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엘로이즈는 루체의 낡은 회색 원피스를 입고 후문을 빠져나왔다.
보석도, 가문의 문장도 없었다. 머리는 빛바랜 천으로 감쌌고 손에는 세탁물 바구니를 들었다.
마차를 쓰지 않은 탓에 성 베르나 구호원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뛰다시피 걷는 동안에도 잘린 목의 환상통이 몇 번이나 되살아났다.
엘로이즈는 멈추지 않았다.
구호원 뒤편 세탁문은 잠겨 있었다.
루체가 두 번, 한 번, 다시 두 번 문을 두드렸다. 에버하르트가가 비상시에 쓰는 신호였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누구…… 영애님?”
마리엘이 두 사람을 급히 안으로 끌어들였다.
엘로이즈는 천에 감싼 장갑부터 내밀었다.
마리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렌의 장갑입니다.”
“어디에서…….”
“뒤편 수로에서 발견됐어요. 레아는 어디 있죠?”
“한 시간 전 신전 부제가 왔습니다. 점검 전에 몸을 씻겨야 한다며 의무실로 데려갔어요. 정식 명령서가 있어서 막지 못했습니다.”
이미 시작됐다.
엘로이즈는 곧장 복도 끝으로 향했다.
“영애님, 의무실 앞에는 신전 사람이 지키고 있습니다.”
“정문으로는 가지 않아요.”
전생의 엘로이즈는 황후가 된 뒤 이 구호원의 보수 장부를 직접 검토했다. 의무실 뒤에는 전쟁 중 환자를 옮기던 좁은 세탁 통로가 있었다.
“삼 분 뒤 주방의 비상종을 울리세요. 보일러가 터졌다고 하고, 아이들은 동쪽 마당으로 대피시키십시오.”
“레아는요?”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마리엘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들키시면 황실까지 문제 삼을 겁니다.”
“그 아이를 넘기면 오늘 밤부터는 문제 삼을 사람조차 남지 않아요.”
낡은 통로는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큼 좁았다. 먼지와 습기가 목을 조였지만 엘로이즈는 기억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판 너머로 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싫어요. 원장님한테 갈래요.”
엘로이즈가 판자를 밀었다.
침대 위에는 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신전이 새긴 붉은 표식이 남아 있었다.
레아였다.
전생에서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던 아이가 눈앞에서 울고 있었다.
“레아.”
아이가 젖은 눈을 들었다.
“누구세요?”
멀리서 비상종이 울렸다. 의무실 문밖을 지키던 젊은 부제의 발소리가 급히 멀어졌다.
엘로이즈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리엘 원장님이 보냈어. 여기서 나가자.”
“신전 아저씨들이 엄마를 만나게 해 준댔어요.”
“그 사람들은 네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몰라.”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엘로이즈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디로 끌려가는지는 알아.”
잠시 망설이던 레아가 작은 손을 올렸다.
세 사람은 세탁 통로를 빠져나와 후문으로 향했다.
출구까지 열 걸음도 남지 않았을 때, 골목에서 말 울음소리가 터졌다.
은빛 태양 문장이 새겨진 검은 마차가 후문을 막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기다리던 사제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손짓하자 신전 호위 둘이 골목 양쪽을 막아섰다.
사제의 시선이 레아의 손목에 새겨진 붉은 표식에 멎었다.
“그 아이는 오늘 신전으로 인계될 보호 대상이다.”
그는 레아를 등 뒤로 숨긴 엘로이즈를 위아래로 훑었다.
“구호원 명부에는 없는 얼굴이군.”
지팡이 끝이 엘로이즈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잡일꾼 따위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아이에게서 손을 떼라.”
엘로이즈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제는 지팡이를 거두지 않은 채 낡은 천 아래 드러난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군.”
그의 시선이 곧게 편 허리와 흐트러짐 없는 발음에 차례로 머물렀다.
“구호원의 잡일꾼이 신전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드는 법부터 배웠나?”
레아의 손이 공포에 질려 엘로이즈의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사제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그 얼굴을 가린 천부터 벗겨라.”
호위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이와 함께 신전으로 데려가 조사하겠다.”
엘로이즈는 레아를 더욱 깊이 등 뒤로 감쌌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아동 유괴와 신전 명령 방해죄로 처리하겠다.”
호위들의 손이 동시에 검 손잡이에 올라갔다.
사제가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그 아이를 넘겨라.”
십 년치 보수 장부에는 벽이 없었다.엘로이즈는 같은 페이지를 세 번째로 넘겼다.지붕 교체.봉화대 난간 보강.빗물 배수로 정비.동쪽 외벽 균열 보수.제7 신호탑에 들어간 공사비는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지하층은 없었다.회반죽도.통로를 막은 기록도.“장부 밖에서 작업했다는 뜻이겠군요.”기술관이 말했다.“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비용을 처리했거나요.”엘로이즈는 장부를 덮었다.그날 저녁 카시안에게 짧은 전언을 보냈다.〈최근 십 년간 공식 보수 기록에는 지하층 공사가 없습니다. 회반죽 구매 내역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이번에도 마지막에 덧붙였다.〈아직 벽은 열지 않았습니다.〉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그러나 내용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수선비가 아니라 소모품을 찾아봐. ‘겨울 열병 대비 소독용 석회.’〉엘로이즈의 시선이 문구 위에서 멈췄다.소독용 석회.가능한 위장이었다.하지만 카시안은 가능성을 말하지 않았다.항목의 이름을 말했다.다음 날 엘로이즈는 보수 장부 대신 제7 신호탑의 외부 반입 물품 기록을 요청했다.십 년치였다.곡물.기름.장작.등잔 심지.약품.몇 권을 넘긴 끝에 손이 멈췄다.사 년 전 겨울.〈겨울 열병 대비 소독용 석회, 열여덟 통.〉문구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공급처는 군부가 아니었다.〈황후궁 구휼청 기부 물품.〉수령지는 제7 신호
카시안은 약혼 계약서의 마지막 장을 가장 늦게 읽었다.엘로이즈 에버하르트.로웬 카르시온.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재산 분리.각 가문의 지휘권 독립.작위와 영지에 대한 상호 청구권 없음.혼인 후에도 엘로이즈는 에버하르트의 이름과 상속권을 유지한다.그리고 마지막 조항.〈본 약혼은 당사자 양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체결되며, 황실을 포함한 제3자는 일방적으로 이를 변경하거나 해지할 수 없다.〉카시안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계약이었다.그때 엘로이즈의 혼인은 선택이 아니라 결정이었다.자신과 황실이 내린 결정.이번에는 달랐다.그녀는 자신이 들어갈 혼인의 문까지 직접 만들고 있었다.“문제가 있습니까?”맞은편의 로웬이 물었다.카시안은 계약서를 내려놓았다.“없다.”오늘은 정식 약혼 등록일이었다.사교계에 떠도는 구두 약속도, 시험적인 구혼도 아니었다.제국 귀족원과 북부 자치공국 양측 기록에 남는 공식 계약.서명만 끝나면 엘로이즈는 법적으로 카르시온 공자의 약혼자가 된다.귀족원 서기관이 계약서를 가져가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황후궁의 법무관이었다.“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그는 별도의 문서를 내밀었다.“황후 폐하께서 계약 형식에 우려를 표하셨습니다.”엘로이즈가 물었다.“어느 조항입니까?”“제3자의 변경권을 전면 부정한 부분입니다.”법무관은 카시안을 향해 예
군사기록원의 지도는 신전 기록보다 훨씬 정직했다.무엇이 옳았는지는 적지 않았다.대신 무엇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남아 있었다.엘로이즈는 건국 초기 수도권 방어망 지도와 삼십칠 년 전의 시설 변경도를 나란히 펼쳤다.붉은 점은 봉화탑.푸른 점은 폐기된 신전 시설.하나.둘.셋.점을 겹쳐 갈수록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워졌다.열두 보조 공명소 가운데 여덟 곳이 훗날 군사 신호탑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카시안의 추측이 맞았다.하지만 엘로이즈는 거기서 멈췄다.“건설 기록도 보여 주세요.”기록관이 두꺼운 문서철을 가져왔다.대부분은 예상대로였다.〈기존 신전 시설 철거 후 신축.〉〈지반 정리 완료.〉〈하부 구조 매몰.〉하나씩 지워 나가던 엘로이즈의 손이 일곱 번째 기록에서 멈췄다.제7 신호탑.건설 시점은 보조 공명소 폐기 바로 다음 해.그런데 철거 항목이 없었다.대신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기존 하부 기단 재사용.〉엘로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이 기단이 어느 시설의 것인지 기록돼 있습니까?”기록관이 부속 도면을 찾았다.누렇게 바랜 종이가 펼쳐졌다.신호탑 아래에 현재 구조보다 훨씬 넓은 원형 공간이 그려져 있었다.출입구는 폐쇄.지하 통로는 매몰.용도란에는 단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구식.〉“보조 공명소였군요.”기록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정황상은 그렇습니다.”
엘로이즈가 황태자궁을 찾은 것은 사흘 만이었다.카시안은 집무실 안쪽에 앉아 있었다.감사 기간 동안 북문 경비대 지휘권도, 비상 통행증 열람권도 정지된 상태였다.평소라면 부관들의 발소리와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로 끊임없이 움직였을 공간이었다.지금은 달랐다.사람도, 명령서도 거의 사라진 집무실에는 기묘할 만큼 깊은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탁자 위에는 군사 보고서 대신 오래된 제국 지도만 놓여 있었다.엘로이즈가 서류 한 묶음을 내려놓았다.“대신전에서 찾은 기록입니다.”카시안의 시선이 종이로 향했다.그러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봐도 되나?”엘로이즈가 잠시 그를 바라봤다.전생의 그는 허락을 묻지 않았다.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가져갔다.이번에는 종이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기다리고 있었다.“보세요.”그제야 카시안이 첫 장을 펼쳤다.열두 개의 보조 공명소.마흔여덟 명의 참여자.중앙 제물 없음.초기 출력 91퍼센트.동시율 94퍼센트.그리고 연쇄 붕괴.카시안은 끝까지 읽은 뒤 말했다.“실패한 이유가 힘 부족은 아니군.”“예.”“균형을 맞추지 못했다.”엘로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한 사람이 빠지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몰렸습니다. 결국 약한 곳부터 무너졌고요.”“그럼 사람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카시안은 해결책을 말하지 않았다.명령도 내리지 않았다.대신 물었다.“나한테 무엇을 원하는 거지?”엘로이즈는 그 질문이 조금 낯설었다.예전의 카시안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먼저 정했을 것이다.“군에서 여러 지점을 동시에 움직일 때 사용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신호 체계?”“정확히는 오차를 줄이는 방법이요.”카시안의 눈빛이 변했다.그는 옆에 펼쳐 둔 제국 지도를 끌어왔다.“북부 방어선에는 오래된 봉화망이 있다. 각 탑이 자기 판단으로 불을 올리지 않아.”“그럼요?”“중앙 신호를 받아 같은 간격으로 전달한다. 하나가 늦으면 다음 탑이 그 지연을 보정하고
엘로이즈는 보조 공명소의 위치보다 먼저 폐기 기록을 요구했다.“어디 있었는지보다 왜 실패했는지가 중요합니다.”관리 사제는 난색을 보였다.“유지 기록 열람 범위를 벗어납니다.”“그럼 이 방식이 정말 실패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겠군요.”엘로이즈가 열람증을 내려놓았다.“‘비효율적이었다’는 신전의 결론만 믿으라는 뜻이니까.”침묵 끝에 세라피나가 말했다.“폐기 심의록까지 열어 주세요.”관리 사제가 놀라 돌아봤다.“성녀님, 거기에는 사고 기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알아요.”“대신전의 책임 문제도—”“그래서 봐야죠.”세라피나는 엘로이즈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틀렸다는 증거만 찾으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잠시 후 두꺼운 회색 장부 하나가 탁자에 놓였다.삼십칠 년 전.열두 보조 공명소 마지막 동시 가동 시험.엘로이즈는 첫 장부터 숫자를 따라갔다.공명소 열둘.참여자 마흔여덟 명.중앙 제물 없음.결계 출력 91퍼센트.그녀의 손이 멈췄다.“91퍼센트.”현재 결계의 정상 유지선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처음 두 시간 동안은 그랬습니다.”세라피나가 말했다.엘로이즈는 다음 장을 넘겼다.제3 공명소 출력 저하.제7 공명소 지연.제11 공명소 참여
세라피나는 엘로이즈가 기도실을 떠나기 직전 한 가지를 더 내놓았다.“방법을 찾겠다면, 적어도 무엇을 바꾸려는지는 알아야겠죠.”그녀가 건넨 것은 대신전 지하 기록고의 임시 열람증이었다.허용 범위는 아스트라 결계의 유지 기록.최근 십 년간의 제물 명단은 제외.성물 제작법도 제외.핵심 의식문 역시 제외되어 있었다.엘로이즈는 열람증을 내려다봤다.“이 정도로 뭘 찾으라는 겁니까?”“제가 허락할 수 있는 한계예요.”“성녀께서도 결국 신전 사람이군요.”“그래서 제가 틀렸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신전의 문을 열어 주고 있잖아요.”엘로이즈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정도면 충분했다.지하 기록고에는 오래된 양피지 냄새와 축축한 돌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결계 유지 기록은 숫자로 가득했다.공명률.신성력 소모량.정화 범위.보강 주기.엘로이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대신 숫자의 흐름을 읽었다.현재 방식은 단순했다.중앙의 강한 공명체 하나에 부담을 집중한다.공명도가 높을수록 효율이 오른다.87이라면 기존 여러 명의 부담을 한 사람에게 몰아도 결계가 유지된다.그래서 신전은 그것을 ‘개선’이라 불렀다.엘로이즈는 다음 장을 넘겼다.오 년.십 년.이십 년.기록을 거꾸로 올라갔다.그러다 건국 초기 보수 기록에서 낯선 항목을 발견했다.〈외곽 보조 공명소 제7기 출력 감소.〉그녀의 손이 멈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