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살구꽃 향이 났다.
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
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
"아가씨!"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목은 멀쩡했다. 상처도, 쇠사슬이 쓸고 간 자국도, 죄패가 눌렀던 흔적도 없었다.
월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황궁의 담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계단도 아니었다.
머리 위에는 옅은 청색 비단 천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창 너머로 살구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가지마다 연분홍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바람이 지날 때마다 몇 장씩 창살에 닿았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 방을 알고 있었다.
심가의 동쪽 별채.
황후의 금관을 쓰기 전, 그녀가 열여섯 해를 살았던 방이었다. 창가 낮은 서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이 남아 있었다.
절반쯤 펼쳐진 병법서, 아버지의 군보를 따라 그리던 산맥과 강줄기, 아란에게 가르쳐 주다 만 바둑판. 흑돌 셋과 백돌 다섯이 끝내기 자리에서 묘하게 맞물린 채 멈춰 있었다.
이 방은 그녀가 가장 아름답게 꾸며지던 곳이 아니라, 가장 오래 생각하던 곳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의원을 부를까요?"
월령은 고개를 돌렸다.
침상 곁에 어린 시녀 청아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직 양 볼에 젖살이 남은, 눈이 크고 손이 빠른 아이.
훗날 황궁 깊은 곳까지 따라와 끝까지 곁을 지키다, 누구도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채 사라졌던 아이. 그 아이가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월령의 손끝이 떨렸다.
"청아."
목소리가 낯설었다.
갈라지고 쉬어 버린 목소리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오래 울부짖느라 망가지지 않은, 어린 자신의 목소리였다.
"예, 아가씨."
"오늘이 며칠이냐."
청아가 눈을 깜빡였다.
"삼월 초엿새입니다. 아가씨께서 낮잠을 너무 오래 주무셔서, 소인이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삼월 초엿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월령의 숨이 접혔다.
경화 칠년, 삼월 초엿새.
황후 간택의 이름이 아직 심가 문턱을 넘기 전. 서원당에 흰 천이 걸리기 전.
어머니의 기침이 병으로 불리기 시작한, 바로 그날. 월령은 화장대 위 동경을 끌어다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열여섯의 심월령이 있었다. 뺨에는 핏기가 돌았고, 눈가에는 황궁에서 배운 미소의 흔적이 없었다.
손등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다만 눈동자만이 달랐다 — 아직 세상을 믿던 얼굴 위에, 너무 먼 밤을 건너온 눈이 얹혀 있었다.
봄이 다시 문을 열었다.
검은 우산 아래의 높은 단.
위명서의 차가운 눈.
위지헌의 피 젖은 손.
그리고 빗소리 사이로 낮게 떨어지던 말.
내가 되돌릴 거야.
다시 봄이 오게 할게.
그는 왔다.
황제가 버린 자리로, 모두가 역적이라 부른 자리로.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 그녀는 두 해를 거슬러,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가씨, 정말 의원을…"
"어머니는."
청아가 멈칫했다.
"마님이요? 서원당에 계세요. 아침부터 기침이 심하셔서, 둘째 부인께서 몸에 좋은 탕약을 올리겠다고…"
"탕약."
월령이 낮게 되뇌었다.
부드럽던 살구꽃 향 밑에서, 아주 오래된 쓴맛이 고개를 들었다. 그날 어머니 유씨는 둘째 부인 한씨가 보낸 탕약을 마셨다.
처음엔 감기가 깊어진 줄 알았다. 다음 날부터 피를 토했고, 보름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 달 뒤 서원당 문에는 흰 천이 걸렸다. 그 흰 천이, 심가의 첫 균열이었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월령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옷을 다오. 푸른 비단 말고 흰 장삼으로. 머리는 단정하게만 묶어 다오."
청아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 아이는 언제나 월령의 표정만 보고 움직였다. 그래서 끝내, 아무것도 모른 채 너무 먼 곳까지 따라왔다.
주인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번에는 잃지 않는다.
흰 장삼으로 갈아입는 동안, 월령은 당장 울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를 보고, 오라비의 이름을 부르고, 어린 아란을 품에 안아 살아 있느냐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눈물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살리는 것.
그리고 독을 가져온 손목을 잡는 것.
"청아. 오늘 서원당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기억하느냐?"
청아가 빗질하던 손을 멈췄다.
"아침에 둘째 부인과 서윤 아가씨가 함께 오셨고요, 그 뒤로 주방의 은매가 탕약을 달인다고 몇 번 왔다 갔어요."
은매.
그 이름을 듣자 월령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장례 사흘째, 은매는 우물에서 건져졌다.
사람들은 젖은 돌을 잘못 밟았다 했다.
너무 쉽게, 너무 조용히.
이제 와 생각하면 입막음이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울며 탕약을 빼앗고, 둘째 부인을 의심한다는 티를 냈을 것이다.
그러면 손은 숨어 버린다.
증거는 사라지고, 은매는 그날 밤 안에 우물가로 끌려갈 것이다. 다시 열린 봄은 자비가 아니었다.
손잡이가 이쪽으로 돌아온 칼이었다.
"약방으로 가자."
방울이 울렸다.늙은 태의가 아이의 오른쪽에서 방울을 흔들자 봄이 돌아보며 잡으려 했다. 태의가 방울을 뒤로 빼고 왼쪽으로 돌아가서, 아이 귀 한 뼘 옆에서 울렸다.아이는 앞에 있는 월령을 보고 웃었다.태의가 방울을 놓고 왼쪽에서 크게 손뼉을 쳤다. 방어멈이 놀라고 청아가 놀랐는데 아이는 놀라지 않았다."열이 귀 안으로 들었사옵니다. 왼쪽이옵니다. 돌 전 아이가 열병을 앓고 나면 더러 있사옵니다. 열 아이에 하나꼴이옵니다. 오른쪽은 멀쩡하옵니다.""왼쪽은요. 약을 쓰면요.""쓸 약이 없사옵니다. 안 돌아오옵니다.""평생요.""예, 마마님. 평생이옵니다."월령이 오른쪽 귀가 제 가슴에 오게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그쪽 귀로 어미 숨소리를 듣고, 이 하나 난 잇몸으로 웃었다.*위지헌이 흰 옷에 왼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마루 기둥 옆에 서서 태의 말을 들었다. 왼쪽이 안 돌아온다는 말이었다.그가 소리를 냈다.말이 아니었다. 목 안에서 숨이 꺾이는 짧은 소리였다. 열 해 전장에서도 내지 않았고 형장에서 늦었을 때도 내지 않은 소리를, 아내 앞에서 처음 냈다.오른손이 옥대로 가서 매듭을 잡고는 놓지 못했다.월령이 아이를 안은 채 그것을 보았다. 무너지지 않았다. 아이가 품에서 오른쪽 귀로 어미 숨소리를 듣고 있어서, 무너질 자리가 없었다."부군."그가 아내를 보지 않고 기둥을 보았다."부군. 이리 오세요. 오른쪽으로요. 이 애 오른쪽은 다 들어요."그가 아이의 오른쪽으로 왔다. 아이가 아비를 돌아보며 손을 뻗었는데 옥관이 없어서 붕대를 잡았다. 그는 앉은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었고, 아이 손이 잡은 붕대를 빼지 않았다."내 왼쪽하고, 네 왼쪽하고. 둘이면—"말이 거기서 끊겨 다 맺지 못했다. 그가 말을 다 맺지 못하는 것을 월령은 여태 손에 꼽을 만큼만 보았다. 오늘 하나가 더 늘었다."둘이면 오른쪽이 둘이에요. 그거면 돼요."*"오른쪽에서 부르면 됩니다."방어멈이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마루 끝에서 말했다."애가 고개 돌
흰 천이 문마다 걸렸다.곤원전 문과 회랑 기둥과 궁문에, 늙은 상궁이 제 손으로 그것을 걸었다. 어제 문지방에서 무릎이 꺾였던 사람이 일어나서 걸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빈전이 곤원전 안에 차려지고 황후가 마신 찻상은 치워졌다. 잔 하나만 꼭지를 오른쪽으로 둔 채 고 내관의 손에 들려 편전으로 갔다.*경화제가 병상에서 일어났다.태의가 말리고 고 내관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다리가 서지 않는 사람이 서자 위명서가 그 팔을 잡았고, 아비가 아들에게 실어 본 적 없는 무게를 실었다."아바마마, 가마를 부르겠습니다.""가마는 안 탄다. 황후한테 가는 길이다. 걸어서 간다.""그럼 제 팔을 잡으십시오. 놓지 마시고요."편전에서 곤원전까지 회랑 하나와 돌길 하나를 걷는 데 반 시진 가까이 걸렸다. 위명서는 아비가 서면 서고 걸으면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화 소맷단의 마른 것 위에 아비의 손이 닿아 있었다.빈전 앞에서 경화제가 아들 팔을 놓았다."여기서부터는 혼자 간다."혼자 세 걸음을 걸어 흰 천 앞에 섰다. 꿇지 못하는 다리라 선 채로, 임금이 아니라 늙은 남편의 눈으로 보았다. 그러고는 고 내관 손의 잔을, 오른쪽인 꼭지를 보았다."그 잔은 짐 머리맡에 둬라. 꼭지는 그대로 두고. 짐이 누운 동안 짐 대신 볼 것이다.""예, 폐하. 머리맡에 두겠사옵니다."*위지헌이 국청 마당에 섰다.태의가 손가락 셋이 제 방향이 아닌 채로 밤을 넘기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황후를 독살하고 폐하께 향을 먹인 손이다. 지금 참한다.""전하, 국상 중에 피는 법도에—""국상 중이라 벤다. 상주가 없는 국상이다. 벨 것이라도 있어야지."옥리가 마당에서 벴다. 월령은 그 자리에 없었다. 봐야 할 것은 어제 다 봤다. 위지헌은 칼을 닦지 않았다. 벤 것은 옥리의 칼이었다.*자녕궁 담 밖에서 초비가 들었다.담 안에서 나는 곡소리는 숙비의 것이었다. 법도대로 세 번 길게 하고 끊고, 다시 세 번 하고 끊는, 황
월령은 국청 마당을 뛰쳐나왔다.궁 안에서는 아무도 뛰지 않는다. 여인이 치맛자락을 쥐고 달리면 그것만으로 흠이 되고, 섭정왕비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태의가 국청 바닥에 엎드린 채 뱉은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곤원전 찻잔은 오늘 아침에 바뀌었소.기윤이 뒤에서 따라붙다가 앞질러 나갔다. 회랑을 두 개 지나고 돌길을 건너는 동안 월령은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곤원전 문 앞에 늘 서 있던 늙은 상궁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국화 우린 물 냄새가 흘러나왔다. 황후가 좋아하는 차였다.*황후는 찻상 앞에 앉아 있었다.병상에서 일어나 곤원전으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처음 옷을 갈아입고 앉은 자리였다. 찻상 위에는 잔 하나가 뚜껑을 벗은 채 놓여 있었고, 벗겨 둔 뚜껑의 꼭지는 오른쪽을 향해 있었다. 상궁이 직접 우린 것만 오른쪽으로 놓기로 한, 월령이 만든 규칙 그대로였다.잔은 비어 있었다."마마."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빛이 희다기보다 잿빛이었고, 입가에서 국화 냄새가 났다."섭정왕비가 궁 안에서 뛰다니. 무슨 일이냐.""마마, 그 잔을 누가 올렸습니까.""상궁이 우렸다. 내 눈으로 봤다."황후는 이상할 것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우려 놓고 나니 편전에서 부른다기에 갔다. 폐하께서 찾으신다고 하더구나. 가 보니 찾으신 적이 없다 하시고. 돌아와 보니 잔이 그대로 있기에 마셨다. 꼭지가 오른쪽이었으니까."월령은 찻상으로 다가가 잔을 집어 들었다.빈 잔 바닥에 국화 잎 하나가 붙어 있었다. 잔을 뒤집자 굽에 난 흠이 손끝에 걸렸다. 곤원전의 잔은 굽에 흠이 없다. 이것은 곤원전의 잔이 아니었다. 곤원전의 것과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국화 냄새까지 입힌 다른 잔이었다. 상궁이 우린 진짜 잔은 이 방에 없었다. 누군가 그 자리에 이 잔을 놓고 갔다. 뚜껑 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려놓을 줄 아는 손이었다."기윤 나리, 태의원에 가 주세요. 원로 말고 아무나,
목패가 먼저 떨어졌다.궁문 밖 돌길에서 기윤이 태의의 뒷덜미가 아니라 허리띠를 잡았다. 돌아선 태의는 회색 옷에 마흔 남짓이었다. 맥 짚던 손이 허리로 갔다가 멎었다. 강무진이 붕대 감은 왼팔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그 손목을 잡았다."무슨 일이오. 나는 태의원 사람이오. 폐하의 맥을 짚고 나오는 길인데—""압니다. 하가 태의시지요. 소매만 보겠습니다."강무진이 소매 안에 손을 넣자 작은 향낭이 나왔다. 비단이 아니라 무명으로 지어 오래돼 색이 바랜 것이었다. 단내가 났고, 단내 밑에 쓴 것이 있었다.다른 태의 둘은 그냥 보냈다. 고 내관이 그들을 돌려세워, 아무것도 못 본 얼굴로 집에 가라고 일렀다.*왕부 별채에서 독고진겸이 그 향낭을 늙은 손으로 받았다.코에 대지 않았다. 댈 것도 없이 아는 냄새라, 손바닥에 놓고 무명 주머니와 실 매듭만 보았다."자녕궁 것이 아니오.""향방 것이 아니에요? 자녕궁 향방에서 짓던 냄새예요.""향방이 이것을 물려받은 거요. 아버지가 서른 해 전에 셈방 문 앞에 이 향을 피웠소. 셈이 틀린 사람이 문을 열면 이 냄새부터 맡았지. 맡고 나서, 아, 내 셈이 틀렸구나 하고 알았소. 누이가 입궁할 때 이것을 가져갔소. 그걸로 향방을 차렸고."독고진겸이 매듭을 보았다. 셈방 매듭이라 푸는 법이 따로 있었다. 그가 그것을 풀자 안에 향 가루가 있었고, 가루 밑에 숫자 하나가 적힌 종이 조각이 있었다."아버지 사람이오."독고진겸이 종이 조각을 들어 보였다."나도 몰랐던 사람이오. 셈방 문패에 이 번호가 있었소. 아버지가 사람을 살 때 이 번호를 줬지. 내가 셈방을 물려받을 때 이 번호 사람은 없었소. 죽었다고 들었소.""살아 있었네요.""살아 있었소. 하가 옷을 입고 서른 해를 살았소."월령이 향낭을 도로 받았으나 매듭을 묶지 못했다. 독고진겸이 대신 묶어 주었다. 딸에게 이름 첫 자를 굵게 쓰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손이었다.*자녕궁 담 위에서 초비가 내려왔다."담 안은요, 마마님, 조용해요. 설련 언
숨소리가 문밖까지 났다.편전 안쪽 침방에는 발이 내려져 있었고, 그 안에서 숨이 들고 났다. 드는 숨은 짧고 나는 숨은 길었으며, 나는 숨 끝에는 기침이 붙었다. 고 내관은 그 기침을 세지 않았다. 셋을 넘긴 뒤로는 셀 수가 없었다.월령이 발 밖에 서고 위지헌이 먼저 들어갔다. 왼 어깨에는 방어멈이 다시 감은 붕대가 대창포 안에 있었다. 발이 들렸다가 내렸다."지헌아. 왔느냐.""예, 형님. 왔습니다.""어깨는 어떠냐.""화살이옵니다. 뼈는 비켰습니다.""뼈만 비키는 애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경화제가 웃으려 했으나 웃음이 기침이 됐다. 위지헌은 무릎을 꿇은 채 그것을 보면서도 손을 뻗지 않았다. 뻗을 손이 오른쪽 하나뿐이라, 그 하나를 무릎 위에 두었다."형님,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어제부터 못 일어났다. 기침은 그 전부터고. 고 내관이 세더구나. 짐이 모를 줄 알고."*태의가 셋이었다.회색 옷에 허리에 목패를 찬 셋이 번갈아 맥을 짚었다. 하나가 짚고 물러나면 다른 하나가 앞으로 나왔고, 짚고 나서는 서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눈을 맞추면 셋이 같은 것을 안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었다.황후가 병상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예복이 아니라 사흘째 갈아입지 않은 옷이었다. 위명서는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북문에서 곧장 온 옷 그대로, 매화 소맷단의 마른 것을 털지 않은 채였다."명서.""예, 아바마마.""북에서 곧장 왔느냐. 어미한테는 갔다 왔고.""아직 안 갔습니다. 여기 먼저 왔습니다.""그럼 거기 앉아 있어라. 짐이 자다 깨면 네 얼굴이 있게.""예. 여기 있겠습니다."경화제가 눈을 감았고, 위명서는 그 자리에 남았다. 어미에게 가지 않고 아비 곁에 있었다. 월령이 발 밖에서 그것을 보았다. 전생에 이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고, 어미 곁에 있었다.*가운데 태의가 물러나며 월령 곁을 지났다.소매가 스치자 향이 왔다.월령이 굳었다.단내가 나고, 단내 밑에 쓴 것이 있었다. 자녕궁 향방에서
도성 북문 돌계단에 첫서리가 앉아 있었다.아침 해에 반은 녹고 반은 남은 서리 위에 월령이 봄을 안고 서 있었다. 아이는 열이 내린 지 나흘이라 뺨이 도로 희었고, 품 안에서 제 손으로 어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힘이 돌아온 손이었다.청아가 뒤에, 기윤이 그 뒤에 섰다. 방어멈은 대문을 지킨다고 오지 않았고, 초비와 묵아는 길 끝이 보이는 성루 위에 있었다.길 끝에서 먼지가 올랐다.*북문로에서 검은 줄이 왔다.앞에 말 하나, 검은 대창포에 옥관이었다. 대창포 안에 붕대가 있어서 어깨 한쪽이 다른 쪽보다 높았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월령에게는 보였다.그 뒤에 붉은 것과 검은 것이 다 마른 매화 소맷단, 붕대 감은 팔 둘인 강무진과 정무, 들것, 북경군이 차례로 왔다.말이 돌계단 앞에 섰다.위지헌이 오른손으로 안장을 짚고 내렸다. 시간이 걸리는데도 아무도 돕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월령 앞에 섰다."왔다.""예. 오셨어요."위지헌이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모르는 얼굴을 보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옥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앉는다더니.""앉아요. 기울지만요.""열은 내렸느냐.""내렸어요. 나흘 전에요. 이제 밤에도 안 깨요."위지헌이 오른손을 들어 희어진 아이 뺨에 손등을 댔다. 그러고는 그 손을 아이를 안은 월령의 손 위에 놓았다. 북경군이 뒤에 서 있는 채로, 서리 위에서, 그가 아내에게 건넨 것은 그 손 하나였다.월령이 그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어깨는요. 뼈는요.""비켰다. 살만 뚫렸다.""고름 냄새가 나요. 여기서도요.""방어멈이 감으면 낫는다."*"첫 장이다."위지헌이 오른쪽 소매에서 반, 또 반 접힌 종이를 꺼내 아이를 안은 월령의 팔 위에 놓았다.월령이 한 손으로 펴려는데 아이가 그것을 잡으려 했다."아기씨, 저한테 오세요. 마마님이 종이를 보셔야 해요."청아가 아이를 받았고, 월령이 두 손으로 폈다.'심월령.' '위지헌.'여섯 살 이름과 열다섯 이름이 가는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
은매가 사라졌다는 말은 밤공기보다 먼저 월령의 손끝에 닿았다.청아는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으나, 마지막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숨은 목구멍에서 가늘게 부서지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서원당 뒤뜰의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가 삐져나와 달빛을 받았다."제가 문을 잠갔습니다."청아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분명히 안에서 잠그고, 바깥 고리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월령은 먼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열쇠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짓말하는 손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제 잘못을 먼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