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릴 적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니는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났으니 세상의 모든 귀하고 좋은 것은 마땅히 언니의 몫이어야 한다고. 도성의 사람들 역시 언니보다 명석하지 못하다며 나를 피하고 은근히 멸시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언니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꽃을 피울 시기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궁중 연회가 열리기 전, 어머니는 내게 일부러 칙칙한 초록색 치마를 보내오시며 언니의 기를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언니는 이미 미래의 태자비로 여겨지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옛날 도사가 우리 가문에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난 여성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게 꼭 언니 한 사람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난 세월의 인내는 그저 때를 기다린 것뿐이다. 모두가 나에게 물러서라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빼앗을 것이다. 황후의 운명이라고 해서 어찌 꼭 태자비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중궁전의 주인이 되어 황제의 곁을 지키는 것 역시, 비할 데 없이 고귀한 운명이거늘.
View More현비가 각 궁에 심어둔 자들을 도려낸 자리에, 나는 재빨리 내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현비가 얌전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리 없었다.그러니 내가 먼저 대비해야만 했다.본가에서 서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들었다.대부분은 내게 고유진을 도우라는 내용이었다.나는 답장하지 않았다.대신 사람을 시켜 서신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가장 최근에 온 서신에는 단 한 마디뿐이었다.'반드시 후회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슬쩍 훑어보고는 은밀히 수족들에게 명을 내렸다."철저히 감시해.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절대 놓쳐선 안 돼."최근 내무부의 기록을 살펴보던 중 현비가 한 달에도 몇 번씩이나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궁녀를 궁 밖으로 내보내 명의를 불러 약을 짓게 했다고 했다.그때, 소은이 갑자기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최근따라 고유진이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그저 부모님이 그립다는 핑계로 고씨 가문으로 자주 향했고, 한 번 가면 몇 시진씩 머물다 온다는 것이었다.최근 들어서는 유독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입만 열면 곧 좋은 날이 올 거라며 떠들어댔다고 한다.한 가지 믿기 힘든 예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나는 황제의 피로를 풀어드린다는 명목으로 진하게 달인 인삼탕을 들고 편전으로 향했다.그리고 최근 일어난 모든 수상한 정황과 내 짐작을 폐하께 낱낱이 고했다.폐하의 안색을 살피니,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계신 듯했다.그는 나의 예리함을 치하하고는 절대 공연히 적을 자극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흘 뒤 열릴 연회에서 부디 몸을 잘 건사하라면서 말이다.이윽고 한마디 덧붙였다."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사흘 뒤.나는 화려한 궁복을 차려입고 폐하의 곁에 앉았다.내 발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태자, 그리고 고유진까지 빠짐없이 엎드려 있었다.특히 고유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머리에는 온갖 화려한 장신구를 꽂았고, 얼굴에 떠오른 득의양양함은 도무지 숨겨지질 않았다.내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눈치채고도, 그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앞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넘기며, 도리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어찌 적장녀께서 이 귀비의 행차를 마중 나오지 않으셨을까? 참으로 방자하시군요.""훗날 궁에 들어가 태자 첩이 되어서도 이리 예의가 없다면, 필시 손가락질받으실 터인데 말입니다."순간, 부모님의 안색이 흉하게 일그러졌다.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저 유유히 내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잠시 후, 어머니가 내 처소로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이것이 바로 권력이었다.과거엔 늘 내가 숨죽여 머리를 조아리러 가야 했거늘, 지금껏 내 처소엔 발끝조차 들이밀지 않던 그 콧대 높은 마님께서 친히 행차하시다니. 가슴속에서 통쾌한 환희가 터져 나왔다."들라 하라."어머니는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들어오더니, 나를 향해 악을 썼다."너는 어찌 이리도 고집을 부리는 게냐!""네 언니는 지금 울면서 죽겠다고 난리다!""그 애는 네 친언니가 아니더냐! 어찌하여 네가 꾸민 짓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게야!""난 모른다! 당장 내일이라도 폐하께 매달려 네 언니를 태자비로 거두어 달라고 청하거라!"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오만한 시선으로 어머니를 굽어보았다.어머니가 스스로 지쳐 입을 다물 때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것이 귀비에게 고하는 태도입니까.""고씨 부인."그 한마디가 어머니의 귓전을 강타했다.그녀는 마치 나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 양, 경악으로 물든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놀라셨습니까.""지난 십여 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친딸로 여긴 적이 있었던가요?""얌전히 당신의 그 소중한 딸을 첩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을 겁니다. 행여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내 친히 그 아이에게 지옥을 맛보게 해줄 터이니."이윽고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도망치듯 처소를 빠져나갔다.처소는 다시금 고요해졌다.다만 이번에는, 무언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다음 날 이른
나는 시선을 올려 폐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이것이 법도에 어긋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래야만 했다.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나는 또박또박 한마디 내뱉었다."소녀, 폐하의 성은을 입어 궁에서 평생 폐하의 곁을 모시길 원하옵니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현비가 가장 먼저 반응하며 벌떡 일어나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너, 네년이 폐하의 은덕을 저버리고, 어찌 감히 그토록 대역무도한 망발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현비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황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나, 제 소생이 태자로 책봉되었음에도 현비는 여전히 봉의궁에 들지 못했다.폐하의 총애가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그녀가 고작 정6품 관원의 여식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그러하냐."폐하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마치 날씨를 논하듯 무심한 어조라 도무지 희로애락을 읽어낼 수 없었다."네가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주마.""다시 마음에 드는 사내를 고르거라."나는 폐하의 말을 자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그리고 다시금 흔들림 없이 말했다."소녀, 폐하께 시집가 늘 폐하의 곁을 모시고 싶사옵니다."무거운 침묵이 연회장을 짓눌렀다. 시간이 멈춘 듯 숨 막히도록 무거운 공기가 짓눌러왔다.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폐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무래도 고씨 가문 둘째가 크게 놀란 모양이로다. 여봐라, 저 아이를 편전으로 데려가 푹 쉬게 하라.""자, 나머지 사람들은 알아서들 즐기도록 하라."나는 폐하를 모시는 내관의 안내를 받아 편전으로 향했다.창가에 서서 화려하게 만개한 화원의 꽃들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폐하를 다시 뵙게 되면 어찌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서.내 운명은 오직 폐하의 허락에 달려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통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폐하 납시오!"나는 황급히 몸
"윤허하노라!"폐하가 직접 행차하신 까닭에 이 일은 금세 진상이 밝혀졌다.이 모든 것은 고유진과 태자가 꾸민 짓이었으며, 손수건 역시 고유진이 내 곁의 하인을 매수해 훔쳐 낸 것이었다.내 반응은 그야말로 평온했다. 정말이지, 예상했던 바였으니까.그때, 곁에서 구경하던 명문가 영애들도 연신 나지막이 수군거렸다."어떻게 저런 짓을.""이곳이 어딘 줄 알고 감히 황궁에서...""아무리 그래도 친동생 아니야?"태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소자, 그저 유진이를 너무나 은애한 나머지 한순간 미혹되었사옵니다. 아바마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한순간 미혹되었다라."폐하는 손에 낀 옥깍지를 매만지더니 훌쩍 화제를 돌렸다."고서현, 네 곁의 하인은 어찌 처리할 작정이냐?"고유진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하인을 어찌할지 물으셨다.이는 폐하가 누가 자신의 장기말로 더 적합한지 저울질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나는 반드시 내 능력을,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폐하,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가문에는 가규가 있사옵니다.""이리 방자하게 군 것은 애초에 제게 살길을 남겨두지 않으려 한 것이오니, 부디 폐하께서 그 하인을 처형하시어 기강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폐하가 소리 내어 웃었다. 참으로 호쾌한 웃음이었다."고씨 가문의 둘째가 퍽 기개가 넘치는구나!""좋다. 네가 피해자이니, 네 뜻대로 하마.""여봐라, 저 하인을 끌어내어 장살에 처하라!""그리고 고씨 가문의 큰 아가씨는...""폐하, 폐하! 모두 제가 허튼 마음을 품은 탓이옵니다!""둘째 아가씨께서 큰 아가씨의 앞길을 막으실까 두려워, 한순간 미혹되어 이런 짓을 꾸몄사옵니다!""저희 큰 아가씨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오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어릴 적부터 고유진의 곁을 모시던 시녀가 황급히 끼어들며 외쳤다.고유진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심정으로 다급히 소리쳤다."모두 이 천한 계집종이 혼자 꾸민 짓이옵니다! 소녀와는 무관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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