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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자정의 초대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3:11:16

“온실에 피어 있던 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나?”

칼릭스는 묻고도 손목을 놓지 않았다. 레일라가 조금 비틀자 손가락 마디에 힘이 실렸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더는 눈을 감고 통증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얼굴을 피하려 해도 시선이 따라왔다.

“대답해 보아라, 레일라.”

칼릭스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서늘한 피비린내와 함께 사나운 맹수의 뜨거운 숨결이 뺨을 스쳤다.

“왜 말이 없지?”

“……폐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엄지가 손목 안쪽을 눌렀다. 레일라는 빠르게 뛰는 맥박이 손끝에 들킬까 두려웠다. 침착한 얼굴을 만들려 할수록 붙잡힌 곳에서 더 세게 피가 뛰었다.

“온실에서의 밤을 잊은 것인가?”

칼릭스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짐에게 그토록 매달리던 네가, 그 밤의 꽃을 잊었을 리가 없을 텐데.”

‘시험하는 걸까.’

레일라는 그의 표정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장미든 백합이든 이름을 대는 순간, 그의 기억과 맞는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 온실에서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첫 입맞춤이라는 말부터 덫이라면 무슨 꽃을 골라도 틀린 답이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손목을 놓지 않는 그에게는 대답이 필요했다.

‘도망칠 곳은 없어.’

상대방이 발을 뺄 수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레일라는 파르르 떨리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칼릭스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맑은 녹안에 서서히 물기가 차올랐다.

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록 잠깐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붙잡힌 손목으로 내려가자 레일라는 눈을 들었다. 억울해서 대답조차 못 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꽃이라고 하셨습니까?”

레일라의 목소리가 메마르게 갈라져 나왔다.

칼릭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래. 짐과 네가 함께 머물렀던 온실 속에서 피어났던…….”

“어떻게 제게 그런 잔인한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레일라가 말을 끊었다. 질문을 기다리던 칼릭스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손목을 쥔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무어라?”

“폐하께서는 그날 밤이, 고작 꽃 따위나 감상하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신 겁니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밤, 온실 바닥을 붉게 적시던 낭자한 핏물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핏물……?”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황위 계승 전쟁의 피비린내를 피해,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입고 온실 구석으로 피를 흘리며 기어들었던 분이 누구셨습니까!”

레일라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칼릭스의 옆구리 흉터를 가리켰다. 혼수상태의 그를 닦아주며 몇 번이고 보았던 자리였다. 그 상처가 온실에서 생겼는지는 몰랐다. 그의 얼굴에서 반박할 기색을 살피며, 자신이 본 상처에 지어낸 밤을 이어 붙였다.

“암살자의 독검에 찔려 사경을 헤매며, 제 치맛자락을 쥐고 숨을 헐떡이던 분이 대체 누구였느냔 말입니다!”

칼릭스의 몸이 굳어버렸다.

“내가…… 온실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고……?”

“제 손은 온통 폐하의 뜨거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레일라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격앙된 숨을 토해냈다.

“차갑게 식어가는 폐하의 숨통을 붙잡기 위해, 제 입술을 겹쳐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신들에게 빌면서요!”

“……!”

“그런데, 꽃이요?”

레일라의 입술에서 서글픈 실소가 흘러나왔다.

“품 안의 당신은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었는데…… 제 눈에 꽃 따위가 보였을 것 같습니까?”

침전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제게 보였던 것은 오직…… 핏물에 젖어 꺼져가던 당신의 눈동자뿐이었습니다.”

레일라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런 지옥 같던 밤을 두고…… 이제 와 제게 꽃의 이름을 물으시는 겁니까?”

칼릭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레일라는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 말을 이었다.

뚝, 뚝.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칼릭스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차라리 제 목을 베십시오, 폐하.”

레일라가 목덜미를 꼿꼿이 드러냈다.

“목숨을 걸고 폐하를 살려낸 대가가 고작 이런 조롱과 의심뿐이라면…… 저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칼릭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실의 어둠과 피 묻은 손이 뒤섞였다. 둘이 같은 날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레일라의 설명을 붙들었다. 그 말을 의심하면 눈앞의 그녀까지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자신을 살려낸 유일한 정인에게 씻을 수 없는 비수를 꽂았다는 자책감.

“아…….”

칼릭스의 손끝이 경련하듯 떨렸다.

“레일라…….”

“놓으십시오.”

레일라가 손을 빼내자 칼릭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라! 제발…… 내게서 돌아서지 마라, 레일라!”

어깨에 닿은 숨이 떨렸다. 레일라는 그의 손이 다시 목으로 올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팔에 힘을 조금 풀었다.

“짐이 미안하다. 내가…… 내가 어리석었다.”

피폐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애원하듯 귓가를 맴돌았다.

“독의 고통에 눈이 멀어 네 가슴에 대못을 박았구나.”

“……폐하.”

“용서해 다오. 다시는 너를 시험하지 않겠다. 절대로 너를 의심하지 않으마.”

레일라는 그의 어깨 너머로 숨을 내쉬었다. 꽃 이름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묻기 전에, 이 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 했다.

레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칼릭스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습니다, 폐하.”

속삭이는 음성은 다정했으나, 그녀의 녹안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간이 없어.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을 빠져나가야 해.’

***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서슬 퍼런 칙명이 온 황궁에 공표되었다.

“침소 시녀 레일라를 황제 폐하의 전속 정부(情婦)이자, 침전의 유일한 안주인으로 책봉한다.”

궁정 대신들의 반발은 없었다.

며칠 전 헤센 후작가의 가신이 손목이 박살 난 것을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절대적인 비호 아래, 진귀한 보석들이 끝없이 레일라의 거처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해의 흑진주, 순금 장미 관, 눈부신 사파이어.

시녀들은 시선을 낮춘 채 물건을 옮겼다. 누구도 상자를 내려놓는 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 했다.

“마님, 폐하께서 하사하신 에메랄드 원석입니다.”

“거기 두면 기울어요. 탁자 가운데에 놓으세요.”

시녀가 얼른 상자를 밀었다. 레일라는 손잡이에 끼인 그 여자의 손가락이 빠진 것을 확인하고 덧붙였다.

“이제 나가봐요.”

레일라는 화려한 보물들을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국경 너머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무기명 금표와 다이아몬드 나석뿐이었다.

시녀들이 물러간 한낮.

침소의 테라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라벤더 오일 병을 든 하급 시종 길렌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달달 떨리는 은쟁반 위에서 병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마, 마님…….”

길렌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일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이지? 암시장 쪽에 전갈은 넣었느냐?”

길렌은 가슴팍에서 구겨진 양피지 쪽지를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검은 까마귀 날개 문양이 찍힌 밀랍 서신이었다.

“그, 그것이…… ‘회색 까마귀’의 상주(商主)가 마님께 직접 전하라며…….”

“상주가 직접?”

레일라는 쪽지를 낚아채 밀랍을 뜯었다.

피처럼 붉은 잉크로 휘갈겨 쓴 거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황궁의 귀하신 분께서 남부 국경을 넘는 위조 신분증을 원하신다지.

하지만 황실 금표 10장이 걸린 판돈을 일개 심부름꾼과 거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 밤 자정, 황궁 외곽 폐쇄된 제3 밀수 수로 창고로 직접 나와라.

반드시 혼자 와야 할 것이다.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네 정체와 은닉한 금표 목록이 황제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이게 될 테니.]

쿵-!

레일라는 금표 10장이라고 적힌 줄을 다시 읽었다. 숨겨 둔 수량과 정확히 같았다. 길렌이 대체 어디까지 전한 것일까.

“마님, 어쩌면 좋습니까? 그자들은 암흑가의 살인귀들입니다!”

길렌이 주저앉아 눈물범벅으로 애원했다.

“오늘 밤 나가셨다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십니다!”

“입 다물어.”

레일라는 쪽지를 든 손을 내려 길렌의 입부터 막았다.

“밖에서 듣겠어. 목소리 낮춰.”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어디까지 아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주 계획이 황제에게 넘어가면 숨겨 온 성까지 캐물을 터였다. 거절한다고 없어질 약속이 아니었다.

레일라는 쪽지를 촛불에 가져갔다. 가장자리부터 불이 붙었다. 마지막 글자가 타 없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은쟁반에 내려놓았다. 자정 전에, 황제의 침전부터 빠져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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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멸문시킨 폭군의 정인이 되었다   26화. 반지가 여는 문

    “내 첫사랑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는데.”창틀에 올린 레일라의 발이 멎었다.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소매 밖으로 나오려던 전송석을 다시 손안에 감췄다.칼릭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일라는 창틀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그의 걸음을 세었다. 첫사랑의 다른 이름을 들었다는 말보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를 먼저 설명해야 했다. 이 방에서 밤바람을 쐰다고 둘러대기에는 신발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폐하.”레일라는 전송석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이 야밤에 창틀을 넘어가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칼릭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폐하.”“바람이라?”칼릭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외투에 신발까지 갖춰 신었더구나. 창밖에서 누구를 만나려 했지?”“혼자 있었습니다.”“그걸 묻지 않았다. 내 눈을 보아라.”레일라는 전송석을 쥔 손을 창틀 아래로 내렸다. 그가 이름을 의심하는 동안 물건까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칼릭스의 시선은 이미 외투 앞섶을 훑고 있었다.칼릭스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레일라의 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는 동안, 전송석을 감춘 소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눌렸다.“대답해라. 너는 누구지?”“……폐, 하…… 쿨럭!”“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폐하의…… 정인입니다……!”“정인? 뻔뻔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등등하게 희번덕거렸다.“네 잿빛 머리칼, 서늘한 녹안……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과 닮았기에 눈이 멀었다.”“폐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입 닥쳐라! 방금 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 속에서, 내 첫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그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가 아니었다! 결코 레일라 에스테르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칼릭스의 포효가 침전을 뒤흔들었다.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손아귀.“말해라! 짐의 눈을 멀게 하고 내 침소로 기어든 네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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