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송이나경
조청아의 등장은 초라하고 낡은 방 안의 풍경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금실로 무늬를 놓은 석류빛 겉옷을 입고 있었다. 옷깃과 소맷부리에는 눈처럼 흰 토끼털이 풍성하게 둘렸고, 잘록한 허리에는 벽옥으로 만든 패옥 장식이 드리워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옥 장식이 맑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온몸에서 귀하고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 뒤로는 시녀 넷과 어멈 둘이 줄지어 들어왔다. 가뜩이나 비좁은 방 안이 삽시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들이 몰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은은한 향분 냄새가 퍼졌다.

침상에서 막 일어난 정은소는 해진 푸른 무명 겉옷만 급히 걸치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마구 흩어져 있었고, 맨발에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무거운 몸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방 안은 어둑하고 서늘했다. 맨발로 딛고 선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배 때문에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도 평소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조청아는 정은소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곧바로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은소의 얼굴에서 시작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듯, 한 치도 빠짐없이 샅샅이 훑어보는 눈길이었다.

흐릿한 빛 아래 선 정은소는 여러 번 빨아 빛이 바랜 푸른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수척했지만, 타고난 이목구비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맑고 단정한 눈매에 콧날은 곧았고, 도톰한 입술은 고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분을 한 점 바르지 않았음에도 은은한 매력이 배어 있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덟 달이 넘도록 아이를 품은 몸이었지만, 크게 불러온 배를 제외하면 다른 곳은 그리 부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부드러운 모성이 배어 있어, 진흙 속에서도 희고 깨끗하게 피어난 연꽃을 보는 듯했다.

조청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사이 정은소의 두 다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여덟 달이 넘은 배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몸을 굽힌 채 버티는 자세만으로도 힘겨운데, 다리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잠시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무릎에는 가느다란 바늘로 쉴 새 없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마에 촘촘한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정은소는 이를 악문 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조청아는 그제야 정은소가 여전히 인사를 올린 자세로 서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

“어머나.”

조청아는 그제야 그녀를 떠올린 듯 다가와 서둘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정 낭자, 어서 일어나세요. 장군의 아이를 품은 몸이잖아요. 이러다 태기가 불안해지기라도 하면 제가 어찌 감당하겠어요?”

정은소는 그녀가 부축하는 힘을 따라 천천히 허리를 폈다.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조청아는 정은소를 침상 가장자리에 앉힌 뒤 자신도 곁에 놓인 걸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크게 불러온 정은소의 배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몇 달이나 되었나요?”

“아가씨께 아룁니다. 여덟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정은소는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벌써 여덟 달이 넘었군요.”

조청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은소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럼 머지않아 아이가 태어나겠네요. 헌데 정 낭자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군요. 얼굴도 몹시 수척해 보이고요. 역시 아이를 품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닌가 봐요.”

걱정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마치 진심으로 정은소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처럼 다정했다.

정은소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청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은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 제 탓이에요. 예전에는 철없이 노는 것만 좋아해서 시언이와 일찍 혼인하지 못했거든요. 제가 진작 장군부에 들어왔다면 시언이에게 통방이 필요할 일도 없었을 테고, 정 낭자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그녀는 고시언을 말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시언’이라고 불렀다. 오랜 세월 그렇게 불러 온 것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호칭이었다.

정은소의 손가락이 치맛자락 위에서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정은소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청아는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시언은 여자의 마음을 참 잘 달랠 줄 알아요. 며칠 전에는 정 낭자가 아이를 낳으면 제 처소로 보내 기르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정은소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정은소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면 저는 아이를 조금 늦게 낳아도 되고, 원하지 않으면 낳지 않아도 괜찮대요. 자기는 제가 이런 고생을 겪는 것이 마음 아파 차마 볼 수 없다면서요.”

조청아는 수줍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눈가에는 사랑받는 여인 특유의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정 낭자가 보기에도 참 실없는 소리만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정은소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로 눈동자에 어린 모든 감정을 감춘 뒤, 오히려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장군께서 아가씨를 그만큼 아끼시기 때문이겠지요. 아가씨께서는 귀하게 자라신 분이니, 장군께서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신 것도 당연합니다.”

조청아의 미소가 잠시 멎었다.

그녀는 정은소의 얼굴에서 아주 작은 변화라도 찾아내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평온하고 공손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기색마저 엿보였다.

이 천한 것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조청아가 오늘 별채까지 찾아온 것도 고시언이 정은소를 만나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직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자 직접 떠보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이 천한 통방 몸종이 제 아이를 빼앗긴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억울함이나 분노, 슬픔 정도는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울며 매달리거나 소란을 피운다면 다루기 쉬웠다. 어떤 식으로 나오든 손을 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은소의 얼굴에서는 티끌만 한 빈틈조차 찾을 수 없었다.

조청아의 가슴속에 서늘한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이토록 철저하게 감정을 숨길 수 있는 여인이라면, 아이를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속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람일 터였다.

들리는 말로는 정은소가 본래 바깥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몸종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 명의 통방 가운데 홀로 고시언의 눈에 들어 총애를 얻었고, 끝내 그의 아이까지 품었다.

그런 여인이 결코 만만한 사람일 리 없었다.

조청아의 마음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정한 미소를 유지한 채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헌데 정 낭자의 방에는 시중드는 사람이 없나요?”

“부저의 일손이 모두 장군과 아가씨의 혼례 준비에 매여 있어 사람이 부족합니다. 저는 혼자서도 제 몸을 돌볼 수 있습니다.”

정은소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청아는 도무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장군의 아이를 품고 있는데 곁에 돌봐 줄 사람 하나 없다니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그녀는 뒤에 늘어선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시선은 이내 녹색 조끼를 입은 시녀에게 머물렀다.

“연아야, 너는 본래 장군부의 시녀인 데다 예전에 정 낭자와 함께 변방에도 다녀왔지? 그러니 이곳에 남아 정 낭자를 보살피거라.”

연아는 살구씨처럼 동그란 눈과 복숭앗빛 뺨을 지닌 여인이었다. 영리하고 약삭빠른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조청아의 명을 들은 연아는 허리를 살짝 굽혀 예를 갖추고 또렷이 대답했다.

“예, 아가씨.”

정은소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아라니.

변방에 있을 때부터 춘화와 연아는 정은소를 싫어해 번번이 그녀를 괴롭혔다.

정은소와 고시언이 가까워진 뒤에는 연아가 뒤에서 훼방을 놓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고시언은 연아를 일찌감치 도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니 연아가 자신을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은소의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조청아가 하필 자신과 원한이 있는 연아를 이곳에 남긴 뜻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가씨께 폐를 끼칠 수는…….”

정은소가 조심스럽게 거절하려 했지만, 조청아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폐가 되기는요. 정 낭자는 아무 걱정 말고 태교에만 전념하세요. 저는 노부인과 함께 혼례복을 고르러 가 봐야 해서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조청아는 시녀와 어멈들을 이끌고 요란하게 별채를 빠져나갔다.

향분 냄새와 패옥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방 안에는 연아만이 홀로 남았다. 그녀는 두 팔을 가슴 앞에 겹쳐 낀 채 방 한가운데 서서, 앉아 있는 정은소를 내려다보았다.

방 안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잠시 뒤, 연아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어머, 정은소. 정말 오랜만이네.”

그녀는 낡고 초라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본 뒤 비웃음을 담아 말을 이었다.

“변방에서는 그렇게 위세가 대단했잖아. 장군의 눈에는 오직 너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더니,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곳에 처박혀 사네?”

정은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상 가장자리를 짚고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킨 뒤, 맨발을 가리기 위해 신을 가져다 신었다.

하지만 연아는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집요하게 쏘아붙였다.

“너는 아직도 모르지? 장군께서는 스물여섯이 되도록 곁에 통방 하나 두지 않으셨어. 마음에 조 아가씨가 계셨기에 그분을 저버리고 싶지 않으셨던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헌데 너처럼 염치없는 것이 변방에서 장군을 유혹했지. 그 바람에 장군께서는 아가씨께 죄책감을 품게 되셨어. 지금 장군부의 모든 사람이 아가씨께 몇 배로 더 잘해 드리려는 것도 전부 네 탓이야.”

연아는 정은소에게 바짝 다가왔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서는 안 될 말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말끝에는 이를 갈 듯한 증오가 가득했다.

“그러니 넌 죽어 마땅하지 않겠어? 네 뱃속의 저 천한 씨도 마찬가지야. 장군께서 아가씨를 저버렸다는 증거니까!”

정은소는 신을 다 신은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동요 한 점 없는 눈으로 연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 말은 다 끝났니?”

그 무심하리만큼 평온한 모습이 오히려 연아를 격분하게 했다.

연아는 변방에 머무는 동안 오래도록 분을 삭여야 했다. 비천한 허드렛일 몸종에 불과했던 정은소가 차츰 고시언의 눈에 들고, 마침내 그의 침상에 올라 온갖 총애를 독차지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이제 처지가 뒤바뀌었다.

자신은 노부인의 명으로 장차 장군부의 안주인이 될 조청아를 모시게 되었고, 정은소는 총애를 잃고 별채에 내쳐진 통방에 불과했다.

그런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여전히 이토록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인가?

“천한 것!”

연아가 손을 뻗어 정은소를 힘껏 밀쳤다.

정은소는 그녀가 갑자기 손을 쓸 줄 예상하지 못했다. 퉁퉁 부은 다리로는 중심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발이 엉키는 순간 몸이 뒤로 크게 기울었고, 허리가 침상 모서리의 날카로운 귀퉁이에 세차게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배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아……!”

정은소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두 팔로 배를 필사적으로 감싸 안자, 순식간에 솟구친 식은땀이 등허리를 흠뻑 적셨다.

연아도 순간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표정을 가다듬고 차갑게 비웃었다.

“뭘 그렇게 유난을 떨어? 한 번 밀렸다고…….”

연아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정은소의 치맛자락 아래로 검붉은 액체가 서서히 번져 나오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30화

    정은소는 장군부에서 점점 멀어졌다.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작은 길만 골라 다녔다. 좁은 골목과 구불구불한 뒷길을 돌고 또 돌며, 야간 순찰을 도는 관병과 마주칠 만한 곳은 모조리 피했다.배가 불러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했다.그래도 상관없었다.다시 붙잡혀 장군부로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느려도 계속 걸을 수 있었다.그런데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일까.조금 전부터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줄곧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은소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하지만 어두운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마른 잎 몇 장만이 바람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다가 청석길 위로 떨어졌다.아무도 없었다.정은소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또다시 들었다. 어둠 속에 무언가가 몸을 숨긴 채 서두르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조용히 따라오는 듯했다.정은소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모퉁이를 돌아서자 앞에는 더욱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양옆으로 높은 담장이 솟아 있어 달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았다. 눈앞의 길만 희미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정은소는 한 손으로 담을 짚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다 발밑의 흔들리는 돌을 잘못 밟아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다급히 중심을 되찾고 양팔로 배부터 감쌌다.바로 그때, 골목 깊은 곳에서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정은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 숨을 죽였다.이윽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골목 안쪽에서 휘청거리며 나타났다.온몸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몇 번씩 옆으로 기울었다. 입으로는 가락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웅얼거리고 있었다.술에 취한 사내였다.정은소는 그가 먼저 지나가도록 몸을 옆으로 돌렸다.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취객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그의 시선이 정은소의 몸을 훑었다.크게 불러온 배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9화

    문을 밀자 경첩에서 희미한 삐걱 소리가 흘러나왔다.작은 소리에 불과했지만, 깊은 적막에 잠긴 밤에는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정은소는 숨을 죽인 채 몸을 옆으로 틀어 좁게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갔다.후문 밖은 장군부 뒤편의 인적 없는 거리였다. 깊숙이 이어진 골목에는 등불 하나 밝혀져 있지 않았다. 머리 위에 걸린 초승달만이 싸늘한 빛을 흘리며 청석이 깔린 길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정은소는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보퉁이를 든 채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만삭에 가까운 배가 무거워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씩 신중하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장군부를 나왔다.마침내…… 그 장군부를 벗어났다.정은소의 눈가가 갑자기 시큰해졌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조금이라도 더 멀리, 더 멀리 가야 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걸어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곳에 닿은 다음, 어머니와 동생이 기다리는 작은 마을로 가야 했다.그러나 정은소가 별채를 떠난 직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한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정은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고, 다른 한 사람은 고시언의 처소를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두 사람은 주강이 별채 주변에 배치해 둔 암위였다.*앞마당의 서재는 늦은 시각까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손님 몇 사람을 배웅하고 막 돌아온 주강은 자신을 기다리던 암위에게 가로막혔다.“주 부장!”암위가 다급히 다가와 주강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주강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나갔다는 게 무슨 말이냐?”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급히 되물었다.“지금 이 시각에?”암위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정 낭자가 보퉁이를 들고 혼자 몰래 별채를 빠져나왔습니다. 그 모습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달아나는 듯했습니다.”주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성큼성큼 서재로 달려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장군!”고시언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8화

    고시언은 문득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깊은 눈동자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욕망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변방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돌이킬 때마다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정은소의 탄탄한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던 감각이었다.그 감각에 한 번 맛을 들인 뒤로는 몇 번을 품어도 만족할 수 없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실 자신에게는 정은소 하나면 충분했다.고시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언젠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정은소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끝났다.고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줄지 않은 음식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먹는 양이 너무 적구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정은소도 따라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예, 명심하겠습니다.”고시언은 정은소를 잠시 바라보았다.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는 정확히 짚어 낼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에게는 온 신경을 쏟아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 큰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장군부 전체가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멸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시언은 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정은소에게 몸을 잘 돌보라고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정은소는 문 앞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고시언의 뒷모습은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이내 샛문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정은소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이제 정말 작별이에요.’어멈은 남은 그릇들을 모두 치운 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정은소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눈을 크게 뜬 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캄캄한 휘장만 바라보며 미동도 하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7화

    이제 움직일 때였다.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이 위험천만한 곳을 떠나야 했다.그날도 겉보기에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정은소는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마당을 두 바퀴 거닐었다. 방으로 돌아와 한나절 동안 책을 읽고 잠시 낮잠을 잔 뒤, 오후에도 의서를 몇 장 더 넘겼다.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멈이 저녁상을 가져왔다.쌀죽 한 그릇과 소박한 반찬 두 접시, 향긋한 계화떡 한 접시가 전부였다.정은소가 막 젓가락을 들었을 때 문발이 걷히며 고시언의 훤칠한 모습이 나타났다.그는 대나무 잎처럼 푸른빛이 도는 평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달빛처럼 흰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평소의 날카롭고 위압적인 모습은 한결 누그러지고 드물게 여유로운 기색이 감돌았다.뜻밖의 등장에 놀란 정은소는 들고 있던 젓가락까지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고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찌 그리 놀라는 것이냐?”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주강은 손에 든 찬합을 열어 음식을 한 접시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윤기가 흐르도록 푹 조린 돼지족발과 담백한 농어찜, 따뜻한 닭고기탕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제비집죽까지.하나같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다. 고소하고 진한 냄새가 퍼지자 소박했던 저녁상이 순식간에 풍성해졌다.“먹거라.”고시언은 제비집죽을 정은소 앞으로 밀어 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운 것을 보니 기분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정은소는 눈앞에 놓인 제비집죽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고시언은 일부러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아니면 다른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일까?혹시 자신이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정은소는 고시언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까 두려워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죽을 조금씩 떠먹었다.고시언도 젓가락을 들어 농어 살점을 한 점 집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6화

    정은소는 고시언이 손을 뻗는 것을 알아차리자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거두어 이불 아래로 감췄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예법에 어긋났음을 깨닫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허공에 멈춘 고시언의 손이 잠시 굳었다. 이윽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다.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까?낮에 집으로 가던 길을 가로막아 억지로 장군부에 데려왔기 때문에?고시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정은소가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한다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려 했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았겠는가.물론 정은소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있었다.그저 바쁜 자신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고시언은 이 여인이 때로는 지나치게 손이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혼자 감당하고 참아 내니, 오히려 그가 알아차릴 틈조차 없었다.“되었다. 밤이 깊었으니 일찍 쉬어라.”고시언은 더 다가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돌아가겠다.”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문발 너머로 사라지는 고시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이불 아래에 감췄던 손을 천천히 꺼냈다.가느다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두려워서가 아니었다.조금 전 고시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자신이 보인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가 남아 있었다.정은소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에 번지는 쓰라림을 애써 깊숙이 눌러 삼켰다.*그 뒤 며칠 동안 정은소는 모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대부분의 시간은 방 안에 머물며 책을 읽었다. 고명원이 가져다준 의서도 어느새 절반 이상 읽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 두었다가, 다음에 고명원이 찾아오면 물어볼 생각이었다.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 그해 봄, 나는 죽었다   제25화

    정은소는 잠시 침묵했다.고명원에게만큼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연아가 한 짓이 아니에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제가…… 일부러 먹은 거예요.”“뭐라고 하셨소?”고명원이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곧바로 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정은소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직접 먹었다고 했소? 제정신이오? 그 약초는 성질이 몹시 차서 조금만 잘못 먹어도 산모와 아이, 둘 다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소. 그걸 몰랐던 것이오?”“알고 있었어요.”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고명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단단했다.“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양을 미리 계산했어요.”고명원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으나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동안 자신이 보아 온 정은소는 언제나 온순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묵묵히 참으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고명원은 정은소에게서 광기마저 느껴질 만큼 단호한 결의를 처음으로 보았다.“어째서…….”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오? 연아를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었잖소. 무엇 때문에 자신과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연아는 아가씨의 사람이고, 아가씨는 곧 장군의 정실이 되실 분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장군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물론 겉으로 내세운 말에 불과했다.정은소는 알고 있었다. 고시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어도 그는 자신을 위해 연아를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로 조청아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고명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공자.”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안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