써 깊숙이 눌러 삼켰다.*그 뒤 며칠 동안 정은소는 모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대부분의 시간은 방 안에 머물며 책을 읽었다. 고명원이 가져다준 의서도 어느새 절반 이상 읽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 두었다가, 다음에 고명원이 찾아오면 물어볼 생각이었다.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5화

    정은소는 잠시 침묵했다.고명원에게만큼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연아가 한 짓이 아니에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제가…… 일부러 먹은 거예요.”“뭐라고 하셨소?”고명원이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곧바로 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정은소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직접 먹었다고 했소? 제정신이오? 그 약초는 성질이 몹시 차서 조금만 잘못 먹어도 산모와 아이, 둘 다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소. 그걸 몰랐던 것이오?”“알고 있었어요.”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고명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단단했다.“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양을 미리 계산했어요.”고명원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으나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동안 자신이 보아 온 정은소는 언제나 온순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묵묵히 참으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고명원은 정은소에게서 광기마저 느껴질 만큼 단호한 결의를 처음으로 보았다.“어째서…….”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오? 연아를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었잖소. 무엇 때문에 자신과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연아는 아가씨의 사람이고, 아가씨는 곧 장군의 정실이 되실 분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장군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물론 겉으로 내세운 말에 불과했다.정은소는 알고 있었다. 고시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어도 그는 자신을 위해 연아를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로 조청아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고명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공자.”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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