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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언문

Author: 연월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4 13:52:22

말미를 받아 돌아온 시경이 서고에 들어서자 호정이 책상 앞에서 종이 한 장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서고 안에는 화로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바깥의 찬바람이 거짓말인 듯 따뜻하고 아늑했다. 시경이 조용히 호정의 곁에 앉았다.

"무엇을 그리 보느냐."

"숙부님! 수연 언니가 빌려준 것입니다."

호정이 책을 들어 보였다. 구불구불한 글씨가 빼곡히 적힌 언문 시를 필사한 얇은 책이었다. 수연이 아끼는 것이라며 선뜻 내주었다고 했다.

"언니와 보암 언니는 이 시를 읽으며 이 구절이 좋다, 저 구절이 곱다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는 한 글자도 읽지 못해 곁에서 구경만 하려니 서운한 마음이 조금 들었습니다."

호정이 입을 삐쭉이자 볼이 통통하게 올라갔다. 시경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서운하긴. 한문이 훨씬 어려운 글인데."

"그러니 더 억울합니다. 어려운 글은 읽는데 쉬운 글은 모르니까요."

시경이 소매를 걷고 호정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배우겠느냐."

"가르쳐 주시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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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기   101화. 짝짝이

    이튿날 아침, 시경은 마당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과 씨름하고 있었다. 청운이 멀찍이서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도련님, 그것은 무엇입니까?""토끼다.""쥐 같습니다.""토끼라고 했다."시경은 남천 열매로 눈을 박고 솔잎으로 귀를 꽂았다. 귀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아 영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시경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포기하고 쟁반에 얹었다.호정의 방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도련님, 벌써 일어나셨습니까.""예 형수님. 호정이는 어떠합니까.""많이 나았습니다. 허나 아직 일어나지는 못해요.""잠시 얼굴만 보겠습니다.""들어 오시어요. 밖이 춥습니다."어머니는 자리를 내주었다."저는 약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이불에 몸을 감싸고 앉은 호정이 시경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양쪽 볼이 발그래했다."숙부님! 그것은 무엇입니까.""토끼다. 약속하지 않았느냐."호정이 쟁반 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쥐입니까?""토끼다!""귀가 짝짝이입니다. 희도 도련님이 만든 것보다 더 심하게 짝짝이인걸요!""이건 내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봐주어라."호정이 입을 가리고 웃다가 아이고, 하며 배를 짚었다. 시경이 놀라 일어서려 하자 호정이 손을 저었다."괜찮습니다. 웃으면 조금 땅길 뿐입니다.""웃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숙부님이 이리 웃기게 만드셨으니 웃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름을 짓겠습니다. 짝짝이입니다.""좋을 대로 해라.""짝짝이가 녹지 않으면 좋겠는데..."호정이 짝짝이를 창가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이어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숙부님, 매운 국밥이 먹고 싶습니다. 산초 가루를 듬뿍 넣은 것으로요.""안 된다. 오늘은 너무 매운 것을 먹으면 안된다. 미음이나 먹거라.""의원이 정말 그리 말했습니까?""내가 정했다."호정이 입을 비죽였다가 눈을 반짝였다."그럼 반촌에 있는 국밥집은 언제 데려 가시려구요?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 금기   100화. 부끄럽지 않은 일

    이튿날 아침, 호정은 약속대로 마당에서 눈토끼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귀를 짝이 맞게 다듬고 눈에는 붉은 열매를 박았다. 쟁반을 받아 든 시경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귀가 어제 것보다 낫구나.""숙부님 몫이니까요. 녹기 전에 많이 보아 두십시오.“"흠... 누구를 닮은 것이냐!!""숙부님을 닮았습니다. 숙부님을 생각하며 만들었으니 숙부님을 닮는게 당연하지요.""난 너 닮은 아이가 좋은데..." 시경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 듯 작아졌다.시경은 쟁반을 마루 끝에 올려 두고 몇 번이나 돌아보다 성균관으로 돌아갔다.사흘 뒤, 호정은 서고에서 언문을 쓰다가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붓이 손에서 떨어지고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청아가 달려왔을 때 호정은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정신을 잃었다.안채는 발칵 뒤집혔다. 급히 불려 온 의원이 발 너머에서 맥을 짚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기가 쇠하고 피가 부족한 허혈입니다. 처음 달거리가 시작되었는데 몸이 이를 감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아랫배를 따뜻하게 해드리고 푹 쉬게 하십시요. 그리고 이 약을 달여서 따뜻할 때 드시게 하면 됩니다."어머니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열일곱이 되도록 소식이 없어 걱정하던 터였다. 좋은 일이라 기뻐할 겨를도 없이 어머니는 호정의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어머니는 의원을 배웅하고 돌아와 호정의 배 위에 따뜻한 수건을 얹었다. 미음을 쑤고 약탕관을 지키며 밤이 깊도록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호정이 잠결에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불을 여며 주며 어머니는 눈가를 훔쳤다. 이제야 이 아이도 여느 아이처럼 자라는구나 싶었다. 워낙 몸이 약골인 터라 키우는 내내 마음을 졸이던 아이였다."집안에는 허혈로 앓는다고만 해 두어라. 그 외에는 입 밖에 내지 말고."어머니가 청아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청아는 곧바로 청운에게 호정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전했고, 청운은 한달음에 성균관으로 달렸다. 시경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대사성에게 달려가 집안 아이가 위독하다 하여 특별 말

  • 금기   99화. 눈토끼

    눈 쌓인 나무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덕쇠는 입김을 손으로 막았다. 서고 창호지에 등잔 불빛이 번져 있었다. 그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키 큰 그림자가 몸을 숙여 작은 그림자의 어깨에 무언가를 둘러 주었다."흠... 역시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닌게로군."덕쇠가 침을 삼켰다. 겨우 그것뿐이었으나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든 크게 보이는 법이었다. 덕쇠는 눈 위에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같은 시각, 호직의 사랑채 곁방에서는 희도가 서책을 펼쳐 놓고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내년 봄 생원시를 앞두고 달포가 넘도록 방에 틀어박혀 지낸 터였다. 창밖으로 눈송이가 날리는 것을 보고서야 붓을 놓았다."첫눈이군.""눈?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군!!"희도는 마당으로 나가 눈을 한 줌 뭉쳤다. 호직이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기댔다."서고에 호정이 있을 게다.""왜 내게 그걸 말하나.""네 얼굴에 쓰여 있으니까. 혼담 소식은 들었지?""들었네. 나는 벗일세. 그저 눈이 오니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야."희도는 쟁반에 눈토끼를 만들어 얹었다. 눈은 남천 열매로, 입은 마른 솔잎으로 했다. 귀가 짝짝이가 되자 한참 고쳐 보다가 포기했다.서고 문 앞에서 희도는 숨을 한 번 골랐다. 나직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호정 낭자, 계십니까. 희도입니다."안에서 호정이 놀라 시경을 쳐다보았다. 시경은 두루마기를 어깨에서 걷어 제 팔에 걸치며 짧게 말했다."들어오시오."문이 열리고 어깨에 눈을 얹은 희도가 들어섰다. 얼굴은 해쓱했으나 눈빛은 맑았다."숙부님도 계셨군요.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요?""괜찮네. 오랜만이군."희도가 쟁반을 호정 앞에 내려놓았다. 호정의 눈이 둥글어졌다."눈토끼입니까? 참 곱습니다. 도련님이 만드셨어요?""서툴러서 귀가 짝짝이입니다. 고향 안주에서는 첫눈이 오면 아이들이 이것부터 만들었지요.""안주의 눈은 이곳보다 많이 오나요?""발목까지 쌓이는 날이 열흘은 이상이 됩니다. 언젠가 낭자

  • 금기   98화. 눈 오는 날의 추신

    지난 보름 동안 호정은 밤마다 등잔불 아래 앉아 있었다. 종이는 쓰고 구기고 또 쓰고 구긴 것들로 쌓여 갔다. 청아가 구겨진 종이를 하나 집어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 웃음을 참았다."아가씨, 숙부님 안영하십니까. 이건 영이 아니라 녕이라고 쓰셔야 합니다.""청아는 어찌 그런 것까지 아느냐. 다시 쓰겠다.""언문은 어릴 적에 어깨 너머로 배워서 몇 글자 압니다. 그 아는 글자 중 하나여요."호정은 귓불이 붉어진 채 다시 붓을 들었다. 마침내 한 장을 곱게 접어 품에 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말미를 받은 시경은 순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먼 고을에 집이 있어 말미 때마다 반촌에 홀로 남는 순호를 시경이 청한 것이었다. 순호는 사랑채에 큰절을 올린 뒤 안채 방으로 들어와 화로 곁에 앉았다."과연 영상 댁이라 방이 다르구나. 반촌 방에서는 손이 곱아 붓을 못 쥘 지경인데."호정이 차를 내왔다. 숙부가 늘 말하던 순호가 궁금했다. 순호는 입이 쉬지 않는 사내였다."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소녀는 숙부님의 조카인 호정이라 하옵니다.""아...안녕하십니까? 낭자!""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정말 정말 이렇게 선녀처럼.. 아니 선녀보다 고운 분은 난생 처음 봅니다."순호의 입이 다물어 질 줄 몰랐다. 시경이 헛기침을 했다."순호!! 그만 쳐다 보시게!!"순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친화력은 대단했다."호정 낭자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 드릴까요?"호정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형이 요즘 반촌에서 인기가 대단하답니다. 국밥집 주모 따님이 사형만 보면 달려 나와서 엿을 쥐여 주고 간답니다. 얼마나 살뜰한지...""순호, 쓸데없는 소리를..."시경이 눈짓을 했으나 순호는 눈치 없이 웃기만 했다. 호정의 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그러하군요. 그 아가씨와 가깝게 지내시나 봅니다, 숙부님."호정이 환하게 웃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시경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후 시간 다과상에서도 호

  • 금기   97화. 언문

    말미를 받아 돌아온 시경이 서고에 들어서자 호정이 책상 앞에서 종이 한 장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서고 안에는 화로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바깥의 찬바람이 거짓말인 듯 따뜻하고 아늑했다. 시경이 조용히 호정의 곁에 앉았다."무엇을 그리 보느냐.""숙부님! 수연 언니가 빌려준 것입니다."호정이 책을 들어 보였다. 구불구불한 글씨가 빼곡히 적힌 언문 시를 필사한 얇은 책이었다. 수연이 아끼는 것이라며 선뜻 내주었다고 했다."언니와 보암 언니는 이 시를 읽으며 이 구절이 좋다, 저 구절이 곱다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는 한 글자도 읽지 못해 곁에서 구경만 하려니 서운한 마음이 조금 들었습니다."호정이 입을 삐쭉이자 볼이 통통하게 올라갔다. 시경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서운하긴. 한문이 훨씬 어려운 글인데.""그러니 더 억울합니다. 어려운 글은 읽는데 쉬운 글은 모르니까요."시경이 소매를 걷고 호정 맞은편에 앉았다."그럼 배우겠느냐.""가르쳐 주시겠습니까?"호정의 눈이 반짝이며 시경을 바라보았다. 시경은 말없이 먹을 갈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서고 안을 채웠다. 화로의 숯이 따닥 소리를 내며 튀었다."이것이 가, 이것이 나.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되는 글이다. 천천히 따라 해 보아라."시경이 새 종이에 먹 묻힌 붓을 놀려 자음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호정이 붓을 쥐고 따라 쓰자 첫 줄이 삐뚤빼뚤하게 번졌다."모양이 이상합니다.""처음엔 다 그렇다. 붓을 이렇게 쥐어 보아라."시경은 호정의 손을 잡을 뻔하다가 멈칫하고, 제 붓으로 허공에 획을 그어 보였다. 호정이 그 흉내를 내자 이번에는 제법 곧은 선이 나왔다.그런데 호정이 모음의 방향을 자꾸 헷갈렸다. 한번은 연습 삼아 호 자를 쓰다가 모음을 뒤집어 후가 되어 버렸다. 시경이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이대로면 네 이름이 후정이 되겠구나.""숙부님! 놀리지 마시어요."호정이 붓대로 시경의 소매를 가볍게 쳤다."알았다, 알았어. 원래 이 글은 말할 때 입

  • 금기   96화. 조용한 방패

    그날 밤, 시경은 호정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후원 정자로 나갔다. 청운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섰다."도련님, 알아냈습니다."청운은 숯막에서 본 일을 낱낱이 고했다. 사랑채 문간 하인 덕쇠가 봉선과 밤마다 만나고 있다는 것, 덕쇠가 안에서 오간 말을 봉선에게 전달하였다는 것, 그리고 봉선이 말끝마다 육보정을 아가씨라 부르며 뜻을 이루면 덕쇠를 속량시켜 주겠다고 약조했다는 것까지. 그리고 봉선이 아직 시경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 까지 다 전했다."도련님이 대감마님 앞에서 혼인하지 않겠다 하신 말씀도 그날 밤 바로 그 놈이 알렸던 것 같습니다."시경의 눈빛이 서늘하게 그늘이 졌다."봉선이 육보정의 사람이었구나. 처음부터 이 집을 엿보라고 심어 놓은 것이다.""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덕쇠를 잡아 족칠 수도 있습니다.""그리하면 어찌 되겠느냐. 육보정을 잡을 기회를 잡을 수 없어. 잡은 패는 감춰야지."청운이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지금은 어떠한 증거도 없으니 소용이 없겠습니다. 혹여 단오의 일도...""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알기로 조현 그자가 육보정의 사촌 오라비거든. 그리고 지금은 증거가 없다. 섣불리 건드리면 이쪽이 도리어 모함하는 꼴이 된다."시경이 주먹을 쥐었다. 달빛이 연못 안에 흔들리고 있었다."덕쇠는 모른 척 두어라. 대신 사랑채와 안채에서 오가는 말에는 앞으로 더 조심하도록 일러 두어야 겠다. 청아에게도 호정 곁에 오는 서찰과 낯선 사람을 눈여겨보라고 해라. 일단 꼬리가 잡히도록 해야겠구나.""아가씨께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시구요?""말하지 않겠다. 그 아이가 아직은 모르는게 나아. 아니 그냥 끝까지 몰랐으면 한다. 조용히 보호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구나."시경은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호정의 곁을 한시도 비우지 않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집에 없으니 너와 청아가 잘 살피도록 해라. 수연이도...""예, 도련님."청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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