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저는 정말 이름을 모릅니다."
은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어떤 여인이 저를 불렀습니다. 검은 장막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고, 목소리도 낮게 깔았습니다. 이 약재를 넣으면 은자 열 냥을 주겠다고, 거절하면 제 동생을 팔아 버리겠다고…"
"그 여인이 남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은매가 품에서 작은 비단 조각을 꺼냈다.
"약재가 싸여 있던 천입니다. 버리려 했는데, 무늬가 고와서…"
청아가 그것을 받아 월령에게 건넸다. 흰 비단 조각에 연꽃 무늬가 은실로 수놓여 있었다.
아주 작고 섬세한 자수였다. 햇빛 아래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손바닥 안에서 기울 때마다 물 위에 뜬 꽃처럼 은빛이 살아났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고급 비단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월령은 알고 있었다.
심서윤은 늘 그런 연꽃 무늬를 좋아했다.
가련하고 깨끗해 보인다며.
월령은 비단 조각을 손안에 접었다. 예전의 그녀는 이 작은 무늬 하나도 보지 못했다.
서윤이 흘린 눈물만 보았고, 둘째 부인의 다정한 걱정만 들었다. 어머니의 기침 뒤에서 누가 웃음을 삼키는지, 끝내 보지 못했다.
이제는 보였다.
너무 선명하게.
"이 약은 그대로 올리지 않는다."
월령이 말했다.
은매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아가씨?"
"어머니께서 드실 약은 내가 따로 준비한다. 다만, 모두가 이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잠시 뒤 서원당에는 둘째 부인과 심서윤이 올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탕약을 권하겠지.
그때 그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누가 어머니의 숨이 꺼지기를 기다리는지.
누가 약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지.
"은매. 살고 싶으면, 오늘 본 것을 잊어라."
월령은 손안의 연꽃 비단을 소매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누가 이 약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똑똑히 보아 두어라."
은매가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약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느린 걸음.
병문안을 온 귀한 손님처럼 조심스러운, 그러나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었다. 문밖의 햇빛이 발치에서 한 번 흐려졌다.
누군가 문 앞에 섰다.
청아가 숨을 멈췄다.
월령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
심서윤이었다.
봄이 문을 연 첫날, 첫 번째 손님이 약방 앞에 서 있었다. 월령은 소매 안에 연꽃 비단을 감춘 채, 천천히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 가련한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참이었다.
달이 바뀌고, 월령은 왕부의 살림 장부를 다시 폈다.지난달 표해 두지 않은 자리. 행랑 사람들의 삯을 적은 줄이었다.마 어멈의 굵은 글씨가, 그 줄에서 또 한 번 흐려져 있었다.월령은 그 줄의 숫자를 세지 않았다. 대신, 그 줄에 적힌 이름들을 보았다. 행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 그 가운데 하나에, 삯이 다른 손을 거쳐 나간 흔적이 있었다.칠복이라는 이름이었다.곳간에서 나온 돈이 삯이 되어 사람에게 닿기까지, 그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길이, 두 달에 한 번씩 굵은 글씨를 흐리게 만들었다.월령은 그 자국을 오래 보지 않았다. 보는 것을 들키면, 감추는 손이 더 깊이 숨었다.*마 어멈의 서방이라 했다.월령은 청아를 통해 그 이야기를 주웠다. 캐물은 것은 아니었다. 부엌에서 청아가 나물을 다듬다 옮겨 온 말이었다."마마님, 그 마 어멈 서방이 노름을 심하게 한대요."청아가 목소리를 낮췄다."삯을 받는 족족 어디로 새 나간다고, 부엌 사람들이 그러던데요.""그 말을 함부로 옮기지 마라.""…예."청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곧, 왕부 부엌은 솥이 심가보다 둘이나 많더라며 딴 이야기로 재잘거렸다. 월령은 그 재잘거림을 막지 않았다. 낯선 집의 낮은, 그런 소리 하나로 조금 덜 낯설어졌다.월령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흐려진 획이 노름빚 하나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만, 마음 한쪽에 걸어 두었다.*낮에, 월령은 행랑 마당을 지나며 마 어멈을 보았다.마 어멈은 왕부의 문을 여닫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물건을 지고 드나드는 장사치의 짐을 하나하나 살폈다. 손이 야무졌다. 열아홉 해 문을 지킨 사람다운 눈썰미였다.다만, 한 장사치의 짐 앞에서 그 손이 한 번 멎었다.기름을 지고 온 장사치였다. 마 어멈은 그 기름통을 유난히 오래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 들였다.다른 짐은 손짓 한 번으로 들여보내던 사람이었다. 그 기름통 앞에서만, 마 어멈의 눈이 한 박자 더 머물렀다. 들이
가례 사흘 뒤, 위지헌이 조정에 들었다.넉 달을 비운 자리였다. 삭원의 겨울을 하루에 끝내고 돌아온 섭정왕에게, 대신들의 예가 한 뼘씩 깊어졌다.경화제가 순검패를 돌려주었다.한 달 전 거둔 도성 순검권이었다. 황제는 그것을 친정 승전의 상으로 삼지 않았다. 다만 정무를 논하는 자리에서, 지나가듯 예부에 명했다."섭정왕의 순검을 전과 같이 둔다."돌려주는 말치고는, 무게가 실리지 않은 말이었다.위지헌은 그 가벼움을 읽었다. 가볍게 돌려준 것은, 가볍게 다시 거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내관이 그 명을 받아 적었다. 붓이 종이를 지나는 소리가, 넓은 정전에서 유난히 작게 들렸다.삼황자 위명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지난겨울 자녕궁과 반걸음 어긋난 뒤로, 위명서는 어전에서 말수가 줄었다. 순검패가 섭정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예전처럼 눈에 힘을 주지 않았다. 다만 비워 둔 결재 칸을, 한 번 오래 보았다.그 빈 칸을 읽는 눈이, 위지헌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정무가 끝난 뒤, 허도겸이 절목 하나를 받쳐 올렸다.북변의 군량 절목이었다. 삭원 결전으로 축난 군량을 다시 채우는 셈이 적혀 있었다. 숫자는 맞았다.다만 절목의 끝, 폐하의 친람을 받고 결재가 내리는 칸이 비어 있었다."폐하께서 보셨습니까."위지헌이 물었다."친람은 어제 마치셨다 합니다."허도겸이 낮게 답했다."결재는, 아직 내리지 않으셨습니다."보고도 비워 둔 칸이었다.*그날 밤, 위지헌은 안채에서 그 이야기를 월령에게 옮겼다.숨기는 성미가 아니었다. 어렵게 두지 않고, 먼저 풀어 말했다."폐하께서 순검을 돌려주시고, 군량 결재는 비워 두셨다.""돌려주신 것과 비워 두신 것이, 같은 날의 일이군요.""그렇다."월령은 잠깐 생각했다."한 손으로는 자리를 돌려주시고, 다른 손으로는 그 자리의 값을 아직 안 치르셨다는 걸 보이신 거예요. 왕야가 그 자리를 어떻게 쓰시는지, 봄 한 철 더 보시겠다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너는 폐하를 뵌 적도 없이
왕부의 아침은, 심가의 아침보다 문이 많았다.월령이 안채를 나서자, 회랑 끝에서 마 어멈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부의 행랑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들이고 내보내는 문마다, 그 손을 한 번씩 거쳤다."마마님, 문안 여쭙습니다."마 어멈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숙이는 각도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다만 고개를 드는 것이, 반 박자 늦었다."오래 이 집을 지켰다고 들었어.""열아홉 해입니다.""그럼 나보다 이 집을 잘 알겠구나."월령이 웃었다. 마 어멈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청아가 안채 세간을 옮기며 자꾸 두리번거렸다."아가씨, 여기는 문이 왜 이렇게 많아요. 심가에서는 한 바퀴 돌면 다 봤는데.""익숙해지면 적어 보여.""저는 어제도 부엌을 못 찾아서 세 번이나 물었어요."청아가 입을 삐죽였다. 월령은 그 투정이 반가웠다. 낯선 집에서,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부엌을 못 찾는 것마저.*왕부의 안채에는, 감송향이 옅게 배어 있었다.위지헌의 옷에서 나던 냄새였다. 그 냄새가 방 하나가 아니라 집 전체에 낮게 깔려 있었다. 월령은 그 사실이 낯설고, 또 낯익었다.지난겨울, 그 냄새는 늘 한 뼘 밖에 있었다. 문밖에서, 반걸음 앞에서. 오늘 아침에는, 그녀가 눈을 뜬 자리에 그 냄새가 함께 있었다.심가의 냄새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집의 냄새가 그녀의 아침이 되어 갈 것이었다.*낮에, 월령은 왕부의 살림 장부를 폈다.안주인이 살림을 살피는 치부책이었다. 곳간에 드는 쌀과 숯, 나가는 삯과 물건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글씨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반듯한 서리의 글씨, 하나는 눌러 쓴 굵은 글씨.굵은 글씨가 마 어멈의 것이었다.월령은 그것을 처음부터 천천히 넘겼다. 숫자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었다. 열아홉 해 이 집을 지킨 손이 어디에서 힘이 들어가고 어디에서 풀리는지를, 눈으로 짚어 보았다.대부분은 고르게 눌린 글씨였다.다만 달포에 한 번, 행랑 사람들의 삯을 적은 줄에서, 붓이 한 번씩 머뭇거
혼례 이튿날 아침, 왕부에 봄빛이 들었다.월령은 낯선 천장 아래에서 눈을 떴다.심가의 방이 아니었다. 왕부의 안채였다. 창호지로 든 아침빛이, 심가의 것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서 내려왔다.곁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월령이 몸을 일으키자, 낮은 상 위에 놓인 것이 보였다. 흰 바둑돌과 검은 바둑돌 두 알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간밤에 그녀가 함에서 꺼내 둔 것이었다. 두 돌이, 이제 한 상 위에 있었다.*청아가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아가씨… 아니, 마마님."청아가 호칭을 고치다 얼굴을 붉혔다."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부르던 대로 불러."월령이 웃었다."네가 아가씨라 부르면, 나는 아직 심가의 딸이야. 그게 좋아."청아가 웃으며 세숫물을 놓았다.월령이 머리를 매만지자, 두 개의 비녀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백옥과 살구나무. 어머니의 손과, 그가 깎은 봄이 함께 있었다.*위지헌은 안채 마당에 있었다.이른 아침부터, 그의 손에는 이미 문서 하나가 들려 있었다.혼례 이튿날인데도, 그는 일을 놓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문서는, 어제까지의 것과 조금 달랐다.기윤이 낮게 보고했다."연이라는 이름이, 어젯밤 도성 밖으로 움직였습니다. 가례를 흠집 내려던 손이, 판을 잃고 물러난 듯합니다.""쫓지 마라."위지헌이 말했다."어젯밤은, 쫓지 않는 밤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센다."그는 문서를 접었다.연이라는 이름도, 자녕궁의 그늘도, 아직 다 걷히지 않았다. 삭원 너머의 흑령도, 봄이 지나면 다시 올 것이었다. 병풍 뒤의 황제가 비워 둔 결재 칸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그러나 오늘 아침만은, 그 모든 것을 잠시 뒤에 두었다.*월령이 마당으로 나왔다.위지헌이 돌아보았다.붉은 옷은 벗었다. 오늘 아침, 그녀는 무늬 없는 엷은 봄옷을 입고 있었다. 두 개의 비녀만, 여전히 머리 위에 있었다."일찍 일어나셨네요.""버릇이다.""오늘 하루는, 그 버릇을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늘
신방에는 붉은 초 한 쌍이 타고 있었다.청아가 신부의 겉옷을 벗기고, 머리의 두 비녀만 남긴 채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전, 청아는 한 번 더 눈시울을 붉혔다가, 이번에는 웃으며 나갔다.문이 닫혔다.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월령은 낮은 상 앞에 앉아 있었다. 붉은 옷의 소맷단 위로, 손끝이 조금 떨렸다. 촛불이 그 떨림을 크게도, 작게도 만들지 않고 그대로 비췄다.위지헌이 그 앞에 앉았다.늘 한 뼘을 남기던 사람이었다. 문밖에 서고, 손을 뻗기 전에 멎고, 닿기 전의 거리를 지키던 사람. 오늘 밤, 그 사이를 막던 것들이 다 걷혔다.그런데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떨리느냐.""조금.""늘 '조금'이라 하는구나."월령은 답하지 못했다. 대신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았다. 촛불이, 붉게 물든 귓불을 비췄다.그 붉은빛이 대답이었다.위지헌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오늘은 왕야가 아니다. 이제 왕야 대신, 부군이라 불러라."월령의 눈이 흔들렸다."…부군."그 두 글자가 그녀의 입술을 처음 지나갔다. 그 낮은 부름에, 그의 눈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위지헌이 손을 들었다.전장에서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겨울에 덴 화상 자국 위로, 새 흉이 얹힌 손. 그 손이, 월령의 뺨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에 닿았다.그리고 머리로 올라갔다.백옥 비녀를, 천천히 뽑았다.살구나무 비녀도, 뒤이어 뽑았다.두 비녀가 낮은 상 위에 놓이는 소리가, 유난히 맑게 울렸다. 묶여 있던 검은 머리가 어깨 위로, 등 뒤로 풀려 내렸다. 촛불이 그 결을 한 올씩 지나갔다.위지헌은 그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어 보았다.넉 달을, 아니 두 생을 참은 손이었다."령아."그가 이름을 불렀다. 혼례상 앞에서 처음 부른 이름을, 이제 둘만 남은 방에서 다시 불렀다.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이 조금씩 낮아졌다.월령이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이, 그의 눈 아래로 가까이 들어왔다.닿기 전의 거리가, 오늘 밤에는 남지 않았다.살구골에서
왕부의 마당에, 혼례상이 차려졌다.붉은 초 한 쌍이 타올랐고, 상 위에는 산 닭과 대추와 밤이 놓였다. 살구나무로 깎은 함이 상 한쪽에 있었다.하객은 많지 않았다.경화제는 직접 나오지 않고, 황후 하문정을 보냈다. 화안공주가 그 곁에 섰다. 조정의 대신 몇과, 북에서 급히 내려온 진북대장군의 부장 하나가 심도윤을 대신해 자리했다.심가에서는 유씨와 서윤, 아란이 왔다. 청아와 은매도 신부의 사람으로 뒤에 섰다.왕부에서는 기윤과 윤백과 강무진이, 오늘은 그림자가 아니라 마당 가운데 섰다.*신랑과 신부가 마주 섰다.붉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었다.혼례의 홀기가 낭독되었다. 절을 올리고, 잔을 나누는 절차가 이어졌다. 월령은 그 절차를 천천히 따랐다.절을 올릴 때, 두 개의 비녀가 흔들리지 않았다.잔을 나눌 때, 술은 반 모금이었다. 신부의 잔은 늘 반 모금이라 했다. 월령은 그 반 모금을 넘겼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술이, 오늘은 쓰지 않았다.*절차의 끝에,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가린 것을 걷었다.붉은 천이 걷히자, 월령의 얼굴이 드러났다.위지헌은 그 얼굴을 보았다.전생에, 그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얼굴은 형장에 있었다. 빗물에 젖고, 다 잃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그의 품에서 '다시는 황후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오늘, 그가 본 얼굴은 혼례상 앞에 있었다.붉은 옷을 입고, 두 개의 비녀를 꽂고, 젖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위지헌은 그 얼굴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위지헌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그는 오래 참았던 것을, 그 자리에서 다 참지는 못했다."령아."낮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령아.오래 아껴 두었던 호칭이었다. 첫 입맞춤과도 분리해 두었던, 그가 가장 무너질 것 같은 순간을 위해 남겨 둔 이름이었다.오늘, 그가 그 이름을 처음 썼다.하객들은 그 부름을 듣지 못했다. 두 개의 비녀 사이로만 지나간 소리였다.월령은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월령의 눈에서 물기가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은호였다.은매가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는 거의 소리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은호야. 그 두 글자가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매는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동생이 깰까 봐 참는 울음이었다.은호는 작았다.일곱 살이라 들었지만, 마른 몸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손목에는 회색 실이 묶여 있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침을 참을 때마다 혀끝으로 이를 쳤다. 딱, 딱. 작은 소리는 방 안 사람들의 숨을 매번 붙잡았다.왕부 의원은 은호의 맥을 짚고 오래 말이 없었다.청아는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