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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너무 빨리 알아듣는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7 11:42:41

"앞으로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월령이 물었다. 위지헌의 손끝이 아주 작게 멈췄다. 그는 월령의 손을 놓았다. 조심스럽게.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처럼.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다음은요."

"사흘 동안 심가 안의 문을 잠그고, 밖에서 들어오는 글을 모두 나에게 보낸다."

말은 분명했다.

"한씨와 서윤은 떨어뜨려 두되, 서윤을 벌하지 마라. 겁먹은 아이는 몰리면 다시 잘못된 손을 잡는다."

월령의 눈이 흔들렸다.

"왕야께서도 그렇게 보셨습니까. 서윤이가 아직 돌아올 수 있다고요."

위지헌은 잠시 월령을 보았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깊어졌다.

"네가 그렇게 보고 있지 않느냐."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네 눈이 늘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사람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네가 버리지 않으려는 자는, 내가 한 번 더 본다."

월령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위지헌은 그런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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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6. 문상궁

    문상궁이 선 자리에는 늘 자녕궁의 냄새가 남았다.향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먹빛 소매에서도 머리에서도 향내가 나지 않았는데, 그가 지나간 마당에는 병풍 뒤 찻방에서 맡던 단내가 한참 머물렀다. 월령은 마루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 먹빛 소매가 먼저 보였고, 아무 기색 없는 얼굴이 보였고, 그 뒤에 선 궁인의 두 팔에 안긴 질그릇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손끝이 찼다. 별궁 마당 한가운데에서 문상궁이 월령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왕비마마. 이 별궁의 살림을 소인이 맡게 되었사옵니다. 자녕궁에서 정한 일이옵니다.""그렇습니까. 오래 몸이 불편하셨다 들었는데 이리 일어나셨군요.""한 달 반 문이 닫혀 있었으니 소인도 문 밖에서 몸이 굳었사옵니다. 풀리고 나니 맡은 일이 늘었고요."문상궁의 얼굴에는 아무 기색이 없었다. 월령은 이 얼굴을 열여섯 살에 처음 보았다. 그때도 이 사람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병풍 곁에서 손님의 잔을 세었다. 그 얼굴이 이 별궁 마당에서 같은 높이로 월령을 마주 보고 있었다. 등 뒤가 서늘했다. 겁이었고, 열여섯의 겁이 두 생을 건너 같은 얼굴 앞에서 났다.방어멈이 마루에서 빗자루를 든 채 끼어들었다."저, 상궁마마님. 이 별궁 부엌이 제 일터라서요. 살림을 맡으시는 건 좋은데 부엌 물건에 손 대시는 건 제게 먼저 일러 주시면 좋겠어요.""어멈의 부엌이니 어멈의 법을 따르겠사옵니다. 다만 소인은 살림을 보러 온 것이니 부엌부터 둘러보게 해 주시옵소서."방어멈이 입술을 삐죽였으나 길을 비켜 주었다.*별궁 부엌은 마당 뒤편의 낮은 흙벽 건물이었다.문상궁은 아궁이도 솥도 건드리지 않고 한쪽 구석의 물 항아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른 허리까지 오는 항아리였고, 뚜껑 위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그는 뒤따라온 궁인에게 눈짓했다. 궁인이 새 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한 번도 물이 담기지 않은 질그릇이었다."묵은 항아리는 치우고, 이것을 쓰시옵소서.""물을 새로 길어다 채워 주면 그만이지 항아리까지 바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5. 별궁

    조서는 아침 일찍 왕부 대문으로 들어왔다.국상 중 섭정왕비였던 사람은 곤원전 옛 별궁에서 근신한다는 열두 자였다. 숙비가 빈전 앞에서 흘린 말이 열흘을 돌아 종이가 되어 돌아왔다. 월령은 그것을 보았다. 흠 없는 글씨가 먼저 보였고, 별궁이라는 두 자가 보였고, 그 아래 찍힌 새 황제의 붉은 인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등 뒤가 얼었다. 전생에 이 두 자가 적힌 종이를 받던 날의 손이 돌아왔다.위지헌은 조서를 읽고 나서 마루 기둥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기대는 사람이 아니었다."내가 폐하께 가서 거두게 하겠다. 못 거두면 네가 문을 나서지 않아도 되게 하마.""안 거두셔도 돼요, 부군."월령은 봄의 저고리 끈을 매 주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가면 폐하께서 부군의 청을 들어주셔야 하는 자리에 서시고, 들어주지 않으시면 부군이 청한 것만 남아요. 저는 이 조서를 받는 쪽이 더 나아요.""별궁이다."위지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겹 낮았다.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이 이름이 월령에게 어떤 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을 어떻게 다룰지는 월령이 정할 일이었고, 그가 막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막지 않는 데 힘이 들었다. 오른손이 기둥을 쥐었다."압니다. 그래서 제가 갈래요. 부르러 오기 전에 제 발로요."방어멈이 짐 꾸러미를 든 채 마루 끝에서 혀를 찼다."아씨, 별궁이면 오래 비워 둔 데 아니에요? 먼지가 한 치는 앉았을 텐데 아기를 거기서 재우자고요.""어멈이 있으니 한 치는 사흘이면 치워.""사흘이 뭐예요. 이틀이에요."청아가 약 봉지를 안고 따라 나오며 눈을 크게 떴다."마마님, 저도 가요. 제가 안 가면 누가 마마님 차를 우려요."월령은 대답 대신 웃었다. 오랜만에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웃는데 가슴 밑바닥은 찼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전생과 다른 유일한 것이었고, 그 다른 것 하나로 가는 길이었다.*궁문 앞의 돌문턱까지 위지헌이 따라왔다.문턱을 넘으면 그는 종실 아우의 몸으로 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4. 종친부 앞마당

    종친부 앞마당의 돌에는 서리가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월령은 흰 상복 차림으로 그 한가운데에 섰다. 눈앞의 것을 차례로 보았다. 닫힌 대청 문이 먼저 보였고, 그 아래 서리가 녹지 않은 돌계단 다섯이 보였고, 문틈으로 새는 배중곤의 흰 두루마기 자락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의가 열리는 대청에는 여인이 들 수 없었으므로, 종실 여인이 청을 올리려면 마당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신발 밑창으로 찬 기운이 올라왔고, 대청 안에서는 배중곤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황제 생모 마마께 자녕태후의 호를 올리는 일은 선제의 은덕을 잇는 일이옵니다. 또한 황후 자리가 비어 막을 분이 계시지 않으니, 이의를 달 분도 없사옵니다."월령은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당에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로 소리를 냈다. 소리를 내기 전에 숨을 하나 삼켰다. 전생에 이 마당에서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소리였다."종실 여인 심월령이 청하옵니다."대청 안이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변영달이 문턱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왕비마마, 여인이 의를 막는 것은 법도에……""막는 것이 아닙니다. 청하는 것입니다. 편전에 선제께서 짐의 인으로 봉하신 명부가 있습니다. 책봉에 앞서 그것을 열어 종친부 앞에서 읽게 해 주십시오."변영달이 대청 안과 마당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위명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흰 상복의 매화 없는 소매가 계단 위에서 멈췄다. 그가 월령을 내려다보는 높이가 한 단 더 높았다.한 단.그 한 단이 전생의 용상 높이로 느껴졌다. 월령의 손끝이 찼다.*"숙모.""폐하. 신첩이 종친부 앞에서 청을 올린 죄를 물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숙모의 청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말씀하십시오."월령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듣고 어디서 닫을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두려웠고, 두려운 채로 말했다."선제의 명부 뒤쪽 스무 장이 책봉을 올리시는 분의 글씨입니다. 그 글씨를 보신 뒤에도 같은 호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3. 사병 삼백

    윤백의 보자기 속에서 쇠패 부딪는 소리가 났다.위지헌은 마루 위에서 마당을 보았다. 열을 맞춘 삼백의 어깨가 먼저 보였고, 그 어깨마다 앉은 서리를 아무도 털지 않는 것이 보였고, 맨 앞줄에 선 늙은 얼굴 몇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북영에서 함께 눈을 맞던 얼굴들이었다. 궁 내관이 셋째 조서를 펴 들었고, 위지헌은 그 곁에 흰 옷으로 서서 듣기만 했다."국상 중 도성 안에 사병을 두는 일을 금한다. 섭정왕부의 사병 삼백은 오늘 해산하고, 삯과 패는 호부가 거두어 셈한다."내관이 조서를 접고 물러서자 강무진이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손에 명단을 쥐고 있었다. 먹이 번질 만큼 여러 번 만진 종이였다. 밤새 만진 손이었다."내가 이름을 부르겠다. 부르면 나와서 패를 윤백에게 내고, 대문으로 나가라. 뒤돌아보면 나갈 때 눈이 시리니 돌아보지 마라.""강 나리는 돌아보셨습니까."맨 앞줄에서 누가 물었다. 강무진이 명단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나는 돌아본다. 그러니 너희는 하지 마라. 해동.""예.""차달.""예.""마보."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사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패를 윤백의 보자기에 놓았다. 쇠가 쇠에 닿는 소리가 점점 두꺼워졌다. 대문 밖으로 나가는 등이 하나 지나가면 바로 그다음 등이 서 있었다.이름 부르는 목소리가 백 번을 넘기자 강무진은 눈을 한 번 닦았다. 서리가 눈에 들어간 것이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가는 것은 혼자 말하지 않았다.위지헌은 마루 위에서 그 소리를 다 들었다. 쇠패 하나가 보자기에 떨어질 때마다 가슴 어딘가에서 같은 소리가 났다. 그는 그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삼백이 보는 얼굴이었다.*이백 번을 넘길 무렵 기윤이 지붕에서 내려왔다.그는 대문 안쪽 곁방으로 가지 않고 곧장 위지헌 앞에 섰다. 손에는 뒷문에서 잡아 온 사병 하나의 목덜미가 있었다. 사병은 소매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려다 들킨 얼굴이었다."뒷문 담 곁에서 궁 쪽 서리를 만났습니다. 소매 안에 이것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2. 인 없는 손

    정전 돌바닥에서 겨울 냄새가 올라왔다.위명서가 용상에 앉은 첫 조회였고, 위지헌은 종실 줄의 맨 뒤에서 올려다보았다. 용상 위의 매화 없는 흰 소매가 먼저 보였고, 그 아래 계단에 꿇은 젊은 도위의 등이 보였고, 열 해 동안 제가 섰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열 해 동안 용상 아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섰던 사람이 이제 문 가까운 기둥 곁에 서 있었다. 인도 관도 없는 몸이 이렇게 가벼운 줄은 몰랐다. 가벼운 것이 서운한지 편한지 그는 가르지 않았다. 가르면 어느 쪽이든 조카 앞에 들킬 것 같아서였다.고 내관이 두 번째 조서를 펴 들었다."북경군을 폐하의 직속으로 삼는다. 수령은 북영 도위 한승으로 하고, 북경군 통령의 패와 군적은 사흘 안에 그에게 넘긴다. 북경군에 남는 자는 황제의 군사이고, 왕부를 따르는 자는 군적에서 지운다."조서를 읽는 동안 종친부 쪽에서 헛기침 하나 나오지 않았다. 배중곤이 발을 옮기지도 않았다. 이미 정해진 판이어서 옮길 발이 없었다.북경군.그 세 글자가 남의 입에서 남의 것으로 읊히는 것을 위지헌은 들었다. 턱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열여덟에 받은 것을 스물여덟에 내놓는 데 걸린 시간이 조서 한 줄이었다.위지헌은 용상 아래 한승을 보았다. 북영에서 위명서와 함께 눈 속을 건넌 젊은 도위가 무릎 꿇은 채 어깨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었다. 한승은 위지헌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깨였다. 그 어깨를 보는 위지헌의 가슴 어딘가가 조금 풀렸다. 조카가 고른 사람이 적어도 뒤를 보지 않으려고 애쓸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해 질 무렵 왕부 대문 앞에 북경군이 모였다.도성 안에 있던 옛 부하의 절반이 군복 그대로 서 있었다. 창은 들지 않았고 투구만 팔에 끼웠다. 창을 두고 온 손들이었다. 한승이 말에서 내려 그 앞에 서더니, 대문 안에서 나온 위지헌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가 도로 앞으로 나왔다."왕야. 소장이 이 조서를 들고 이 문 앞에 서는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1. 빈전 둘

    곤원전 회랑에는 흰 천이 두 겹으로 걸려 있었다.바깥 겹은 어제 새로 건 선제의 것이었고, 안쪽 겹은 아직 걷히지 않은 황후의 것이었다. 삼베가 바람에 스칠 때마다 분향 연기가 한쪽으로 쏠렸다가 돌아왔다. 월령은 봄을 오른팔에 안고 그 두 겹 사이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방어멈과 청아는 회랑 입구의 시녀 줄에서 걸음을 멈췄다. 상주 자리 가까이에는 종실 여인과 비빈만 들 수 있었다.예부 주사 변영달이 서열표를 접어 쥐고 달려왔다. 문턱에 발이 걸려 표가 반쯤 펼쳐졌고, 그는 그것을 가슴에 눌러 붙이고서야 절을 했다."섭정왕비마마, 아니, 왕비마마. 자리를 안내하겠사옵니다.""섭정왕비라 부르는 것이 틀렸습니까.""틀리지는 않사오나 맞지도 않사옵니다. 어제 폐하의 조서로 섭정이 파해졌으니, 섭정왕비 또한 파해진 것이옵니다."변영달이 표를 다시 펴서 손가락으로 짚었다."상주는 폐하이시고, 그 곁이 황제 생모 마마이시옵니다. 이어서 현비 마마, 덕비 마마, 순빈 마마, 의빈 마마, 정빈 마마, 류 귀인 마마, 그다음이 왕비마마이옵니다.""비빈 뒤로군요.""종실 서열에서는 선제의 후궁이 윗자리이옵니다. 왕비께서는 선제의 아우님 부인이시니, 예법이 그리 정하고……""알겠습니다."월령이 말을 끊자 변영달은 입을 다물고 상궁에게 눈짓했다. 상궁이 삼베 방석 하나를 들어 류 귀인의 방석 뒤로 옮겼다. 방석이 놓일 때 먼지가 얇게 올라왔다. 그것이 어제까지 섭정왕비였던 사람의 자리였다.*월령이 그 방석에 앉자 상주 자리가 보였다.위명서가 흰 상복에 매화 없는 소매로 병풍 없는 빈전 앞에 서 있었다. 어제 사위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어깨가 지나치게 곧았다. 그 곁에서 숙비가 한 걸음 뒤처진 자리를 지켰고, 비빈들이 그 뒤로 줄을 이루었다.위지헌은 이 줄에 없었다. 종실 아우의 자리는 남자들 줄의 맨 뒤쪽이었다. 인도 관도 없는 흰 옷의 사람이 거기 서 있다는 것을 월령은 돌아보지 않고 알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이 자리의 법도였다.봄이 오른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4. 자리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3. 매듭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2. 틈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1. 실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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