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접견실의 대리석 바닥을 적셨던 핏자국은 하룻밤 사이에 말끔히 지워졌다.
문짝을 바꾸는 장인들도 목소리를 낮췄다. 접견실 앞을 지나는 시종들은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헤센 후작가의 가신이 손목이 으스러진 채 끌려 나간 사건은 삽시간에 궁정 귀족들에게 번져나갔다.
이제 레일라 앞에서 천한 시녀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시녀들은 눈을 피했고, 복도에서 마주친 시종들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레일라는 비어 있는 길을 서둘러 지나갔다.
‘나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야. 저 사람 때문이지.’
레일라는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기둥 아래 은밀한 홈을 열었다.
칼릭스가 매일같이 안겨주는 진상품들. 피비린내 나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에 꽂아주던 보석들이 그곳에 가득했다.
레일라는 크고 눈에 띄는 장신구는 손대지 않았다. 황실 문양이 각인된 물건은 장물아비조차 받지 못한다.
대신 그녀가 모은 것은 각인이 없는 최상급 무색 다이아몬드 나석 3알, 핏빛이 옅은 작은 루비, 그리고 제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무기명 금표 10장이었다.
금표 한 장당 100만 류트. 제국 남부의 소도시에서 작은 저택과 농장을 사고도 평생을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황제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이 돈을 들고 국경을 넘어야 해.’
레일라는 얇은 가죽 주머니에 보석과 금표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낡은 하녀복 치맛단 안쪽에 바늘로 꿰매 단단히 숨겼다.
바늘이 옷감을 뚫을 때마다 손끝에 섬유가 걸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레일라는 주머니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안쪽 솔기를 따라 눌렀다. 겉에서 보이는 주름을 펴고 다시 접어보았다.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와 하녀복을 입고 있을 때, 같은 물건도 몸에 닿는 자리가 달랐다.
보석을 한꺼번에 움켜쥐면 작은 마찰음이 났다. 그녀는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감싸 그 소리가 얼마나 멀리 들릴지 가늠했다. 지금 모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문지기 앞에서 옷자락을 들추는 순간에는 종이와 돌덩이일 뿐이었다. 바느질이 끝나자 실밥부터 안쪽으로 숨겼다.
돈이 준비되었다면 다음은 탈출로였다.
오후가 되자, 침소로 약초와 향유를 납품하는 하급 시종 길렌이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왔다.
길렌은 며칠 전부터 문지방 밖에서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자였다.
“……마님께서 부르신 라벤더 오일입니다.”
레일라는 차가운 눈으로 문밖의 동태를 살핀 뒤, 길렌의 손바닥 위에 금화 5닢을 묵직하게 쥐여주었다.
길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 마님? 이건…….”
“네가 지난달부터 수도 외곽의 투견장에서 거액의 도박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레일라는 문에 가까이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시녀로 일할 때 약재 꾸러미를 함께 나른 적이 있었다. 장부보다 가벼운 짐, 보급소 문밖까지 찾아오던 투견장의 심부름꾼. 길렌이 잊고 싶을 일들이었다.
“황실 보급품 장부를 조작해 약재를 빼돌린 것도. 근위대에 이 사실이 들어가면 넌 오늘 저녁으로 황궁 성벽에 매달리게 되겠지.”
길렌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손을 모아 빌었다.
“살려주십시오, 마님! 제발 목숨만은……!”
“살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일을 해.”
레일라는 길렌의 턱을 차갑게 들어 올렸다.
“약재를 팔 때 ‘회색 까마귀’를 통했지? 그쪽에 전갈을 넣어.”
“그, 그것은…….”
“그자들에게 전해. 남부 자유도시 연합으로 넘어갈 수 있는 완벽한 위조 신분증 2장, 그리고 국경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할 마차 편을 마련하라고.”
레일라는 금화 주머니 하나를 더 던져주었다.
“환전 수수료는 15% 이상 주지 않겠다고 못 박아. 허튼짓을 하거나 황궁 경비대에 밀고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네놈의 입이 열리기 전에, 폐하의 검이 네 목을 먼저 벨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준비해 놓겠습니다!”
길렌은 금화를 놓칠 듯 움켜쥔 채 기어가듯 물러났다.
길렌이 나간 자리에서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레일라는 금화를 건넸던 손을 드레스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겁을 먹은 것은 분명했지만, 두려움만으로 사람의 입을 닫아둘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보다 더 무서운 상대를 만나면 그자는 같은 얼굴로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을 터였다.
그래도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었다. 침전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황제의 기억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셈이었다. 그녀는 길렌에게 했던 요구를 하나씩 되짚었다. 신분증과 마차, 그 두 가지가 제 손에 들어올 때까지는 그의 눈치를 더 살펴야 했다.
레일라는 빈 금화 주머니를 접어 숨겼다. 길렌이 가져올 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경비가 바뀌는 시각은 직접 살펴야 했다.
그날 밤.
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두드렸다.
정무를 마친 칼릭스가 충혈된 눈으로 침소를 둘러보았다.
“……레일라.”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신음처럼 젖어 있었다.
칼릭스는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침대 곁에 앉아 있던 레일라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지독한 두통과 주술 독의 반동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살갗을 델 듯 뜨거웠다.
쿵.
제국의 지배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레일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구나.”
큰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레일라의 얇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도륙당한 자들의 비명이 귓가를 찢어.”
레일라는 무릎에 닿은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목덜미가 드러나 있었다. 손이 저도 모르게 비녀로 향했다.
지금 뽑아 찌르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 고개만 조금 더 숙이면 닿을 거리였다.
레일라는 비녀에서 손을 뗐다. 무릎 위 남자의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저 얼굴에서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겹쳐졌다. 가엾다고 느낀 짧은 순간이 들키기라도 한 듯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지금 그를 찌른들 이 침전에서 살아 나갈 수는 없었다. 레일라는 그렇게 되뇌며 헝클어진 흑발을 쓸어넘겼다. 칼릭스가 손길을 따라 무릎에 더 기대었다. 칼을 들던 사람의 무게가 고스란히 맡겨지자, 비녀를 쥐었을 때보다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쉬이…… 괜찮습니다, 폐하.”
귓가에 닿는 레일라의 다정한 음성에, 경련하듯 떨리던 칼릭스의 어깨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금은 방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제 말만 들으세요. 숨부터 천천히 쉬시고요.”
칼릭스는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만이 내 안식이다, 레일라.”
위태로운 평온이 찾아온 듯했다.
무릎 위로 전해지는 숨이 한결 길어졌다. 레일라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시 넘겨주었다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달래는 시늉은 이미 끝났는데도 손이 한 번 더 움직였다. 그녀는 머리칼 위에서 손끝을 멈췄다. 내일 챙겨야 할 마차를 생각하려 했으나, 무릎에 닿은 숨이 자꾸 셈을 흐트러뜨렸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는 순간, 칼릭스가 손목을 붙잡았다.
“앗……!”
갑자기 힘이 실려 손가락이 저렸다. 레일라는 비명을 삼키고 붙잡힌 팔을 그의 손 쪽으로 조금 내주었다. 억지로 빼내려다 더 아파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손아귀는 느슨해지지 않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칼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통증으로 감겨 있던 눈이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레일라는 머리를 쓸어주던 다른 손까지 멈췄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아픈 곳이 생긴 건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본 건지. 먼저 물었다가 의심을 살까 봐 그의 말을 기다렸다.
“……폐, 폐하?”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일라는 놓이지 않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그와 눈을 맞췄다.
“레일라.”
“……예, 폐하.”
“문득 생각이 났는데.”
칼릭스의 엄지손가락이 레일라의 떨리는 손목 안쪽 맥박을 지그시 눌렀다. 쿵, 쿵, 미친 듯이 날뛰는 맥박이 고스란히 그의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그의 붉은 입술 끝이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우리가 처음 입 맞추었던 그날 밤.”
공기가 얼어붙었다.
“온실에 피어 있던 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나?”
쿵.
레일라는 벌어지려는 입술을 다물었다. 놀란 티부터 지워야 했다.
온실? 첫 입맞춤?
그런 기억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칼릭스와 온실에서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진짜 정인의 기억 파편인가, 아니면 거짓말쟁이를 솎아내기 위한 잔혹한 덫인가.
대답 하나에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침묵 속에서, 칼릭스의 붉은 눈이 그녀의 동공을 집요하게 꿰뚫고 있었다.
“간밤에 누구와 밀담을 나누었지?”레일라는 숨을 멈췄다. 칼릭스의 질문은 방금 발렌에게 내린 명령보다 더 앞선 밤을 향해 있었다. 소매 안의 수정구가 손목에 닿았다.그가 팔을 풀고 앞으로 돌아서자 레일라는 주최권 패가 놓인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폐하.”“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뽑아 든 검으로 발치의 대리석을 툭 건드렸다.“밤에 통신을 나눈 자가 누구냐?”“연회의 안전을 위해 연락한 사람입니다.”“짐을 위한 자?”칼릭스의 눈매가 잔인하게 찌푸려졌다.“감히 짐의 침실에서 외간 사내와 전음을 나누고도, 짐을 위한 것이라 둘러대는 것이냐?”“둘러대는 것이 아닙니다.”레일라는 망설임 없이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내일 밤 열릴 피의 가면무도회, 그 연회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무도회의 안전이라?”“에스테르 가문의 옛 충복들을 통해 황도 외곽 불순 세력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불순 세력이라니? 대체 누구를 뜻하는 것이냐?”“황태후의 잔당들과 헤센 가문의 음모가 황궁 내부로 스며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황태후의 잔당들이 감히 내 궁전을 넘본단 말이냐?”“그들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고 정변을 일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내 기병대에 알리면 될 일이었다.”“그래서 발렌 경을 불렀습니다. 본대가 나가면 들킬 테니 별동대만 보내달라고 했고요.”칼릭스가 탁자 위의 패를 보았다. 레일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조금 옮겼다.“폐하께서 연회의 경호도 물어보라 하셨잖습니까. 제 손에 맡기신 일을 확인했을 뿐입니다.”“그래서 짐보다 먼저 명을 내렸다?”“지금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발렌 경이 돌아오면 제가 들은 말이 맞았는지도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정녕 그것이…… 네 진심이란 말이냐?”“제가 가져온 첩보부터 확인해 주십시오.”레일라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대신, 반지가 보이도록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발렌 경
- 공녀님! 지금 당장 탈출하셔야 합니다!수정구 너머로 들려오는 바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감별석이 황태후 쪽으로 넘어간 것은 확실한가요?”- 수장고에서 사라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놈들이 내일 밤 연회에 들여오려 합니다.레일라는 잠든 칼릭스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돌에 피를 떨어뜨리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그 빛을 본 뒤 그가 무엇을 물을지가 두려웠다.“핏줄이 확인되면, 원수의 딸이 왜 정인 행세를 했느냐고 묻겠군요.”- 돌이 공녀님의 마음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물음을 황태후가 먼저 꺼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그렇다면 감별석만 되찾는다고 끝날 일도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내일 밤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흑랑 기병대의 눈을 피해 탈출하셔야 합니다!“도망칠 수는 없어요, 바론 경.”- 공녀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잊으셨습니까?”레일라는 검붉은 흑요석 반지를 내려다보았다.“저를 감시하는 군사들이 붙어 있어요.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따라붙을 겁니다.”- 하오나 무도회에서는 공녀님이 설명하시기도 전에 황태후가 복수를 들먹일 것입니다!“그렇다면 도착하기 전에 가로채야죠.”- 가로채다니요? 암살대를 어찌 막는단 말씀입니까!“감별석의 이동 경로는 파악되었습니까?”- 서부 외곽의 버려진 풍차 방앗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황태후궁의 비밀 안전가옥이로군요.”- 예! 놈들은 그곳에 감별석을 숨겨두고 무도회 당일 들여올 계획입니다!“그렇다면 아직 황궁 외곽을 벗어나지 못했겠네요.”- 하오나 저희 가문 잔당들만으로는 그림자 까마귀의 정예를 뚫기 어렵습니다!“우리가 직접 뚫을 필요는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칼릭스가 제게 쥐여준 칼을 쓸 겁니다.”레일라의 시선이 협탁 위의 주최권 패로 향했다.‘피의 가면무도회’ 최고 주최권 패, 그리고 검지의 흑요석 반지.“제국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면 돼요.”- 설마…… 황제의 친위대를 움직이시
칼릭스가 벽에서 뽑아낸 검을 틀었다. 날이 발렌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가 레일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발렌.”“폐, 폐하……!”발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감히 짐의 정인을 붙들어 몸을 수색하려 했느냐?”“소, 송구하옵니다! 신은 다만 어의실 주변을 배회하는 자를……!”“그것이 네 혓바닥을 놀릴 이유가 된다 생각하느냐?”“살려주시옵소서! 국법에 따라 비상 경계령을 수행 중이었을 뿐입니다!”“짐의 말이 곧 국법이며, 내 정인의 발걸음이 곧 법도다.”칼릭스가 발렌의 이마를 장검 끝으로 지그시 짓눌렀다.“누가 네게 그따위 권한을 주었지? 헤센의 잔당이냐, 아니면 토옥의 황태후냐?”“아니옵니다! 오직 황실의 안위를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소매에 손을 대겠다고 했느냐. 다음에는 네 팔이 먼저 잘릴 것이다.”발렌이 이마를 바닥에 댔다. 레일라는 목덜미에서 흐른 피를 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망각초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내 정인이 약을 찾으면 어의에게 전해라. 네 판단으로 붙들지 말고.”칼릭스가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제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가자, 레일라. 이런 버러지들과 섞여 있을 곳이 아니다.”“……예, 폐하.”레일라는 숨을 죽인 채 칼릭스의 이끌림에 발걸음을 옮겼다.***깊은 밤, 황제의 침전.무거운 황금문이 닫히자, 칼릭스는 레일라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앉혔다.“손이 얼음장 같구나. 왜 이리 차가운 것이냐?”칼릭스가 레일라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며 입김을 불어넣었다.“침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차서 그렇습니다.”“발렌 때문에 아직 놀란 것이냐?”“……폐하.”“왜 짐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어의실로 향했지?”“그것은…….”“짐의 두통 때문에 탕약을 구하러 갔던 것이 아니더냐?”“……예?”레일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칼릭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레일라의 뺨을 쓸어내렸다.“어의
“북부 요새의 반란군 잔당 3,000명을 전원 효수하라.”황금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냉혹한 칙명.옥좌에 비스듬히 기댄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군단장들을 내려다보았다.“항복을 청하는 자들의 목숨을 구걸하러 왔느냐, 군단장?”“폐하, 북부 귀족 300가문이 무기를 버리고 자비를 청하고 있나이다!”“자비?”칼릭스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반역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다.”“폐하, 그들을 모두 베어내면 북부 국경의 방벽을 지탱할 영주들이……!”“입 닥쳐라! 짐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라 일렀을 텐데.”“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투항한 자들도 예외는 없다. 주모자의 목은 성벽에 걸고, 가담한 귀족들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하여 황실 직할령으로 귀속시켜라.”“존명! 황제 폐하의 영을 받들겠나이다!”붉은 망토를 두른 군단장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장막 뒤의 레일라는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만졌다. 간밤에 제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던 사람이 이제는 투항한 자들의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닐 터였다.어의가 말한 정제 완료까지 이틀이었다. 레일라는 바닥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군단장들을 보았다. 약을 늦추려다 발각되면 자신뿐 아니라 조제실 사람들에게도 저 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무엇을 건드려도 남의 목숨과 닿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정오가 지나 정무가 잦아든 시각.레일라는 영지 문서를 살피러 가겠다고 말하고 침전을 나왔다. 어의실로 길을 바꾼 뒤에는 황제의 두통에 쓸 차를 구하러 왔다고 했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확인하고 물러섰다.반지가 모든 질문까지 막아주지는 않았다. 뒤에서 출입 시각을 적는 소리가 났다. 레일라는 못 들은 척 지하 조제실로 내려갔다. 어의들이 약재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틈에, 청동 약탕관 곁의 조제 일지를 펼쳤다.- 1차 배합: 정화초 추출액 완료.- 2차 배합: 빙령수 증류 완료.- 최종 단계: 이틀 뒤 정제 완료
“내 첫사랑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는데.”창틀에 올린 레일라의 발이 멎었다.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소매 밖으로 나오려던 전송석을 다시 손안에 감췄다.칼릭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일라는 창틀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그의 걸음을 세었다. 첫사랑의 다른 이름을 들었다는 말보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를 먼저 설명해야 했다. 이 방에서 밤바람을 쐰다고 둘러대기에는 신발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폐하.”레일라는 전송석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이 야밤에 창틀을 넘어가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칼릭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폐하.”“바람이라?”칼릭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외투에 신발까지 갖춰 신었더구나. 창밖에서 누구를 만나려 했지?”“혼자 있었습니다.”“그걸 묻지 않았다. 내 눈을 보아라.”레일라는 전송석을 쥔 손을 창틀 아래로 내렸다. 그가 이름을 의심하는 동안 물건까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칼릭스의 시선은 이미 외투 앞섶을 훑고 있었다.칼릭스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레일라의 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는 동안, 전송석을 감춘 소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눌렸다.“대답해라. 너는 누구지?”“……폐, 하…… 쿨럭!”“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폐하의…… 정인입니다……!”“정인? 뻔뻔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등등하게 희번덕거렸다.“네 잿빛 머리칼, 서늘한 녹안……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과 닮았기에 눈이 멀었다.”“폐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입 닥쳐라! 방금 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 속에서, 내 첫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그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가 아니었다! 결코 레일라 에스테르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칼릭스의 포효가 침전을 뒤흔들었다.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손아귀.“말해라! 짐의 눈을 멀게 하고 내 침소로 기어든 네놈
“폐하의 의식과 기억을 옭아매던 주술 독의 잔맥이 드디어 잡혔습니다.”“정녕 사실인가, 수석 어의?”“배합은 잡았습니다. 마지막 정제를 마치면 투여할 수 있습니다.”“남방에서 공수해 온 성수와 희귀 약초의 배합이 끝났단 말인가?”“예. 사흘 뒤면 정제를 마칠 수 있습니다. 먼저 의식을 흐리는 여독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묻힌 기억이 얼마나 돌아올지는 그 뒤에 살펴야 합니다.”어의실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있던 레일라는 소매를 움켜쥐었다.‘사흘.’어의는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인이 아니었다는 기억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처지가 뒤집힐 수 있었다. 바론이 준비하는 탈출로와 마차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기다려도 되는지 더는 자신할 수 없었다.어의실 안에서는 약탕을 옮기는 기척이 이어졌다. 레일라는 그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린 뒤 벽에서 몸을 떼었다. 어제는 투여 일자를 모른다는 말에 아직 여유가 있을 거라 기대했다. 이제 직접 들은 사흘 안에, 끝나지 않은 준비까지 마쳐야 했다.계획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탓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기억이 돌아온 뒤 사정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녀가 내민 증거와 그를 살핀 밤은 사실이었지만, 정인이었다는 말까지 사실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레일라는 복도 끝을 보고 어느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골랐다.‘오늘 밤이다.’오늘 밤, 황제가 깊은 잠에 빠진 틈을 타 황궁 서문 지하 수로를 통해 국경으로 내달려야만 했다.***달빛이 은빛 비늘처럼 부서져 내리는 밤.황실 정원 최상층, 백옥으로 깎아 만든 테라스 난간 너머로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스륵-묵직한 온기가 뒤편에서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칼릭스였다.흑발을 쓸어 넘긴 황제는 레일라의 목덜미에 깊게 숨을 묻었다.“밤공기가 차다, 레일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레일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어깨는 따뜻합니다. 다만 조금만 느슨하게 안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