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방 안에는 약한 햇살이 고여 있었다. 침상에 기대 앉은 유씨는 창백했지만 살아 있었다.
아직 눈빛이 꺼지지 않았고, 손끝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월령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이 방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잡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
"월령아."
유씨가 고개를 돌렸다.
그 부름 하나에 월령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네가 웬일로 약방까지 다녀왔니. 몸이 약한 아이가."
"어머니 약이라서요."
월령은 침상 곁에 앉았다.
유씨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월령이 웃어도 울음을 알아보았고, 아무 말 않아도 상처를 먼저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무 일도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번 거짓말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부인 한씨는 이미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짙은 자색 치마에 단정한 비녀를 꽂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씨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향낭에서 매화와 침향을 섞은 향이 났다.
너무 정갈해서, 오히려 병든 방의 냄새와 어울리지 않았다.
"월령이가 효심이 깊구나. 아픈 몸으로 직접 약을 가져오다니."
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숙모께서 좋은 약을 보내 주셨다 들었습니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니. 네 어머니께서 어서 나으셔야지."
한씨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때의 월령은 그 눈물을 믿었다.
지금은 그 손수건 끝에 묻은 향까지 의심스러웠다.
서윤이 한 걸음 나섰다.
"큰어머니, 어머니께서 밤새 의원 처방을 다시 살피셨어요. 꼭 드셔야 해요."
"고맙구나, 서윤아."
유씨가 희미하게 웃었다.
월령은 탕약 그릇을 들었다. 그 순간 한씨와 서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초조함, 기대, 그리고 아주 깊은 곳의 두려움.
월령은 그 모두를 보았다.
"어머니, 약이 조금 뜨겁습니다. 제가 먼저 식혀 볼게요."
월령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올렸다. 한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서윤은 숨을 멈췄다.
그러나 월령은 숟가락을 어머니의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문득 손을 멈췄다.
"아. 제가 예를 잊었습니다."
방 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월령은 한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숙모께서 어머니를 위해 귀한 약을 구해 주셨으니, 먼저 향을 봐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씨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방 안의 햇살이 한 치쯤 물러난 듯했다.
서윤이 급히 웃었다.
"언니도 참. 약을 어찌 어머니께서 먼저—"
"왜?"
월령이 물었다.
그 한 글자에 서윤의 웃음이 멈췄다.
"숙모께서 직접 구해 주신 약이라 들었어. 어머니를 위한 정성이니, 향이 제대로 우러났는지 보시는 게 이상한 일이니?"
"그건…"
한씨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월령아, 나는 기침이 없으니 약향을 보아도 잘 모를 것이다."
"드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월령은 숟가락을 천천히 한씨 앞에 내밀었다.
"그저 향만 보시면 됩니다."
한씨는 숟가락을 바라보았다.
탕약은 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씨는 그것을 몰랐다.
서윤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하나 — 어머니가 마시면 죽어야 할 약이라는 것. 그러므로 지금 그들의 얼굴이 증거였다.
"어머니!"
서윤이 갑자기 한씨의 팔을 붙잡았다.
"향이 너무 짙어요. 큰어머니 몸에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의원을 다시—"
"서윤아."
월령이 조용히 불렀다.
"너는 왜 겁을 내니?"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요?"
"나는 숙모께 향을 봐 달라고 했을 뿐이야."
"언니, 저는 그저 큰어머니가 걱정되어…"
"그래."
월령이 미소 지었다.
"나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이러는 거야."
침묵이 길어졌다.
유씨는 말없이 월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깊었다.
무언가를 눈치챘으나, 아직 묻지 않았다. 한씨는 결국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향만 맡으면 되는 일이었고, 마실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향이… 괜찮구나."
"정말입니까?"
"그래."
"그럼 어머니께 올리겠습니다."
월령이 숟가락을 돌려받으려 하자, 서윤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제가… 제가 다시 데워 오겠습니다. 식은 약은 효험이 떨어지니까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어리구나.
월령은 생각했다.
곤원전의 밀서를 훔치던 서윤은 이보다 훨씬 능숙했다. 지금의 서윤은 악의를 품었으되, 아직 궁중의 칼날처럼 단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 부러뜨릴 수 있다. 아니 — 부러뜨리기엔 이르다.
누가 이 아이에게 칼을 쥐여 주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그러면 네가 데워 오렴."
월령은 뜻밖에도 순순히 탕약 그릇을 내밀었다. 서윤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 순간, 월령은 그릇을 놓쳤다.
무너진 문짝 위로 불붙은 종이가 날렸다.강무진의 방패가 첫 칼을 받아 냈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왕부 군사들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소금 자루가 터지고 흰 가루가 연기 속으로 피어올랐다.칼 하나가 방패 가장자리를 타고 미끄러져 강무진의 뺨을 스쳤다. 가느다란 피가 턱까지 흘렀다.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방패로 상대의 가슴을 밀어 벽에 박았다."엎드려!"창고 일꾼 둘이 바닥에 몸을 붙였다. 칼을 든 사내가 그중 하나의 목을 잡아 일으켰다. 윤백이 던진 단검이 사내의 손등을 꿰뚫었다."악!"인질이 굴러 나왔다. 강무진이 그를 발로 밀어 방패 뒤에 넣었다.위지헌은 화로 앞으로 걸어갔다. 반쯤 탄 장부 한 권이 불 속에서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가 장갑 낀 손을 넣자 불이 소매 끝을 물었다.천장에서는 불붙은 볏짚이 떨어졌다. 정무가 칼집으로 쳐 냈으나 한 조각이 위지헌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강무진이 손으로 털어 내는 사이에도 그는 화로 안쪽의 표지를 잡아당겼다."전하!"정무가 물을 끼얹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검은 장갑이 수축했다. 위지헌은 장부를 놓지 않았다. 젖은 표지가 갈라지고 속장 몇 장이 손 안에서 살아남았다.회색 옷을 벗어 던진 자가 뒤문으로 달렸다. 기윤이 피 묻은 어깨로 문을 막았다. 사내의 칼이 다시 들렸으나, 기윤의 발이 무릎 뒤를 걷어찼다.쿵.윤백이 팔을 비틀어 등 뒤로 묶었다. 사내의 허리에서 태의원 목패와 죽은 의원의 호적지가 함께 떨어졌다.안쪽 방에서 비단 관모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수염 없는 중년 사내 하나가 창문을 넘으려다 강무진에게 붙잡혔다. 그의 도포 안쪽에는 내수사 출입패가 달려 있었다.정무가 패를 뒤집었다."주내관입니다."주내관은 입을 다문 채 화로를 보았다. 불길이 바닥의 기름을 타고 기둥 아래까지 갔다.그때 아래에서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우두둑.소금 자루를 쌓아 둔 바닥 한쪽이 꺼졌다. 묶여 있던 사내와 일꾼 하나가 함께 구덩이로 미끄러졌다."사람부터 빼라."군사들이
마르지 않은 피가 염방의 푸른 물 위로 떨어졌다.회색 옷의 사내가 천을 널어 둔 장대를 밀쳤다. 젖은 무명이 길을 가로막으며 윤백의 얼굴을 덮었다. 윤백은 칼로 천을 찢고 그대로 달렸다.어깨에서 흐른 피가 옆구리까지 내려와 있었다.사내가 염료 통을 걷어찼다.철퍽!짙은 쪽물이 바닥을 덮었다. 윤백의 발이 한 번 미끄러졌다. 사내는 담을 짚고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품에서 꺼낸 비수가 뒤로 날아왔다.윤백이 고개를 틀었다. 칼날이 뺨을 스치고 기둥에 박혔다."윽."그는 멈추지 않았다.시장 큰길에서는 위지헌의 말이 젖은 좌판을 뛰어넘었다. 사람들이 길을 열기도 전에 강무진이 앞에서 짐수레를 밀어냈다. 정무는 반대편 골목으로 말을 몰았다.과일 광주리가 뒤집혀 푸른 살구가 말발굽 사이로 흩어졌다. 위지헌은 고삐를 들어 말의 앞발을 틀었고, 길바닥에 주저앉은 장사꾼은 구르듯 벽 아래로 피했다. 그의 놀란 숨 위로 말굽이 두 번 세차게 울렸다.도망자는 염방 지붕 끝에서 뛰어내려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윤백도 같은 끝에서 몸을 던졌다. 착지하는 순간 발이 젖은 돌을 밀어 무릎이 바닥을 쳤다. 푸른 물이 소매까지 튀었다. 그는 칼집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같은 시각, 심가 대문 앞으로 형부의 사람이 왔다가 돌아갔다.정오까지 심가의 문을 넘는 자는 섭정왕의 명을 거역한 것이 된다 하였다. 문서를 든 손이 문턱 앞에서 멎었다가 물러났다.월령은 그 손이 돌아서는 것을 대문 안에서 보았다.멀리 저잣거리 쪽으로 연기가 한 줄 올랐다. 그가 지금 저 안에 있었다.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 심가가 흔들리면, 그가 몸으로 사 준 반나절이 헛것이 된다. 월령은 놀란 아란의 손을 잡고, 여느 날처럼 천천히 마당을 걸었다.걷는 뒷모습이 흔들리지 않아야, 문밖의 눈들도 셈을 멈춘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위지헌의 시선이 빈 지붕을 훑었다. 골목 왼쪽에는 문 닫은 쌀전, 오른쪽에는 낡은 소금 창고가 있었다. 처마 끝에 엎드린 기윤이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
칼날은 말할 수 있는 사내의 목으로 곧장 들어갔다.수레에 붙어 있던 호위가 손목을 쳐냈다. 날이 빗나가 쇄골 아래를 깊이 갈랐다."악!"붕대를 감은 사내가 몸을 일으키다 약재 궤짝에 머리를 부딪쳤다. 말린 천궁과 황기가 후두둑 쏟아졌다. 회색 옷의 자는 손목이 꺾인 채로 몸을 비틀어 호위의 턱을 찼다.철컥.동문 빗장이 내려왔다. 문 안의 상인들이 한꺼번에 밀리며 비명을 질렀다. 회색 옷은 약재 더미를 걷어차고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살려 줘!""길을 비켜라!"관군이 창을 세웠으나 아이를 업은 여인과 짐꾼들이 엉켜 날을 내밀지 못했다. 회색 옷은 그 틈을 갈라 시장 안쪽으로 달렸다. 벗겨진 신발 한 짝이 문턱 아래 남았다.수레 위에서는 피가 멎지 않았다.왕부 의원이 상처를 누르자 사내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옆에 누워 있던 생존자 하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의원은 천을 겹쳐 눌렀다가 약가루를 쏟았다. 흰 가루가 피에 닿자 곧 붉게 젖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뛰던 맥이 한 번 크게 울리고 점점 느려졌다."장목아. 장목아, 눈 떠라."장목의 입술이 달싹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피 묻은 숨이 한 번 새고,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그의 손을 잡은 사내가 제 가슴으로 끌어다 붙였다. 다른 생존자는 열에 들뜬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장목의 이름을 따라 중얼거렸다.약재 수레가 동문을 넘은 지 반 각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남문에서 달려온 말이 시장 입구에서 미끄러졌다. 위지헌은 말이 다 멎기도 전에 내려섰다. 그의 뒤로 강무진과 윤백이 따라붙었다.수레 곁 호위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전하, 소인이 지키지 못했습니다."위지헌은 그를 지나 수레 앞으로 갔다.장목의 눈은 반쯤 떠져 있었다. 방금까지 맞잡았던 두 손도 떨어져 있었다. 위지헌이 피에 젖지 않은 천을 집어 그의 얼굴 위에 덮었다."이름을 적어라."그는 남은 둘을 보았다. 한 사람은 고열에 떨었고, 다른 사람은 장목의 빈 손을 붙든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둘은 궁 안으로
멎은 바퀴 아래로 검은 기름이 흘러들었다.마부가 고삐를 당기는 순간, 장독 하나가 달구지에서 굴러떨어졌다.쨍그랑!깨진 독 안에서 불길이 솟았다.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울부짖었다. 흰 베를 두른 호위가 고삐를 낚아채기도 전에 양쪽 지붕에서 화살이 쏟아졌다.타닥, 퍽!첫 화살이 거적에 박혔다. 두 번째는 마부의 어깨를 노렸다. 마부가 몸을 꺾자 화살촉이 모자를 날려 버렸다."불이다!"좌판을 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도기점 어린아이가 깨진 항아리 사이에 주저앉았다. 붉은 불이 기름을 타고 아이의 짚신 앞으로 번졌다.아이의 손에는 아침에 산 엿 한 조각이 붙어 있었다. 놀라 쥔 주먹에서 녹은 엿물이 흘렀다. 어미는 건너편에서 아이의 이름만 되풀이해 불렀다.기윤이 지붕에서 떨어졌다.그는 아이를 겨드랑이에 끼워 내던지듯 약초 좌판 뒤로 밀었다. 뒤늦게 날아온 쇠뇌 화살이 그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흡…!"검은 천이 갈라지고 피가 번졌다. 기윤은 한쪽 무릎을 짚었다가 곧장 몸을 돌렸다. 짧은 칼이 처마 위 궁수의 발목을 베었다.골목의 떡집과 생선 좌판이 동시에 뒤집혔다. 그 아래 감춰졌던 왕부 군사들이 방패를 세웠다. 불붙은 수레를 향해 뛰던 사내 셋이 그대로 방패에 부딪혔다.떡 시루가 바닥에 엎어지며 흰 가루가 불길 위로 날렸다. 뜨거운 떡덩이가 돌바닥을 굴렀고, 군사 하나가 맨손으로 그것을 치워 달아나는 노인의 발을 비켜 주었다.쿵!위지헌은 불길 앞까지 걸어왔다. 검은 장포 자락에 불빛이 일렁였다. 강무진이 그의 앞을 막았으나, 그는 강무진의 어깨 너머로 사람부터 보았다.약초 좌판 뒤에서 아이가 울었다. 어미가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한 군졸의 소매에는 불이 붙었고, 다른 군졸이 그를 바닥에 굴려 껐다."백성부터 빼라."짧은 명이 떨어졌다.장사꾼 차림의 군사들이 골목 양 끝으로 사람을 밀어냈다.골목 남쪽 끝으로 밀려 나온 사람들 사이에 월령이 있었다.조문 무명을 안은 청아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아가씨,
첫 번째 바퀴가 별원 문턱을 넘을 때, 쇠테가 돌을 긁었다.끼이익.마른 소리가 아직 잠든 골목을 길게 훑었다. 수레 위 거적에는 오래된 피가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네 모퉁이마다 회암역 군졸의 낡은 띠가 늘어졌다.마부는 등을 구부렸고, 뒤따르는 두 사내는 상여꾼처럼 흰 베를 둘렀다. 생선 좌판을 펴는 여인도, 물지게를 내려놓은 사내도 수레를 한 번씩 보았다.갓 찐 떡의 김과 비린 물 냄새 사이로 탄 피 냄새가 지나갔다. 좌판 아래에서 졸던 개가 코를 들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주인은 목줄을 당긴 뒤 수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아무도 두 번째로 보지는 않았다.처마 밑을 걷던 기윤이 손가락 두 개를 내렸다. 떡집 문간에 앉아 있던 왕부 군사가 막 솥뚜껑을 여는 척했다. 맞은편 약초꾼은 쑥단을 뒤집었다.위지헌은 남문 누각 그림자 안에 서 있었다. 검은 장포 위로 새벽 습기가 얇게 맺혔다. 그의 시선이 수레를 지나 게시판으로 옮겨 가자 정무가 가까이 붙었다."게시문은 세 벌이 베껴졌습니다. 한 벌은 병부로, 한 벌은 삼황자부로 갔습니다. 나머지 한 벌을 든 자가 서쪽 골목으로 움직입니다."위지헌은 턱을 한 번 내렸다.기윤의 손짓이 끝나자 연조가 소리 없이 골목으로 스며들었다.삼황자부의 침전에서는 식어 가는 세숫물 냄새가 났다. 주란은 흐트러졌던 머리를 단정히 묶고 문밖에서 받아 든 종이를 두 손으로 올렸다. 손목 안쪽의 붉은 자국은 소매 속에 가려졌다.위명서는 첫 줄을 읽었다.‘남원 별원에서 심가의 군량패가 발견되었다.’그의 엄지가 젖은 인주 위를 문질렀다. 붉은 빛이 손끝에 묻었다. 어젯밤 구겨진 금침은 아직 펴지지 않은 채였다."주란."주란의 속눈썹이 들렸다. 그가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예, 전하.""이 종이는 자녕궁에 보내지 마라."주란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종이를 접어 등잔불에 대자 가장자리부터 검게 오그라들었다. 위명서는 타는 종이를 보다가 그녀의 손가락에 불씨가 가까워졌을 때에야 잔을 들어 눌
동이 트기 전, 남원 별원의 바깥채에 사람이 모였다.허도겸은 밤새 쓴 조사서를 두 벌로 나누었다. 한 벌에는 군량패의 나무와 인영, 새 못과 젖은 마루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다른 한 벌의 첫 줄에는 짧은 문장만 남았다.검은 소매를 입은 내관이 황궁에서 가져온 답서를 내놓았다. 경화제의 어보 아래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정오까지 섭정왕의 처분에 맡긴다.위지헌은 답서를 허도겸 앞에 펼쳐 두었다. 허도겸이 그제야 굳었던 어깨를 조금 내렸다.남원 별원에서 심가의 군량패를 발견함.위지헌이 첫 번째 조사서에 검은 인장을 눌렀다."이것은 폐하께 바로 올려라."허도겸이 두 번째 종이를 보았다."이것도 올립니까.""남문 게시소에 붙인다."방 안의 붓 소리가 모두 멎었다."가짜임을 확인했습니다.""우리는 확인했다."위지헌이 손을 닦았다."저 패를 둔 자는 아직 모른다."정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투구와 어깨에 새벽이슬이 흥건했다."회암에서 세 명을 살려 냈습니다. 한 명은 말을 할 수 있고, 둘은 열이 높습니다.""어느 문으로 들어오고 있지.""남문으로 들이라는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동문으로 돌려 황궁 의관에게 넘겨라. 얼굴을 본 자는 네 사람을 넘기지 마라."정무가 허리를 굽혔다."남문에는 무엇을 들입니까.""수레."기윤이 마당을 향해 손짓했다.검은 포장을 씌운 죄수 수레가 끌려왔다. 바퀴에는 마른 피가 묻어 있었고, 수레 안에는 군복 한 벌과 피 묻은 붕대만 놓여 있었다.허도겸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정오에는 생존자에게 빠진 장부를 보인다고 게시해라.""심가에는 체포령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위지헌이 빈 조사서 한 장을 당겼다.붓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섭정왕 위지헌. 그 아래에 자신의 사인을 또박또박 남긴 뒤 왕부의 인장을 찍었다."정오까지 심가의 문을 넘는 자는 내 명을 거역한 것으로 적어라."붉은 인주가 종이에 깊이 배었다."그 뒤에도 장부가 오지 않으면요.""황명 지연과 증물 조작의 책임을
태후의 초대장은 향이 없었다.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아침 부엌에서는 멥쌀 씻는 물소리가 나고, 무쇠솥 가장자리에는 지난밤 끓여 둔 닭죽의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행랑 쪽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패며 낮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구간에서는 젖은 짚을 갈아내는 냄새가 느리게 흘러왔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그런데 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집 안의 모든 소리가 반 박자씩 늦어졌다.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의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대고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살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