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4. 다음

Penulis: moominkiller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5-24 01:37:31

월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연한 백색 저고리 위로 먹빛 머리카락이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다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긴 속눈썹 아래 맑은 눈빛이 잠시 가려졌다. 그 짧은 그늘 때문에, 오히려 얼굴은 더 또렷해 보였다.

위명서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 멈춤을, 서윤이 보았다.

"소문보다 조용한 분이군요."

위명서가 웃었다.

"달빛은 본디 소리가 없어 오래 남는다지요."

낮은 감탄이 번졌다.

서윤은 월령의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손끝은 치맛자락을 파고들고 있었다.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고운 말씀입니다, 전하."

월령의 목소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전에 뵌 적이 있었습니까?"

"아직 그런 영광은 없었습니다."

"이상하군요."

위명서의 웃음이 조금 깊어졌다.

"낯설지가 않습니다."

월령은 찻잔의 온기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손등에 이마를 대던 순간을, 청아의 떨리는 숨을, 죽은 아이의 이름을.

그것들이 그녀를 이 자리에 붙들었다.

"소녀가 낯선 얼굴을 잘 익히지 못해서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전하의 눈에 어디선가 본 듯 비쳤다면, 아마 봄빛 탓일 겁니다."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위명서는 그 작은 거절을 알아들었고, 알아들은 사람의 얼굴로 더 온화하게 웃었다.

"연회가 끝나면 정원의 바람을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긴 이야기는 아닙니다."

심도윤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한씨는 숨을 삼켰고, 서윤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하얘졌다.

"송구합니다, 전하."

월령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어머니 곁을 오래 비워 두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위명서의 눈동자에 얇은 빛이 스쳤다 —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갚겠습니다."

다음.

위명서는 언제나 다음을 만들었다. 다음 만남, 다음 편지, 다음 꽃가지.

거절은 그에게 끝이 아니라 잠시 접어 두는 물건에 가까웠다. 그는 상대가 스스로 다시 펼치게 만들 줄 알았다.

*

연회 끝 무렵, 월령은 후원으로 나와 숨을 골랐다. 살구꽃은 조금씩 지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이 계절을 사랑했다. 이제는 꽃잎이 너무 희었다.

피가 묻기 전의 천처럼.

"심 아가씨."

월령은 걸음을 멈췄다.

위명서가 후원 입구에 서 있었다. 혼자인 척하고 있었다 — 회랑 그림자에는 호위가 있었고, 더 멀리 나무 뒤로는 하늘빛 치맛자락이 보였다.

서윤이었다.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월령은 모르는 척했다.

서윤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지금 위명서의 아름다움이 누구를 향한 칼인지 그 아이 스스로 보아야 했다.

"이상합니다."

위명서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나를 피하고 싶어 하는데,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월령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굳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다.

너무 잘 읽어서, 월령은 한때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라 착각했다.

사실 그는 알아본 것이 아니라 재고 있었을 뿐인데.

"마치 내가 장차 그대에게 죄를 지을 사람처럼 봅니다."

그 말은 가까웠다.

정답에.

"전하께서 소녀에게 죄를 지으실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월령은 어깨를 펴고 그를 보았다.

"아직은 없습니다."

위명서가 웃었다.

아직은.

무거운 말을 참 가볍게도 하지. 월령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까닭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의 미소가 아주 짧게 멈췄다가, 다시 봄빛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바람이 불었다.

살구꽃잎 하나가 월령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위명서가 손을 들어 그것을 떼어 주려 했다.

월령은 물러났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높은 단 위에서도 저 손은 그렇게 올라갔다 — 젖은 소매 끝을 털 듯 가볍게, 그 가벼운 손짓 하나에 한 사람의 목이 떨어지던 것을, 월령은 보았다.

"꽃잎입니다. 상처는 아니고요."

위명서는 손을 거두었다.

얼굴은 변하지 않았으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괜찮습니다, 전하. 소녀가 하겠습니다."

월령은 어깨의 꽃잎을 직접 털어 냈다. 작은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흰 채로 떨어져도, 밟히면 금세 더러워지는 것. 위명서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월령."

처음으로 그가 이름을 불렀다. 한때 그 두 글자는 달았다.

그 단맛을 믿어, 그녀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같은 이름이 혀 위에 차게 닿았다.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

세상이 잠시 멈췄다.

그 말.

살구꽃 아래에서 들었던 말. 한때의 월령이 밤새 품고, 끝내 황후가 되기로 마음먹게 한 첫 문장.

황궁의 붉은 담을 사랑의 문으로 착각하게 만든 말. 회랑 그림자 뒤에서 서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월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명서는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죽이는 법을 모르는 남자처럼.

황궁이 외롭다면, 그 외로움은 전하께서 스스로 돌보셔야 할 것입니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발끝이 떨어진 살구꽃잎 앞에 조용히 멈췄다.

밟지 않았다.

그 작은 흰 것을 밟지 않는 일에도, 이상하게 힘이 들었다.

거절도 수락도 아닌 침묵.

길을 내주지 않되 칼을 먼저 꺼내지도 않는 침묵. 위명서가 그 침묵을 보고 있었다.

회랑 뒤에서 서윤도 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월령은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팽팽히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한쪽 끝에는 황궁이 있었고, 다른 한쪽 끝에는 아직 피 묻지 않은 심가의 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실 위에, 서윤의 어린 손과 은매의 떨리는 숨과 청아의 작은 열쇠가 함께 매달려 있었다.

월령은 그 모든 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숨조차 천천히 골랐다.

Lanjutkan membaca buku ini secara gratis
Pindai kode untuk mengunduh Aplikasi

Bab terbaru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26. 향

    목패가 먼저 떨어졌다.궁문 밖 돌길에서 기윤이 태의의 뒷덜미가 아니라 허리띠를 잡았다. 돌아선 태의는 회색 옷에 마흔 남짓이었다. 맥 짚던 손이 허리로 갔다가 멎었다. 강무진이 붕대 감은 왼팔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그 손목을 잡았다."무슨 일이오. 나는 태의원 사람이오. 폐하의 맥을 짚고 나오는 길인데—""압니다. 하가 태의시지요. 소매만 보겠습니다."강무진이 소매 안에 손을 넣자 작은 향낭이 나왔다. 비단이 아니라 무명으로 지어 오래돼 색이 바랜 것이었다. 단내가 났고, 단내 밑에 쓴 것이 있었다.다른 태의 둘은 그냥 보냈다. 고 내관이 그들을 돌려세워, 아무것도 못 본 얼굴로 집에 가라고 일렀다.*왕부 별채에서 독고진겸이 그 향낭을 늙은 손으로 받았다.코에 대지 않았다. 댈 것도 없이 아는 냄새라, 손바닥에 놓고 무명 주머니와 실 매듭만 보았다."자녕궁 것이 아니오.""향방 것이 아니에요? 자녕궁 향방에서 짓던 냄새예요.""향방이 이것을 물려받은 거요. 아버지가 서른 해 전에 셈방 문 앞에 이 향을 피웠소. 셈이 틀린 사람이 문을 열면 이 냄새부터 맡았지. 맡고 나서, 아, 내 셈이 틀렸구나 하고 알았소. 누이가 입궁할 때 이것을 가져갔소. 그걸로 향방을 차렸고."독고진겸이 매듭을 보았다. 셈방 매듭이라 푸는 법이 따로 있었다. 그가 그것을 풀자 안에 향 가루가 있었고, 가루 밑에 숫자 하나가 적힌 종이 조각이 있었다."아버지 사람이오."독고진겸이 종이 조각을 들어 보였다."나도 몰랐던 사람이오. 셈방 문패에 이 번호가 있었소. 아버지가 사람을 살 때 이 번호를 줬지. 내가 셈방을 물려받을 때 이 번호 사람은 없었소. 죽었다고 들었소.""살아 있었네요.""살아 있었소. 하가 옷을 입고 서른 해를 살았소."월령이 향낭을 도로 받았으나 매듭을 묶지 못했다. 독고진겸이 대신 묶어 주었다. 딸에게 이름 첫 자를 굵게 쓰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손이었다.*자녕궁 담 위에서 초비가 내려왔다."담 안은요, 마마님, 조용해요. 설련 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25. 병상

    숨소리가 문밖까지 났다.편전 안쪽 침방에는 발이 내려져 있었고, 그 안에서 숨이 들고 났다. 드는 숨은 짧고 나는 숨은 길었으며, 나는 숨 끝에는 기침이 붙었다. 고 내관은 그 기침을 세지 않았다. 셋을 넘긴 뒤로는 셀 수가 없었다.월령이 발 밖에 서고 위지헌이 먼저 들어갔다. 왼 어깨에는 방어멈이 다시 감은 붕대가 대창포 안에 있었다. 발이 들렸다가 내렸다."지헌아. 왔느냐.""예, 형님. 왔습니다.""어깨는 어떠냐.""화살이옵니다. 뼈는 비켰습니다.""뼈만 비키는 애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경화제가 웃으려 했으나 웃음이 기침이 됐다. 위지헌은 무릎을 꿇은 채 그것을 보면서도 손을 뻗지 않았다. 뻗을 손이 오른쪽 하나뿐이라, 그 하나를 무릎 위에 두었다."형님,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어제부터 못 일어났다. 기침은 그 전부터고. 고 내관이 세더구나. 짐이 모를 줄 알고."*태의가 셋이었다.회색 옷에 허리에 목패를 찬 셋이 번갈아 맥을 짚었다. 하나가 짚고 물러나면 다른 하나가 앞으로 나왔고, 짚고 나서는 서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눈을 맞추면 셋이 같은 것을 안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었다.황후가 병상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예복이 아니라 사흘째 갈아입지 않은 옷이었다. 위명서는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북문에서 곧장 온 옷 그대로, 매화 소맷단의 마른 것을 털지 않은 채였다."명서.""예, 아바마마.""북에서 곧장 왔느냐. 어미한테는 갔다 왔고.""아직 안 갔습니다. 여기 먼저 왔습니다.""그럼 거기 앉아 있어라. 짐이 자다 깨면 네 얼굴이 있게.""예. 여기 있겠습니다."경화제가 눈을 감았고, 위명서는 그 자리에 남았다. 어미에게 가지 않고 아비 곁에 있었다. 월령이 발 밖에서 그것을 보았다. 전생에 이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고, 어미 곁에 있었다.*가운데 태의가 물러나며 월령 곁을 지났다.소매가 스치자 향이 왔다.월령이 굳었다.단내가 나고, 단내 밑에 쓴 것이 있었다. 자녕궁 향방에서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24. 귀환

    도성 북문 돌계단에 첫서리가 앉아 있었다.아침 해에 반은 녹고 반은 남은 서리 위에 월령이 봄을 안고 서 있었다. 아이는 열이 내린 지 나흘이라 뺨이 도로 희었고, 품 안에서 제 손으로 어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힘이 돌아온 손이었다.청아가 뒤에, 기윤이 그 뒤에 섰다. 방어멈은 대문을 지킨다고 오지 않았고, 초비와 묵아는 길 끝이 보이는 성루 위에 있었다.길 끝에서 먼지가 올랐다.*북문로에서 검은 줄이 왔다.앞에 말 하나, 검은 대창포에 옥관이었다. 대창포 안에 붕대가 있어서 어깨 한쪽이 다른 쪽보다 높았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월령에게는 보였다.그 뒤에 붉은 것과 검은 것이 다 마른 매화 소맷단, 붕대 감은 팔 둘인 강무진과 정무, 들것, 북경군이 차례로 왔다.말이 돌계단 앞에 섰다.위지헌이 오른손으로 안장을 짚고 내렸다. 시간이 걸리는데도 아무도 돕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월령 앞에 섰다."왔다.""예. 오셨어요."위지헌이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모르는 얼굴을 보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옥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앉는다더니.""앉아요. 기울지만요.""열은 내렸느냐.""내렸어요. 나흘 전에요. 이제 밤에도 안 깨요."위지헌이 오른손을 들어 희어진 아이 뺨에 손등을 댔다. 그러고는 그 손을 아이를 안은 월령의 손 위에 놓았다. 북경군이 뒤에 서 있는 채로, 서리 위에서, 그가 아내에게 건넨 것은 그 손 하나였다.월령이 그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어깨는요. 뼈는요.""비켰다. 살만 뚫렸다.""고름 냄새가 나요. 여기서도요.""방어멈이 감으면 낫는다."*"첫 장이다."위지헌이 오른쪽 소매에서 반, 또 반 접힌 종이를 꺼내 아이를 안은 월령의 팔 위에 놓았다.월령이 한 손으로 펴려는데 아이가 그것을 잡으려 했다."아기씨, 저한테 오세요. 마마님이 종이를 보셔야 해요."청아가 아이를 받았고, 월령이 두 손으로 폈다.'심월령.' '위지헌.'여섯 살 이름과 열다섯 이름이 가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23. 뜨거운 밤

    고개 위에 해가 먼저 닿았다.눈이 붉어졌다가 희어졌다. 위명서가 새벽부터 그 위에 서 있었고, 열아홉과 오십이 뒤에 있었다. 국자를 허리에 찬 채 칼을 들고 고개 너머 골짜기를 보고 있었다.골짜기가 비어 있었다.흑령 일백이 밤사이 올라오지 않고 제 땅으로 갔다. 검은 대창포 대신 매화 소맷단이 고개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간 것만 알았다. 눈 위에 발자국이 북으로 났고, 돌아온 자국은 없었다."삼전하, 갔습니다. 발자국이 다 북쪽입니다.""안다. 새벽부터 보고 있었다."위명서가 칼을 넣자 그제야 손이 떨렸다. 어제 옆구리를 뚫을 때는 떨리지 않던 손이 빈 골짜기 앞에서 떨려서, 아무도 못 보게 소매 안에 넣었다.*군막 안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위지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일어나서 누워 있었고, 얼굴이 붉었다. 왼 어깨의 붕대는 강무진이 새벽에 또 갈았다. 넉넉하다던 붕대가 다 떨어져서 윤백이 넣은 마른 옷을 찢었고, 그것도 이제 반이 남았다."갔습니다, 왕야. 골짜기가 비었습니다.""명서는 어디 있느냐.""고개 위에 서 계십니다. 새벽부터 안 내려오십니다."위지헌이 눈을 감았다가 뜨고, 다시 감았다. 열이 눈꺼풀 안에 있었다.심각이 북문군 둘이 든 들것에 실려 군막에 들어왔다.누운 사람이 누운 사람을 보러 왔다. 심각이 들것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전하. 저는 다리고 전하는 어깨고. 둘이 합치면 사람 하나는 되겠습니다.""부장은 입을 다무시오.""열이 나면 말이 많아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저께요."강무진이 헛기침을 했고 심각이 웃었다. 위지헌은 웃지 않았는데, 오른손이 옥대 위로 갔다가 힘이 없어서 매듭에 닿기 전에 내려왔다.*군막 밖 열아홉의 불에서 국 냄새가 났다.큰 솥에 소금길에서 가져온 소금을 넣고, 눈 속에서 캔 마른 풀뿌리와 말린 고기를 넣은 것뿐인 국이었다.위명서가 고개에서 내려와 솥 앞에 섰다. 열아홉이 그를 보았으나 아무도 국을 뜨지 않았다. 국을 뜨는 사람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22. 요충

    붕대가 젖어 있었다.새벽에 강무진이 위지헌의 왼 어깨에서 붕대를 풀었다. 배어 나온 것은 붉은 피가 아니라 누런 고름이었다. 화살 자리 둘레가 검게 부어 손을 대니 뜨거웠고, 위지헌의 이마도 뜨거웠다."왕야, 오늘은 말에 안 오르십니다. 고름이 나옵니다.""오른다.""열이 있으십니다. 이마를 안 짚어도 압니다.""오른다. 오늘 안 치면 흑령이 고개에 자리를 잡는다."강무진이 새 붕대를 감았다. 윤백이 넣어 준 붕대가 넷째 사람인 왕야에게 두 번째로 가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보자기가 비었다. 감고 나서 헛기침을 한 번 한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위지헌이 대창포 왼 소매에 팔을 넣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정무가 잡아 주려다 말았다. 잡으면 왕야가 뿌리칠 것을 알아서, 제 왼팔에 붕대를 감은 채 그냥 서 있었다.*고개 아래 북경군이 섰다.정면에 북경군 이백과 북문군 일백이 섰고, 왼쪽 비탈에는 위명서의 열아홉과 북문군 오십이 섰다. 오른쪽은 비웠다. 그리로 빠지면 흑령 땅이라, 쫓기는 놈들이 빠져나가게 둔 자리였다.위지헌이 오른손에 고삐를 쥐고 왼손은 무릎 위에 둔 채 말 위에 있었다. 얼굴에 열을 올리지 않는 것이 오늘 이 사람이 하는 싸움의 반이었다."명서야. 너는 왼쪽 비탈에서 막는다. 오늘은 막고 내일 친다.""예, 숙부.""정면에서 밀리는 놈들이 왼쪽으로 새면 막아라. 비탈을 내려오지 마라.""막기만 하겠습니다."위지헌이 정면을 보았다."친다."북경군이 소리 없이 비탈을 올랐고 눈이 발소리를 먹었다. 고개 위에서 흑령 이백이 일어서서 화살을 내려보냈고, 방패가 올라갔다. 정무가 위지헌의 말 앞에서 오른손에 칼 하나만 들고 걸어서 올랐다.*고개 중턱에서 칼이 부딪쳤다.흑령이 위에서 내려왔고 북경군이 받다가 반 걸음, 한 걸음 밀렸다. 위지헌이 밀리는 자리로 말을 냈다. 검은 대창포가 앞에 있으면 사람들이 밀리지 않았다. 열 해 동안 그랬다.말이 눈 위에서 앞발을 헛디뎠다.위지헌이 오른손 하나로 고삐를 당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21. 원본

    새벽 왕부 마루에 먹이 갈려 있었다.시킨 사람이 없는데도 윤백이 벼루에 먹을 갈아 두었다. 자녕궁에서 나온 것을 베끼려고 간 먹인데, 어젯밤 담을 넘어 나온 것은 베낄 것이 아니라 원본이었다.명부가 마루 한가운데 놓였다.검은 표지에 손때가 앉아 있었다. 첫 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실이 끊긴 자국만 남았고, 그다음 장부터 이름과 값과 치른 날이 한 장에 열씩 적혀 스물여섯 장이었다. 앞쪽은 늙은 셈방 글씨였고, 뒤로 갈수록 곱게 다 맺는 가는 글씨였다.월령이 한 장씩 넘겼다. 아는 이름이 있고 모르는 이름이 더 많았다. 아는 이름 옆에는 어김없이 치른 날이 적혀 있었다."마마님, 봄 아기씨 이름은 어디 있습니까."윤백이 마루 끝에서 물었다. 오늘은 베낄 것이 없어서 손이 검지 않았다."없어요. 여기에는요.""사본에는 있었지 않습니까. 붉은 표까지 찍혀서요.""사본에만 넣고 원본에는 안 넣은 거예요. 아니면 넣기 전에 원본을 뺏긴 거고요."월령이 마지막 장을 덮었다. 옆방에서 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열이 오른 지 나흘째였고, 태의가 말한 내리는 사흘의 첫날이었다. 이마가 어제보다 덜 뜨거워서 방어멈이 잔소리 없이 수건만 갈았다.*곤원전에 명부가 갔다.월령이 명부를 들고 청아가 뒤에 섰다. 늙은 상궁이 문을 열었다. 황후는 명부를 두 손으로 받고도 장을 넘기지 않고 표지만 보았다."담을 넘었다더구나.""예, 마마.""누가 넘었느냐.""신첩의 암위 하나와, 신첩이옵니다."황후가 명부 표지의 손때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곤원전 사람이 넘었다. 내가 보냈고. 앞으로는 그리 안다.""마마, 그것은 신첩이 한 일이옵니다.""섭정왕비가 넘었다고 하면 종친부가 너를 문다. 곤원전이 보냈다고 하면 아무도 못 문다."황후는 더 보태지 않았다. 월령이 고개를 숙였고, 황후가 명부를 늙은 상궁에게 넘겼다."편전으로 간다. 내가 직접 가지고 간다. 가마는 두고 걸어서."*편전에서 경화제가 명부를 폈다.손에 옥필이 없어서 굴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8. 문턱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 그늘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Bab Lainnya
Jelajahi dan baca novel bagus secara gratis
Akses gratis ke berbagai novel bagus di aplikasi GoodNovel. Unduh buku yang kamu suka dan baca di mana saja & kapan saja.
Baca buku gratis di Aplikasi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