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34. 가릴 것은 가린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5 11:00:33
너무 쉽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월령은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았다.

위지헌은 햇살 아래 서 있었지만, 빛을 먹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검은 장포, 낮은 눈빛,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

그 단단함 속에서 오직 그녀를 보는 시선만 온도를 달리했다. 느릿한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월령은 제 숨이 한 박자씩 늦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가려 주실 겁니까."

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 지켜지는 것이 고맙고, 동시에 두려웠다.

그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언젠가 그 안에서 길을 잃을까 봐. 한때 그녀는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제 판단을 통째로 맡겼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위지헌은 그 마음까지 읽은 듯했다.

"가릴 것은 가린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나 네 눈을 닫지는 않는다. 추한 것은 내가 먼저 보겠다. 네가 봐야 할 때가 오면, 네가 다치지 않을 만큼만 남겨 두지."

쉽게 말했다.

어려운 정치도, 독고가 상단의 인장도 잠시 뒤로 물러나고, 남은 것은 단순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6. 눈 속의 사당

    "살구 마을이요."위명서가 그 말을 받았으나, 받아서 어디에 둘지 몰랐다. 국자를 든 손이 부풀어 있어서 그것을 내려놓지도 못했다."탄 마을이라고만 하셨습니다.""탄 마을이 살구 마을이다. 네 숙모가 여섯 살에 살던 데다. 나무가 스물은 있었다.""지금은요.""그루터기다. 네가 밤새 옆에 두고 눈을 퍼 나른 게 그거다."위지헌은 그 말만 하고 사당 쪽으로 걸었다. 위명서는 따라가지 않고 검은 얼굴로 자루 옆에 서 있었다. 숙모가 여섯 살에 살던 마을에서 제가 군량 절반을 태웠다는 것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몰랐다.*심각이 낮에 창 두 자루에 망토를 건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북문군 넷이 들었다. 붕대로 굵어진 왼쪽 다리 위에 눈이 앉았는데, 손이 닿지 않아서 심각은 그것을 털지 못했다.탄 담 안에 들어서자 심각이 들것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전하, 여기가 어디입니까.""살구 마을이오."심각이 그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급한 사람이 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팔을 들어 곳간 뒤 낮은 돌담 쪽을 가리켰다."사당입니다. 저기요. 어머니가 저기서 빌었습니다. 아버지 살아 돌아오시라고요. 저는 여덟이었고 누이는 여섯이었습니다. 누이가 저 담 위에서 떨어져서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흉이 남았을 텐데, 보셨습니까.""못 봤소.""머리카락 밑입니다. 왼쪽이요."위지헌이 그 말을 받고, 받은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옥대에 얹힌 손이 매듭 위에서 잠깐 멎었다."부장은 성터에 계시라고 했소.""다리가 다쳤지 귀가 다친 게 아닙니다. 본진이 탔다는데 성터에 누워 있으면 그게 부장입니까, 전하."강무진이 들것 옆에서 헛기침을 했고, 심각이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사당은 지붕이 없었다.돌담 셋에 문 자리 하나, 안에 마루가 있었던 자국 위로 눈이 앉아 있었다. 담이 낮아서 불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위지헌이 그 안에 서고 정무가 뒤에 섰다. 위명서는 들어오지 않고 문 자리에 섰다."뭘 찾으십니까, 숙부.""명부지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5. 종이

    "안 마시나."숙비가 제 잔은 들었다. 쉰 목으로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도로 덮는 손이 느렸다."목이 안 말라요, 마마.""꼭지가 오른쪽인데.""예.""오른쪽이면 마셔도 되는 잔이지. 설련이가 자네한테 그리 배웠고, 그대로 놓았네.""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목이 안 말라요."월령은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소매 안의 얇은 종이가 손목 안쪽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는 것이 오늘 이 방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설련은 병풍을 보는 눈으로 고모 곁에 서 있었다."자네 남편이 북에서 이기면 내 아들이 산다."숙비가 잔을 든 채 이어 갔다."자네 남편이 지면 둘 다 죽고. 그러니 나는 섭정왕이 이기길 빌어야 하는 사람일세. 우스운 셈이지.""셈이 아니에요, 마마. 그냥 그런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눈 위에 서 있으니까요."숙비가 웃다가 기침을 삼켰고, 삼킨 것이 목에서 소리를 냈다.*담 밖에서 병사장이 제 발을 보고 있었다.해가 미시 자리에 왔다. 기윤이 반대편 지붕에서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초비가 지붕 위에서 문을 보았다.길 끝에서 사람이 가마가 아니라 걸어서 왔다.늙은 상궁이 앞에 서고, 그 뒤에 예복을 갖춘 여인 하나가 신이 먼지로 하얗게 된 채 왔다.병사장이 그 얼굴을 알았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황후마마."황후가 문 앞에 섰다. 병사장을 보지 않고, 안에서 열면 열리는 붉은 문을 보았다."섭정왕비를 내놓아라. 곤원전이 왔다."두드리지 않고 그 한마디만 문 안으로 보냈다.*방 안으로 궁인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마마, 곤원전 마마께서 문 앞에 와 계시옵니다."숙비가 소리 없이 잔을 놓았다."가마를 타고 왔더냐.""아니옵니다. 걸어오셨사옵니다.""황후가 내 문 앞까지 걸어왔어."숙비가 무엇인가를 다시 매기는 얼굴로 월령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가게, 섭정왕비. 곤원전이 자네를 데리러 온 것이니. 안 마신 잔은 그대로 두고.""예, 마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4. 삭원

    옛 삭원성 성터의 돌담은 반만 남아 있었다.남은 반 안에 심각의 북문군 이백이 갇혀 있었고, 무너진 반 쪽 비탈에 흑령이 엎드려 있었다. 밤인 데다 불을 피우지 않는 놈들이라 수를 셀 수 없었다.정무가 앞에 섰다."왕야, 비탈 아래로 돌아서 오릅니다. 놈들은 담만 보고 있습니다.""그렇게 해라. 소리 없이.""예. 왕야는 제 뒤에 서십시오."위지헌이 정무의 반 걸음 뒤에 섰다. 도성을 떠난 뒤로 처음이었다. 늘 제가 하던 말을 정무가 했으니, 강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북경군이 비탈 아래서 소리 없이 올라갔다. 눈이 발소리를 먹었다. 흑령이 알아챈 것은 등 뒤에서 칼이 왔을 때였다.*길지 않았다.정무의 칼이 먼저 갔고 위지헌의 칼이 그 옆으로 갔다. 검은 것들이 눈 위에서 일어나다가 도로 누웠다. 나머지는 산으로 뛰었다."왕야, 산으로 간 놈들은요.""두어라. 밤에 산을 쫓지 않는다."돌담 위에서 북문군이 소리를 질렀다. 반나절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소리였다. 위지헌이 담을 넘었다.*심각은 담 밑 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앞으로 뻗은 왼쪽 다리 허벅지에 화살대가 꺾인 채 박혀 있었고, 그 아래 눈이 검었다."전하, 늦으셨습니다."심각이 급한 사람답게 급하게 말했다."늦지 않았소. 부장이 살아 있으니 늦은 것이 아니오."위지헌이 그 앞에 무릎을 꿇자 대창포 자락이 검은 눈에 닿았다. 화살은 뼈를 비켜 갔고 살은 비켜 가지 못했다."다리요. 다리만입니다. 다리는 둘이니까 하나쯤은 괜찮습니다.""입을 다무시오.""예, 전하."강무진이 윤백이 넉넉히 넣어 준 붕대를 꺼내고 화살대를 잡았다."부장, 이를 무십시오. 하나, 둘에 뽑습니다.""셋에 뽑는 게 아니오?""둘에 뽑습니다. 셋을 기다리면 힘이 들어가서요."화살이 뽑혔다. 심각은 소리 대신 급한 말을 냈다."누이한테는 말하지 마십시오. 아니, 하십시오. 어차피 어머니가 아실 테니까요. 어머니가 아시면 누이도 알고, 그러면 전하가 말 안 하신 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3. 병풍 앞

    문지방을 넘자 향이 탄 냄새가 먼저 왔다.불이 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회랑에 남아 있는 냄새였다. 물지게를 오른쪽에 지던 궁인이 앞서 걸었고, 다른 하나가 회랑 끝에 서 있었다. 초비가 센 셋 가운데 하나는 지금 왕부 마당에 묶여 있으니, 담 안에 남은 손은 이 둘이었다.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월령은 돌아보지 않았다."설련이는 안에 있느냐.""마마 곁에 계시옵니다. 이쪽으로 드시옵소서."궁인은 그 말만 하고 앞서 걸었다. 안에서 열면 열리는 문이라는 것을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향방 앞을 지났다.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은 채였고, 문갑이 있던 자리에 재가 쓸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안쪽 방 문이 열려 있었다.*병풍이 있었다.그런데 그 앞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병풍을 등지고 앉은 무향의 소매와 정갈하게 여민 깃, 숙비였다.월령은 그 자리에 멎었다. 이 방에 들 때마다 병풍이 있었고 목소리는 그 뒤에서 왔다. 오늘은 목소리가 앞에서 왔다."왔군."숙비의 목이 쉬어 있었다. 연기를 마셨다는 말 하나는 서찰에서 참이었다."설련이 글씨로 불렀는데, 설련이 글씨가 아닌 줄 알고 왔겠지.""예, 마마.""그러고도 왔어.""예.""요 밑에는 아무것도 없네.""알아요. 그것도 알고 왔어요."월령은 숙비가 앉으라 하기 전에 앉았다. 이 방에서 처음 하는 일이었고, 숙비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설련이 숙비 곁에 서 있었다.소매가 그을린 궁인 옷을 입고 있었다. 뺨의 검댕은 씻었고 머리는 도로 반듯했다. 월령을 보지 않고 고모의 어깨 너머 그림 없는 병풍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담 밖에서 초비가 해를 보았다.오시가 반쯤 갔다. 초비는 지붕 위에서 문을 보고, 해를 보고, 다시 문을 보았다. 기윤이 반대편 지붕에서 손가락 하나를 들어 반 시진이 남았다고 알렸다.병사장은 문 앞에서 제 발을 보고 있었다. 미시가 오면 누가 오는지 그 사람은 몰랐다. 독고진겸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2. 급한 첫 획

    "설련 언니 글씨를 흉내 낸 거예요."서윤이 새벽에 기윤이 데려온 걸음 그대로 마루에 앉아 말했다. 밤에 바느질을 하다 온 손끝에 실 자국이 있었다. 종이를 등잔 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제 쪽으로 기울였다."모양은 맞아요. 마 자 꺾는 데도, 요 자 끝을 올리는 데도요. 언니 글씨를 오래 본 사람이에요. 그런데요, 언니.""그런데?""숨을 안 쉬었어요. 언니는 첫 획을 놓고 한 번 쉬잖아요. 그래서 첫 자가 굵고요. 이건 모양만 베끼고 숨은 못 베꼈어요. 남의 글씨를 베끼는 사람은 보통 첫 획에서 쉬어요. 모양을 보느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안 봤어요. 외워서 썼어요."서윤이 종이를 접지 않고 내려놓았다."언니 글씨를 안 보고도 쓸 만큼 오래 본 사람이에요."월령은 그 말을 받았다. 설련이 찻상 뒤에서 자란 그 방에서, 설련의 글씨를 열 해 넘게 본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숙비였다.*"저도 제 이름으로 남이 글을 쓴 적이 있어요."서윤이 어른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는데, 그 밑에서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때 그 글씨도 이랬어요. 제 것 같았어요. 저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저를 오래 본 사람이 썼으니까요. 언니, 이걸 받은 사람이 설련 언니 글씨를 믿고 가면, 그때 저처럼 돼요.""안다.""그런데 가실 거죠."월령이 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그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손끝의 실 자국을 제 치마에 문질렀다.*독고진겸이 밤새 담 밖에 섰다가 온 걸음으로 마루 아래 서 있었다.종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서윤의 말만 들었다. 듣고 나서 한참 뒤에 물었다."그 아이 첫 획이 느리오?"서윤이 그를 보았다."예. 붓을 놓고 한 번 쉬어요.""나는 그 아이 글씨를 모르오."늙은 사내가 담을 짚던 손을 소매에 넣고 있었다."셈방 글씨만 알지. 그 아이는 셈방에 앉지 않았으니. 여섯 살에 열쇠를 삼키려 했소, 셈방에 안 들어가려고.""다음에 보시면 아실 거예요. 첫 자가 다른 자보다 굵어요."독고진겸이 셈을 받아 적는 사람처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1. 담 안의 손

    묵아가 등롱을 들고 협도로 왔다.해가 담 너머로 넘어가는 교대 시각이었다. 낮을 지킨 초비가 내려와 물 표주박을 건네자 묵아가 받았다. 손끝에는 늘 그렇듯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오늘도 그대로야. 셋이 물 긷고, 들어가고. 그게 다야.""휘장은 그대로고?""안 걷었어. 봉쇄한 날부터 한 번도.""알았어. 밤엔 내가 볼게."묵아는 말이 짧았고 초비는 더 짧았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담이 하나 더 선 것 같았다.담 서쪽 협도 쪽에서 기와가 낮게 울렸다. 사람이 밟는 소리였다."서쪽이야.""올라갈게."초비가 도로 지붕으로 올라갔고, 묵아는 등롱을 내려놓고 손끝의 실을 풀었다.*담 안에서 궁인 옷을 입은 사람이 넘어왔다.치맛자락을 허리에 묶고 기와에 매달렸다가 손을 놓아 협도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기 전에 초비가 지붕에서 소리 없이 그 위에 내려섰다. 어깨를 누르고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묵아의 실이 그 손목으로 갔다. 던지고, 감고, 당겼다. 붉은 실이 두 손목을 세 번 돌았다. 손이 등 뒤에서 묶였다.궁인은 버둥거리지 않았다."왕부에 가는 길입니다. 왕비마마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궁인이 협도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말했다. 잡힌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설련 아가씨가 보내셨습니다. 소매 안에 있습니다."초비가 소매를 뒤지자 접힌 종이가 나왔다. 제가 볼 것이 아니라서 펴지 않고 품에 넣었다.*독고진겸이 협도 어귀에 서 있었다.기와 소리를 듣고 제 자리에서 온 걸음이었다. 늙은 사내가 엎드린 궁인의 얼굴을 보았다. 셋 중 하나의 같은 얼굴이었다."설련이는 어찌 있소.""안에 계십니다."궁인은 얼굴을 들지 않고 그렇게만 답했다. 독고진겸은 더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얼굴 앞에서는 물을 말이 없었다."왕부로 데려가오. 나는 여기 있겠소."초비가 궁인을 일으켜 세웠다. 묵아가 실 끝을 제 손목에 감아 쥐었다. 끌지 않고 앞세워 걸었다. 독고진겸은 따라오지 않고 담 밖 제 자리로 돌아갔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8. 문턱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 그늘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