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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찬란한 날들

꽃처럼 찬란한 날들

작가:  꽃비참여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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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예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이 27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고, 남편은 세계 최고의 재벌이자 글로벌 그룹의 대표, 박지호였다. 수년째 포브스 세계 부호 순위 최정상을 지켜 온 남자. 잡지가 선정한 ‘전 세계 여성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 1위’이자, 영국 왕실마저 공주와의 혼인을 바랐다는 완벽한 남자. 모두가 강예원을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여자라 말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강예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의 첫사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협의이혼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 “나 이혼하려고요. 그러니까... 박지호는 심은정 씨 가져요. 두 아이도... 심은정 씨에게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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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화

심은정은 눈앞의 여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6년이나 박씨 집안의 사모님 자리를 지켜온 여자가 갑자기 그 자리를 순순히 내주겠다고 선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강예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남편도, 아이들도 다 나보다 심은정 씨를 더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쯤에서 물러날게요. 박지호가 이혼 서류에 사인만 하면 돼요. 이혼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바로 떠날게요.”

이번 생만큼은 지난 생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외면받는 박지호의 아내로 살아가는 삶도, 이제는 끝이었다.

심은정은 손끝으로 무심하게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꿍꿍이에요?”

강예원은 심은정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 꿍꿍이도 없어요. 그냥... 이제 지쳤어요.”

“밖에 박씨 집안의 사모님 자리를 탐내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요?”

“알죠.”

강예원은 심은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서 심은정 씨한테 주는 거예요.”

그 말에 심은정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심은정은 그 이혼 협의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손을 뻗어 서류를 가져가서 확인했다.

“좋아요. 이렇게 관대하게 나오시니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나는 손에 넣은 건 절대 다시 놓치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강예원은 살짝 웃어 보였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강예원은 전생에서 외롭고 고단한 삶을 평생 살았다.

심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의 다른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

전화가 연결되자 심은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호야, 나 지금 블루마운틴 카페에 있는데, 데리러 와줄 수 있어?”

한쪽에 앉아 있던 강예원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매번 자신이 박지호에게 전화를 걸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비서 추상우가 대신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채 20분도 안 되어, 늘 회의 중이던 그 남자가 카페 입구에 나타난 것이다.

강예원은 유리창 너머로 박지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몸에 꼭 맞는 검은 정장 탓인지 넓은 어깨와 날렵한 허리가 더 돋보였다.

여섯 살 난 아들 박유환과 네 살 난 딸 박소연은 심은정을 보자마자, 달려가서는 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은정 이모!”

박소연이 다정하게 부르며 심은정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박지호는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긴 손가락으로 조용히 심은정 쪽으로 밀어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말차 맛이야. 설탕은 적게 넣어 달라고 따로 부탁했어.”

심은정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내 취향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네.”

구석에 앉아 있던 강예원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세게 움켜쥐었다.

지난 결혼 6년 동안, 박지호는 강예원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단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전생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박지호가 추상우를 시켜 대충 사 온 것은 강예원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망고가 들어간 케이크였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

박지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프렌치? 아니면 중식?”

심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이혼 협의서를 꺼냈다.

“그 전에 먼저 확인해 줬으면 하는 서류가 있어.”

심은정은 서류를 서명 페이지까지 펼쳐서 보여주었다.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 있는데, 당장 마련할 수 있는 돈이 조금 부족해서... 혹시 가능하면 조금만 도와줄 수 있을까?”

박지호는 펜을 받아 쥐더니, 내용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사인을 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걸 굳이 따져야 해?”

“은정 이모가 새집을 사는 거예요?”

박유환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빠도 그 옆에 집 하나 사요! 나랑 소연이는 은정 이모랑 같이 살고 싶어요. 엄마랑 맨날 같이 있는 건 싫단 말이에요.”

박지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두 아이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채 사지.”

“그럴 필요 없어.”

심은정이 서둘러 말했다.

“대신 유환이랑 소연이, 그리고 네 방까지 세 개는 비워 둘게.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우리집에 와서 지내면 되잖아.”

두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박소연은 심지어 심은정의 목을 꼭 껴안으며 입을 맞췄다.

“은정 이모가 최고예요! 우리 엄마보다 천 배는 더 좋아요!”

강예원은 마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억세게 쥐어짜는 듯 고통스러웠다. 답답해서 숨을 거의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강예원은 박지호의 입가에 번지는 옅은 미소를 보았다.

그건 강예원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다정한 얼굴이었다.

더는 견딜 수 없어서 강예원은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떴다.

카페 문을 나서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전생에 강예원은 박지호와 정략결혼을 통해 아들과 딸을 낳고 62세까지 살았지만,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은 없었다.

박지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첫사랑인 심은정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심은정이 해외로 떠난 뒤, 박지호는 며칠을 폭음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박지호는 끝내 머리 숙여 심은정을 잡으려 하지 않았고, 곧바로 집안에서 요구하는 정략결혼을 받아들였다.

박지호는 소녀 시절 강예원의 첫사랑이었다.

마치 신처럼 고귀한 존재였으며, J시 상류층의 영애 중 박지호와 결혼하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두 집안에서 혼담이 오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강예원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결혼 후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박지호를 사랑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무한한 냉담함이었다.

그러다 심은정이 귀국했다.

박지호는 강예원에게 이혼을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시선은 한시도 심은정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더 끔찍한 것은 두 아이 모두 심은정을 좋아하게 되어 강예원과 점점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말년의 강예원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고, 박지호는 요양을 핑계로 강예원을 본가 저택에 버려 혼자 지내도록 방치했다.

어느 생일날, 떨리는 손으로 박지호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돌아온 것은 심은정과 함께 몰디브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으려 했지만, 기억이 뒤죽박죽되어 그만 불을 끄는 것을 잊고 말았다.

집이 뜨거운 화염에 휩싸일 때, 강예원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박지호가 결혼식에서 반지를 끼워주던 그 차가운 눈빛이었다.

강예원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오직 한 가지 소원만을 빌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박지호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겠다고.

강예원이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하지만 강예원은 쉬지 않고 바로 짐 정리를 시작했다.

박지호의 수트, 아이들의 장난감, 가족사진...

모든 것을 망설임 없이 하나하나 종이상자에 던져 넣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박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예원이 고개를 돌려 보니, 박지호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문간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엄마는 왜 우리 물건을 버리는 거예요?”

박소연이 달려와 상자 속 자신의 곰 인형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박유환도 분노에 찬 눈으로 강예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그냥 은정 이모랑 잠깐 놀다 온 건데, 그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에요?”

박지호 역시 차가운 시선으로 강예원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은정이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못마땅해? 고작 그런 일로 삐칠 필요는 없잖아.”

“화난 거 아니야.”

강예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말!”

박소연이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엄마는 은정 이모를 질투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곰 인형까지 버린 거예요! 엄마는 나쁜 엄마예요!”

“나랑 동생은 크면 바로 나가서 은정 이모랑 같이 살 거예요.”

박유환이 박소연의 손을 꼭 잡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엄마 보러 안 올 거예요!”

박지호는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강예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은 마치 생떼를 쓰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만해.”

박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타고난 품격이 묻어났고, 긴 손가락은 무심하게 커프스단추를 매만지고 있었다.

“곧 이사회 화상회의가 있어. 뭘 버리든 네 마음대로 해. 대신 소란만 피우지 마.”

문이 닫히는 순간, 강예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장은 갈가리 찢겨 나간 듯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강예원은 눈물을 닦아내고, 어지럽게 흩어진 방 안을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영원히 시끄럽게 하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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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심은정은 눈앞의 여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6년이나 박씨 집안의 사모님 자리를 지켜온 여자가 갑자기 그 자리를 순순히 내주겠다고 선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강예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 남편도, 아이들도 다 나보다 심은정 씨를 더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쯤에서 물러날게요. 박지호가 이혼 서류에 사인만 하면 돼요. 이혼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바로 떠날게요.”이번 생만큼은 지난 생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모두에게 외면받는 박지호의 아내로 살아가는 삶도, 이제는 끝이었다.심은정은 손끝으로 무심하게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꿍꿍이에요?”강예원은 심은정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아무 꿍꿍이도 없어요. 그냥... 이제 지쳤어요.”“밖에 박씨 집안의 사모님 자리를 탐내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요?”“알죠.”강예원은 심은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서 심은정 씨한테 주는 거예요.”그 말에 심은정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심은정은 그 이혼 협의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손을 뻗어 서류를 가져가서 확인했다.“좋아요. 이렇게 관대하게 나오시니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요.”“하지만 기억하세요. 나는 손에 넣은 건 절대 다시 놓치지 않아요.”“걱정 마세요.”강예원은 살짝 웃어 보였다.“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어차피 강예원은 전생에서 외롭고 고단한 삶을 평생 살았다.심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의 다른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전화가 연결되자 심은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호야, 나 지금 블루마운틴 카페에 있는데, 데리러 와줄 수 있어?”한쪽에 앉아 있던 강예원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매번 자신이 박지호에게 전화를 걸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비서 추상우가 대신 받았다.그런데 지금은 채 20분도 안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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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혼 협의서에 서명한 다음부터 강예원은 집안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기 시작했다.강예원은 더 이상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이를 위한 영양이 균형 잡힌 식단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늦은 밤 박지호가 술자리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해장국을 끓이지도 않았다.그동안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고 여겼던 일들을 전부 가사도우미들에게 넘겨버렸다.처음에는 아무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박유환이 유치원에 지각해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박소연은 사라진 숙제 공책을 찾지 못하고, 박지호의 회중시계가 멈춰 선 뒤에야 다들 비로소 깨달았다.가사도우미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녔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강예원이 해오던 집안일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주방에는 설거지 안 된 그릇이 산처럼 쌓였고, 거실에는 아이들 장난감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으며, 다려 놓은 셔츠는 늘 어딘가 구겨져 있었다.한때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던 이 집은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박지호가 침실 문을 열었을 때, 강예원은 창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강예원의 몸에 아른거리는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지?”박지호가 문간에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예원은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왜 집안일을 안 하는 거야?”박지호가 몇 걸음 다가서자 은은한 침향이 공기 중에 퍼져 나갔다.“아직도 지난번 일로 화가 난 거야?”“화난 거 아니라고.”강예원은 책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그냥 하기 싫어졌어.”박지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이유가 뭔데?”“지쳤으니까.”강예원은 담담하게 말했다.“집에는 가사도우미들도 있고, 내가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잖아.”그 순간, 강예원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강예원은 그때도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곤 했다.박지호의 커피 물의 온도는 반드시 85도여야 했고, 샌드위치는 빵의 겉면이 노릇노릇 바삭하게 구워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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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사 온 첫날, 심은정은 가사도우미들에게 거실 인테리어부터 전부 바꾸라고 지시했다.“이 소파는 너무 답답해 보여.”심은정은 가느다란 손끝으로 천연 가죽 소파를 살며시 매만지다, 고개를 돌려 박지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아이보리 색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박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사 김석규에게 지시했다.“은정이가 하라는 대로 해.”강예원은 계단 모퉁이에 서서, 반년 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소파가 밖으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박유환과 박소연은 마치 작은 꼬리처럼 심은정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은정 이모, 이 쿠션도 바꿔 주세요! 엄마가 산 건 너무 촌스러워요!”심은정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 다 바꾸자.”강예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이내 곧 힘을 풀었다.그 쿠션들은 강예원이 임신 기간 동안 한 땀 한 땀 손수 바느질한 것들이었다.아이들이 피부가 예민해 알레르기 방지 솜까지 넣어 직접 만든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그 후 며칠 동안, 집은 점점 더 낯선 공간으로 변해 갔다.식탁에서는 심은정이 원래 강예원의 자리였던 곳에 앉아,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반찬을 챙겨 주었다.박지호는 가끔 심은정에게 직접 커피를 따라 주며, 긴 손가락으로 조용히 잔을 밀어주었다.그리고 그 눈빛에는 강예원이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저녁이면 거실 조명이 어둑하게 내려앉고, 네 사람은 소파에 붙어 앉아 영화를 보곤 했다.박소연은 심은정의 품에 안겨 있었고, 박유환은 박지호의 어깨에 기대어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강예원이 곁을 지나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마치 강예원은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예전의 세 사람은 생활의 질에 있어서는 지나칠 만큼 까다로운 사람들이었다.그런데 지금 강예원은 심은정이 20억 원짜리 시계를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모습을 보았다.심지어 시계가 뒤집힌 채 놓여 있었는데도 박지호는 그저 웃으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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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엄마가 그랬어요!”박소연이 울먹이며 소리쳤다.“우리가 알레르기 있는 거 알면서 일부러 먹였단 말이에요!”박유환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너무 나빴어요!”강예원의 손가락은 문틀을 꽉 움켜쥐었고, 그 탓에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너희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니? 당장 사실대로 말해.”“그만해!”박지호가 벌떡 일어나 강예원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손목뼈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엄청난 힘이었다.“네가 정말 애들 엄마 맞아? 아이들을 해친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강요하는 거야?”“아니야...”강예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그럼 아이들이 널 모함했다는 거야?”박지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저 어린 애들이 그런 거짓말까지 꾸며 낼 거라고 생각해? 넌 엄마 자격도 없어.”두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고, 박지호는 즉시 강예원의 손목을 놓고 몸을 돌려 아이들을 달랬다.하지만 아이들은 달래면 달랠수록 더 크게 울었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아빠...”박소연이 훌쩍이며 말했다.“너무 아파요...”“어떻게 하면 좀 괜찮아질까?”박지호가 낮은 목소리로 묻고는, 손가락으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박유환은 붉어진 눈으로 강예원을 노려보았다.“엄마도 망고 알레르기 있잖아요. 엄마한테도 망고주스 먹여서 똑같이 아파야 해요!”강예원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강예원이 박지호를 바라보는 순간, 박지호의 차가운 눈빛에 온몸이 서늘해졌다.“그래.”박지호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 명의 경호원이 즉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붙잡아.”강예원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강예원을 의자에 눌려 앉혔다.그리고 강예원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1리터의 망고주스가 강제로 목구멍 안으로 콸콸 쏟아졌다.끈적하고 달콤한 액체가 기도를 타고 넘어가자, 강예운은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목구멍이 화끈거리며 불에 타는 듯 아팠다.두드러기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강예원의 피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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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강예원의 눈에서 눈물이 도저히 멈추지 않았다.한참 가슴을 움켜쥐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그때 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항공사에서 예매한 티켓 정보를 확인하는 전화였다.[강예원 고객님, Y시행 편도 항공권 발권이 완료되었습니다. 좌석 선택을 도와드릴까요?]“창가 자리로 부탁드릴게요.”강예원은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며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전화를 끊자마자 병실 문이 열렸다.박지호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반듯한 정장 차림에 소맷단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누구랑 통화한 거야?”박지호가 무심하게 물었다.강예원은 휴대폰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친구.”박지호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그저 침대 옆에 서서 강예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지난번 일은 오해였어. 아이들에게 실수로 망고 주스를 준 건 은정이었어.”박지호의 어조는 날씨를 말하듯 평온했다.“하지만 은정이는 몰랐어. 그러니까 이 일은 그냥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하자.”강예원은 가슴이 세게 조여 오는 느낌에 숨이 막혔다.범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마치 죽여 버릴 듯이 굴더니, 심은정으로 바뀌자 그저 말 한마디로 가볍게 넘겨버렸다.강예원은 입을 열어 따져 묻고 싶었다.소리를 지르고, 가슴 가득 찬 억울함과 분함을 모조리 쏟아내고 싶었다.하지만 입술 끝까지 올라온 말은 결국 들릴 듯 말 듯한 한마디로 바뀌었다.“알았어.”마치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 너무 지쳐서 다툴 의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한때 강예원을 밤잠 못 들게 했던 그 억울함도, 나날이 쌓이던 분한 마음도, 이 순간에는 입가에 맺힌 자조 섞인 쓴웃음으로 변해 버렸다.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본디 이렇게나 엄청나게 다른 것이었다.박지호는 강예원의 반응이 다소 의외라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다음 주에 애들 캠프가 있어. 나랑 은정이가 같이 갈 테니 너는 혼자 집으로 돌아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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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찔한 순간, 강예원의 몸은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순식간에 덮쳐 왔고, 미지근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자 시야가 흐려졌다.두 아이는 계단 맨 위에 서서 얼굴 가득 악의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꼴 좋다!”박소연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케이크 안 줬으니까 당연한 거야!”박유환도 혀를 내밀며 말했다.강예원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턱을 타고 흘러내린 선혈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강예원은 눈앞의 이 작은 악마들을 바라보며, 이들을 분만실에서 숨이 끊어질 듯 죽을힘을 다해 낳았던 그 순간과 도저히 연결할 수가 없었다.그때 현관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무슨 일이야?”박지호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지호의 뒤에는 심은정이 따르고 있었다.이 광경을 목격한 세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아빠!”두 아이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엄마가 케이크를 버리면서 안 줬어요. 그리고 우리가 필요 없다고 했어요! 흑...”박지호의 시선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케이크에 닿았다가, 다시 온몸이 피투성이인 강예원에게 옮겨갔다.박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꼭 아이들이랑 싸워야 하는 거지?”박지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자기가 낳은 친자식한테 그런 말을 한다니. 그러는 네가 엄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강예원은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피가 강예원의 옷깃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강예원은 박지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네 눈에 내가 언제는 엄마 자격이 있었어?”쉰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너도 처음부터 날 아이 낳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했잖아.”박지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네가 진짜 원하는 아내는 처음부터 심은정이었고.”강예원은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두 아이도 엄마로 심은정을 원한다면 나는 엄마 자리에서도 물러나서 너희 네 식구를 축복해 줄게.”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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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하객들의 수군거림이 선명하게 강예원의 귀에 꽂혔다.“저 두 분이랑 대학 동기였는데, 예전에 박 대표님이 심은정 씨 얼마나 아껴 주셨는지 몰라요.”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졸업하기도 전에 청혼할 기세였다니까.”“어쩐지!”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첫사랑은 역시 첫사랑인가 봐요. 사모님 자리는 아니어도, 언제나 최우선 순위인 거죠.”“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결혼했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누군가 강예원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훑으며 말했다.“아이까지 낳았는데 남편 마음 하나 못 얻고. 내가 보기엔 평생 외롭게 살 팔자인 것 같은데.”강예원은 그 모든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가슴은 두꺼운 얼음에 꽁꽁 싸인 것처럼 먹먹했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강예원은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손을 뻗어 문을 막았다.심은정이 우아한 몸짓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붉은 입술을 살짝 추어올렸다.“이혼 숙려 기간이 이제 딱 사흘 남았네요.”심은정은 강예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약속대로 정말 떠날 거죠?”강예원은 1층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물론이죠.”“나야말로 누구보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니까.”심은정은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걱정 마요. 내가 강예원 씨 대신 지호와 아이들을 잘 돌볼 테니까.”“어차피 지호와 아이들도 강예원 씨를 안 좋아하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예요.”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강예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심하게 한 번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컴컴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으악!”심은정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고,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지호야! 살려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어!”강예원은 벽에 세게 부딪혔고, 이마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미지근한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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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예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백색 형광등 불빛이 쏟아져 내려 무의식적으로 눈을 찌푸렸다.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귓가에는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맴돌았다.“깨어나셨군요.”의사가 다가와 강예원의 동공을 확인했다.“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졌습니다. 병원 이송이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이 위험했을 거예요.”강예원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기 직전의 그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박지호가 조금도 서슴지 않고 심은정을 구조하겠다고 선택했던 그 순간, 그리고 변형된 엘리베이터 문이 자신을 향해 내리꽂혔을 때 박지호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그 순간을.강예원은 몸을 조금 움직여 보려 했지만, 극심한 통증이 가슴에서부터 금세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하지만 이상한 것은 눈물이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아마도 고통이 극에 달하니 마음조차 무뎌져 버린 듯했다.사흘 뒤, 박지호가 강예원의 퇴원을 위해 데리러 왔다.박지호는 병실 문간에 서서 깔끔하게 다려진 정장을 입은 채, 붕대로 친친 감긴 강예원의 가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은정이는 앞으로도 춤을 춰야 해. 난 은정이 다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둘 수 없었어.”강예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지호를 올려다보았다.“그러니까 부득이하게 네가 좀 이해해 줘야겠어.”박지호의 어조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평온했다.“너는 가정주부니까 설령 몸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거 아니야.”강예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평생 사랑했던 이 남자를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박지호의 눈매와 얼굴은 여전히 천상의 신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두 눈 속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그림자가 깃든 적이 없었다.강예원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그날 내가 죽었으면... 너는 조금이라도 슬펐을까?”박지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안주머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의미 없는 질문은 집어치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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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강예원은 Y시에 도착했다.이 도시는 강예원에게 완전히 낯선 곳이었지만, 오히려 바로 그 점이 안정감을 주었다.강예원은 보름 동안이나 곳곳을 발로 뛰며 조사한 끝에, 한적한 길목에 ‘예원 서점’이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다.가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드는 것이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석 달이라는 시간을 온통 인테리어에 쏟아부어, 강예원은 본래 낡고 허름했던 공간을 아늑한 독서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Y시의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강예원은 서점의 유리문 앞에 서서 밖에 촉촉히 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현관에 걸린 풍경이 갑자기 맑은 소리를 내며 짧게 울렸다.“어서 오세요.”강예원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가, 문가에 선 사람을 알아보고는 살짝 멈칫했다.문 앞에 선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검은색 긴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고, 빗물이 우산 끝을 타고 마룻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지고 있었다.남자의 품에는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는데, 아이는 양쪽으로 머리를 땋은 채 겁먹은 얼굴로 남자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이 나이 또래 아이가 읽기 좋은 그림책이 있을까요?”남자가 우산을 접으며 부드럽게 물었다.강예원은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뚜렷한 이목구비에 잘생긴 눈매, 콧등에는 금속 테 안경이 걸쳐져 있었고, 렌즈 너머의 눈동자에는 옅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강예원은 순간 굳어 버렸다.“시우 선배?”남자 역시 놀란 듯 강예원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미소 지었다.“강예원?”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고시우는 의대에서 전설처럼 불리는 인물로, 강예원보다 두 학번 위인 선배였다.재학 시절부터 이미 소문난 수재였던 그는 성적이 뛰어난 것은 물론, 피아노 연주 실력까지 출중해 수많은 여학생의 동경의 대상이었다.“진짜 오랜만이에요.”강예원이 살며시 웃으며, 고시우가 품에 안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이 아이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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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날 이후, 고시우와 민희는 서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거의 주말마다 두 사람은 한두 시간씩 서점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냈다.민희는 구석의 작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그림책에 푹 빠져들었고, 고시우는 의학 전문서 한 권을 골라 민희 곁에서 조용히 읽었다.강예원이 차를 한 잔 타 주면 고시우는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민희도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이내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느 화창한 토요일, 고시우가 강예원에게 연락해서 민희를 놀이공원에 데려가자고 제안했다.“예원아, 같이 가자.”고시우는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민희가 계속 같이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강예원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잔뜩 기대에 찬 민희의 눈빛을 보는 순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민희는 왼손으로는 고시우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강예원의 손을 꼭 잡은 채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회전목마도 타고, 범퍼카도 탔으며, 함께 줄을 서서 대관람차에도 올랐다.관람차가 가장 높은 지점에 다다랐을 때, 민희는 갑자기 먼 곳의 구름을 가리키며 말했다.“우리 엄마는 저기 살고 있어요.”강예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시우는 민희를 조용히 품으로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하늘에서 민희를 지켜보고 계셔. 그리고 우리 민희가 매일매일 행복하길 바라신단다.”민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강예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언니가 민희 엄마 하면 안 돼요?”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강예원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고시우가 황급히 수습하려 끼어들었다.“민희야,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함부로 한 말 아니에요!”민희의 작은 얼굴이 새빨개졌다.“저 언니 좋아해요! 언니도 민희 좋아하잖아요.”강예원은 고집 센 그 어린 표정을 바라보며, 문득 박소연을 떠올렸다.그 아이 역시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곤 했다.“언니도 민희를 정말 좋아해.”강예원이 다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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