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 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누구도 해친 적 없다는 얼굴로. 한때 월령은 그 목소리를 친자매처럼 믿었다 — 곤원전의 어느 밤, 그 작은 손이 비녀함에서 밀서를 꺼내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지금 문을 열어서는 안 됐다.
서윤은 영리했다.
이 약방 안의 공기만으로도 이상함을 눈치챌 아이였다. 월령은 은매에게 다가가 몸을 낮췄다.
떨리는 손을 붙잡고, 그 손안에 작은 약봉지를 쥐여 주었다.
"이것을 넣어라. 감초와 진피다. 독은 없다."
월령이 낮게 속삭였다.
"향만 비슷하게 날 것이다. 손을 떨지 마라. 오늘 네가 올리는 탕약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은매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너도 죽지 않는다."
월령은 그 젖은 눈을 외면하지 않았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가 있다 하여 곧장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누가 죽을까 두려워하는지 잘 보아 두어라."
바로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첫 부름보다 아주 조금 낮아져 있었다. 걱정하는 척했지만, 그 안쪽에는 젖은 종이를 급히 접는 듯한 조급함이 있었다.
예전이라면 놓쳤을 소리였다.
"문을 열어요."
청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봄볕을 등지고 심서윤이 서 있었다.
연분홍 저고리에 흰 치마, 머리에는 은실로 연꽃을 수놓은 비단 댕기. 그 가련한 얼굴을 보는 순간, 오래 묻어 둔 밤 하나가 스쳤다.
곤원전의 밤.
서윤은 그때도 똑같이 울먹였다. 언니,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폐하께서 언니를 버리셨는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다음 날, 월령의 침전에서 위조된 역모 서신이 발견되었다.
"서윤아."
월령은 다정하게 불렀다.
제 목소리가 이토록 평온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평온은 용서가 아니었다.
오래 끓은 물이 더는 김을 내지 않는 순간에 가까웠다.
"몸이 안 좋으시다더니 왜 약방에 계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어머니 약이 걱정되어 보러 왔어."
그 찰나, 서윤의 시선이 약로 위의 사기그릇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짧았다.
눈썹도 입가의 미소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월령은 보았다 — 그 눈동자 안에 아주 얇게 번진 안도.
약이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 월령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서윤이 약방으로 들어와, 시선을 은매에게 옮겼다.
은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떨림이 눈에 띌 만큼 심했다.
"은매야, 너는 왜 그렇게 떨고 있니?"
서윤이 부드럽게 웃었다.
"몸이 안 좋으면 말하렴. 큰어머니께 올릴 약을 달이는 사람이 아프면 안 되잖니."
다정한 말이었다.
그러나 은매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다정함으로 감싼 협박.
그때 보지 못했던 선들이, 이제는 보였다. 은매는 겁에 밀려 독을 들었고, 서윤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칼처럼 쥐었다.
둘 다 죄에서 멀지 않았으나, 아직 끝까지 간 사람들도 아니었다. 월령은 그 차이를 놓치지 않으려 숨을 골랐다.
"서윤아. 마침 잘 왔어."
월령이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께 같이 가자. 탕약이 다 되었으니, 직접 올리면 어머니께서 기뻐하시겠지."
서윤이 멈칫했다.
봄바람에 소매가 흔들린 줄로만 알 만큼, 아주 잠깐.
"물론이죠. 그런데 언니, 얼굴이 아직 창백하세요. 큰어머니 약은 제가 올릴게요. 언니는—"
"아니."
월령의 대답은 짧았다.
약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내 어머니 일이잖아."
그 말에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예전의 월령은 누구에게나 양보했다. 착한 딸, 좋은 황후, 다정한 언니.
그 이름들은 모두 목에 걸리는 얇은 비단 같았다. 부드러워서, 목을 조르는 줄도 몰랐다.
이번의 심월령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서원당으로 가는 길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길 위로 긴 세월이 겹쳐졌다. 어머니의 병실에서 들리던 기침.
장례 날 내리던 비.
흰 소복으로 흘리던 둘째 부인의 눈물. 모두 연극이었다 — 어쩌면 그중 일부는 진심이었을지도.
그러나 진심이 섞였다 하여 죄가 옅어지지는 않는다. 서원당 앞에 이르자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월령의 발이 멈췄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머니는 뼈만 남은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말했다.
궁에 들어가거든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말거라. 그 말을 그녀는 너무 늦게 이해했다.
"들어가자."
월령이 숨을 골랐다.
위명서의 손 위에서 게시문이 펼쳐졌다."소자가 남문에 사람을 보낸 것은 묘시 초각입니다. 이 글은 묘시 이각에 삼황자부로 들어왔습니다."그는 종이 아래 찍힌 남문 수문장의 시각인을 보였다. 아직 물기가 남았던 인주가 번져 손끝 모양까지 묻어 있었고, 등잔에 댔던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사관이 그 시각을 국청 기록 옆에 옮겨 적었다. 빈 수레가 남문을 나간 때와 첫 습격자가 붙잡힌 때도 같은 줄 아래 나란히 놓였다.경화제는 그 뒤 자녕궁에 알릴 생각이었는지 물었다.위명서의 손가락이 종이 끝을 한 번 눌렀다."보내지 않았습니다."뜰 아래 엎드린 주내관의 고개가 들렸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위명서는 어머니께서 아시기 전에 누가 먼저 움직이는지 보고 싶었다고 답했다.위명서는 위지헌을 보지 않았다. 접힌 게시문을 내관의 쟁반 위에 돌려놓고 제 자리로 물러났다.경화제는 더 묻지 않았다.황후전 바깥 별채에서 옮겨 온 생존자가 뜰로 들어왔다. 백운이라는 군졸이었다. 아직 고열이 남아 두 사람에게 부축받았고, 갈라진 입술에는 핏물이 맺혀 있었다.황후전에서 내준 솜신이 그의 발에는 컸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뒤축이 벗겨졌고, 부축한 내관이 허리를 숙여 다시 신겨 주었다.주내관 앞을 지나던 그의 발이 멎었다."저자입니다."목소리는 작았으나 정전 안까지 닿았다."회암으로 떠나기 전, 내수사 수레를 타라 한 자입니다. 길이 바뀌었다며 남원 군량패를 내밀었습니다."주내관이 몸을 돌렸다."거짓말이다!""얼굴을 잊지 않았습니다. 장목이 저자를 보고 돌아가자 했습니다."주내관이 갑자기 일어섰다. 포승줄에 묶인 두 팔을 휘둘러 옆에 있던 연무를 넘어뜨렸다. 무릎으로 목을 짓누르려는 순간 윤백의 발이 옆구리에 박혔다."컥!"주내관이 바닥을 굴렀다. 연무는 목을 감싸고 거친 숨을 토했다.위지헌은 무릎 꿇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붕대 아래 손가락만 천천히 펴졌다.허도겸이 백운의 진술서와 연무의 진술서를 나란히 올렸다
약 냄새가 가시기 전, 정오의 북이 다시 울렸다.정전 바닥에 햇빛이 길게 들었다. 중앙에는 불에 탄 장부와 군량패, 내수사 황동패가 놓였다. 그 뒤에 장목의 피 묻은 군번목이 따로 있었다.창고에서 살아 나온 일꾼 둘은 뜰 끝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의 머리에는 그을린 붕대가 감겼고, 다른 사람은 연기를 마신 듯 계속 마른기침을 했다. 포승줄에 묶인 자들과 자리가 섞이지 않았다.위지헌은 어좌 아래 홀로 섰다. 검은 관복의 오른쪽 소매가 붕대 감긴 손을 반쯤 가렸다. 대신들의 시선은 장부보다 그 손에 먼저 닿았다가 급히 내려갔다.허도겸이 조사서를 올렸다. 내관이 첫 장을 읽는 동안 잡혀 온 주내관과 연무가 뜰 아래 엎드렸다. 남문에서 붙잡힌 자들도 포승줄에 묶인 채 줄지어 앉았다.경화제는 끝까지 듣고 나서 조사서를 덮었다.황제의 곤룡포 소매에는 전날 밤 남은 유자 향이 옅게 배어 있었다. 두 증인을 황후전 바깥 별채에 들였다는 기록 아래에는 하문정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심가의 이름으로 거짓 게시문을 붙였느냐.""예."세 번째 대답 뒤에도 위지헌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전 바깥에 선 군사 한 명이 이를 악물었고, 강무진은 손등의 핏줄이 솟을 만큼 검집을 쥐었다가 놓았다."황명을 반나절 늦추었고.""예.""동문 길이 새어 군졸 하나가 죽었다."위지헌의 붕대 감긴 손이 소매 안에서 굽었다."예."병부 상서가 앞으로 나왔다."폐하, 섭정왕 전하께서 진범을 잡으신 공은 크오나 황명을 늦추고 사가의 이름을 미끼로 쓴 일을 가볍게 둘 수 없사옵니다. 더구나 회암의 유일한 증인이 죽었습니다."허도겸이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오늘 아침 정신을 차렸습니다."병부 상서의 입술이 잠깐 멎었다.황제의 손가락이 어좌 팔걸이를 두 번 두드렸다."아우야. 왜 먼저 아뢰지 않았느냐.""남문을 보는 자가 게시문을 믿어야 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늘면 먼저 사라질 자였습니다.""그러고도 동문이 샜다.""제가 정
굳은 손이 고삐를 놓았다.위지헌은 말에서 내려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상복 입은 가족들이 차례로 마당에 앉고, 뜨거운 죽 그릇을 받아 드는 동안 문밖에 서 있었다.강무진이 그늘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위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빛이 검은 장포 어깨를 지나갈 때까지 같은 자리에 섰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월령은 이름과 식구 수를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받았다. 먹을 갈던 손이 떨릴 때마다 아이가 옆에서 이름패를 꼭 쥐었다. 짙은 속눈썹 아래 눈물이 고였으나 종이 위로 떨어지지는 않았다.마지막 그릇이 비고 사람들이 일어섰다.월령은 아이가 남긴 죽그릇을 직접 받았다. 가장자리에는 작은 입술 자국이 남았고 바닥에는 쌀알 세 톨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행랑 시비에게 넘긴 뒤에야 굳은 무릎을 폈다.상복 입은 여인이 월령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월령이 더 깊이 숙이자 여인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아이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아이는 두어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그들이 골목 끝으로 사라진 뒤에야 위지헌이 문턱을 넘었다.월령은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오래 접힌 다리가 한 번 흔들렸다. 위지헌의 손이 움직였으나, 그녀의 팔에 닿기 전에 멎었다.월령은 스스로 문기둥을 짚고 섰다.뺨에 붙은 잔머리가 숨을 쉴 때마다 가볍게 움직였다. 눈가가 붉었어도 턱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위지헌은 제 손을 감추듯 장포 자락을 여몄다.그제야 그의 손을 보았다.검은 장갑 대신 흰 붕대가 손바닥과 손목을 감고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약 냄새와 그을음이 배어 있었다."다치셨습니까.""조금 데었다."위지헌이 손을 장포 안으로 감추려 했다. 월령의 손끝이 먼저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으나 장포가 멈췄다.그의 눈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왔다.월령은 붕대가 느슨해진 부분을 보았다. 다른 말 없이 청아에게 새 약천을 가져오라 눈짓했다. 청아는 마당 끝에 서 있던 기윤의 꿰맨 어깨까지 보고
상복 입은 여인의 손이 세 번째로 문을 쳤다.쿵.빗장이 올라가고 심가 대문이 열렸다. 월령은 장옷도 쓰지 않은 채 청아와 함께 문 안에 서 있었다. 밤새 땋았다 풀린 머리 끝이 어깨 아래로 가늘게 흘렀다.여인의 뒤에는 아이 하나와 노인 둘이 있었다. 그보다 더 뒤로 회암역에서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 흰옷을 입고 모여 있었다.아이는 새가 새겨진 이름패를 두 손으로 쥐었다. 작은 손톱 아래에 검은 흙이 끼어 있었다."게시문에 심가 군량패가 나왔다 하였습니다."여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내 남편이 역적의 군량을 지킨 것입니까."월령의 속눈썹이 내려갔다. 그녀는 문지방 안에 서서 대답하지 않았다. 한 걸음 밖으로 나가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접었다.청아가 놀라 치맛자락을 잡았다."아가씨."월령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오래 울어 부은 눈이었으나 아이는 울지 않았다."성함을 알려 주시겠어요."여인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죽은 이의 이름과 집 주소, 남은 식구가 적힌 낡은 호적 부본이었다. 손이 떨려 종이 귀퉁이가 바스락거렸다.월령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조서에 군졸의 이름으로 남도록 청하겠습니다. 심가가 내건 게시문도 오늘 안에 거두겠습니다.""우리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예."월령의 입술에서 핏기가 옅어졌다. 젖은 눈동자는 피하지 않았다."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여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뒤에 선 노인이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의 이름패가 다시 달각 울렸다.안채에서 유씨가 나왔다. 병색이 남은 얼굴에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도 걸음은 빨랐다.마당에는 아직 아침 물기가 남아 있었다. 상복 자락이 젖자 청아가 마른 자리를 찾으려 했고, 유씨는 손짓으로 사랑채 돗자리부터 모두 펴게 했다."청아야, 큰 솥에 불부터 지펴라. 방어멈은 곳간 쌀을 내고.""예, 마님.""문희야, 약방에 사람을 보내라. 다친 이가 있는지도 묻고."월령의 숙모가 곧장 몸을 돌렸다. 방어멈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
사슬 끝에 묶인 연무가 불빛 아래로 끌려 나왔다.수염은 자랐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맞은 흔적은 없었으나 잠을 빼앗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맞은편에는 주내관이 새 관복도 받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연무의 발이 멎었다.주내관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두 사람의 사슬이 같은 바닥 위에 놓였으나 서로 닿지는 않았다. 연무는 그 짧은 틈을 내려다보며 발끝을 뒤로 빼려 했다.허도겸은 둘 사이 낮은 상에 군번목을 놓았다. 회암역에서 죽은 일곱 사람의 것이 먼저 놓였고, 맨 끝에 장목의 나무패가 더해졌다.여덟 번째 소리가 났다.달각.장목의 군번목에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연무의 시선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일곱 번째 이름패에는 작은 새가 새겨져 있었다. 여덟 번째 것은 칼자국만 깊었다. 죽은 사람마다 다른 손때가 나뭇결 사이에 남아 있었다.허도겸이 주내관을 가리켰다.연무는 입을 다물었다. 주내관이 무릎을 움직여 몸을 바로 세웠다."저자는 제 목숨을 아끼려고 아무 이름이나 댈 것입니다."허도겸은 대꾸하지 않았다. 불에 탄 장부를 펴고, 주내관의 황동패와 동문에서 벗겨진 의원 목패를 곁에 놓았다.연무의 손가락이 사슬 아래에서 떨렸다.허도겸은 가짜 군량패와 남원 수레를 차례로 물었다. 연무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연무의 숨이 거칠어졌다. 주내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말 한마디 없는데도 연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위지헌은 방 한쪽에 서 있었다. 붕대 감긴 손은 장포 안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여덟 개의 이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연무가 마른침을 삼켰다.사슬 아래 손이 두 번 접혔다. 손톱이 제 손바닥을 긁고 난 뒤에야 고개가 희미하게 들렸다."저자가 주었습니다."주내관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윤백이 목덜미를 눌렀다."거짓입니다!""문상궁의 전갈이라 했습니다. 패를 별원에 두고, 장부 한 권을 염창으로 보내라 했습니다."허도겸이 문상궁을 직접 보았는지 묻자 연무는 고개를 저었다.
장목의 이름을 쥔 손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검은 재가 손금 사이로 번졌다. 의원이 달려와 약천을 펴자 위지헌은 손을 내주지 않고 먼저 기윤 쪽을 보았다.기윤의 어깨를 감은 천은 이미 절반이 붉었다."꿰매라.""따라갈 수 있습니다.""꿰매고 따라와라."기윤이 그제야 의원 앞에 앉았다. 바늘이 살을 꿰뚫자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샜다. 옆에서는 불이 꺼진 창고를 뒤지는 군사들이 소금 자루를 하나씩 옮겼다.주내관은 두 손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가 앉은 관모는 발치에서 밟혔다. 그가 고개를 들 때마다 윤백이 어깨를 눌렀다."안에서 나온 사람과 물건은 따로 옮겨라. 죽은 자의 것도 섞지 마라."강무진은 명이 끝나기 전에 군사들을 나눴다.동문 쪽에서 또 한 필이 들어왔다. 말에 탄 관군이 숨을 몰아쉬며 내려섰다.말의 가슴에는 거품이 맺혔고 관군의 갓끈은 한쪽이 풀려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기 전에 먼저 품의 꾸러미를 받쳐 들었다."전하, 태의원 의원 서기가 성 밖 도랑에서 발견되었습니다."그가 내민 꾸러미 안에는 피 묻은 회색 옷과 부러진 목패가 있었다."사흘 전부터 보이지 않았답니다. 오늘 동문에 나타난 자가 그 옷과 패를 썼습니다."꾸러미 안쪽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줄 법한 대추사탕 두 알이 함께 나왔다. 정무는 그것까지 죽은 의원의 물건으로 따로 싸 두었다.위지헌은 죽은 의원의 옷을 오래 보지 않았다."이름을 장목 아래에 적어라. 가족부터 찾고."정무가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한쪽에서는 젖은 장부를 얇은 판 사이에 벌려 놓았다. 물을 먹은 종이에서 먹물이 번졌으나, 살아남은 줄마다 수레가 드나든 날짜와 문 이름이 남아 있었다.남원, 곤원전, 서협문.그리고 오늘 새벽의 동문.마지막 줄의 출입자는 비어 있었다. 그 옆에 내수사 황동패를 찍은 둥근 자국만 눌려 있었다.허도겸이 도착해 젖은 소매도 털지 않은 채 장부 앞에 앉았다. 그는 글자를 읽어 주지 않았다. 남은 장과 탄 장을 차례로 나누고, 주내관에게서 나온 패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