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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살아남은 기사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3:11:19

바스락.

타다 남은 작은 양피지 조각이 레일라의 손끝에서 부서졌다.

‘오늘 밤 자정, 제3 밀수 수로 창고.’

레일라는 재가 묻은 손끝을 털었다. 창고의 위치와 약속 시각을 되짚었다. 협박장을 없애도, 자정까지 가야 한다는 조건은 남았다.

황궁의 비밀 통로를 쥐고 흔드는 암시장 상단 ‘회색 까마귀’.

그들은 길렌을 통해 정인이 황궁을 떠나려 한다는 것과 금표의 수를 알아냈다. 이름까지 확인했는지는 만나봐야 알 수 있었다.

“마님, 황실 보물창고에서 보낸 하사품 목록입니다.”

시녀장이 허리를 굽히며 황금빛 양피지 문서를 내밀었다.

침전 앞마당에는 60개의 자개 궤짝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남해의 거대 흑진주 목걸이, 은실로 짠 드레스, 그리고 핏빛보다 붉은 루비 티아라.

며칠 전 헤센 후작가의 가신을 짓밟았던 칼릭스가, 오늘 전속 정부로 공식 책봉한 레일라에게 쏟아부은 선물들이었다.

“모두 창고에 넣어두어라.”

레일라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낮게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의 철갑 근위대에 닿아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를 지키겠다며 호위 기사를 두 배로 늘렸다. 경비가 바뀔 때도 누군가는 침전 문 앞에 남았다.

‘자정에는 나가야 해.’

레일라는 순찰 일지를 되짚었다. 교대 시간, 북쪽 회랑에서 서편 수로로 이어지는 길에는 15분의 틈이 있었다. 그 안에 회랑을 벗어나야 했다. 돌아오는 길은 순찰이 지나간 뒤 다시 살펴야 했다.

창밖에서 갑옷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레일라는 그 소리가 멀어지는 방향을 따라 눈을 옮겼다. 순찰 일지의 빈틈을 알고 있는 것과 그 길을 실제로 걷는 것은 달랐다. 귀환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야 했고, 중간에서 발각되면 오던 길로 뛰어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손톱을 소파의 천에 눌렀다. 약속된 창고까지 갈 수 있더라도 상대가 돈만 빼앗으면 끝이었다. 그러나 협박장을 받아든 뒤에는 가지 않는 쪽의 위험도 똑같이 선명해졌다. 황제의 정무가 끝나기 전에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탈출할 생각을 얼굴에 드러낸 채 그를 맞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침전 접견실의 황동문이 거칠게 울렸다.

황제의 묵인 없이는 감히 다가올 수 없는 구역에, 무례한 발소리가 들이닥쳤다.

“황태후 마마의 내명부 감찰 칙령이다! 문을 열어라!”

날카롭고 앙칼진 음성이 복도를 갈랐다.

시녀들이 사색이 되어 문을 열자, 보라색 비단옷을 입은 늙은 상궁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들어섰다.

황태후의 심복이자 내명부 수석 상궁, 베르타였다.

그녀의 뒤로 황태후궁의 사병 10명이 번쩍이는 창을 쥐고 도열했다.

“황제 폐하의 환후가 온전치 못한 틈을 타, 근본 없는 천출 시녀가 국고를 탕진하고 황실의 기강을 어지럽힌다는 고변이 있었다.”

베르타 상궁의 매서운 눈빛이 레일라를 쏘아보았다.

“당장 요부의 옷을 벗기고 내명부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여 친국을 진행하라는 황태후 마마의 하명이시다!”

시녀들이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헤센 후작가와 결탁한 황태후 세력이 황제가 정무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기습을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일라는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녹색 눈으로 베르타를 올려다보았다.

“황태후 마마의 상궁이라 하여 국법을 우습게 아는 모양이군요.”

“무어라? 이 발칙한 년이 어디서 주둥이를 놀리느냐!”

“황실 법전 제4조 2항.”

레일라의 입에서 법조문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황제의 침전과 그 부속 접견실은 황제 1인의 절대 주권 지역이며, 황제의 친필 윤허가 없는 자의 무단 침입은 내란에 준하는 반역으로 다스린다.’”

베르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태후의 칙령이라 한들, 황제의 친필 윤허장 없이 사병을 대동해 침전을 짓밟은 순간, 귀하는 지금 황제를 사칭하고 황권을 찬탈하려 한 대역죄인입니다.”

레일라는 찻잔에서 손을 떼고 문가의 시종을 보았다.

“윤허장이 없다는 말을 근위대에 전해. 내 반지를 보았다고 해도 좋아.”

베르타가 시종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 레일라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조문만으로 저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사람에게 이 소란이 전해질 때까지 버텨야 했다.

일개 침소 시녀의 입에서 황실 고위 관료나 욀 법한 법전이 튀어나오자 상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 년이 요망한 세 치 혀로……! 당장 묶어라! 황태후 마마의 권위에 불복하는 년이다!”

베르타가 삿대질을 하며 사병들에게 소리쳤다.

사병들이 쇠사슬을 들고 다가왔다. 레일라는 탁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접견실 벽면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먼지 사이로 칼릭스가 들어왔다. 끌리는 장검 끝이 대리석을 긁었다.

“누가 짐의 침전에서 짖어대는가.”

“폐, 폐하……!”

베르타 상궁과 사병들이 경악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칼릭스의 붉은 눈은 오직 레일라를 향해 뻗어 있던 베르타의 손가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릉-!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꺄아아악!”

베르타의 치맛자락이 단칼에 찢겨 나가며 피가 튀었다.

“짐의 정인에게 손가락질을 해?”

칼릭스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베르타를 내려다보았다.

“황태후의 개라 하여 목숨이 두 개인 줄 아는가 보군.”

“폐하! 살려주십시오! 황태후 마마의 명을……!”

“그 늙은 여우에게 전해라.”

칼릭스가 베르타의 턱을 군화 끝으로 짓밟아 쳐올렸다.

“내 정인을 건드리는 자는, 그게 황태후든 제국의 귀족이든 모조리 가죽을 벗겨 성벽에 내걸 것이라고.”

공포에 질린 베르타 상궁은 피를 흘리며 기어서 도망쳤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칼릭스가 옷자락에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레일라의 어깨를 잡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다치지 않았느냐, 레일라.”

“내가…… 늦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폐하. 괜찮습니다.”

레일라는 그의 품에 안겨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황태후와 헤센 가문의 칼날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밤, 반드시 탈출로를 확보해야 한다.

그가 등을 감싼 채 놓지 않아 레일라는 고개만 돌려 창을 보았다. 낮의 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밤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품 안에서는 안도한 여인의 표정을 유지했다.

***

깊은 밤, 자정.

통증을 가라앉히는 탕약을 마신 칼릭스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레일라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팔을 빼낼 때는 그의 손가락이 이불을 움켜쥐지 않는지 먼저 살폈다. 침대에서 발을 내리자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레일라는 허리를 굽힌 채 잠시 멈추었다. 잠든 남자의 숨이 끊기거나 빨라지는 기척은 없었다.

익숙한 하녀복을 꺼내 들었지만 마음까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오늘 낮 옷을 벗기라는 명령을 들었고, 지금은 그 옷만이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가려줄 수 있었다. 두건의 매듭부터 풀어놓은 뒤 소매를 펼쳤다. 갈아입으면 손끝의 떨림을 가릴 만큼 깊게 내릴 생각이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벗고 낡은 하녀복으로 갈아입은 뒤, 은닉해 둔 다이아몬드 나석 3알과 금표 10장을 가슴팍에 단단히 숨겼다.

달빛이 구름에 가린 틈을 타, 그녀는 서편 정원의 무너진 회랑을 따라 기어가듯 움직였다.

순찰대가 지나가는 찰나의 사각지대.

레일라는 황궁 북서쪽 깊숙이 숨겨진 제3 밀수 수로 창고의 썩은 나무문을 밀었다.

끼이익-

먼지와 곰팡내 가득한 어둠.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칼날이 턱 밑을 파고들었다.

“움직이지 마라.”

낮고 거친 사내의 음성.

“황제의 총희께서 이런 시궁창까지 납시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레일라는 숨을 멈추었다. 칼날이 닿은 턱은 굳힌 채, 눈동자만 옆으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후드를 쓴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가 후드를 벗어 던지며 차가운 달빛 아래 얼굴을 드러낸 순간.

“……!”

레일라의 녹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뺨의 흉터 아래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턱 밑에 겨누었던 단검에는 옛 공작가 기사단의 은빛 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3년 전 가문이 도륙당하던 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던 에스테르 공작가의 수석 호위 기사.

“……케일런 경?”

레일라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믿을 수 없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손에서 칼날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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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멸문시킨 폭군의 정인이 되었다   26화. 반지가 여는 문

    “내 첫사랑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는데.”창틀에 올린 레일라의 발이 멎었다.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소매 밖으로 나오려던 전송석을 다시 손안에 감췄다.칼릭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일라는 창틀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그의 걸음을 세었다. 첫사랑의 다른 이름을 들었다는 말보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를 먼저 설명해야 했다. 이 방에서 밤바람을 쐰다고 둘러대기에는 신발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폐하.”레일라는 전송석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이 야밤에 창틀을 넘어가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칼릭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폐하.”“바람이라?”칼릭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외투에 신발까지 갖춰 신었더구나. 창밖에서 누구를 만나려 했지?”“혼자 있었습니다.”“그걸 묻지 않았다. 내 눈을 보아라.”레일라는 전송석을 쥔 손을 창틀 아래로 내렸다. 그가 이름을 의심하는 동안 물건까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칼릭스의 시선은 이미 외투 앞섶을 훑고 있었다.칼릭스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레일라의 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는 동안, 전송석을 감춘 소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눌렸다.“대답해라. 너는 누구지?”“……폐, 하…… 쿨럭!”“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폐하의…… 정인입니다……!”“정인? 뻔뻔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등등하게 희번덕거렸다.“네 잿빛 머리칼, 서늘한 녹안……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과 닮았기에 눈이 멀었다.”“폐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입 닥쳐라! 방금 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 속에서, 내 첫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그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가 아니었다! 결코 레일라 에스테르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칼릭스의 포효가 침전을 뒤흔들었다.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손아귀.“말해라! 짐의 눈을 멀게 하고 내 침소로 기어든 네놈

  • 나를 멸문시킨 폭군의 정인이 되었다   25화. 첫사랑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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