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제나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경후가 회사 일을 핑계로 댄 건, 늦은 책임을 전부 자신에게 돌리겠다는 뜻이었다.물론... 실제로 늦어진 이유가 경후이긴 했다. 그래도 차씨 가문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제나를 감싸 주는 경후의 태도에... 제나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차근수는 제나를 힐끗 보더니 옅게 웃었다.“그냥 가족끼리 밥 한 끼 먹는 자리다. 괜찮아. 일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차근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어서 앉아라.”집안에서 열리는 모임은 호텔 연회와는 달랐다.호텔식 연회는 보통 뷔페처럼 음식을
모두가 형용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 불쾌한 시선으로 경후와 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예전의 제나는 류서윤을 따라 여러 연회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별의별 사람과 일을 겪었다.그때 제나는 아직 어렸다. 류서윤처럼 속을 감추는 법도 몰랐고, 류서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하필 그 사람들이 모두 경후의 친척이었다. 제나는 대들 수 없었고, 억울해도 참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이제 와 다시 이 사람들을 마주하자, 제나의 몸은 본능적으로 굳었다.제나에게 류서윤은 이미 지울 수 없
경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원피스 입지 마. 난 싫어.”“괜찮아. 내가 좋으면 되잖아.”“안 돼.”제나는 깊은 못처럼 가라앉은 경후의 눈을 바라보았다.“내가 꼭 입겠다면?”경후는 눈도 떼지 않고 제나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오늘은 늦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 갈 수도 있겠네.”제나는 멈칫했다.“무슨 뜻이야?”경후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희미하게 위험한 기색이 어렸다.그리고 닿을 듯 말 듯 제나의 뺨에 입술을 스치며 낮게 속삭였다.“여보, 아직도 날 유혹하고 싶어?”이번에는 제나도 알아
“안 돼... 읍!”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나의 목소리는 경후의 키스에 완전히 묻혔다.오늘 밤 가족 모임에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참석하려고, 제나는 메이크업에만 꼬박 두 시간을 들였다.그런데 지금 경후는 제나의 화장을 망가뜨리는 것도 모자라...찌익-옷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제나는 잠시 멍해졌다.곧이어 제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내 원피스!”하지만 경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키스가 빗발치듯 쏟아졌다.함께 지낸 시간이 이토록 긴데, 제나가 경후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안 돼...
“아니.”하성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왜 말 안 했어?”“전에 네가 알아냈잖아. 내 기억상실, 차경후가 손댄 거라고. 아직은 차경후가 왜 내 기억을 잃게 했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당분간은 말하지 않으려고.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되면, 그때 말할게.”제나가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경후의 태도가 달라진 건, 제나가 기억을 잃은 뒤부터였다.경후는 제나가 기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나와 경후의 지난 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경후의 마음속 응어리는 아직 완전히 풀리
은주는 제나를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사실 나는... 줄곧 네 대역이었어.”은주는 늘 자존심이 강했다. 뻔히 알고 있는 일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그런 은주가 이제 와서 이 일을 인정한다는 건, 마음이 완전히 꺾였다는 뜻이었다.“사실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경후가 막 Z국으로 돌아와서 나한테 다가오던 때였지. 같이 밥 먹으러 나갈 때마다 경후는 늘 내 옆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내 옆모습을 가만히 보곤 했어.”“경후가 나를 볼 때면 가끔 눈이 멀리 가 있었어. 마치 나를 지나... 다른 여자를 보는 것
은주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경후가 제나를 선택한 것은 원치 않은 결혼이었고, 그 후 제나는 그 결혼생활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그래서 은주는 제나를 질투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조금의 미움과 불편함은 있었어도, ‘질투’라는 감정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주는 처음으로 질투를 느꼈다.얇고 차가운, 그러나 분명한 질투가 은주의 가슴에 스며들었다.제나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정면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은주와 눈이 마주쳤다.제나는 은주의 눈동자 속 감정을 알아챈 듯, 잠시 그 시선을 머금었
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선배도 차경후 알아?”정빈은 잠시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음... 그때 너랑 차경후가 같이 다녔잖아. 그래서 몇 번 본 적은 있어.”정빈은 더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연주 씨는 제나 친구야?”연주는 바로 공손하게 답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우연주라고 합니다.”정빈도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그리고 다시 물었다.“둘 다 콘서트 보러 온 거야? 왜 안 들어가고 있어?”제나는 약간 머쓱해졌다.“나... 표를 못 구했어.”정빈은 바로 웃어버렸다.
몇 시간이 지나자 경후의 상태는 겨우 안정됐다.찰스 교수는 제나를 따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제나 씨도 평소에 일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남자친구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잠시 말을 멈춘 뒤, 시선에 못마땅함이 스쳤다.“당분간은 하시던 일을 내려놓고, 간호에 전념해 주길 바랍니다. 하루에 한 번 잠깐 들렀다 가는 정도로는 부족해요.”찰스 교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환자는 아플 때 몸도, 마음도 굉장히 약해집니다. 외롭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회복 속도는 빨라질 수
병실 안은 소독약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코끝을 찌를 만큼 강한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천천히 눈을 뜨자, 흐릿하고 가느다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경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바라보다가 그제야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봤다.“제나 씨...?”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힘이 거의 실려 있지 않았다.“이제 깼어요?”제나는 손을 뻗어 경후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끝을 얹었다.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아직도 열이 조금 있어요.”제나는 침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고열이 39도까지 올라갔어요. 사흘 동안 의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