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한양의 남촌 뒷골목, 홍등이 화려하게 걸려있는 '연화루'의 별채에서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풍악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
가야금 줄이 튕겨지는 소리, 장구 장단, 그 사이사이로 사내들과 술따르는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섞여 담장 너머까지 흘러나왔다.
"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도련님.“
기생 월향이 나긋한 손길로 술병을 기울였다.
상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경은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며 흐드러지듯 풀어진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미 상 위에는 빈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
"시경이 자네,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구먼."
맞은편에 앉은 한도윤이 술잔을 든 채 킬킬 웃었다. 병조참판 댁 아들로, 시경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벗이었다. 그 옆에서 서진이 거들었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술자리에서는 말을 아끼는 놈이지."
"시끄럽다, 이것들아."
시경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탁 내려놓았다. 월향이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웠다.
한양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름난 한량 김시경의 술버릇쯤은 이 집 기생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고, 아무리 절세가인을 앉혀도 술을 따르게 하는 그 이상은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
"도련님, 오늘은 소녀가 밤새 곁을 지켜도 되겠사옵니까."
월향이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시경의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시경의 옷섭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밀어넣었다.
시경은 그 손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그녀의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옮겨 놓았다.
"술이나 따르거라. 거기까지다."
"어머, 도련님~ 제가 어여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도 수백 번은 쌓았겠구만."
월향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물러서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이런 거절이 처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경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참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야.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량이라면서 기생 하나 건드리지 않으니. 자네가 정말 방탕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방탕한 시늉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시늉이라 생각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허, 참. 그럼 왜 매일 이 자리에 오는가?"
"술 마시러 오지 않는가. 난 그저 술이면 됐네."
시경의 간단한 대꾸에 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시경이 저런 식으로 대답을 피할 때는 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오랜 벗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건 그렇고, 우의정 댁 규수와 곧 혼례를 올린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서진이 화제를 돌리자 시경의 눈썹이 가늘게 꿈틀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온 장안이 다 아는 소문일세. 육보정 낭자가 자네 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며?"
"제멋대로 드나드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혼인할 생각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없다."
시경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도윤과 서진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없다고? 우의정 댁과의 혼사인데 그렇게 말해도 되겠는가. 아버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러시든 말든 나랑은 상관이 없네. 그렇게 좋으면 직접하시면 될 일이지."
시경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불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한때는 이 벗들과 함께 서책을 끼고 밤을 새워 학문을 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 자리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윤재 소식은 들은 것이 있느냐."
시경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가."
"두고 말고가 어디 있느냐. 그 집안이 어찌 그리 되었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함경도 쪽으로 유배를 간 이 후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어."
침묵이 흘렀다. 악사들의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세 사람 사이만큼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이윽고 시경이 술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가겠다."
"벌써? 아직 초저녁이 아닌가."
"취하기엔 이르지만 앉아 있기엔 지겹구나."
시경은 도포의 소매자락을 탁 치더니 방을 나섰다.
월향이 아쉬운 표정으로 문가까지 따라 나왔다.
"도련님, 또 오실 것이지요?"
"내일도 오마."
"도련님~~ 내일은 꼭 저 좀 품어주시어요~“
시경은 월향의 유혹에도 한마디 댓구도 하지 않고 신발을 꿰신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청운이었다.
"도련님."
"오래 기다렸느냐."
"괜찮사옵니다."
청운은 짧게 답하고 한 걸음 뒤에서 시경을 따랐다. 어릴 적부터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 온 그였다. 시경이 얼마나 마셨는지, 어디서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하나하나 다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한양의 밤길은 고요했다. 순라군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골목을 지나며 시경은 문득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한심해 보이느냐."
"소인이 어찌 도련님을 그리 생각하겠사옵니까."
"그럼 어찌 생각하느냐."
청운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담담히 답했다.
"도련님께서는 스스로 정하신 선을 넘으신 적이 없으시지요. 소인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기옵니다."
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을 조금 늦추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김정 대감댁 대문을 넘었을 때는 이미 삼경이 지난 뒤였다. 시경은 발소리를 죽이며 사랑채로 향했다. 청운이 물러가고 홀로 방에 들었으나 잠은 쉬이 오지 않았고,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그리고 해가 채 중천에 오르기도 전에, 그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
같은 시각, 호정은 조모께 문안을 마치고 사랑채로 향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도 아침 인사를 올리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사랑채 앞 섬돌에 다다랐을 때, 닫힌 문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노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놈! 어젯밤에도 기방에 있었다지!"
김정 대감의 목소리였다. 호정은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이번에는 낯익은 나른한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술 한 잔 하였을 뿐이옵니다."
"한 잔이 매일이더냐! 곧 혼인할 놈이 기방이나 드나들다니, 이 집안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혼인이라니요. 전 아직 혼인할 마음이 없습니다."
"혼인할 마음이 없어! 누구마음대로!! 지금 네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그리고 우의정 대감께서 이미 뜻을 비치셨고, 네 어미도 그리 알고 있다. 그런 놈이 뒷골목 기방에서 술이나 퍼마신다는 소문이 우의정 댁 귀에라도 들어가 보아라. 그때는 어쩔 것이냐!"
"...소자의 처신은 소자가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알아서 하는 꼴이 이 모양이냐! 오늘부터 기방 출입은 끊거라. 다시 그 근처에서 네 얼굴을 보았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는 문밖출입을 못 하게 할 것이야!"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이윽고 시경이 낮게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말투에는 순종이라기보다 귀찮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호정이 그제야 자신이 남의 꾸지람을 엿듣는 꼴이 되었음을 깨닫고 슬며시 돌아서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문턱을 넘어 나온 시경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직후여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섬돌 앞에 서 있는 호정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엿듣는 버릇도 청나라에서 배운 것이냐."
"...우연히 지나던 길이었사옵니다. 할아버님께 문안을 올리러 왔사온데, 때가 아닌 듯하여 물러가려던 참이옵니다."
"그래, 잘 들었느냐. 기방이나 드나드는 한량 숙부가 어떤 꾸지람을 듣는지."
"들으려 들은 것은 아니오나, 문밖까지 들리는 것을 어찌하겠사옵니까."
호정은 고개를 들어 시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날이 서 있었다.
"혼인하실 분이 기방을 드나드시면 꾸지람을 들으시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요. 소녀가 듣기에도 할아버님의 말씀이 옳은 듯하옵니다."
"너 지금 뭐라했느냐?"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호정은 예를 갖추고 그대로 돌아섰다. 시경이 등 뒤에서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사랑채 마당을 벗어나는 호정의 뒷모습을, 시경은 잠시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조선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말대꾸는 여전하구나."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별당으로 돌아온 호정은 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아가 서둘러 물을 떠 와서 건넸다.
"아씨, 무슨 일이 있으셨사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시옵니다."
"사랑채 앞에서 시경 숙부님을 마주쳤다. 기방에 다녀오신 일로 할아버님께 꾸지람을 듣고 계시더구나."
"아이고, 그것을 들으셨사옵니까."
"들으려 들은 것이 아닌데 그분은 또 내가 엿들었다며 트집을 잡으시더라."
호정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불쾌한 듯 덧붙였다.
"기방에서 밤을 새우고 오시고도 반성은커녕 조카에게 시비나 거시니, 참으로 대단한 어른이시다."
청아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정리했다. 아씨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지금은 그저 조용히 두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다.
그날 이후로 호정은 사랑채 쪽 길목을 더욱 철저히 피하게 되었다. 식사 때마다 시경이 앉을 자리와 가장 먼 곳에 앉았고, 같은 자리에 있을 때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시경 역시 기방 출입을 금지당한 뒤로 한동안 집 안에서 무료한 얼굴로 지냈는데, 그 심사가 뒤틀린 탓인지 문안 자리에서 스치듯 던지는 한마디, 마당에서 마주칠 때 흘리는 짧은 비아냥은 오히려 더 늘었다. 그때마다 호정은 표정을 굳히고 자리를 피했다.
집안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삼촌 조카 사이에 어찌 그리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람."
"둘 다 성정이 보통이 아니니 그렇지.“
호정은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저 이 집에서 하루빨리 시경과 얽힐 일이 없어지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그녀가 조선에 돌아와 처음으로 품은, 가장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저잣거리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시경은 며칠째 마음이 어지러웠다. 팔 안에 안겨 있던 그 짧은 순간의 감촉이 눈만 감으면 떠올랐고, 그때마다 처음 느끼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올랐다. 밥상머리에서 호정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공연히 시선을 피하게 되었고, 그런 스스로가 낯설어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자네, 요즘 통 넋이 나가 있구먼. 도대체 어느 댁 여식 때문에 이러는가? 아니면 어디 숨겨 둔 여인네라도 있는 것인가?"도윤이 사랑채에 찾아와 대뜸 던진 말에, 시경은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다."쓸데없는 소리.""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정신이 반쯤 나가서는.. 이럴 땐 술 한잔하며 집 나간 정신 챙겨 오는게 상책이니 일어나게, 연화루에 가서 거하게 한잔 하세."시경은 잠시 망설였다. 대감의 엄명으로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곳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가자."청운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말리지는 못하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문을 나서는 시경의 뒤에서 청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연화루에 들어서자 기생들이 반색하며 몰려들었다."도련님, 어찌 이리 오랫만이셔요!"가야금 뜯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방 안,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도 함께 일렁였다. 시경은 늘 앉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화루에서 별채를 쓰는 몇 안되는 손님이 오랜만에 왔다는 소식에 연화루의 주인이 직접 인사를 하러 방으로 들어왔다."나으리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셨으니 오늘 밤은 저에게 맡겨 주시어요.""그리하시게, 독한 술로 내오게. 오늘은 좀 취해봐야겠으니."풍채 좋은 여자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한편 별채 안쪽 방에서는 기생 몇이 모여 은밀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좁은 방 안, 분내가 가득한 그곳에서 그녀들은 머리를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오늘 김시경 도련님이 오셨다지?""그렇다네. 아직도
한가위가 지나고 며칠 뒤,호정은 한양의 장터가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함도 잊고자 청아만을 데리고 저잣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머니께는 필요한 노리개와 빗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명절 내내 집안 어른들 사이에 치이고 숙부와도 신경전을 벌인 탓에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던 것이었다."아씨, 오랜만에 나오시니 걸음이 다 가벼워 보이십니다."청아가 앞장서며 웃었다. 호정도 모처럼의 나들이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포목전, 지전, 방물전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호정은 처음으로 보는 한양의 점포들이 낯설고 신기했다."이 노리개는 어떻습니까, 아씨."청아는 작은 백옥에 연분홍 매듭이 곱게 지어진 노리게를 호정에게 보여주었다."아주 곱구나. 그것으로 하자."값을 치르고 물건을 받아 든 호정은 다음 가게로 발길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맞은편 거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 서넛이 한 사내를 둘러싸고 교태를 부리며 걸어오고 있었다."도련님, 이쪽 가게에 좋은 노리개가 있다던데 소녀 노리개하나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어머, 저는 저쪽 방물전에 새로 들어온 연지가 갖고 싶슴니당~."기생들이 저마다 사내의 팔짱을 끼려 애쓰며 재잘거렸다. 호정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그 한가운데, 나른한 걸음으로 기생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시경이었다."...숙부님?"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정의 목소리에, 시경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호정은 예를 갖추어 짧게 고개를 숙였다."숙부님을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그러나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기방 출입을 금하겠다던 할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건만, 대낮 저잣거리에서 기생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니는 꼴이라니. 호정은 순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어머, 저 아가씨는 뉘신지요? 도련님의 조카분이십니까?.""조카가 도련님을
축문이 낭독되고, 절이 이어졌다. 향 연기가 사당 안에 자욱하게 퍼지는 가운데, 호정은 어머니 곁에 서서 조상님께 절을 올리는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시경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나른하고 심드렁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중한 얼굴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호정은 그 낯선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이 이어졌다. 온 집안이 마당에 상을 펴고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였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이번 한가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먼 친척들도 여럿 자리를 함께하였다. 평안도, 충청도 등지에서 온 일가붙이들 중에는 호정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려서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를 향한 시선과 궁금증이 유독 뜨거웠다. "저 아이가 그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이 댁 손녀딸인가?“ "그렇다네. 여덟 살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다지.“ "어쩐지, 낯빛이며 몸가짐이 여느 규수들과는 사뭇 다르구먼.“ 호정이 인사를 올리러 다가가는 자리마다 어른들은 그녀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었다. "심양에서는 어찌 지냈느냐. 그곳 음식은 입에 맞더냐.“ "조선말은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었느냐.“ "듣던 대로 참으로 곱게 생겼구나. 어느 댁에서 며느리로 데려가려 눈독을 들이겠어."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호정은 웃는 낯으로 하나하나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사촌 언니들이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해 슬쩍 끼어들었다. "할머님들, 그만 놓아주셔요. 호정이도 좀 쉬어야지요.“ "허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다. 어여 가서 쉬거라." 간신히 자리를 벗어난 호정은 사촌들 무리에 섞여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호정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보아라." 사촌 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옮기며 호정도 오랜만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추석이 다가오자 김정 대감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번 한가위는 예년과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시헌의 가족들이 처음으로 함께 지내는 명절이었던 까닭에, 대감은 조상님께 그 소식을 알리는 뜻에서 예년보다 더 성대하게 제청을 차리라 일렀다. "이번 제사에는 집안 가솔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아무도 빠짐없이 참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먼 곳에서 오시는 친지들도 계시니 그 분들 또한 최선을 다해 맞이해야 할 것이야." 대감의 엄명에 사랑채도 안채도 며칠 전부터 집안일을 하는 노비들의 손이 바빴다.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며 집안 대청소까지 빈틈없이 모든 일이 차근차근 이루어 졌다. 호정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일가친척들에 관해 하나하나 교육을 받아야 했다. 행여 멀리 청나라에서 지내다 왔다 하며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정에게 제사의 전반적인 것들에 관해 알려주었다. 앞으로 호정이 역시도 어느 댁 며느리가 되어야 할 터, 양반집인 만큼 실제 손이 가는 일은 모두 노비들의 몫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안주인 될 이로서 제청이 어떻게 차려지고 절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아 두어야 했다. "제상은 이리 놓이고, 지방은 저리 모시는 것이다. 이리 크게 제사를 모시는 것이 낯설겠지만, 명색이 이 집안의 손녀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예, 어머니. 잘 새겨듣겠습니다." 호정은 어머니가 짚어 주는 제상의 위치, 축문을 읽는 순서, 절하는 예법 하나하나를 열심히 익혔다. 조선의 예법은 누누이 어머니의 교육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제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짚어 가며 배우는 것은 또 달랐다. "명절 음식 또한 집안의 어멈들이 담당하겠지만 앞으로 네가 시집을 가게 되면 알아야 부릴수도 있는 것이니 잘 익혀두어야 한다..“ "예. 어머님!" 호정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어머니는 이번 명절에 외지에 사는 친척들도 여럿 다녀갈 것이라며, 그들 앞에서 흠 잡힐 일이 없도록 각별히
한양의 남촌 뒷골목, 홍등이 화려하게 걸려있는 '연화루'의 별채에서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풍악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가야금 줄이 튕겨지는 소리, 장구 장단, 그 사이사이로 사내들과 술따르는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섞여 담장 너머까지 흘러나왔다."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도련님.“기생 월향이 나긋한 손길로 술병을 기울였다.상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경은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며 흐드러지듯 풀어진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미 상 위에는 빈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시경이 자네,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구먼."맞은편에 앉은 한도윤이 술잔을 든 채 킬킬 웃었다. 병조참판 댁 아들로, 시경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벗이었다. 그 옆에서 서진이 거들었다."말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술자리에서는 말을 아끼는 놈이지.""시끄럽다, 이것들아."시경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탁 내려놓았다. 월향이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웠다.한양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름난 한량 김시경의 술버릇쯤은 이 집 기생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고, 아무리 절세가인을 앉혀도 술을 따르게 하는 그 이상은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도련님, 오늘은 소녀가 밤새 곁을 지켜도 되겠사옵니까."월향이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시경의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시경의 옷섭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밀어넣었다.시경은 그 손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그녀의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옮겨 놓았다."술이나 따르거라. 거기까지다.""어머, 도련님~ 제가 어여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도 수백 번은 쌓았겠구만."월향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물러서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이런 거절이 처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경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참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야.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량이라면서 기생 하나 건드리지 않으니. 자네가 정말 방
연회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김정 대감댁 안팎은 호직과 보암의 혼담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정작 시경은 그런 화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심드렁한 얼굴로 사랑채에 틀어박혀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호정은 여전히 그를 피해 다니는 방법들을 연구해 시경과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아침 문안도, 저녁 밥상머리도, 되도록 시경과 마주치지 않을 시각을 골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시경 쪽에서 먼저 트집을 잡으러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조카는 요즘 어찌 그리 코빼기도 안 비치느냐."별당 앞을 지나던 호정의 앞을 시경이 가로막아 섰다. 호정은 한숨을 삼키며 예를 갖추었다."딱히 숙부님을 뵐 일이 없어서요.""뵐 일이 없다니. 한 집안에 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숙부님께서 저를 보실 때마다 좋은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온데, 굳이 마주칠 이유가 있사옵니까."호정의 대꾸에 시경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흥, 어른을 그리 피해 다니는 것부터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숙부님께서 예법을 논하실 처지는 아니신 듯한데요.""뭐라?""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시는 분이 조카에게 예법을 가르치려 드시니 하는 말씀이옵니다."호정의 말에 시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그건 그렇고, 네 오라비 혼담이 그리 잘 풀리는 것을 보니 배가 아프지도 않느냐.""어찌 오라버니의 경사에 배가 아프겠사옵니까.""내 말은, 너도 슬슬 혼처를 알아보아야 할 나이가 아니냐는 것이다."뜻밖의 화제에 호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경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아직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사옵니다.""생각이야 안 해 봤어도, 나이가 차면 어른들이 알아서 정해 줄 것이다."시경의 말투는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어딘가 그답지 않게 그 화제를 오래 붙들고 있는 듯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