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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함

作者: moominkiller
last update 公開日: 2026-06-14 16:17:08

심가의 대문은 해가 기울 때 가장 조용했다.

낮 동안 드나들던 장정들의 발소리와 마차 바퀴 자국이 흙바닥에 남고, 부엌 쪽에서는 저녁 쌀을 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우물가의 두레박은 한 번 올라올 때마다 젖은 나무 냄새를 끌고 왔고, 마구간에서는 말들이 콧김을 내뿜었다.

이 집은 늘 그렇게 하루를 접었다.

문간 하인들은 빗장을 확인했고, 행랑채 아이들은 물동이를 나르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안채의 어린 시녀들은 마님 방에 올릴 탕약이 식지 않도록 작은 화로의 숯을 고르게 폈다.

그런 심가의 저녁 한가운데, 붉은 것이 놓여 있었다.

붉은 예함.

사랑채 앞 돌계단 아래.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어야 했던 물건처럼, 함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붉은 비단 덮개 위에는 금실로 구름 문양이 놓였고, 사방 모서리는 검은 칠목으로 단단히 감쌌다. 함을 묶은 끈은 너무 새것이라 손끝이 닿으면 붉은 물이 묻어날 것 같았다.

정무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칼을 뽑지는 않았다.

다만 왼손을 칼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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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6. 수

    황제의 사사로운 다실이었다. 곤원전의 높은 자리가 아니라, 형제가 차 한 잔을 사이에 두는 낮은 방.위지헌이 그 방에 드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그가 먼저 청해 든 걸음이었다.경화제는 그 한 가지로 이미 알았다. 아우가 무엇을 청하러 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무엇이, 나라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앉아라."위지헌은 앉지 않았다. 형의 방에서만은, 그는 늘 칼을 세워 둔 자세로 서 있었다."삼황자가 심가에 혼사를 청했습니다."경화제는 찻잔을 내려놓지 않았다."들었다.""폐하께서 봉서로 약정하신 자리입니다. 북문군과 북경군을 한 매듭에 묶으시려고. 그 매듭 위로 삼황자의 청이 가로질렀습니다."말은 정연했다. 한 자도 사사로움이 없었다. 군량과 변경과 결속을 짚는, 신하의 말이었다.경화제는 그 정연함을 한참 들었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지헌아."어릴 적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떨어지자, 방 안의 격식이 한 겹 벗겨졌다."너는 평생, 단 한 번도 네 몫을 청한 적이 없다."위지헌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북쪽의 눈밭도, 짐의 등 뒤도, 네가 베어 온 모든 목숨도 — 다 나라의 것이었지 네 것이 아니었다. 짐은 네가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를, 마흔 해가 다 가도록 본 적이 없다."황제는 아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북문군 결속은 짐이 둔 수다. 짐도 안다. 그러나 너는 지금, 그 수를 지키러 온 것이 아니지."위지헌은 답하지 않았다.답하지 않는 것이, 그의 답이었다.경화제는 옅게 웃었다. 책망도 조롱도 아니었다. 오래 칼자루만 쥐어 온 아우의 손에 처음으로 다른 것이 쥐어진 것을 본, 형의 웃음이었다."한 가지는 알아 두어라."웃음이 가셨다."짐이 이 약정을 굳히면, 자녕궁이 가만있지 않는다. 삼황자의 청 뒤에는 그 어미의 손이 있어. 네가 그 아이를 담 안으로 들이는 순간, 그 아이는 자녕궁이 가장 먼저 겨눌 과녁이 된다.""압니다.""그래도냐.""그래서입니다."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5. 다정

    삼황자가 심가에 든다는 전갈은, 그가 오기 반나절 전에 먼저 닿았다.청혼을 올린 황자가 그 집의 여식을 직접 보겠다는 것.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고, 신가가 물릴 수도 없었다. 심가의 안채는 그 반나절 동안, 잔치를 앞둔 집이 아니라 폭풍을 기다리는 집처럼 조용했다.반나절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황자 하나를 맞기에, 심가의 아랫것들에게는 그 반나절이 한 해 같았다.방어멈이 앞장서 정청의 자리를 다시 보았다. 깔개의 결을 손바닥으로 쓸어 눕히고, 향로의 식은 재를 갈고, 찻물의 온도를 세 번 고쳐 잡았다. 서두르되 소리는 내지 않는 것이, 삼십 년 묵은 손의 법이었다. 행랑의 어린 종들은 까닭도 모른 채 숨을 죽였고, 솟을대문 밖에서는 이웃집 담 너머로 목을 빼는 그림자가 두엇 어른거렸다. 황자의 가마가 변방 장수의 집 앞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골목은 벌써 그날의 이야깃거리를 한 짐 얻은 셈이었다.월령은 정청에 나가 그를 맞았다.곁에는 둘째 숙부 심도현과 한씨가 자리했고, 청아는 한 걸음 뒤에 섰다. 황자를 여식 혼자 마주하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둘러앉아도, 위명서가 정청에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의 공기는 그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위명서는 봄볕을 두르고 왔다.옅은 빛깔의 비단 도포, 흐트러짐 없이 다정한 얼굴. 그는 황자의 위세를 앞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제 신분을 잠시 내려놓은 사람처럼, 낮고 부드러운 걸음으로 들어와 좌중에 먼저 예를 표했다. 그 겸양이, 보는 이의 경계를 가장 먼저 녹였다.청아가 찻잔을 받쳐 올렸다. 위명서는 잔을 내려놓는 어린 시비에게조차,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그 작은 다정이 도리어 청아의 손끝을 잠시 굳게 했다. 제 주인을 노리고 든 사람이 이토록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이, 청아에게는 칼보다 서늘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한 걸음 물러서며, 소매 안에서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갑작스러운 걸음에 놀라셨겠습니다." 위명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햇살처럼 따뜻했다. "허나 종이로 오가는 청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4. 탐

    위명서가 연회의 일을 들은 것은, 그 밤이 채 새기도 전이었다.삼황자부의 깊은 방에서, 그는 그 소식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사람의 입으로, 또 한 번은 제 안에서.섭정왕이 봄 연회 한복판에서, 변방의 음모를 까발려 노가의 혼처를 무너뜨렸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심가의 여식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자리를 나섰다는 것.위명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 아이를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국청의 장막 뒤에서 한 톨도 내주지 않던 눈. 다회에서 "나무는 옮겨 주는 손을 고르지 못하나, 사람은 고를 수 있다"던 말. 그의 손에서 나온 차에 끝내 입을 대지 않던 결벽.그때부터 그 아이는, 위명서가 평생 처음으로 가지지 못한 것이 되어 있었다.손을 펴면 무엇이든 그의 앞으로 굴러 왔다. 명문의 여식도, 도성의 재색도, 황자의 자리가 부르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만은, 다정하게 손을 펴 보여도 한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가지지 못한 것은 늘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하물며 그것을, 천하에서 가장 가지기 어려운 그 숙부가 먼저 손에 넣으려 한다면.위명서의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이상한 일이었다. 그 아이를 떠올리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어떤 자리가 함께 떠올랐다. 붉은 담 안의 높은 자리. 곁에 한 여인을 앉히고, 천하를 내려다보는 자리. 그 환영 속에서 제 옆에 앉아 있는 얼굴은 늘, 그 아이였다.까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환영은 처음 보는 것이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그리워한 것처럼 익숙했다.곁에서 사람이 조심스레 물었다."전하. 자녕궁에서, 혼약을 막을 길을 함께 의논하자 하십니다."위명서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어미는 위지헌과 심가가 혼약으로 묶이는 것을 막으려 했다. 두 집이 한 울타리에 들면, 자녕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어미의 셈과 그의 마음은, 가는 방향이 같았다. 그러나 그 끝에서 원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어미는 그 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3. 아침

    연회의 일은 하룻밤 사이에 도성을 한 바퀴 돌았다.승전한 섭정왕이 봄 연회 한복판에서 변방의 음모를 까발렸다는 것. 황실이 내리려던 상을 제 손으로 물렸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여인에게 손을 내밀어 그 자리를 함께 나섰다는 것.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도성이 다 알았다.심가의 아침은 그 소문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대문 밖에는 평소보다 많은 발길이 오갔다. 본디도 진북장군가의 위세는 가볍지 않았으나, 섭정왕이 그 여식을 택했다는 말이 돌자 그 위세에 새로 줄을 대려는 손들이 아침부터 분주했다. 어제까지 그저 예의 시늉만 차리던 집들이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냈고, 포목점 심부름꾼은 청하지도 않은 비단 견본을 들고 왔다. 사람의 마음은 권세의 그림자를 가장 먼저 좇았다.방어멈은 그 견본을 문간에서 돌려보냈다."우리 아가씨는 어제도 오늘도 같은 분이십니다." 방어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달라진 건 아가씨가 아니라, 저 집들이 바람 부는 쪽을 뒤늦게 알아챈 것뿐이지요. 비단이야 들이면 곳간에 쌓이겠으나 — 바람이 한 번 돌아서면, 저 발길이 제일 먼저 끊길 것들입니다."청아는 그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쁜 것도 같고, 두려운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안채에서, 월령은 그 소란을 멀리 들으면서도 아침 내 자리에서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까닭은 바깥의 발길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밤의 일이, 눈을 감아도 자꾸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뺨을 감싸던 손의 무게. 입술이 닿던 순간의 떨림. 사흘 밤을 데워지지 않던 두 돌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지던 감각.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월령은 까닭 없이 이불깃을 끌어 올려 얼굴을 묻었다. 한 수 앞을 읽어 자녕궁의 손을 한 마디씩 잘라 내던 그 침착함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이불 속에서 발끝이 제멋대로 오므라들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앓다가, 제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귀밑까지 더 화끈거렸다.폐위와 죽음을 건너온 여자가, 입맞춤 한 번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2. 정비

    위지헌이 삭원을 꺾고 군량을 북문에 들였다는 소식이 경안에 닿은 것은, 그가 남으로 말머리를 돌린 지 사흘 뒤였다.승전. 그 한마디에 도성이 들썩였다. 변방의 봄을 지킨 섭정왕의 이름이 저잣거리까지 오르내렸다.그리고 그 들썩임 한가운데에서, 자녕궁은 조용히 한 자리를 차렸다.황실이 섭정왕의 공을 치하하는 봄 연회. 종친과 후궁, 도성의 귀족가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였다. 표면은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였으나, 그 자리에서 무엇이 논해질지는 아는 사람은 알았다. 섭정왕의 공에 황실이 상을 내릴 것이고, 그 상이 무엇이 될지를.월령도 그 연회에 청해졌다.거절할 명분이 없는 청이었다. 월령은 그 연회가 누구를 위해 차려진 자리인지 알면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연회의 후원은 화사했다. 갓 핀 봄꽃과 비단 차일, 맑은 술과 풍악. 그 화사함의 중심에, 노예원이 있었다.지난 모임 때보다 한층 짙게 단장한 모습이었다.오늘 밤을 위해 골랐을 차림은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깊은 자줏빛 바탕에 금사로 화려한 꽃송이를 빼곡히 수놓은 대수(大袖) 비단옷, 그 위로 겹쳐 두른 얇은 사라가 등불을 받아 안개처럼 어른거렸다. 도성의 어느 귀족가 여식도 황실 연회에 이렇게까지 차려입고 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무엇이 될지를, 그녀는 옷자락으로 미리 둘렀다. 높이 올린 머리에는 금보요와 붉은 보석 하나가 함께 얹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등불보다 먼저 빛났다.자태는 이미 한 자리의 안주인이었다. 술잔을 든 채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볍게 굽어보는 그 눈에는, 오늘 밤 황실이 섭정왕에게 무엇을 내릴지,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앉을지가 이미 정해진 일처럼 담겨 있었다. 곁의 여식들이 그 한 사람 옆에서 한 뼘씩 낮아 보였다."심가의 아가씨도 오셨네요." 노예원이 월령을 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섭정왕께서 이번에 세우신 공이, 참으로 크다지요. 변방을 손수 지키시고, 굶던 군을 살리시고. 황실이 그 공을 어찌 갚아야 할지, 다들 그 이야기뿐이에요."자리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1. 옛길

    협곡 입구에서 불어온 바람이, 위지헌의 말 앞에서 멎었다.그 바람 끝에 묻은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만 도는, 너무 고요해서 도리어 어긋난 고요였다. 절벽 어딘가에, 강가 풀숲 어딘가에, 숨이 너무 가지런한 자들이 엎드려 있었다.부장이 다시 새 길을 가리켰다."전하. 이 길이 빠릅니다. 옛길은 장계에 무너졌다 적혀 있어, 수레가 들지 못합니다.""멈춘다." 위지헌이 말했다.긴 행렬이 갈림길 앞에 섰다. 곡식 수레가 무거운 숨을 내려놓았고, 검은 갑옷의 기마가 그 곁에서 멈췄다.위지헌은 협곡의 입을 오래 보았다. 한쪽은 절벽, 한쪽은 강. 곡식 수레를 끌고 들기에는 좁고, 매복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들면 빠르되, 한 번 들어선 뒤에는 돌아 나올 자리가 없었다.앞은 덫이었다. 그것은 바람이 일러 주었다.그러나 옆은 무너졌다 했다. 무너진 길로는 곡식이 가지 못했다. 뒤로 돌면, 흑령의 군이 굶었다.가장 빠른 길이 덫이고, 다른 길은 끊겼다 했다. 누군가 그렇게 보이도록, 그를 협곡 한 입으로 몰아 두었다.위지헌이 그 한 입 앞에서 한 수를 고르려던 그때, 행렬의 뒤가 잠시 술렁였다.검은 옷의 그림자 하나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행렬을 거슬러 올라와, 위지헌의 말 앞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경안에 두고 온 암위였다. 밤길을 새운 숨이 아직 가빴다."…아가씨께서." 암위가 품에서 접힌 글을 꺼내 두 손으로 올렸다. "전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위지헌이 글을 펼쳤다. 단 세 줄이었다.새 길로 들지 마실 것.협곡에 매복이 있을 것.옛길은 무너지지 않았음.세 줄 가운데, 그의 눈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앞의 두 줄은 그도 알았다. 바람이 일러 준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줄은 바람으로 알 수 없었다. 경안의 호부 절목을 한 칸 한 칸 짚어야만 닿는 말이었다. 옛길이 무너졌다 한 장계가 거짓이고, 길은 끊긴 적 없이 다만 그를 협곡 한 자리로 몰기 위해 끊겼다 했을 뿐임을 — 그녀는 그 절목 위에서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2. 사흘

    국청의 햇빛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심가의 군량 누명은 마침내 종이 위에서 벗겨졌다.호부의 장부와 예부의 기록이 같은 결론에 닿았다. 군량패를 새긴 손도, 장부를 벤 손도, 객점을 메운 은자도, 모두 자녕궁 고방에서 풀린 손이었다. 심가는 군량을 빼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심가를 무너뜨리려는 손이, 제 표식을 곳곳에 남겼을 뿐이었다.예부상서가 붓을 들어 마지막 한 줄을 적었다."심가의 군량 출납에 사사로운 흠이 없음을 확인하다."그 한 줄이 적히는 동안, 월령은 가만히 서 있었다.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1. 자복

    사흘째 아침, 예부에 마련된 국문 자리에는 사람이 가득했다.조회가 열리는 정전이 아니었다. 황제가 내린 사흘의 마지막 날, 군량 누명의 죄인을 가리기 위해 섭정왕이 황명을 받들어 연 국청이었다. 정전에서라면 아녀자는커녕 죄인조차 함부로 들 수 없었으나, 죄인을 국문하는 자리의 법도는 조회와 달랐다. 가려지지 않으면, 봉인된 밀서가 풀려 심가와 섭정왕이 한 번에 무너질 것이다. 국청에 모인 관원들은 그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말을 높이지 않았다.붉은 기둥 아래, 예부상서가 주재석에 앉았다. 호부 낭중 허도겸은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0. 연무

    연무라는 이름은, 연기와 닮아 있었다.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빠져나가고, 어디에나 있는 듯하다가도 어디에도 없었다. 내수사 수레를 따라 궁의 물건을 나르고, 자녕궁의 바깥 전갈을 돌리고, 독고 상단의 물표가 흘러간 길을 알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어느 장부에도 또렷이 적히지 않았다.그런 자를 잡으려면, 연기가 어느 바람을 타는지부터 알아야 했다.사흘 중 둘째 날 저녁, 심가 서원당 곁 작은 방에 사람이 모였다.월령과 허도겸이 낮은 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상 위에는 남원 상납처의 부본과, 어제 붙잡은 자의 셈, 그리고 객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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