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415. 종이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9 19:58:42

"안 마시나."

숙비가 제 잔은 들었다. 쉰 목으로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도로 덮는 손이 느렸다.

"목이 안 말라요, 마마."

"꼭지가 오른쪽인데."

"예."

"오른쪽이면 마셔도 되는 잔이지. 설련이가 자네한테 그리 배웠고, 그대로 놓았네."

"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목이 안 말라요."

월령은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소매 안의 얇은 종이가 손목 안쪽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는 것이 오늘 이 방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설련은 병풍을 보는 눈으로 고모 곁에 서 있었다.

"자네 남편이 북에서 이기면 내 아들이 산다."

숙비가 잔을 든 채 이어 갔다.

"자네 남편이 지면 둘 다 죽고. 그러니 나는 섭정왕이 이기길 빌어야 하는 사람일세. 우스운 셈이지."

"셈이 아니에요, 마마. 그냥 그런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눈 위에 서 있으니까요."

숙비가 웃다가 기침을 삼켰고, 삼킨 것이 목에서 소리를 냈다.

*

담 밖에서 병사장이 제 발을 보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6. 눈 속의 사당

    "살구 마을이요."위명서가 그 말을 받았으나, 받아서 어디에 둘지 몰랐다. 국자를 든 손이 부풀어 있어서 그것을 내려놓지도 못했다."탄 마을이라고만 하셨습니다.""탄 마을이 살구 마을이다. 네 숙모가 여섯 살에 살던 데다. 나무가 스물은 있었다.""지금은요.""그루터기다. 네가 밤새 옆에 두고 눈을 퍼 나른 게 그거다."위지헌은 그 말만 하고 사당 쪽으로 걸었다. 위명서는 따라가지 않고 검은 얼굴로 자루 옆에 서 있었다. 숙모가 여섯 살에 살던 마을에서 제가 군량 절반을 태웠다는 것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몰랐다.*심각이 낮에 창 두 자루에 망토를 건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북문군 넷이 들었다. 붕대로 굵어진 왼쪽 다리 위에 눈이 앉았는데, 손이 닿지 않아서 심각은 그것을 털지 못했다.탄 담 안에 들어서자 심각이 들것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전하, 여기가 어디입니까.""살구 마을이오."심각이 그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급한 사람이 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팔을 들어 곳간 뒤 낮은 돌담 쪽을 가리켰다."사당입니다. 저기요. 어머니가 저기서 빌었습니다. 아버지 살아 돌아오시라고요. 저는 여덟이었고 누이는 여섯이었습니다. 누이가 저 담 위에서 떨어져서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흉이 남았을 텐데, 보셨습니까.""못 봤소.""머리카락 밑입니다. 왼쪽이요."위지헌이 그 말을 받고, 받은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옥대에 얹힌 손이 매듭 위에서 잠깐 멎었다."부장은 성터에 계시라고 했소.""다리가 다쳤지 귀가 다친 게 아닙니다. 본진이 탔다는데 성터에 누워 있으면 그게 부장입니까, 전하."강무진이 들것 옆에서 헛기침을 했고, 심각이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사당은 지붕이 없었다.돌담 셋에 문 자리 하나, 안에 마루가 있었던 자국 위로 눈이 앉아 있었다. 담이 낮아서 불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위지헌이 그 안에 서고 정무가 뒤에 섰다. 위명서는 들어오지 않고 문 자리에 섰다."뭘 찾으십니까, 숙부.""명부지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5. 종이

    "안 마시나."숙비가 제 잔은 들었다. 쉰 목으로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도로 덮는 손이 느렸다."목이 안 말라요, 마마.""꼭지가 오른쪽인데.""예.""오른쪽이면 마셔도 되는 잔이지. 설련이가 자네한테 그리 배웠고, 그대로 놓았네.""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목이 안 말라요."월령은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소매 안의 얇은 종이가 손목 안쪽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는 것이 오늘 이 방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설련은 병풍을 보는 눈으로 고모 곁에 서 있었다."자네 남편이 북에서 이기면 내 아들이 산다."숙비가 잔을 든 채 이어 갔다."자네 남편이 지면 둘 다 죽고. 그러니 나는 섭정왕이 이기길 빌어야 하는 사람일세. 우스운 셈이지.""셈이 아니에요, 마마. 그냥 그런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눈 위에 서 있으니까요."숙비가 웃다가 기침을 삼켰고, 삼킨 것이 목에서 소리를 냈다.*담 밖에서 병사장이 제 발을 보고 있었다.해가 미시 자리에 왔다. 기윤이 반대편 지붕에서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초비가 지붕 위에서 문을 보았다.길 끝에서 사람이 가마가 아니라 걸어서 왔다.늙은 상궁이 앞에 서고, 그 뒤에 예복을 갖춘 여인 하나가 신이 먼지로 하얗게 된 채 왔다.병사장이 그 얼굴을 알았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황후마마."황후가 문 앞에 섰다. 병사장을 보지 않고, 안에서 열면 열리는 붉은 문을 보았다."섭정왕비를 내놓아라. 곤원전이 왔다."두드리지 않고 그 한마디만 문 안으로 보냈다.*방 안으로 궁인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마마, 곤원전 마마께서 문 앞에 와 계시옵니다."숙비가 소리 없이 잔을 놓았다."가마를 타고 왔더냐.""아니옵니다. 걸어오셨사옵니다.""황후가 내 문 앞까지 걸어왔어."숙비가 무엇인가를 다시 매기는 얼굴로 월령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가게, 섭정왕비. 곤원전이 자네를 데리러 온 것이니. 안 마신 잔은 그대로 두고.""예, 마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4. 삭원

    옛 삭원성 성터의 돌담은 반만 남아 있었다.남은 반 안에 심각의 북문군 이백이 갇혀 있었고, 무너진 반 쪽 비탈에 흑령이 엎드려 있었다. 밤인 데다 불을 피우지 않는 놈들이라 수를 셀 수 없었다.정무가 앞에 섰다."왕야, 비탈 아래로 돌아서 오릅니다. 놈들은 담만 보고 있습니다.""그렇게 해라. 소리 없이.""예. 왕야는 제 뒤에 서십시오."위지헌이 정무의 반 걸음 뒤에 섰다. 도성을 떠난 뒤로 처음이었다. 늘 제가 하던 말을 정무가 했으니, 강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북경군이 비탈 아래서 소리 없이 올라갔다. 눈이 발소리를 먹었다. 흑령이 알아챈 것은 등 뒤에서 칼이 왔을 때였다.*길지 않았다.정무의 칼이 먼저 갔고 위지헌의 칼이 그 옆으로 갔다. 검은 것들이 눈 위에서 일어나다가 도로 누웠다. 나머지는 산으로 뛰었다."왕야, 산으로 간 놈들은요.""두어라. 밤에 산을 쫓지 않는다."돌담 위에서 북문군이 소리를 질렀다. 반나절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소리였다. 위지헌이 담을 넘었다.*심각은 담 밑 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앞으로 뻗은 왼쪽 다리 허벅지에 화살대가 꺾인 채 박혀 있었고, 그 아래 눈이 검었다."전하, 늦으셨습니다."심각이 급한 사람답게 급하게 말했다."늦지 않았소. 부장이 살아 있으니 늦은 것이 아니오."위지헌이 그 앞에 무릎을 꿇자 대창포 자락이 검은 눈에 닿았다. 화살은 뼈를 비켜 갔고 살은 비켜 가지 못했다."다리요. 다리만입니다. 다리는 둘이니까 하나쯤은 괜찮습니다.""입을 다무시오.""예, 전하."강무진이 윤백이 넉넉히 넣어 준 붕대를 꺼내고 화살대를 잡았다."부장, 이를 무십시오. 하나, 둘에 뽑습니다.""셋에 뽑는 게 아니오?""둘에 뽑습니다. 셋을 기다리면 힘이 들어가서요."화살이 뽑혔다. 심각은 소리 대신 급한 말을 냈다."누이한테는 말하지 마십시오. 아니, 하십시오. 어차피 어머니가 아실 테니까요. 어머니가 아시면 누이도 알고, 그러면 전하가 말 안 하신 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3. 병풍 앞

    문지방을 넘자 향이 탄 냄새가 먼저 왔다.불이 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회랑에 남아 있는 냄새였다. 물지게를 오른쪽에 지던 궁인이 앞서 걸었고, 다른 하나가 회랑 끝에 서 있었다. 초비가 센 셋 가운데 하나는 지금 왕부 마당에 묶여 있으니, 담 안에 남은 손은 이 둘이었다.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월령은 돌아보지 않았다."설련이는 안에 있느냐.""마마 곁에 계시옵니다. 이쪽으로 드시옵소서."궁인은 그 말만 하고 앞서 걸었다. 안에서 열면 열리는 문이라는 것을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향방 앞을 지났다.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은 채였고, 문갑이 있던 자리에 재가 쓸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안쪽 방 문이 열려 있었다.*병풍이 있었다.그런데 그 앞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병풍을 등지고 앉은 무향의 소매와 정갈하게 여민 깃, 숙비였다.월령은 그 자리에 멎었다. 이 방에 들 때마다 병풍이 있었고 목소리는 그 뒤에서 왔다. 오늘은 목소리가 앞에서 왔다."왔군."숙비의 목이 쉬어 있었다. 연기를 마셨다는 말 하나는 서찰에서 참이었다."설련이 글씨로 불렀는데, 설련이 글씨가 아닌 줄 알고 왔겠지.""예, 마마.""그러고도 왔어.""예.""요 밑에는 아무것도 없네.""알아요. 그것도 알고 왔어요."월령은 숙비가 앉으라 하기 전에 앉았다. 이 방에서 처음 하는 일이었고, 숙비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설련이 숙비 곁에 서 있었다.소매가 그을린 궁인 옷을 입고 있었다. 뺨의 검댕은 씻었고 머리는 도로 반듯했다. 월령을 보지 않고 고모의 어깨 너머 그림 없는 병풍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담 밖에서 초비가 해를 보았다.오시가 반쯤 갔다. 초비는 지붕 위에서 문을 보고, 해를 보고, 다시 문을 보았다. 기윤이 반대편 지붕에서 손가락 하나를 들어 반 시진이 남았다고 알렸다.병사장은 문 앞에서 제 발을 보고 있었다. 미시가 오면 누가 오는지 그 사람은 몰랐다. 독고진겸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2. 급한 첫 획

    "설련 언니 글씨를 흉내 낸 거예요."서윤이 새벽에 기윤이 데려온 걸음 그대로 마루에 앉아 말했다. 밤에 바느질을 하다 온 손끝에 실 자국이 있었다. 종이를 등잔 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제 쪽으로 기울였다."모양은 맞아요. 마 자 꺾는 데도, 요 자 끝을 올리는 데도요. 언니 글씨를 오래 본 사람이에요. 그런데요, 언니.""그런데?""숨을 안 쉬었어요. 언니는 첫 획을 놓고 한 번 쉬잖아요. 그래서 첫 자가 굵고요. 이건 모양만 베끼고 숨은 못 베꼈어요. 남의 글씨를 베끼는 사람은 보통 첫 획에서 쉬어요. 모양을 보느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안 봤어요. 외워서 썼어요."서윤이 종이를 접지 않고 내려놓았다."언니 글씨를 안 보고도 쓸 만큼 오래 본 사람이에요."월령은 그 말을 받았다. 설련이 찻상 뒤에서 자란 그 방에서, 설련의 글씨를 열 해 넘게 본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숙비였다.*"저도 제 이름으로 남이 글을 쓴 적이 있어요."서윤이 어른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는데, 그 밑에서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때 그 글씨도 이랬어요. 제 것 같았어요. 저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저를 오래 본 사람이 썼으니까요. 언니, 이걸 받은 사람이 설련 언니 글씨를 믿고 가면, 그때 저처럼 돼요.""안다.""그런데 가실 거죠."월령이 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그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손끝의 실 자국을 제 치마에 문질렀다.*독고진겸이 밤새 담 밖에 섰다가 온 걸음으로 마루 아래 서 있었다.종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서윤의 말만 들었다. 듣고 나서 한참 뒤에 물었다."그 아이 첫 획이 느리오?"서윤이 그를 보았다."예. 붓을 놓고 한 번 쉬어요.""나는 그 아이 글씨를 모르오."늙은 사내가 담을 짚던 손을 소매에 넣고 있었다."셈방 글씨만 알지. 그 아이는 셈방에 앉지 않았으니. 여섯 살에 열쇠를 삼키려 했소, 셈방에 안 들어가려고.""다음에 보시면 아실 거예요. 첫 자가 다른 자보다 굵어요."독고진겸이 셈을 받아 적는 사람처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1. 담 안의 손

    묵아가 등롱을 들고 협도로 왔다.해가 담 너머로 넘어가는 교대 시각이었다. 낮을 지킨 초비가 내려와 물 표주박을 건네자 묵아가 받았다. 손끝에는 늘 그렇듯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오늘도 그대로야. 셋이 물 긷고, 들어가고. 그게 다야.""휘장은 그대로고?""안 걷었어. 봉쇄한 날부터 한 번도.""알았어. 밤엔 내가 볼게."묵아는 말이 짧았고 초비는 더 짧았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담이 하나 더 선 것 같았다.담 서쪽 협도 쪽에서 기와가 낮게 울렸다. 사람이 밟는 소리였다."서쪽이야.""올라갈게."초비가 도로 지붕으로 올라갔고, 묵아는 등롱을 내려놓고 손끝의 실을 풀었다.*담 안에서 궁인 옷을 입은 사람이 넘어왔다.치맛자락을 허리에 묶고 기와에 매달렸다가 손을 놓아 협도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기 전에 초비가 지붕에서 소리 없이 그 위에 내려섰다. 어깨를 누르고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묵아의 실이 그 손목으로 갔다. 던지고, 감고, 당겼다. 붉은 실이 두 손목을 세 번 돌았다. 손이 등 뒤에서 묶였다.궁인은 버둥거리지 않았다."왕부에 가는 길입니다. 왕비마마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궁인이 협도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말했다. 잡힌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설련 아가씨가 보내셨습니다. 소매 안에 있습니다."초비가 소매를 뒤지자 접힌 종이가 나왔다. 제가 볼 것이 아니라서 펴지 않고 품에 넣었다.*독고진겸이 협도 어귀에 서 있었다.기와 소리를 듣고 제 자리에서 온 걸음이었다. 늙은 사내가 엎드린 궁인의 얼굴을 보았다. 셋 중 하나의 같은 얼굴이었다."설련이는 어찌 있소.""안에 계십니다."궁인은 얼굴을 들지 않고 그렇게만 답했다. 독고진겸은 더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얼굴 앞에서는 물을 말이 없었다."왕부로 데려가오. 나는 여기 있겠소."초비가 궁인을 일으켜 세웠다. 묵아가 실 끝을 제 손목에 감아 쥐었다. 끌지 않고 앞세워 걸었다. 독고진겸은 따라오지 않고 담 밖 제 자리로 돌아갔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