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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숙모

作者: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4 00:35:15

방 안에는 약한 햇살이 고여 있었다. 침상에 기대 앉은 유씨는 창백했지만 살아 있었다.

아직 눈빛이 꺼지지 않았고, 손끝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월령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이 방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잡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

"월령아."

유씨가 고개를 돌렸다.

그 부름 하나에 월령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네가 웬일로 약방까지 다녀왔니. 몸이 약한 아이가."

"어머니 약이라서요."

월령은 침상 곁에 앉았다.

유씨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월령이 웃어도 울음을 알아보았고, 아무 말 않아도 상처를 먼저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무 일도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번 거짓말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부인 한씨는 이미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짙은 자색 치마에 단정한 비녀를 꽂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씨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향낭에서 매화와 침향을 섞은 향이 났다.

너무 정갈해서, 오히려 병든 방의 냄새와 어울리지 않았다.

"월령이가 효심이 깊구나. 아픈 몸으로 직접 약을 가져오다니."

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숙모께서 좋은 약을 보내 주셨다 들었습니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니. 네 어머니께서 어서 나으셔야지."

한씨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때의 월령은 그 눈물을 믿었다.

지금은 그 손수건 끝에 묻은 향까지 의심스러웠다.

서윤이 한 걸음 나섰다.

"큰어머니, 어머니께서 밤새 의원 처방을 다시 살피셨어요. 꼭 드셔야 해요."

"고맙구나, 서윤아."

유씨가 희미하게 웃었다.

월령은 탕약 그릇을 들었다. 그 순간 한씨와 서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초조함, 기대, 그리고 아주 깊은 곳의 두려움.

월령은 그 모두를 보았다.

"어머니, 약이 조금 뜨겁습니다. 제가 먼저 식혀 볼게요."

월령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올렸다. 한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서윤은 숨을 멈췄다.

그러나 월령은 숟가락을 어머니의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문득 손을 멈췄다.

"아. 제가 예를 잊었습니다."

방 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월령은 한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숙모께서 어머니를 위해 귀한 약을 구해 주셨으니, 먼저 향을 봐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씨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방 안의 햇살이 한 치쯤 물러난 듯했다.

서윤이 급히 웃었다.

"언니도 참. 약을 어찌 어머니께서 먼저—"

"왜?"

월령이 물었다.

그 한 글자에 서윤의 웃음이 멈췄다.

"숙모께서 직접 구해 주신 약이라 들었어. 어머니를 위한 정성이니, 향이 제대로 우러났는지 보시는 게 이상한 일이니?"

"그건…"

한씨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월령아, 나는 기침이 없으니 약향을 보아도 잘 모를 것이다."

"드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월령은 숟가락을 천천히 한씨 앞에 내밀었다.

"그저 향만 보시면 됩니다."

한씨는 숟가락을 바라보았다.

탕약은 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씨는 그것을 몰랐다.

서윤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하나 — 어머니가 마시면 죽어야 할 약이라는 것. 그러므로 지금 그들의 얼굴이 증거였다.

"어머니!"

서윤이 갑자기 한씨의 팔을 붙잡았다.

"향이 너무 짙어요. 큰어머니 몸에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의원을 다시—"

"서윤아."

월령이 조용히 불렀다.

"너는 왜 겁을 내니?"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요?"

"나는 숙모께 향을 봐 달라고 했을 뿐이야."

"언니, 저는 그저 큰어머니가 걱정되어…"

"그래."

월령이 미소 지었다.

"나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이러는 거야."

침묵이 길어졌다.

유씨는 말없이 월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깊었다.

무언가를 눈치챘으나, 아직 묻지 않았다. 한씨는 결국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향만 맡으면 되는 일이었고, 마실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향이… 괜찮구나."

"정말입니까?"

"그래."

"그럼 어머니께 올리겠습니다."

월령이 숟가락을 돌려받으려 하자, 서윤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제가… 제가 다시 데워 오겠습니다. 식은 약은 효험이 떨어지니까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어리구나.

월령은 생각했다.

곤원전의 밀서를 훔치던 서윤은 이보다 훨씬 능숙했다. 지금의 서윤은 악의를 품었으되, 아직 궁중의 칼날처럼 단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 부러뜨릴 수 있다. 아니 — 부러뜨리기엔 이르다.

누가 이 아이에게 칼을 쥐여 주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그러면 네가 데워 오렴."

월령은 뜻밖에도 순순히 탕약 그릇을 내밀었다. 서윤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 순간, 월령은 그릇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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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20. 먼저 가는 사람

    출정의 아침, 도성의 북문 앞에 북경군이 도열했다.순검패를 잃은 섭정왕이 도성을 비운다는 말에, 대신들의 얼굴이 갈렸다. 흑령을 막을 사람이 그뿐이라 보내야 한다는 쪽과, 순검권도 없는 자가 군을 끌고 나가면 도성이 빈다는 쪽이 나뉘었다.위지헌은 그 갈린 말들 한가운데를 지나, 말에 올랐다.검은 갑주 위로 아침빛이 서늘하게 미끄러졌다. 비어 있던 옥대 자리에는, 오늘 대신 흑옥 군패가 걸렸다. 순검패는 잃었으나, 군패는 그의 것이었다.기윤이 곁에 섰다."도성은 어찌합니까.""강무진을 남긴다."위지헌이 말했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심가를 지켜라. 앞에는 서지 마라. 순검패 없는 왕부 군사가 심가 앞에 서면, 그것이 새 흠이 된다. 그림자로만 있어라.""봄의 부름은요."위지헌의 눈이 잠시 남쪽 궁성 쪽으로 향했다."그 문은 내 칼이 못 연다. 그 안에서는, 그 사람이 혼자 서야 한다."그는 그 말을 하며 손끝을 한 번 굽혔다.혼자 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문밖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문이 닫혀도 그녀가 나올 문을 지키는 것뿐이라는 것.*북문 성루 아래, 배웅하는 사람들 틈에 월령이 있었다.정비가 될 사람이 출정하는 약혼자를 공공연히 배웅하는 것은 아직 일렀다. 그래서 그녀는 심가의 딸로, 아버지의 군영에 겨울 군량을 보태는 사람의 자리에 섰다.북문군의 수레에는 심가가 마련한 쌀과 소금이 실려 있었다. 저잣거리 값 그대로 판 그 소금의 남은 몫이었다.위지헌의 말이 성문을 지나기 전, 그의 시선이 그 수레 곁의 푸른 옷자락에 닿았다.두 사람은 서로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다만 위지헌이 말 위에서 아주 짧게 고개를 숙였다. 예를 갖추는 것도, 명을 내리는 것도 아닌 움직임이었다.봄 안에 있겠다는 약속을, 그는 그 한 번의 끄덕임에 다시 담았다.월령도 고개를 숙였다.늦지 말라는 말을, 그녀는 그 한 번의 숙임에 다시 실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9. 반드시 돌아온다

    계례는 가을 아침에 조용히 치러졌다.서원당 마당에 자리가 깔리고, 유씨가 큰손을 맡았다. 땋아 내렸던 월령의 머리가 처음으로 올려져 쪽을 이루었다. 유씨의 손이 어머니에게 받은 백옥 비녀를 그 위에 꽂았다.빗살이 마지막으로 지날 때, 유씨의 손이 잠시 떨렸다."이제 너는 여인이다."유씨가 낮게 말했다."어미가 지켜 주던 자리에서, 네가 서는 자리로 옮겨 간다."월령은 고개를 숙였다.계례가 끝난 뒤, 그녀는 위지헌이 두고 간 흰 비단을 폈다. 살구나무 비녀를, 어머니가 올린 백옥 비녀 곁에 나란히 두었다.봄에 먼저 피는 나무라 했다. 가을에 올린 성년의 머리 곁에, 봄 하나가 놓였다.*출정 전날 밤, 위지헌이 심가에 왔다.이번에는 대문 안까지 들지 않았다. 서원당으로 난 협문 밖, 달빛이 닿는 담장 아래에 섰다. 내일 북으로 떠나는 사람이, 계례를 마친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러 온 걸음이었다.월령이 협문을 열고 나왔다.올린 머리 위에 백옥 비녀가 맑은 빛으로 남아 있었다. 위지헌의 시선이 그 비녀에 잠시 머물렀다."여인이 되었구나.""예.""곁에서 보지 못했다."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아쉬움이 옅게 배어 있었다.월령은 소매 안에서 살구나무 비녀를 꺼냈다. 계례에 함께 두라던 그 비녀였다."곁에 계셨습니다. 이것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위지헌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담장 아래 달빛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거리를 하얗게 비췄다.닿기 전의 거리가, 오늘은 유난히 짧았다.계례를 마친 여인과, 내일 전장으로 가는 남자였다. 둘 사이를 막던 많은 것들이 오늘 밤에는 얇아져 있었다.위지헌의 손이 올라왔다. 월령의 뺨 옆, 비녀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에 손끝이 닿을 듯 다가왔다.그러나 그는 그 손을, 머리카락 대신 그녀의 손 위에 내렸다."돌아온다."낮은 목소리였다."반드시 돌아온다. 봄이 오기 전에."월령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전생에도 그는 늦게 왔다. 그녀가 이미 다 잃은 뒤에야, 빗속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8. 북에서 온 먼지

    계례를 사흘 앞둔 새벽, 북에서 급보가 왔다.말 한 필이 도성의 북문을 넘어 곧장 왕부로 달렸다. 말의 다리에는 마른 흙이 두껍게 엉겨 있었다. 진북 관문 너머, 삭원과 흑령산맥 쪽에서 온 흙이었다.위지헌은 급보를 새벽빛에 펼쳤다.흑령의 부족들이 겨울을 앞두고 국경의 봉수대 둘을 태웠다. 진북대장군 심도윤이 북문군으로 막고 있으나, 병력이 얇았다. 군량은 지난 회암의 소란으로 이미 축이 났다.위지헌의 눈이 급보의 마지막 줄에서 멎었다.'섭정왕의 친정을 청함.'기윤이 곁에서 낮게 말했다."조정이 전하를 부를 것입니다. 북경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전하뿐입니다."위지헌은 급보를 접었다.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는 첫 줄에서 이미 알았다. 다만 지금은 때가 나빴다. 순검패를 잃은 몸으로 도성을 비우면, 그 빈자리로 자녕궁의 손이 들어온다. 봄에 있을 내명부의 부름 앞에, 월령은 혼자 남는다.그리고 계례가 사흘 뒤였다.*같은 새벽, 심가에도 북문에서 온 전갈이 닿았다.진북대장군의 짧은 서찰이었다. 딸의 계례를 축하하는 말은 한 줄뿐이었고, 나머지는 군량과 병력과 겨울에 관한 것이었다.유씨는 그 서찰을 읽고 오래 창밖을 보았다."네 아버지가, 이번 겨울은 길겠다 하시는구나."월령은 어머니 곁에 앉았다.아버지의 글씨는 여전히 곧고 좁았다. 급한 군보에서도 마지막 획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이번 서찰의 끝 획 하나가, 평소보다 조금 짧았다. 손가락 둘을 잃은 손이 오래 쥐고 있었던 붓의 흔적이었다.월령은 그 짧은 획을 손끝으로 짚었다.전생에도 이 겨울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북에서 겨울을 났고, 봄이 오기 전에 도성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멀리 있는 사이, 심가의 담장 안으로 손들이 들어왔다.이번에는 그 손들을, 아버지 없이 그녀가 막아야 했다."어머니.""말해라.""왕야께서 북으로 가실 겁니다."유씨가 딸을 보았다."어찌 아느냐.""흑령이 봉수대를 태웠다면, 북경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왕야뿐입니다. 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7. 비녀를 올리는 날

    납채 봉서가 든 뒤, 심가에서는 먼저 계례를 의논했다.혼례에 앞서 여자는 성년의 문턱을 넘어야 했다. 땋아 내린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가, 여아를 혼인할 수 있는 여인으로 세우는 의례였다. 가례는 종친부가 살피지만, 계례는 가문이 주관하는 집안일이었다.유씨는 병색이 옅어진 손으로, 오래 간직한 비녀함을 열었다.함 안에는 유씨가 시집올 때 어머니에게 받은 백옥 비녀가 있었다. 세월에 빛이 조금 죽었으나, 옥의 결은 그대로였다."이걸로 하자."유씨가 말했다."금비녀도, 산호 떨잠도 있다. 그러나 네 계례에는 어미가 어미에게 받은 이것을 올리고 싶구나."월령은 그 비녀를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지위를 보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미의 손을 타고 딸의 손으로 오는 물건이었다. 전생에는 이 비녀를 올려 보지 못하고, 남이 정한 봉관부터 이마에 얹었다."어머니께서 올려 주세요.""내가?""계례의 큰손은 집안의 어른이 맡는다 들었습니다. 제 어른은 어머니십니다."유씨의 눈가가 붉어졌다.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딸의 땋은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 보았다. 오래 빗어 준 머리였다.*같은 날 저녁, 위지헌이 심가에 들었다.약혼이 어전의 봉서로 열린 뒤, 그가 심가의 문으로 정식으로 드는 첫걸음이었다. 순검패를 잃은 몸이라 수행은 단출했다. 기윤과 윤백만 대문 밖에 두고, 그는 혼자 서원당으로 들었다.유씨 앞에서, 위지헌은 몸을 낮추어 예를 갖췄다."심 부인. 늦게 왔소.""왕야께서 이 집의 문을 낮추어 드시니, 도리어 이 집이 높아지는 듯합니다.""낮춘 것이 아니오. 이 집이 본디 높소."유씨가 낮게 웃었다."딸을 데려가려는 사람의 말치고는, 값을 후하게 치르시는군요.""값이 아니라 사실이오."위지헌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 안에, 오래 눌러 둔 무엇이 있었다.월령은 문가에 서서 그 대화를 들었다.어머니 앞에서 그는 늘 말을 낮추었다. 황제 앞에서도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던 사람이, 유씨 앞에서만은 먼저 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6. 봄의 부름

    자녕궁의 봄은 문상궁 없이 열렸다.봉함이 그어진 뒤로 문상궁은 방 하나에 머물렀고, 그 자리를 설련이 조금씩 대신했다. 찻잔을 살피던 손이 이제 향안의 기록까지 살폈다.숙비는 그 손을 지켜보았다."설련아. 네 손이 요즘 부지런하구나.""고모님께 누가 될까 하여, 배우는 중입니다.""누가 되는 것이 두려우냐."설련의 손끝이 잠시 멎었다.숙비는 그 멎음을 보았다. 이 아이는 늘 누가 될까 두려워하며 산다. 두려움이 큰 아이는 다루기 쉽다. 두려움을 준 손만 바라보기 때문이다."두려워 마라. 봄에 네게 맡길 일이 있다.""제게요?""황후께서 정비가 될 아이의 부덕을 살피시겠다 하셨다. 심가의 딸을 내명부로 부르는 자리다. 그 자리에 네가 함께 든다."설련의 눈이 흔들렸다."제가 무엇을…""보기만 하면 된다. 그 아이가 어떤 얼굴로 서는지, 어디를 먼저 보는지, 무엇에 손이 떨리는지. 너는 겁이 많으니, 겁 많은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겁이 잘 보인다."숙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설련은 고개를 숙였다."예, 고모님."대답은 순했다. 그러나 대답을 하면서, 설련의 시선은 향안 위에 놓인 낡은 명패 하나로 갔다. 지난 국청에서 돌아온 물건들 틈에 섞여 온, 작은 새가 새겨진 나무패였다.죽은 군졸의 것이었다. 가족을 찾아 돌려보내야 할 패가, 아직 자녕궁 한쪽에 남아 있었다.설련의 눈이 그 새에 오래 머물렀다.정비라는 두 글자보다, 그 작은 새가 설련에게는 더 오래 남았다.*봄의 부름이 있으리라는 말은, 그날 저녁 왕부에도 닿았다.위지헌은 그 소식을 듣고 오래 말이 없었다.내명부의 문은 섭정왕의 칼도 열지 못했다. 황후가 부르면, 정비가 될 사람은 혼자 그 문 안으로 들어야 했다. 그가 궁문 밖에 서던 날들이 다시 올 참이었다."기윤.""예, 전하.""황후전에 내 편이 있느냐."기윤이 잠시 말을 골랐다."황후마마께서는 지난 국청에서 심 소저의 곧음을 보셨습니다. 마마의 마음은 아직 어느 쪽도 아니지만, 숙비 쪽은 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5. 부르지 않은 이름

    삼황자부의 밤은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위명서는 남문 게시문의 필사본을 태우지 않고 두었다. 그 옆에는 예부에서 흘러나온 납채 봉서의 사본이 있었다. 심월령의 이름과 위지헌의 이름이 한 줄에 적힌 종이였다.그는 그 두 이름을 오래 보았다.후원에서, 별궁에서, 그는 그 아이를 다듬으면 쓸모 있겠다고 여겼다. 곁에 두면 황좌의 문이 넓어질 것이라고. 지금 그 아이의 이름은 다른 이름 곁에 적혀, 어보의 빛을 받고 있었다.다듬어질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제 발로, 다른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가 섰다.위명서의 손끝이 봉서 사본 위에서 멎었다.그가 지금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이름 붙이지 못했다.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오기인지, 이용하려다 놓친 패에 대한 분함인지. 세 가지가 같은 온도로 섞여, 어느 하나로 갈라지지 않았다.*주란이 새 차를 들고 들어왔을 때, 그는 봉서 사본을 덮지 않았다.주란의 시선이 그 종이 위의 두 이름에 닿았다.심월령.그녀는 그 이름을 알았다. 저하가 태우지 않고 남겨 둔 게시문도, 밤마다 오래 보는 종이도, 모두 그 이름과 닿아 있었다.주란은 차를 따랐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봉서가 심가에 들었다고 들었습니다.""들었느냐.""저하께서 태우지 않으신 종이가, 요즘은 늘 그 이름을 향하고 있어서요."위명서가 고개를 들었다.주란은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제가 저하 곁에 있는 것은, 저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부르지 않으셔도 저는 옵니다. 다만…"그녀의 목소리 끝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부르지 않는 이름 곁에서, 부르고 싶어 견디는 이름을 밤마다 보는 건, 조금 아픕니다."위명서는 답하지 않았다.답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주란도 이제 알았다. 그녀는 빈 잔을 거두려 손을 뻗었다.그때 위명서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주란의 숨이 멎었다. 저하가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처음이었다."주란."그가 그녀의 이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 그늘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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