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장

작가: 다섯
다음 날.

문씨 가문에서 갑자기 사람이 찾아와 대뜸 문서현을 콕 집어 찾는 것이었다.

선평후부의 일은 언제나 산더미 같았다.

혼인한 이후로 문서현은 너무나 바빴기에 친어머니를 뵈러 갈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문씨 가문에서 먼저 그녀를 찾으러 사람을 보낸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전갈을 받은 그녀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찾아온 이는 오씨 어멈이었다.

문서현의 유모이자, 친어머니 곁을 지키는 가장 가까운 심복.

문서현을 보자마자 오씨는 바닥에 엎드리며 꾹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둘째 아가씨, 마님께서...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지셨습니다. 어서, 어서 가보셔야 합니다!"

절박한 목소리가 심장을 무참히 짓이기고 지나갔다.

순간, 마치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듯 숨이 턱 막혀왔다.

아직 몸도 채 낫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문서현은 상처가 찢어지는 통증조차 무시한 채 문씨 가문 저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측실 진씨는 총애를 받지 못하는 편인지라 그녀가 머무는 처소는 저택의 깊고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에 문서현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가서야 겨우 진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한편, 진씨는 푹신한 베개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문서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딸의 얼굴을 마주한 진씨의 눈에 깊은 안타까움이 스쳤다.

"서현아... 어찌 또 이리 야위었느냐."

진씨의 미간에 짙은 수심이 서렸다.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딸을 향한 걱정을 끝내 떨치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문서현은 다급히 그녀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려 나왔다.

"어머니, 어쩌다 갑자기 이리 위독해지신 거예요? 어디가 불편하신지 제게 말씀해 보세요. 네? 제게 다 말씀해 보세요."

진씨가 고개를 저었다.

이내 몸을 웅크리며 몇 번 기침을 토해냈다.

"오랜 지병일 뿐이다. 큰일 아니니 걱정 말거라. 그저 널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고... 큰아가씨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네 걱정에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아 사람을 보낸 것뿐이란다."

문서현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머니의 초췌한 안색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방금 한 말은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차마 슬픈 기색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그저 어머니의 손을 꽉 쥐어 보이며 그 말을 믿는 척할 뿐이었다.

다행히 머지않아 선평후부를 벗어날 터였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은 한참을 더 이야기 나누었다.

진씨가 잠든 후에야, 문서현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때, 그녀는 황급히 진씨 곁을 모시는 하인을 불러 세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원은 다녀갔느냐?"

"예, 다녀가셨습니다. 의원님 말씀으로는 마님께서 이미 기력이 다하셨다고..."

하인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호심단이라도 구해야 잠시나마 심맥을 보호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며칠 버티지 못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하오나 호심단은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영약이온데 어찌 그리 쉽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는 하인의 목소리가 문서현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문서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의 병세가 이토록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줄은.

하지만 '호심단'이라는 세 글자가 들린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문서현은 하녀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 단단히 당부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선평후부에 분명 호심단 한 알이 있었다.

일 년 전, 배도진이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 황제가 직접 하사한 물건이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서현은 미친 듯이 달리고 달려 가장 빠른 속도로 선평후부로 돌아왔다.

그녀는 곧장 배도진을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처소 정문에 채 닿기도 전이었다.

문희주의 몸종인 다희가 막아서며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

"부인. 후작 나리와 세자께서 지금 큰아가씨와 꽃구경을 하고 계십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 단단히 일러두셨습니다."

다희는 기세등등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안주인을 향한 일말의 존중조차 없었다.

문서현의 속은 불에 타듯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정말 급한 일이 있다! 어서 들어가서 통보하거라!"

하지만 문서현이 아무리 애원하고 호통을 쳐도 다희는 콧방귀를 뀌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됩니다. 나리께서 큰아가씨가 조용한 걸 좋아하시니, 아가씨를 모시는 동안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선평후부의 안주인인 나조차도 안 된단 말이냐!"

거듭된 막무가내식 태도에 문서현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거칠게 다희의 어깨를 밀치며 억지로 안으로 들이닥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다희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내질렀다.

"일호!"

문서현의 발걸음이 흠칫 굳어버렸다.

'일호라고?!'

배도진의 직속 호위무사.

평소 오직 배도진의 그림자처럼 그만을 지키는 자였다.

'그런 자를, 배도진이 문희주에게 내어주었단 말인가? 그래서 선평후부의 정실부인인 내가 한낱 문희주의 몸종 따위에게 이토록 수모를 겪도록 방치했단 말이야?'

문서현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내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의 얼굴이 뇌리에 박혀들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단 일각도 없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윽고 목청이 찢어지라 배도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안으로 돌진했다.

"후작 나리! 나리! 배도진!"

그녀가 마침내 안으로 발을 들이려는 찰나.

갑자기 목덜미에 묵직한 충격이 덮쳐왔다.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했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그녀의 흐릿한 시야에 다희의 오만방자하고 경멸 어린 눈빛이 맺혔다. 자신의 뒤에 서서 손날로 목을 내리친 호위무사 일호의 모습까지.

"너 따위가, 감히 우리 아가씨와 맞서려 들어?"

의식은 끝없는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서현이 다시 번쩍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침상에 눕혀져 있었다.

귓가에 억눌린 흐느낌 소리가 맴돌았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잠시 후, 문서현은 사시나무 떨듯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왜 우는 것이냐? 내... 어머니는?"

초희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꺽꺽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조금 전, 문씨 가문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마님께서, 숨을 거두셨다고..."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4장

    "새로 부임한 호부시랑 서재희입니다."서재희가 배은우의 어깨를 툭 밀쳐 배도진의 곁으로 돌려보냈다.이윽고 문서현의 앞을 완벽히 가로막으며 덧붙였다."그리고, 두 분이 오늘 내내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이 여인의 서방이기도 하죠."'서방'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며 무겁게 떨어졌다.아니나 다를까.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앞에 선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극도로 분노한 기색이었다."무슨 헛소리야! 서현이가 어찌 네놈의..."배은우 역시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마치 가장 아끼는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았다."어머니는 내 어머니야! 당신 같은 놈한테 시집갈 리가 없어!"그 순간, 문서현은 잠시 멍해졌다.너무나도 소름 끼치게 익숙한 풍경.예전에도 수없이 보아왔던 광경이었다.다만, 그때 저런 서슬 퍼런 눈빛을 견뎌야 했던 것은 늘 자신이었고.그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문희주였다.하지만 지금.그녀는 도리어 그들이 어떻게든 차지하려 안달 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그때, 문서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재희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맞닿은 손바닥에서 훅 끼쳐오는 온기가 그녀의 차갑던 손끝을 녹여냈다.그녀는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한때 꿈속에서조차 수없이 그리며 마음에 새겼던 얼굴들.하지만 지금 그 얼굴은 더없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그럼에도 문서현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마치 애초에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사람처럼."어찌 아니라고 확신하지? 배도진, 네가 과거에 날 어떻게 짓밟았는지 평생 똑똑히 기억해야 할 거야. 그리고 배은우.""난 널 키우며 내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어. 단 한 번도 모자람 없이 대했지.""그 소중함을 진흙탕에 처박은 건 너야. 허구한 날 날 모함하고, 네 아비의 등에 업혀 내 숨통을 조였잖아.""배도진, 배은우. 내가 평생 그 자리에 서서, 너희의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3장

    배도진은 문서현과 재회하는 순간을 수없이 상상했었다.하지만 결코 오늘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채 높은 누각 위에 단아하게 앉아 있는 그녀에 비해 배도진은 먼지를 뒤집어쓴 초라한 행색이었다.고개를 들어 우러러본 그녀는, 마치 아득히 먼 하늘에 뜬 달 같았다."아버지, 어머니예요!"배은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배도진은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배은우를 안고 말에서 뛰어내렸다.이윽고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주루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수많은 감정이 엉망으로 뒤엉켰다.그녀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쩌면 이런 길거리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난 시간, 그녀와 엇갈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느꼈던 그 끔찍한 공포가 이성을 집어삼켰다.그녀가 또다시 떠나버릴까 봐.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문서현은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속으로 서재희가 도착할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퇴궐할 시간이 지났으니 분명 머지않아 도착할 터였다.도성으로 돌아오면 언젠가 그들과 마주칠 날이 오리라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이토록 갑작스레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너무나도 기막힌 우연이었다.하필 그가 성문에 들어서는 순간일 줄이야.하필 그와 아득히 시선이 마주쳐 버릴 줄이야.하지만 그녀는 단 한순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저 제자리에 고요히 앉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 지독한 만남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서현아."잔뜩 잠긴 쉰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뒤이어 배은우가 울음을 삼키며 부르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어머니."문서현의 입가에 서늘한 실소가 번졌다.저토록 다정하고 애틋한 부름.그녀가 뼈를 깎아내며 헌신했던 오 년 내내,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배도진은 좀처럼 그녀를 다정하게 부르는 법이 없었다.대개는 그저 '너'라고 칭하거나, 쌀쌀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2장

    배도진은 귀를 의심했다. 배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눈물이 배은우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마치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혹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어머니께서 어떻게 혼인을 하신단 말이에요? 우리를 버리신 거예요? 저 아저씨가 거짓말하는 거죠!"그때, 객주 천씨가 두 눈을 부라렸다.탁!그는 쥐고 있던 주판을 계산대 위로 거칠게 내리쳤다."예끼, 이 녀석아, 말조심해! 우리 장사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신용이야. 생면부지인 너희들한테 내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해!""우리 점주님은 혼인하신 지 벌써 일 년이나 지났어. 은남현 바닥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다고!""게다가 우리 점주님은 슬하에 자식도 없으셔. 어디서 굴러먹던 것들이 우리 점주님과 핏줄인 척 수작을 부려!"배은우는 무의식적으로 가게 안의 다른 손님들을 쳐다보았다.여전히 이 끔찍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객주 천씨의 말을 들은 손님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그날의 성대한 혼례를 떠올리는 듯했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납폐 행렬.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바닥에 흩뿌려지던 동전들.무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거대한 잔치.평소 관아에서 나누어 주는 죽으로 연명하던 거지들조차, 그 사흘 동안은 배가 터지도록 포식을 했을 정도였다.그뿐만이 아니었다.얼음장 같던 평주 자사는 혼인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과거의 그 범접할 수 없던 서늘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만 만나면 제 집에 있는 꽃처럼 어여쁜 아내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장장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두 사람은 여전히 어제 갓 혼인한 신혼부부처럼 꿀이 뚝뚝 떨어졌다.은남현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평주 자사가 사랑하는 아내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 그 산더미 같은 관아의 공무마저 죄다 은남현으로 끌고 와 처리한다는 유난스러운 애처가 행보를.순간, 그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1장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금 전까지 어리둥절해하던 아주머니가 마침내 상황을 파악했다.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지더니 안으로 들이닥치려던 배도진과 배은우의 앞을 대뜸 가로막았다.이내 거칠게 방문을 내리치자, 나무문이 쾅쾅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어디서 굴러먹던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야? 여긴 내 집이야, 무슨 놈의 주인을 찾아!""이 골목은 다들 스스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뿐이라고. 댁들이 찾는 높으신 양반 따윈 없으니까 당장 꺼져!"배도진과 배은우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쾅!매몰차게 닫힌 문짝이 두 사람의 콧잔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배도진과 배은우의 얼굴이 한층 더 흉하게 일그러졌다.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천대와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귀한 몸들이었다.이곳이 문서현의 집이 아니었다면, 행여나 강제로 들이닥쳤다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렵지 않았다면.진작에 문짝을 박살 내고도 남았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배도진과 배은우는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애써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꾹 참고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배은우는 행여나 문서현이 아직도 화가 덜 풀려 자신들을 내치는 것이라 여겼다.눈동자를 굴리던 아이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묘안이 스쳤다."어머니, 어머니! 저랑 아버지가 다 잘못했어요.""제발 저희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요. 앞으론 정말 잘할게요!"어린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굳게 닫힌 대문을 넘어 골목 틈새로 퍼져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 근처로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저 두 사람은 누구야? 여태 한 번도 못 본 얼굴들인데.""게다가 송 씨 아주머니더러 어머니라 부르잖아?""아까 시장에서 본 것 같은데. 계속 길을 묻길래 무슨 큰일인가 했더니, 핏줄을 찾으러 온 거였어?""무슨 헛소리야. 송 씨 아주머니는 시집가서 낳은 애가 벌써 둘이나 있는데!"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하지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0장

    문서현이 눈을 내리깔며 낮게 웃었다.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지 오래였건만.그녀는 일부러 그 대답을 맨 마지막으로 미뤄두고는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정말 안 갈 거예요?"서재희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부의 연을 맺은 지 일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밖으로 겉돌게 하는 그녀를 향해 억울함을 토로하는 듯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참 아쉽네요. 그럼 저 혼자 도성에 다녀와야겠어요."그 한마디에 서재희의 두 눈이 번쩍였다.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했던 빛이 순식간에 차올랐다.벌떡!그가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였다."나랑 같이 도성에 가겠다고요? 하지만 당신, 예전엔 분명..."과거의 일을 떠올린 서재희는 말끝을 흐렸다.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문서현이 곧바로 그의 말을 자연스레 이어받으며 미소 지었다."다시는 도성에 돌아가기 싫다, 은남현에 정착하고 싶다고 했던 말이요?""하지만 당신도 알잖아요.""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지금 내 곁에는 당신이 있는데, 내가 마주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그녀의 대답은 지극히 숨김이 없고 담담했다.마치 예전에 서재희가 수없이 그녀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말이다.서재희의 두 눈에 벅찬 기쁨이 차올랐다.이윽고 그가 다급하게 몸을 돌리며 내뱉었다."지금 당장 가서 짐을 챙겨야겠소."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멀어지는 뒷모습에서조차 벅찬 희열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서현의 가슴 한구석에 옅은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과거에는 늘 서재희가 자신을 배려하고 맞춰주기만 했다.그러니 이번만큼은 스스로 마주할 차례였다.어떤 과거는, 영원히 등 돌리고 살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사흘 뒤.둥근 달이 높이 뜬 밤, 마차가 흔들리며 도성으로 향하는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수레 안의 문서현은 서재희의 어깨에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19장

    선평후부를 떠나던 날, 문서현의 온몸은 끔찍한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그 지옥 같은 곳에서 겪은 핍박과 고통은 그녀의 영혼마저 갉아먹었다.'내 인생에 두 번째 혼인은 없다.'그것은 뼈에 새긴 다짐이었다.게다가 남편을 버리고 휴서를 청한 여인을 정실로 맞아들일 가문은 거의 없었다.그렇다고 남의 소실로 들어가 평생 고개를 숙이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다행히 문씨 가문은 비록 뼈대 있는 명문가는 아니었으나, 재력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풍족했다.바로 그 덕분이었다.문서현이 선평후부로 시집갈 때 비록 남편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문씨 어르신은 가문의 체면을 세우려 그녀에게 아주 두둑한 혼수를 챙겨주었다.그 재물만으로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그녀는 그것이 흠집 난 삶의 마지막 결말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남쪽으로 향해, 평주 은남현에 닿기 전까지는.아름다운 강남의 풍경은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였고, 기어이 그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했다.그리고 운명처럼 평주 자사(刺史) 서재희와 얽혔다.시작은 찰나의 우연이었다.문서현이 갓 사들인 저택에, 자객의 추격을 받던 그가 숨어들었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서재희를 숨겨 목숨을 살렸다.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말했다.그 후로도 기막힌 인연이 거듭되었다.그녀가 지몽각을 세우려 할 때, 서재희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어떤 물건을 팔지부터 터를 고르고 값을 흥정하는 일, 내부 단장과 일꾼을 부리는 궂은일까지.순탄하고 활기찬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그가 돌연 입을 열었다.생명의 은인이니, 평생을 바쳐 은혜를 갚겠노라고.처음엔 그저 실없는 소리인 줄 알았다.사람 하나 살려주었다고 이리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을 줄 뉘 알았겠는가.하지만 서재희는 훤칠한 외모만큼이나 속내가 올곧고 단단한 사내였다.그럼에도 문서현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 흠집으로 그를 떼어낼 속셈이었다.하지만 서재희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