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신이 한지영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고은채는 어느 날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작은 벌레 같은 것을 가지고 왔고 백연신이 방심한 틈을 타 그에게 벌레를 넣은 음료를 먹였다.이상한 느낌에 백연신이 바로 게워내 보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연신 씨 배속으로 들어간 그 벌레는 혈충이라고 몸에 기생하는 벌레예요. 연신 씨 벌레는 특별히 한지영 씨의 피를 섭취한 적이 있는 벌레죠. 혈충은 한번 마신 피의 냄새를 평생 기억해서 피의 주인이 가까이 다가오면 지금 기생해 살고 있는 숙주의 몸을 무척 고통스럽게 만들어요. 즉, 연신 씨가 한지영 그 여자와는 함께할 일은 영원히 없다는 뜻이죠.”고은채는 그때 악랄한 얼굴로 웃으며 이 말을 했었다.그녀의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백연신은 한때 그 일로 깊은 절망감에 빠졌었다. 한지영을 해하려고 했던 인간들을 다 처리해도 결과적으로 그녀와 이어질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혈충은 평생 몸에 기생하는 것이 아닌 원하면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혈충을 처음 발견했던 마을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그에게 혈충에 관한 정보를 줬던 사람도 제거하는 건 기술자가 아니면 못한다고 말하며 난색을 보였다.그래서 백연신은 원래 짰던 계획을 살짝 틀어 고은채가 자기 입으로 혈충을 제거해주겠다는 말을 꺼내게 했다.한지영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몸속에 있는 벌레를 제거해야만 했다.아마 한지영은 모를 것이다. 그날 차 안에서 서로 살결이 맞닿았을 때 백연신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그녀의 포옹 한 번에 그는 바늘로 온몸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고 그녀의 입맞춤 한 번에 그는 살이 다 깎이는 것 같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 그녀 가까이에 가지 말라고, 그녀와 맞닿아있지 말라고 울부짖는 듯했다.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고통이 미친 듯이 몰려와도 닿아있는 것에 그는 기쁘기만 했다.아까도 마찬가지였다. 한지영을 품에 끌
한지영은 자신을 꼭 감싸는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 이대로 몸을 맡긴 채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당장 팔 풀어요. 아니면 때릴 거예요?!”한지영은 입술을 꽉 깨문채 협박성 말을 꺼냈다.이에 백연신은 피식 웃더니 쇄골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때려.”한지영은 마음껏 때리라고 일부러 힘을 풀어 거리를 살짝 벌려주는 그의 행동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대로 손만 뻗으면 바로 뺨을 내리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들리지 않았다.그때 그의 뺨을 때렸던 느낌이 여태 손바닥에 남아있기 때문인가?“지영아, 내가 지금처럼 널 이렇게 안고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통증을 이겨내야 하는지 알아?”백연신은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지워내고 조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한지영은 그 말에 그제야 그의 얼굴색이 안 좋다는 것을 눈치챘다. 심지어 그의 이마에는 땀이 한층 맺혀있기도 했다.“어디... 아픈 거예요?”한지영의 질문에 백연신은 대답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괜찮아. 통증이 따라도 널 이렇게 안을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아. 내가 제일 두려운 건 너랑 함께할 수 없는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윗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정말 그랬다면 나한테 헤어지자는 얘기를 안 했겠죠. 백연신 씨, 당신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건 나랑 함께하지 못하는 것 따위가 아니에요.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쥐고 있는 권력과 재부, 그걸 잃는 걸 가장 두려워했었어!”백연신도 어두운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지영과 마찬가지로 조금 격앙된 말투로 얘기했다.“널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왜 그걸 몰라!”백연신은 연인 관계가 단지 사랑으로만 돌아가고 세상도 사랑만 있으면 뭐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권력과 재부를 손에 넣는 것에 집착했고 한지영까지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려고 노력했다.“날 지켜주기 위해 그랬다
비서는 한지영이 들어간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며 속으로 백선 그룹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한지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도 그럴 것이 고은채와 함께였을 때는 한번도 허락 없이 들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게다가 고은채와 결혼 얘기가 오가던 와중에 한지영과의 일이 터진 것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백연신이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말이다.한편 사무실로 들어온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연신이 얇은 담요를 덮은 채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에 땀을 쥐었는데 자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뭐가 됐든 직접 찾아온 건 맞으니 꼬투리 잡힐 일도 없었다.한지영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쇼핑백을 탁자에 내려놓은 후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떠나려는 그 순간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백연신은 많이 피곤했던 건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자고 있었다. 편히 눈을 감은 채로 있는 모습이 천사가 따로 없었다.한지영은 그와 연인이었을 당시 백연신이 잘 때면 항상 옆으로 다가가 그의 말랑한 볼을 콕콕 찌른다던가 아니면 살짝 꼬집는다든가 하는 행동을 했었다.심지어 어떨 때는 일부러 옆에서 웃기는 포즈로 함께 사진을 찍고 나중에 혼자 그 사진을 보며 키득키득 웃기도 했었다.여느 커플처럼 두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즐거운 연애를 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게 다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그때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겠지. 그래, 그건 다 꿈이었던 거야.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도 됐지. 백연신이 이렇게 다시 눈을 뜬 것처럼... 응? 눈을 떴어?!’한지영은 멍하니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제야 백연신이 눈을 떴다는 것을 발견했다.의식의 흐름대로 그의 얼굴을 꼬집듯이 잡고 있던 바로 이때 말이다.‘이 미친년!’한지영도 설마 과거의
“그런데 나 여기로 온 건 어떻게 알았어?”임유진이 물었다. 그도 그럴 게 소영훈을 찾으러 간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기사가 너 여기로 왔다고 얘기하길래 한번 와봤어. 조만간 가게 되면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강지혁이 오른손으로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며 말했다.“치료 시작하면 그때는 같이 와.”“됐어. 번거롭게 뭐하러 일하는 사람을 불러내. 나 혼자 갈게.”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꿈틀하더니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알았어.”차량이 저택 앞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강지혁과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다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차량을 움직이지 않았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조금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임유진이 사라지자 아까 병원 입구에서 강현수와 나눴던 대화들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유진이가 절벽에서 떨어진 이유가 뭐야? 아무리 네가 기억을 잃었다 해도 네 곁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그날 일에 대해 얘기를 해줬을 거 아니야.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도 나는 유진이가 다시 나타난 뒤에야 전해 들었어. 그런데 유진이가 왜 떨어졌는지는 얘기 안 해주더라. 그러니까 네가 얘기해봐.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내가 왜 나랑 유진이 사이의 일을 너한테 얘기해줘야 하지?”“그럼 이것만 얘기해줘. 유진이가 절벽에서 떨어진 일과 진애령의 교통사고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 일 사이에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두 사건이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강지혁이었다.하지만 고이준과 집사는 여전히 김재호가 진세령을 시켜 임유진을 납치했고 그러다 임유진이 사고로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소리밖에 해주지 않았다.두 사람 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강지혁은 알고 있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계획대로 최면 진행하죠.”
임유진은 시선을 내리며 침묵한 것도 잠시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소영훈을 향해 말했다.“치료할게요.”“조금 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겠어요?”소영훈은 임유진의 결단력에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네, 생각이라면 충분히 했어요. 운이 나빠서 손을 못 쓰게 된다고 해도 한번 해볼래요. 3년 뒤면 치료하고 싶어도 못하잖아요.”“알겠어요. 그럼 치료하는 거로 하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요. 따로 구해야 할 물건들이 있어서.”소영훈이 말했다.“준비를 다 마치면 그때 다시 연락할게요.”“네, 선생님.”“그리고 온 김에 진통제를 처방해 줄게요. 평소에 처방받는 진통제와는 조금 다를 거예요. 효과가 강한 거라.”“네, 고맙습니다.”임유진은 약까지 전부 처방받은 후에야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밖으로 나가자마자 강현수가 웬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등을 지고 있었지만 임유진은 그 사람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두 남자가 움찔했고 강현수가 먼저 시선을 틀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곧바로 강지혁 역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조금은 차가웠던 눈빛이 임유진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풀리며 발걸음도 본능적으로 그녀 곁으로 향했다.“선생님이 뭐래?”“치료에 필요한 준비를 다 마치시면 그때 다시 연락 주겠대.”임유진은 손이 못 쓰게 될 수도 있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그럼 이만 집으로 가자.”“너 회사는?”“너 데려다주고 가면 돼.”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강현수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다가 강지혁과 임유진이 바로 옆을 지나려 할 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가 정말 누군가를 온전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내가 아니더라도 조만간 네 손으로 너희 관계를 망칠 거야.”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추더니 험악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네가 뭐라 해도 우리 사이는 안 변해.”그는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고는 다시금 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강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임유진을 불러세웠다.“잠깐만. 어차피 금방 가려고 했으니까 볼일 봐.”강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손 때문에 온 거지? 전에 만났을 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손은 좀 어때? 괜찮아? 통증 같은 건 없고?”걱정이 그대로 묻어있는 말투였다.“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손에 관해서는 선생님하고만 얘기하고 싶어요.”임유진의 말은 명백한 거절이었다.강현수는 어색하게 시선을 내리더니 이내 쓴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렇게 해. 이쪽으로 와. 나는 이만 나가볼게.”그는 이 말을 끝으로 터벅터벅 진료실을 나갔다.소영훈은 문이 닫힌 후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현수는 그저 유진 씨가 걱정돼서 물었을 뿐이에요. 유진 씨가 사라진 5년 동안 현수 저놈이 유진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요? 나 찾으러 와서도 맨날 유진 씨 얘기만 했어요.”소영훈의 말에는 그 어떤 거짓말도 들어있지 않았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도 둘이서 임유진의 얘기만 했으니까.임유진은 자리에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그래서 그래요. 저는 지금 강지혁의 와이프잖아요. 이런 식의 관심과 걱정은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에요.”소영훈은 그녀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매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언제쯤 유진 씨를 완전히 지워낼 수 있을지. 쯧쯧.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손 좀 봅시다. 원래는 출산만 하고 바로 치료를 이어갔어야 했는데 그사이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그간 많이 아팠을 것 같은데.”임유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소영훈은 일단 일련의 검사를 받게 한 후 30분쯤 뒤에 다시 그녀를 진료실로 불렀다.임유진은 심각해 보이는 소영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많이 안 좋아요?”“5년 전에도 내가 얘기했죠? 치료받는 도중에 중단하면 증상이 더 심해질 거라고. 그 뒤로 시간이 또 지연됐으니 상태가 안 좋아진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이제 3년 정도 지나면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