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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숙모

مؤلف: moominkiller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5-24 00:35:15

방 안에는 약한 햇살이 고여 있었다. 침상에 기대 앉은 유씨는 창백했지만 살아 있었다.

아직 눈빛이 꺼지지 않았고, 손끝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월령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이 방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잡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

"월령아."

유씨가 고개를 돌렸다.

그 부름 하나에 월령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네가 웬일로 약방까지 다녀왔니. 몸이 약한 아이가."

"어머니 약이라서요."

월령은 침상 곁에 앉았다.

유씨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월령이 웃어도 울음을 알아보았고, 아무 말 않아도 상처를 먼저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무 일도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번 거짓말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부인 한씨는 이미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짙은 자색 치마에 단정한 비녀를 꽂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씨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향낭에서 매화와 침향을 섞은 향이 났다.

너무 정갈해서, 오히려 병든 방의 냄새와 어울리지 않았다.

"월령이가 효심이 깊구나. 아픈 몸으로 직접 약을 가져오다니."

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숙모께서 좋은 약을 보내 주셨다 들었습니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니. 네 어머니께서 어서 나으셔야지."

한씨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때의 월령은 그 눈물을 믿었다.

지금은 그 손수건 끝에 묻은 향까지 의심스러웠다.

서윤이 한 걸음 나섰다.

"큰어머니, 어머니께서 밤새 의원 처방을 다시 살피셨어요. 꼭 드셔야 해요."

"고맙구나, 서윤아."

유씨가 희미하게 웃었다.

월령은 탕약 그릇을 들었다. 그 순간 한씨와 서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초조함, 기대, 그리고 아주 깊은 곳의 두려움.

월령은 그 모두를 보았다.

"어머니, 약이 조금 뜨겁습니다. 제가 먼저 식혀 볼게요."

월령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올렸다. 한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서윤은 숨을 멈췄다.

그러나 월령은 숟가락을 어머니의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문득 손을 멈췄다.

"아. 제가 예를 잊었습니다."

방 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월령은 한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숙모께서 어머니를 위해 귀한 약을 구해 주셨으니, 먼저 향을 봐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씨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방 안의 햇살이 한 치쯤 물러난 듯했다.

서윤이 급히 웃었다.

"언니도 참. 약을 어찌 어머니께서 먼저—"

"왜?"

월령이 물었다.

그 한 글자에 서윤의 웃음이 멈췄다.

"숙모께서 직접 구해 주신 약이라 들었어. 어머니를 위한 정성이니, 향이 제대로 우러났는지 보시는 게 이상한 일이니?"

"그건…"

한씨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월령아, 나는 기침이 없으니 약향을 보아도 잘 모를 것이다."

"드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월령은 숟가락을 천천히 한씨 앞에 내밀었다.

"그저 향만 보시면 됩니다."

한씨는 숟가락을 바라보았다.

탕약은 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씨는 그것을 몰랐다.

서윤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하나 — 어머니가 마시면 죽어야 할 약이라는 것. 그러므로 지금 그들의 얼굴이 증거였다.

"어머니!"

서윤이 갑자기 한씨의 팔을 붙잡았다.

"향이 너무 짙어요. 큰어머니 몸에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의원을 다시—"

"서윤아."

월령이 조용히 불렀다.

"너는 왜 겁을 내니?"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요?"

"나는 숙모께 향을 봐 달라고 했을 뿐이야."

"언니, 저는 그저 큰어머니가 걱정되어…"

"그래."

월령이 미소 지었다.

"나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이러는 거야."

침묵이 길어졌다.

유씨는 말없이 월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깊었다.

무언가를 눈치챘으나, 아직 묻지 않았다. 한씨는 결국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향만 맡으면 되는 일이었고, 마실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향이… 괜찮구나."

"정말입니까?"

"그래."

"그럼 어머니께 올리겠습니다."

월령이 숟가락을 돌려받으려 하자, 서윤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제가… 제가 다시 데워 오겠습니다. 식은 약은 효험이 떨어지니까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어리구나.

월령은 생각했다.

곤원전의 밀서를 훔치던 서윤은 이보다 훨씬 능숙했다. 지금의 서윤은 악의를 품었으되, 아직 궁중의 칼날처럼 단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 부러뜨릴 수 있다. 아니 — 부러뜨리기엔 이르다.

누가 이 아이에게 칼을 쥐여 주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그러면 네가 데워 오렴."

월령은 뜻밖에도 순순히 탕약 그릇을 내밀었다. 서윤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 순간, 월령은 그릇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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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5. 부르지 않은 이름

    삼황자부의 밤은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위명서는 남문 게시문의 필사본을 태우지 않고 두었다. 그 옆에는 예부에서 흘러나온 납채 봉서의 사본이 있었다. 심월령의 이름과 위지헌의 이름이 한 줄에 적힌 종이였다.그는 그 두 이름을 오래 보았다.후원에서, 별궁에서, 그는 그 아이를 다듬으면 쓸모 있겠다고 여겼다. 곁에 두면 황좌의 문이 넓어질 것이라고. 지금 그 아이의 이름은 다른 이름 곁에 적혀, 어보의 빛을 받고 있었다.다듬어질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제 발로, 다른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가 섰다.위명서의 손끝이 봉서 사본 위에서 멎었다.그가 지금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이름 붙이지 못했다.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오기인지, 이용하려다 놓친 패에 대한 분함인지. 세 가지가 같은 온도로 섞여, 어느 하나로 갈라지지 않았다.*주란이 새 차를 들고 들어왔을 때, 그는 봉서 사본을 덮지 않았다.주란의 시선이 그 종이 위의 두 이름에 닿았다.심월령.그녀는 그 이름을 알았다. 저하가 태우지 않고 남겨 둔 게시문도, 밤마다 오래 보는 종이도, 모두 그 이름과 닿아 있었다.주란은 차를 따랐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봉서가 심가에 들었다고 들었습니다.""들었느냐.""저하께서 태우지 않으신 종이가, 요즘은 늘 그 이름을 향하고 있어서요."위명서가 고개를 들었다.주란은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제가 저하 곁에 있는 것은, 저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부르지 않으셔도 저는 옵니다. 다만…"그녀의 목소리 끝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부르지 않는 이름 곁에서, 부르고 싶어 견디는 이름을 밤마다 보는 건, 조금 아픕니다."위명서는 답하지 않았다.답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주란도 이제 알았다. 그녀는 빈 잔을 거두려 손을 뻗었다.그때 위명서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주란의 숨이 멎었다. 저하가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처음이었다."주란."그가 그녀의 이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4. 형부의 붓

    주내관과 연무는 형부로 넘어갔다.섭정왕이 순검패를 잃은 뒤라, 두 사람의 심문은 왕부가 아니라 형부의 붓으로 적혔다. 위지헌은 그 자리에 들지 못했다. 대신 허도겸이 호부의 이름으로 배석해, 오가는 말을 장부에 옮겼다.주내관은 입이 무거웠다.죽은 여덟 사람의 이름을 형부 서리가 하나씩 읽는 동안에도, 그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곽진에서 장목까지, 여덟 번째 이름이 불릴 때 그의 눈꺼풀이 한 번 떨렸을 뿐이었다."군량패와 장부를 옮기라 명한 것은 인정하는가."형부 낭중이 물었다."명은 위에서 왔습니다.""위가 누구냐."주내관은 오래 말이 없었다."자녕궁 문상궁의 패가 왔습니다.""문상궁이 직접 주었느냐.""패만 왔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허도겸의 붓이 그 대목에서 잠시 멈췄다.문상궁의 패는 왔으나, 문상궁의 얼굴은 없었다. 오상궁도 같은 말을 했고, 연무도 같은 말을 했다. 세 사람이 모두 패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했다. 누군가 문상궁의 이름을 세 번 빌려 쓴 셈이었다.이름을 빌린 손은, 아직 이름이 없었다.*연무는 주내관보다 겁이 많았다.부러진 손목을 나무판에 묶은 채, 그는 제 목숨값을 셈하는 눈으로 형부 낭중을 보았다."소인은 심부름만 했습니다.""그 심부름의 값이 여덟 사람이다."낭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연무의 입술이 떨렸다."패를 건네준 여인이 있었습니다. 자녕궁 뒤편 수문에서 받았습니다. 얼굴은 장막에 가려 못 보았고, 목소리는 낮았습니다. 다만 그 여인이 쓰던 봉랍에…""봉랍에.""작은 글자가 하나 있었습니다."허도겸이 고개를 들었다.연무가 마른침을 삼켰다."연, 이라는 글자였습니다."형부 서리의 붓이 그 글자를 종이에 옮겼다.연.문선이 물길에서 남긴 종이 조각에도 같은 글자가 있었다. 자녕궁의 이름을 빌리는 여인, 장막을 쓰고 목소리를 낮추는 여인, 봉랍 끝에 연이라는 글자를 남기는 여인. 같은 손이 세 번 지나갔다.허도겸은 그 글자를 장부 한쪽에 조용히 적어 두었다.*그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3. 빈틈을 세는 자

    도성의 순검패가 한 달간 왕부를 떠나자, 그 틈을 먼저 센 것은 저잣거리의 소금이었다.염로의 값이 사흘 새 두 번 올랐다.소금은 관에서 값을 정해 파는 물건이었다. 순검이 느슨해지면 그 값을 몰래 올려 차익을 삼키는 손이 반드시 나왔다. 위지헌이 순검패를 쥐고 있을 때는 그 손이 숨었고, 패가 사라지자 그 손이 나왔다.허도겸이 호부 장부를 들고 왕부로 왔다."염창 세 곳의 출고 장부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남원 상납처를 지나던 물표가, 이번에는 동시의 소금으로 옮겨 붙었습니다."위지헌은 장부를 펴 보았으나, 순검패 없이는 염창의 문을 열 명분이 없었다."내 손으로는 못 연다."그가 낮게 말했다."지금 왕부 군사가 염창에 들면, 순검권을 잃은 자가 사사로이 관물을 뒤졌다는 새 흠이 된다. 저쪽은 그 흠을 기다리고 있다."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빈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자리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판이었다. 위지헌은 그 판을 읽었으나, 읽는 것과 넘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같은 판을, 심가의 약방에서 월령도 보고 있었다.은매가 저잣거리에서 소금 값 이야기를 듣고 왔다."아가씨, 소금이 너무 올라서 아랫사람들 김치도 못 담근다고 다들 걱정입니다. 관에서 파는 소금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요."월령은 소매 안의 두 돌을 굴리다 손을 폈다.관물의 값은 왕부가 순검할 일이었다. 그러나 값을 못 견디는 것은 저잣거리의 살림이었다. 왕야의 손이 묶인 지금, 이 일을 관의 문제가 아니라 살림의 문제로 옮기면, 순검패 없이도 움직일 길이 생겼다."청아야.""예, 아가씨.""어머니께 여쭙자. 심가가 곳간의 소금을 풀어, 죽은 여덟 집과 그 이웃에게 값대로만 나누어 팔 수 있는지."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건 장사가 아니라 손해예요.""장사가 아니야. 심가가 소금을 값대로 파는 집이라는 걸 보이는 거야. 관의 소금이 두 배가 되는 동안, 심가의 소금은 어제 값 그대로다. 그러면 사람들이 묻겠지. 어느 쪽이 정직한 값이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2. 여덟 그릇

    납채 봉서가 심가 대문에 든 날, 심가는 잔치를 열지 않았다.유씨는 봉서를 받아 향안 위에 올린 뒤, 먼저 여덟 개의 찬합을 마당에 늘어놓게 했다.회암에서 돌아오지 못한 일곱 사람과, 동문에서 죽은 장목. 여덟째 이름까지 여덟 집이었다."혼사보다 상이 먼저다."유씨가 말했다."우리 집에 좋은 일이 들었다 하여, 그 좋은 일의 값을 치른 집들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월령은 어머니 곁에서 찬합의 수를 함께 셌다. 쌀자루와 베 필, 조문금 봉투가 여덟 몫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지막 여덟째 찬합 위에는, 작은 나무 물고기 하나가 얹혀 있었다.임학의 동생이 새기던 그 손으로, 이번에는 물고기를 새겼다."물고기는 밤에도 눈을 뜨고 있대요."아이가 그 물고기를 심가에 보내온 편에 그렇게 적어 두었다."그러니까 형이 밤길에 무섭지 말라고요."월령은 그 나무 물고기를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새 한 마리가 형의 길을 밝히더니, 이번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밤을 지킨다. 그 작은 손이 죽음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월령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으나, 눈물은 찬합 위로 떨어뜨리지 않았다.*장례 행렬에는 왕부 군사가 붙지 못했다.위지헌이 한 달간 도성 순검권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순검패 없는 왕부 군사가 성안에서 대오를 이루면, 그 자체가 새 흠이 되어 혼약 위에 얹혔다.월령은 그 사정을 먼저 읽었다."북문군에 청하겠습니다."그녀가 유씨에게 말했다."아버지의 옛 부하들이 도성 밖 둔소에 있습니다. 회암의 군졸들은 북문 소속이었으니, 같은 군영이 제 식구의 상을 지키는 것은 흠이 되지 않습니다. 왕야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죽은 이의 이름으로 대오를 세우는 겁니다."유씨가 딸을 보았다."그이 손을 빌리지 않고 네 손으로 하겠다는 게냐.""왕야의 손이 지금 묶여 있습니다. 그 묶인 손을 대신 쓰는 것이 아니라, 제 손이 따로 있음을 보이려 합니다."유씨는 오래 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월령이 직접 붓을 들어 북문 둔소에 서찰을 적었다. 진북대장군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1. 봉서가 가는 길

    예부 관원의 붓이 마지막 획을 긋고 멈췄다.기록칸에 심월령의 이름이 남았다. 그 옆에는 이미 섭정왕 위지헌의 이름이 있었다. 두 이름이 한 줄에 나란히 놓이는 데 삼 년이 걸렸다.경화제가 보낸 내관이 붉은 봉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폐하께서 예부에 명하시어, 납채의 봉서를 심가에 보내라 하셨습니다."돌길 위의 대신들이 낮게 몸을 숙였다.혼약이 어전의 뜻으로 열린다는 말이었다. 밀서가 봉인된 채 삼 년을 기다린 자리에, 오늘 처음 어보의 빛이 닿았다.월령은 그 봉서를 보지 않았다.봉서보다, 제 손을 아직 놓지 않은 손을 먼저 느꼈다. 붕대 너머의 체온은 세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약한 힘이, 어전의 봉서보다 그녀를 더 단단히 세웠다."왕야."월령이 낮게 불렀다."손을."주위에 눈이 많았다. 종친가의 주렴도, 병부의 장수도, 예부의 관원도 이 손을 보고 있었다.위지헌은 곧바로 놓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 마지막 손끝이 떨어질 때, 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등을 한 번 느리게 쓸었다.놓기 전에 남긴 한 획 같은 손짓이었다."봉서는 심가로 간다."그가 말했다."그대는 오늘 왕부로 오지 않아도 된다. 집에서 어머니 곁에 있어라."약혼자가 되었다 하여 곧장 데려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월령은 그 거리가 서운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 오히려 그다웠다."예.""다만."위지헌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봉서가 도착하거든, 나쁜 말이 함께 올 것이다."월령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섭정왕이 어보 없이 군을 냈고, 거짓 게시를 붙였으며, 그 값으로 한 달간 도성 순검패를 잃었다. 그런 사람이 진북대장군의 딸과 혼약을 맺는다. 이 혼사를 두고 좋은 말만 오갈 리 없었다."압니다."월령이 말했다."나쁜 말은 늘 좋은 일 곁에 붙습니다. 오늘은 그 나쁜 말도 함께 받겠습니다."위지헌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그는 더 말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은 관복 자락이 돌길 위에서 낮게 흔들렸다. 비어 있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0. 왕야께 가겠습니다

    긴 돌길 사이로 아침 바람이 지나갔다.월령은 가마에서 완전히 내려섰다. 푸른 치맛자락이 발등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백옥 비녀 아래 묶인 머리카락 한 올이 뺨을 스쳤으나 손을 들어 넘기지 않았다.위지헌은 궁문 계단 아래에서 멎었다.뒤따르던 대신들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 병부 장수 하나가 급한 장계를 내밀었고, 예부 관원이 새 봉서를 들고 기다렸다. 붉은 담 건너 종친가 마차의 주렴도 잠시 들렸다.위지헌은 어느 쪽도 보지 않았다.월령에게 닿은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붕대 감긴 손이 비어 있는 옥대 곁에서 천천히 접혔다.검은 관모 아래로 반듯한 눈썹과 높은 콧날이 아침빛에 드러났다. 밤새 국청 기록을 보았는지 눈가에는 옅은 그늘이 남았고, 굳게 다문 입술만 평소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주렴을 들었던 손이 소리 없이 내려갔다.월령은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가 기다리겠다고 멈췄던 한 뼘을 남기고 섰다."사흘을 다 썼습니다."위지헌의 턱이 낮아졌다."예."평온한 대답이었다. 그의 엄지는 빈 옥대 자리를 세게 누르고 있었다.월령의 숨이 가슴께에서 한 번 멎었다. 속눈썹 끝에 맺힌 물기가 아침빛을 받아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답을 들으러 오신다 하셨는데, 제가 먼저 왔습니다."위지헌은 한 걸음도 좁히지 않았다. 검은 눈 안에 푸른 옷을 입은 월령만 담겼다."말해라."낮은 목소리 끝이 조금 잠겼다.월령은 소매 안에 넣어 둔 푸른 인끈을 꺼냈다. 손이 떨려 접힌 끈이 한 번에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끝을 고르고 그의 붕대 감긴 손 위에 올려놓았다."심월령의 뜻으로."그의 손가락이 더디게 펴졌다."왕야께 가겠습니다."돌길 끝에서 말이 코를 울렸다. 누군가 들고 있던 장계의 종이만 바람에 바스락거렸다.위지헌은 대답하지 못했다.월령이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옅어진 입술이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끈과 그녀의 손끝을 함께 받쳤다.다른 팔이 반쯤 들렸다가 멎었다. 상복 사이에 무릎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 종이

    조서는 얇았다.얇은 종이가 사람을 가장 깊게 베는 날이 있다.심가 대문에 걸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하인들은 감히 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부엌의 솥뚜껑은 평소보다 조용히 닫혔다. 종이 한 장이 집 안의 숨을 바꾸었다. 누가 지나가도 발끝이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웃다가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월령은 조서를 다시 펼쳤다.궁중 내지 유출.호부 군량 장부 조작.심가 여식.그 말은 일부러 넓었다.월령일 수도 있고, 서윤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넓은 말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 등불

    자녕궁에 가는 날, 경성의 거리에는 낮부터 등틀이 세워지고 있었다.상원절은 이미 지났지만, 대연의 봄에는 작은 등놀이가 자주 열렸다. 남쪽 수해지에서 올라온 장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종이등을 만들었고, 궁은 그것을 사들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양을 갖췄다. 거리의 아이들은 등불을 좋아했고, 어른들은 쌀값을 생각하며 그 빛을 보았다.빛은 늘 아름다웠다.그러나 빛을 밝히는 기름값은 누군가의 장부에 적혔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말이 없었다.오늘의 서윤은 옅은 연두빛 치마를 입었다. 한씨가 골라 준 옷이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9. 이름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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