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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3 23:37:36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

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

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

물 위의 달도,

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

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

소리가 먼저 숨었다.

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

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들기 위해 고른 빛이었다. 머리는 낮게 틀어 올렸고, 귀밑으로 흘러내린 잔머리 한 올만이 안개에 젖어 뺨에 붙었다.

곁에 선 청아는 자꾸 소매 끝을 만졌다.

낮 동안 본 것들이 아직 어린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독향이 남은 탕약.

은매의 젖은 눈.

서윤의 치맛자락에 번졌던 검은 흔적.

어린 시녀가 하루에 다 삼키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청아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월령의 가슴 한쪽을 아프게 했다.

청아는 겁이 나면 먼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월령의 겉옷 끈을 두 번 매만지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코의 흙을 털고, 혹시 몰라 소매 안에 얇은 먹끈까지 숨겨 두었다.

책사의 손은 아니었다.

곁에 남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손이었다.

"아가씨."

청아가 입술만 움직이듯 속삭였다.

"정말 여기 계셔도 괜찮을까요?"

"괜찮은 일을 보러 온 건 아니야."

월령은 연못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가 오면 소매를 잡아. 소리는 내지 말고."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겁먹은 얼굴인데도 눈동자만은 끝까지 월령 쪽에 붙어 있었다.

해시.

은매가 남긴 종이에는 그 두 글자만 선명했다.

남쪽 연못가.

서윤의 처소에서 온 사람.

그 사람이 한씨의 심복인지, 서윤의 하녀인지, 아니면 더 먼 곳에서 내려온 손인지 보아야 했다.

월령은 오래 늦었던 사람처럼 숨을 골랐다.

어머니의 흰 천이 걸린 뒤에야 탕약의 냄새를 떠올렸고,

오라비의 군보가 피로 젖은 뒤에야 봉인의 붉은 먹이 조금 번져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황후전의 비녀함이 열리고 난 다음 날에야 잠금쇠의 흠집을 보았다.

기억은 언제나 뒤늦게 왔다.

불이 꺼진 방에 남은 연기처럼.

이번에는 기다릴 차례였다.

저들이 손을 뻗는 순간을.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청아의 손이 월령의 소매를 잡았다.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연못가로 들어섰다.

걸음은 낮고 빨랐다. 익숙한 길을 지나면서도 세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발끝이 돌을 밟을 때마다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얼굴은 가려졌지만, 월령은 그 몸가짐을 알아보았다.

금지.

서윤의 처소에서 서신을 나르던 아이였다.

금지는 늘 가볍게 움직였다. 안채의 하녀들 사이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쪽을 골라 걷는 아이. 누가 부르면 먼저 웃고, 이름이 책임이 될 것 같으면 그 웃음부터 접는 아이.

악해서라기보다, 살아남는 법을 너무 일찍 배운 몸가짐이었다.

잠시 뒤 담장 아래에서 마른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심가의 하인은 아니었다.

옷은 평범한 장정의 차림이었으나 몸에 옷이 조금 헐겁게 걸렸다. 어깨는 좁고, 턱은 말랐으며, 걸음은 이상하게 빠르다가도 멈출 때마다 발끝을 먼저 거두었다.

궁에서 오래 산 사람의 걸음이었다.

허리끈의 매듭도 달랐다.

두 번 감고 안쪽으로 눌러 숨긴 매듭.

외궁의 하급 내시들이 사복을 입을 때 쓰는 방식이었다.

낮에는 누구의 눈에도 걸리지 않지만, 밤에는 그 매듭 하나가 길을 말해 주었다.

사내가 숨을 고를 때마다 목 안쪽에서 얇은 쇳소리가 났다.

그는 말을 하기 전마다 혀끝으로 앞니를 한 번 눌렀다. 급한 말을 억지로 얇게 눌러 펴는 버릇처럼 보였다.

황궁.

월령은 손끝을 접었다.

이렇게 이른 때부터.

그녀가 살구꽃 아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웃던 시절부터, 황궁은 이미 심가의 담장 밖에 손을 대고 있었다.

황궁이 심가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칼만이 아니었다.

대연의 북쪽에는 흑령산맥이 길게 누워 있었고, 그 너머 삭원의 기마 부족들은 해마다 봄이면 말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남쪽 풀을 넘보았다.

북문관을 지키는 군량은 호부의 장부에서 나오지만, 그 군량이 얼어붙은 고갯길을 지나 병사들의 손에 닿게 만드는 것은 심가의 이름이었다.

경안의 저잣거리 사람들은 겨울밤 바람이 거칠어질 때마다 말하곤 했다.

북문이 닫혀 있으면 아이들이 잠을 잔다고.

그 민심은 조정의 붉은 인장보다 질겼다.

그러니 황궁은 심가를 꺾고 싶어 하면서도, 심가의 이름을 제 편으로 세우고 싶어 했다.

그 사이에서 한 여식의 혼인은 칼보다 조용하고, 군령보다 오래가는 끈이 되었다.

"조 내..."

금지가 입을 열다 급히 혀를 깨물었다.

사내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이, 이름."

첫 음절이 아주 작게 걸렸다.

그는 곧바로 목을 가다듬었다.

"이름은 내려놓고 말하라."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금지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약이 입에 닿지도 못했습니다. 큰아가씨가 약방에 드는 바람에..."

"또."

조계라 불릴 뻔했던 사내가 끊었다.

목소리는 얇았다.

높게 뜨는 소리를 억지로 눌러 낮춘 탓에, 말끝이 마른 쇠붙이처럼 긁혔다.

사람을 꾸짖는 말이라기보다, 잘못 놓인 물건을 급히 제자리에 밀어 넣는 소리에 가까웠다.

"담장에도 귀가 있다."

금지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서원당의 마님께서 약을 드시지 못했습니다."

"시, 심월령이 눈치챘나."

그는 제 혀가 먼저 걸린 것을 싫어하듯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 서원당에서 조금 이상했습니다. 둘째 부인께 향을 보라 하시고, 서윤 아가씨 치맛자락을..."

"그 아이는 그런 눈을 가진 적이 없다."

조계가 희미하게 웃었다.

"순하고 무른 심가의 금지옥엽이지. 겁이 나면 보이는 것마다 붙잡는 법이다."

월령은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래.

나는 그런 아이였지.

부르면 대답하고, 울면 달래 주고, 손을 내밀면 믿었다.

누군가의 외로움까지 제 몫인 줄 알았다.

그래서 끝내 제 목에 죄패를 걸었다.

"약은 멈춘다."

조계가 말했다.

"심 부인이 살아 있으면 다른 문을 열어야지."

"장부 쪽입니까?"

금지가 겁먹은 듯 물었다.

조계는 대답 대신 안개 낀 연못을 보았다.

"안채 문서가 잠기면 군량 문서도 늦어진다. 북문군이 제때 먹지 못하면 병부가 심가를 탓할 수 있고, 심가가 흔들리면 경안 백성의 입도 흔들리지."

그는 아주 가볍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군량과 병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말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체를 참지 못하는 사람의 조급함이었다.

"사람은 배가 비면 충성도 헐값에 논한다."

"윗전께서는요?"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안개 속에서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삼전하께서 기다리라 하셨다."

이 말만은 또렷했다.

누군가에게 여러 번 외워 들은 문장처럼.

삼전하.

그 두 글자가 젖은 공기를 갈랐다.

청아가 숨을 들이켜려는 순간, 월령은 조용히 그 입을 덮었다.

아이의 숨이 손바닥 안에서 뜨겁게 떨렸다.

위명서.

아직 황제가 아닌 남자.

아직 그녀를 높은 단 아래 세우지 않은 남자.

아직 가벼운 손짓 하나로 칼날을 움직이지 않은 남자.

그런데도 이름만으로 목 안쪽에 오래된 피 맛이 올라왔다.

"내일 심가 연회에 삼전하께서 드신다."

조계가 다시 말했다.

"서윤 아가씨에게 전해라. 심월령을 오래 붙잡아 두라고. 웃게 만들 수 있으면 더 좋다."

"큰아가씨를요?"

"눈으로 보겠다 하셨다. 보고 난 뒤에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심가 여식이면 북문군과 저잣거리의 입이 함께 오지."

조계는 물 위로 번진 달빛을 밟듯 낮게 웃었다.

웃음 끝이 얇게 갈라졌다.

"삼전하께서는 그 값을 아신다."

월령은 눈을 감지 않았다.

한 해 이른 만남.

운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가오던 그 손이, 사실은 이토록 오래전부터 길을 재고 있었다.

"은매는?"

"살아 있습니다."

"밤 안에 입을 막아라."

금지가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큰아가씨가 찾으시면..."

"이, 입은 살아 있을 때만 샌다."

첫 소리가 걸리자 조계의 눈가가 작게 일그러졌다.

그는 곧바로 목을 눌러 다시 낮게 말했다.

"살아 있을 때만."

냉정함은 천성이라기보다 버릇처럼 보였다.

하루라도 흐트러지면 궁의 어딘가에서 먼저 버려질 사람의 버릇.

"우물은 넓고 밤은 길다. 심가에서 계집종 하나 미끄러지는 일이 그리 대수냐."

그 말이 끝나자 연못가의 안개가 조금 더 짙어진 듯했다.

월령의 손바닥 안에서 청아의 숨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은매는 그렇게 사라졌었다.

사람들은 젖은 돌을 잘못 밟았다 했다.

심가의 하인들은 불길한 일이라며 입을 다물었고, 월령은 어머니의 상복을 입은 채 향만 피웠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죽음의 증거였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러나 월령은 금지를 향해 당장 뛰어나가지도 않았다.

금지도 한 손이었다.

서윤의 손에서 궁으로 이어지는 가늘고 떨리는 손.

잘라 내면 조용해질 것이다.

하지만 잘린 손은 더는 어디를 가리킬 수 없다.

월령은 청아의 입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은매도, 은매의 병든 어미와 어린 동생도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은매 하나를 심가 안에 숨기는 일과, 담장 밖의 식솔까지 빼내는 일은 달랐다.

전자는 문을 닫으면 되었지만,

후자는 길을 건너야 했다.

길에는 늘 먼저 기다리는 눈이 있었다.

금지는 조계에게 작은 봉투를 받았다.

옷깃 안으로 숨기는 손이 서툴렀다. 검은 장옷 소매가 한 번 접혔다 펴졌다. 그 짧은 틈에 은빛 실 하나가 안개 속에서 번뜩였다.

서윤의 연꽃 댕기와 같은 계열의 실이었다.

금지가 먼저 사라지고, 조계는 잠시 더 연못가에 남았다.

주변을 살피는 눈이 빈틈없었다.

아니.

빈틈없어 보이려 애쓰는 자의 눈이었다.

진짜 그림자들은 그렇게 자주 돌아보지 않는다.

"청아."

"예, 아가씨."

"은매를 서원당 뒤 창고로 옮겨. 문은 안에서 잠그고, 열쇠는 네가 가져."

"혼자요?"

청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물음은 빠르게 나왔다.

겁과 계산 사이에서 손이 먼저 움직이는 아이였다.

"은매가 걷지 못하면 부엌 뒷문에 있는 빈 수레를 써. 짚단을 덮고, 약재 자루를 두 개 올려."

"예."

"누가 묻거든 마님 약재라 해."

"그 아이의 어미와 동생은요?"

청아가 아주 작게 물었다.

월령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

그 이름 없는 식솔들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작은 시녀의 겁먹은 마음 안에도 남을 걱정할 자리가 남아 있었다.

"해가 뜨면 정 호위장께 사람을 청할 거야."

월령은 나직이 말했다.

"오늘 밤 움직이면 저들이 먼저 알아챌 수 있어."

"그럼 그때까지는..."

"그래."

월령의 말끝이 살구꽃잎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그때까지는, 내가 늦지 않아야 해."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 있었지만, 손은 이미 소매 안 먹끈을 풀고 있었다.

"아가씨는요?"

월령은 담장 쪽으로 움직이는 조계의 등을 보았다.

"아버지의 호위들에게 갈 거야."

"정 호위장께요?"

정무.

심도윤이 북쪽 전장에서 데려온 오래된 호위장이었다.

왼쪽 귀가 반쯤 들리지 않았고, 걷는 소리는 마른 잎보다 가벼웠다. 심가의 어린 하인들은 그를 무서워했지만, 월령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정무는 묻기 전에 먼저 문을 닫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베기보다 살려 묶는 법을 아는 손이기도 했다.

"그럼 저 사람은..."

"오늘 밤 심가에 도둑이 들었어."

월령의 목소리는 낮았다.

"궁의 매듭을 한 도둑이."

청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더 묻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는 무서워하면서도 월령의 말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날 밤, 남쪽 담장 아래에서 조계가 붙잡혔다.

정무는 칼을 뽑지 않았다.

칼집 끝으로 조계의 무릎 뒤를 정확히 쳤고, 쓰러지는 몸을 젊은 호위 둘이 받아 눌렀다.

소리는 작았다.

오래 전장을 지나온 사람의 손이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말할 입만 남겨 두는 손.

조계는 넘어지는 순간에도 먼저 입술을 다물었다.

"조, 조정의..."

말은 턱 아래에서 끊겼다.

정무의 손이 이미 그의 턱을 눌러 올리고 있었다.

정무는 조계의 입안부터 확인했다.

혀 밑에 숨긴 작은 독낭을 손가락 두 개로 빼냈다. 젊은 호위 하나가 눈을 크게 뜨자, 정무는 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놀라는 소리는 나중에 해라."

낮고 메마른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호위가 입을 다물었다.

청아는 멀찍이 선 채 은매가 숨은 창고 열쇠를 품에 꼭 쥐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렸다. 그런데도 누가 다가오면 먼저 눈을 들어 길을 막았다.

월령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숨을 삼켰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날수록, 사람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워졌다.

조계는 도망치다 다리를 다쳤고, 품에서는 궁제 향낭과 은자가 나왔다.

묶이는 동안에도 그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 했다.

그때마다 첫 음절이 목에 걸렸고, 결국 마른 숨소리만 얇게 새었다.

향낭 안에는 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얇은 종이 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글자는 없었다.

다만 가장자리 안쪽에 금빛 가루가 아주 엷게 묻어 있었다.

궁의 물건은 때로 글자보다 표식으로 말한다.

월령은 그것을 보았지만, 손을 뻗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가 먼저 만질 물건이 아니었다.

정무가 기름 먹인 천으로 종이 조각을 감싸 품에 넣었다.

그는 월령 쪽을 보았다.

아니, 본 듯하다가 보지 않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심가의 호위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주인의 딸이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주인이 모른 척하고 싶은 밤을 다음 날 아침까지 단단히 묶어 둔다.

잡았으나 아직 잡은 것이 아니었다.

황자의 이름은 무거웠다.

섣불리 꺼내는 순간, 그 이름은 칼이 되어 심가의 목을 먼저 겨눌 것이다.

황궁과 장군가 사이에는 예법이라는 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 아래로는 늘 피가 흘렀다.

위명서.

월령은 그 이름을 혀끝에 올리지 않았다.

이름은 아직 소매 안에 두어야 했다.

다음 날, 심가에는 봄 연회가 열렸다.

겉으로는 유씨의 기침이 조금 가라앉은 것을 기뻐하고,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차와 술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러나 안채의 공기는 어제와 달랐다.

하인들은 서로 눈을 피했다.

부엌에서는 찻물 끓는 소리까지 작아졌고, 안채 문지방을 닦던 아이는 같은 자리를 세 번이나 문질렀다.

심가의 하인들은 말을 크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솥뚜껑 닫는 속도, 쟁반 위 찻잔의 수, 누가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지를 보고 집안의 날씨를 읽었다.

오늘 안채의 날씨는 흐렸다.

한씨는 눈 밑을 분으로 덮었으나 창백함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은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더 조용해졌다.

금지는 서윤의 뒤에 서 있었다.

검은 장옷은 벗었고, 낮의 하녀답게 얌전한 회색 저고리를 입었다. 그러나 손끝이 자꾸 허리끈 아래를 더듬었다. 밤에 받은 봉투가 아직 그곳에 있는 듯이.

월령은 모르는 척했다.

사람은 몰렸을 때보다, 안심했다고 믿는 순간에 더 많은 것을 흘린다.

서윤은 더 곱게 꾸미고 나타났다.

연분홍 대신 옅은 하늘빛 치마를 입었고, 머리에는 작은 진주 비녀를 꽂았다.

맑고 어렸다.

그래서 그 눈 밑에 고인 밤의 흔적이 더 잘 보였다.

서윤은 어릴 때부터 어른의 말을 잘 흉내 냈다.

한씨가 손님 앞에서 "속 깊다"고 웃으면, 그날부터 서윤은 아이들이나 할 법한 투정을 한 겹 접어 넣었다.

기침하는 어른에게는 물을 먼저 권했고, 바쁜 하인에게는 "수고가 많구나" 하고 작은 어른처럼 말했다.

그 말들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일찍 배운 말은 아이의 입술 위에서 종종 작게 떨렸다.

오래 울었거나,

잠들지 못했거나.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언니."

서윤이 가까이 왔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지나치게 매끄러운 것은 때로 금이 간 그릇과 닮았다.

"어젯밤은 편히 주무셨어요?"

"응."

월령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저도요."

거짓말은 향처럼 얇았다.

바람이 불면 금세 흩어질 것 같으면서도, 한동안 옷자락에 남는다.

"오늘 손님이 많다지?"

"네. 어머니께서도 아침부터 분주하세요."

서윤은 말끝을 조심스럽게 낮추었다.

한씨가 손님 앞에서 쓰는 바로 그 높낮이였다.

단정하고, 걱정 많고,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여야 사랑받는다고 믿는 아이의 높낮이.

"혹 궁에서도 걸음하실까?"

서윤의 손끝이 찻잔 가장자리를 스쳤다.

작은 소리가 났다.

"황궁이요?"

"어젯밤 꿈에 붉은 담을 봤어."

월령은 웃었다.

"그 안에서 누가 걸어 나오더라."

서윤은 아주 잠깐 숨을 멈췄다.

그 뒤에는 다시 예쁜 얼굴이었다.

어른들이 보면 안심할 얼굴.

언니를 걱정하는 착한 아이의 얼굴.

"언니는 요즘 꿈이 깊으세요."

"그런가 봐."

"나쁜 꿈이면 잊으세요. 어머니께서도 마음 약한 사람은 나쁜 것을 오래 품지 않는 게 좋다 하셨어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서윤은 그렇게 말하며 월령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여전히 작고 따뜻했다.

월령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등을 토닥였던 손.

머리카락을 빗어 주었던 손.

눈물을 닦아 주었던 손.

그리고 언젠가는 비녀함을 열었던 손.

아직 어린 손이었다.

아직 피보다 인정에 더 쉽게 흔들릴 손.

그 손을 밀어내기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누가 그 아이에게 처음 칼을 쥐여 주었는지는 영영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월령은 서윤이 칼이 아닌 것으로 남을 수 있었던 때를 알고 싶었다.

아직 늦지 않은 선이 어디인지.

그 선을 찾지 않고 베는 일은, 그녀가 미워하던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

월령은 조용히 손을 빼냈다.

"오늘은 좋은 날이어야지."

서윤의 손이 허공에 잠시 남았다.

손가락 끝이 빈 찻잔의 김을 스치더니 천천히 접혔다.

정오 무렵, 대문 쪽이 술렁였다.

먼저 하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다음 친척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씨가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누군가 작게 삼전하라고 속삭였다.

그 말이 연회장 위로 얇게 번졌다.

하인 하나가 잘못 놓은 술잔을 다시 집어 들다 손끝을 데었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잔 받침이 나무 탁자 위에서 아주 작게 떨렸다.

월령은 고개를 돌렸다.

위명서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황제가 아닌 남자.

옅은 옥색 장포가 봄빛을 받았다.

허리에는 검소한 백옥패가 걸려 있었다. 옷자락은 과하지 않았고, 소매 끝의 수조차 낮게 죽어 있었다.

그는 젊었고,

아름다웠고,

병약하다는 소문에 어울릴 만큼 창백했다.

웃을 때마다 입술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저 웃음은 사람을 안심시켰다.

안심한 사람은 대개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월령은 알았다.

독이 언제나 쓴맛으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예고 없이 봄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위명서가 말했다.

목소리도 같았다.

다정하게 들리도록 태어난 목소리.

그래서 더 잔혹했던 목소리.

심도윤이 군례를 취했다.

"전하의 걸음이 심가에 과분합니다."

"과분한 것은 제 쪽입니다. 대연의 북문을 지키는 집이지요. 이 집 뜰에 봄이 든 것을 보는 일도 나라의 은혜라 하겠습니다."

그는 북문이라는 말을 누구보다 부드럽게 꺼냈다.

마치 변경의 눈보라와 병사들의 굳은 손, 군량 수레가 뒤집힌 고갯길, 경안의 쌀값과 백성들의 잠자리까지 모두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처럼.

심가의 연회장에 모인 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등을 조금 폈다.

북문은 심가의 자랑이자 족쇄였다.

대연의 백성은 북쪽 바람이 세질 때마다 심가를 떠올렸고, 조정은 그 민심이 황궁보다 먼저 장군가를 향할까 두려워했다.

위명서는 바로 그 두려움과 자랑 사이에 발을 놓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늘 알맞게 낮아졌다.

너무 낮아 천박하지 않고, 너무 높아 거만하지도 않게.

사람들은 그런 겸손을 좋아했다.

황자가 자신들을 존중한다고 믿었다.

월령은 그 겸손 아래 놓인 계산을 보았다.

위명서의 시선이 천천히 연회장을 지나갔다.

그 시선이 한씨에게 닿자 한씨는 눈가를 눌렀고, 둘째 숙부는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심가 방계의 남자에게 조정 문신들의 글 흐름을 묻듯 말을 던졌다.

가벼운 안부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어느 붓이 어느 편에 기울었는지 재는 습관이 있었다.

호부가 올해 북문군 군량을 얼마나 늦추었는지,

병부가 삭원의 작은 충돌을 어떤 말로 기록하려 하는지,

동남 운하의 소금세가 줄어든 탓에 어느 부서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는지.

그가 묻는 말은 모두 봄날의 술잔처럼 맑았지만, 바닥에는 나라의 장부가 비쳤다.

심가의 혼인은 그런 장부 위에서도 값이 매겨질 수 있었다.

월령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다.

그 시선이 서윤을 스쳤다.

서윤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가, 곧 창백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월령에게 닿았다.

몸이 먼저 기억했다.

빗물.

형장.

죄패의 거친 나뭇결.

목 안쪽을 태우던 독.

높은 단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름다운 얼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숨이 한 박자 늦게 들어왔다.

"저분이 심 대장군의 장녀입니까."

위명서가 물었다.

"예. 제 여식 월령입니다."

심도윤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월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한 백색 저고리 위로 먹빛 머리카락이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다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긴 속눈썹 아래 맑은 눈빛이 잠시 가려졌다.

그 짧은 그늘 때문에, 오히려 얼굴은 더 또렷해 보였다.

봄빛 한가운데 홀로 소리를 잃은 꽃 같았다.

위명서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 멈춤을, 서윤이 보았다.

"소문보다 조용한 분이군요."

위명서가 웃었다.

"달빛은 본디 소리가 없어 오래 남는다지요."

낮은 감탄이 번졌다.

서윤은 월령의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손끝은 치맛자락을 파고들고 있었다.

월령은 예를 올렸다.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고운 말씀입니다, 전하."

목소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전에 뵌 적이 있었습니까?"

"아직 그런 영광은 없었습니다."

"이상하군요."

위명서의 웃음이 조금 깊어졌다.

"낯설지가 않습니다."

월령은 찻잔의 온기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손등에 이마를 대던 순간을 떠올렸다.

청아의 떨리는 숨.

은매의 젖은 눈.

죽은 아이의 이름.

그것들이 그녀를 이 자리에 붙들었다.

"소녀가 낯선 얼굴을 잘 익히지 못해서요."

월령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전하의 눈에 어디선가 본 듯 비쳤다면, 아마 봄빛 탓일 겁니다."

잠시 조용해졌다.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위명서는 그 작은 거절을 알아들었다.

알아들은 사람의 얼굴로, 더 온화하게 웃었다.

"그럴지도요."

그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심 아가씨."

"예, 전하."

"연회가 끝나면 정원의 바람을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긴 이야기는 아닙니다."

심도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한씨는 숨을 삼켰고, 서윤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하얘졌다.

위명서는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지 않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월령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송구합니다, 전하."

두 번째 정적은 첫 번째보다 길었다.

"어머니 곁을 오래 비워 두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 충분했다.

위명서의 눈동자에 얇은 빛이 스쳤다.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심 부인께 먼저 빚을 졌군요."

"그리 여기시면 소녀가 도리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갚겠습니다."

다음.

그 말은 짧았고, 오래 남았다.

위명서는 언제나 다음을 만들었다.

다음 만남.

다음 편지.

다음 꽃가지.

거절은 그에게 끝이 아니었다. 잠시 접어 두는 물건에 가까웠다.

그는 상대가 스스로 다시 펼치게 만들 줄 알았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연회는 다시 이어졌다.

술잔이 오가고, 악공의 손끝에서 낮은 곡이 흘렀다.

위명서는 심도윤에게는 변경의 추위를 물었고, 둘째 숙부에게는 조정의 글 흐름을 물었다.

한씨에게는 유씨의 기침을 걱정했다.

누구에게나 알맞았다.

그 알맞음이, 마치 오래전부터 적어 둔 문장을 읽는 사람 같았다.

그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월령은 중간중간 청아를 보았다.

청아는 다과상을 바꾸는 척하며 서원당 쪽 문을 살폈다.

은매가 숨어 있는 창고 열쇠는 여전히 품에 있었다.

아이의 손끝은 떨렸지만, 찻잔은 한 번도 넘치지 않았다.

그 작은 야무짐이 월령의 숨을 붙들어 주었다.

연회 끝무렵, 월령은 후원으로 나왔다.

숨을 고르고 싶었다.

살구꽃은 조금씩 지고 있었다.

꽃잎이 바람에 날려 돌길 위에 흩어졌다.

한때 그녀는 이 계절을 사랑했다.

황궁에 들어간 뒤에도 살구꽃을 보면 심가의 후원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꽃잎이 너무 희었다.

피가 묻기 전의 천처럼.

"심 아가씨."

월령은 걸음을 멈췄다.

위명서가 후원 입구에 서 있었다.

혼자였다.

아니, 혼자인 척하고 있었다.

회랑 그림자에는 호위가 있었고, 더 멀리 나무 뒤로는 하늘빛 치맛자락이 보였다.

서윤이었다.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월령은 모르는 척했다.

"전하."

"뒤따른 모양이 되었습니다. 무례라면 사과하지요."

"소녀가 먼저 나와 길을 겹치게 했나 봅니다."

위명서는 예와 사심의 경계에서 멈췄다.

가까이 오지 않았다.

멀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늘 거리를 잘 알았다.

상대가 밀어내기에는 미안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두려운 거리.

"아까는 제가 성급했습니다."

"소녀가 어머니 일을 핑계로 전하의 청을 미루었습니다."

"봄바람을 핑계 삼은 셈이니, 제 허물이지요."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자가 장군의 딸에게 사과하는 모습.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특히 숨어서 보는 아이에게는 더욱.

월령은 서윤이 있는 쪽을 보지 않았다.

서윤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지금 위명서의 아름다움이 누구를 향한 칼인지 서윤 스스로 보아야 했다.

억지로 돌려세운 얼굴은 곧 다시 같은 곳을 본다.

"전하께서 사과하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몸 둘 바."

위명서가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심 아가씨는 말을 가볍게 쓰지 않는군요."

월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를 핑계로 물러난 것이 효심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부드러운 눈빛 안쪽에서 칼끝이 움직였다.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나를 피하고 싶어 하는데,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월령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굳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다.

너무 잘 읽어서, 월령은 한때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사실 그는 알아본 것이 아니라 재고 있었을 뿐인데.

"전하 앞에서 등을 돌리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법도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마치 내가 장차 그대에게 죄를 지을 사람처럼 봅니다."

그 말은 가까웠다.

정답에.

월령은 어깨를 펴고 그를 보았다.

"전하께서 소녀에게 죄를 지으실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위명서가 웃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아직은.

무거운 말을 참 가볍게도 하지.

월령은 입술 안쪽을 아주 살짝 깨물었다.

피 맛은 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런 까닭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위명서의 미소가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 뒤에는 다시 봄빛 같은 얼굴이었다.

"심 아가씨."

바람이 불었다.

살구꽃잎 하나가 월령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위명서는 손을 들어 그것을 떼어 주려 했다.

월령은 물러났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높은 단 위에서도 저 손은 그렇게 올라갔다.

가볍게.

젖은 소매 끝을 털 듯이.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

"놀라게 할 뜻은 없었습니다."

위명서는 손을 거두었다.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꽃잎입니다. 상처는 아니고요."

"괜찮습니다, 전하. 소녀가 하겠습니다."

월령은 어깨의 꽃잎을 직접 털어 냈다.

작은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어쩐지 한 생처럼 보였다.

흰 채로 떨어져도, 밟히면 금세 더러워지는 것.

위명서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월령."

처음으로 그가 이름을 불렀다.

한때 그 두 글자는 달았다.

달아서 믿었고, 믿어서 죽었다.

지금은 칼끝이 혀 위에 닿는 것 같았다.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위명서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

세상이 잠시 멈췄다.

그 말.

살구꽃 아래에서 들었던 말.

한때의 월령이 밤새 품고, 끝내 황후가 되기로 마음먹게 한 첫 문장.

황궁의 붉은 담을 사랑의 문으로 착각하게 만든 말.

회랑 그림자 뒤에서 서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월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명서는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죽이는 법을 모르는 남자처럼.

월령은 아주 천천히 눈을 들었다.

황궁이 외롭다면.

그 외로움은 전하께서 스스로 돌보셔야 할 것입니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발끝이 떨어진 살구꽃잎 앞에 조용히 멈췄다.

밟지 않았다.

그 작은 흰 것을 밟지 않는 일에도, 이상하게 힘이 들었다.

월령은 아직 답하지 않았다.

거절도, 수락도 아닌 침묵.

길을 내주지 않되 칼을 먼저 꺼내지도 않는 침묵.

위명서가 그 침묵을 보고 있었다.

회랑 뒤에서 서윤도 보고 있었다.

멀리 연회장의 웃음소리가 아주 얇게 흘러왔다.

그 사이로, 월령은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팽팽히 당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한쪽 끝에는 황궁이 있었다.

다른 한쪽 끝에는 아직 피 묻지 않은 심가의 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실 위에,

서윤의 어린 손과 은매의 떨리는 숨과 청아의 작은 열쇠가 함께 매달려 있었다.

월령은 그 모든 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숨조차 천천히 골랐다.

봄밤의 결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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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 선

    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았다.심가의 안채에는 등불이 오래 남았다. 서원당 처마 아래 작은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약방 쪽에도 낮은 불빛이 흔들렸다. 하인들은 평소보다 발소리를 낮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전체가 숨을 작게 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월령은 목갑 속 먹을 다시 닫았다.문상궁이 두고 간 먹과 같은 냄새.그 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궁의 물건은 여러 손을 지난다. 문상궁이 들고 왔다고 해서 문상궁이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태후의 뜻이라 해도 태후가 직접 먹을 갈았을 리 없고, 위명서가 필요로 했다고 해서 그가 손끝에 먹을 묻혔을 리 없다.궁의 명은 대개 남의 손끝에 묻어 왔다.손끝은 씻기 쉽고, 명은 더 쉽게 사라졌다."언니."서윤이 아주 낮게 불렀다.월령은 고개를 돌렸다.서윤은 아직 붓함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얇게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다시 접지 못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걸,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있었겠지."월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래서 월령은 말을 낮췄다."하녀가 보았을 수도 있고, 숙모께서 보셨을 수도 있고, 글씨를 가르치던 사람이 기억했을 수도 있어.""그럼 제가...""아니야."월령은 서윤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네가 누군가에게 칼을 준 것이 아니야. 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칼로 갈았을 뿐이야."서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하지만 조금 덜 무너진 얼굴이었다.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그때 청아가 조심스럽게 낮은 상 위에 찻잔을 올렸다."차는 아니고 보리물입니다.""왜 그렇게 작게 말하니.""궁에서 차가 나오면 늘 일이 생겨서요."청아는 아주 진지했다."소인은 당분간 차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은호가 작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리도 볶으면 검습니다."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런 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4. 먹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을 잃은 아이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려 보였다. 조금 전까지 찹쌀떡 접시를 들고 어른스러운 말을 고르던 입술은 이제 색을 잃었고,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방 안에는 눌어붙은 죽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창을 열었는데도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불에 닿은 곡식의 냄새는 사람의 옷자락보다 오래 방 안에 머문다. 궁에서 온 글 한 줄도 그랬다. 읽히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곳마다 얇게 달라붙었다.심월령은 기윤이 전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심월령은 황실의 은혜를 달게 받겠다.그 글씨가 서윤의 손과 닮았다고 했다.닮았다.같다고 못 박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칼보다 얇은 말이었다.서윤의 손끝이 떨렸다."저는 쓰지 않았어요."목소리가 작았다."언니, 저는 정말...""알아."월령은 너무 빨리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급한 믿음은 때로 믿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는 서윤의 손을 보았다. 찹쌀가루가 아직 손톱 가장자리에 희게 끼어 있었다. 궁의 종이를 만진 손이라기보다, 부엌에서 반죽을 조금 망친 아이의 손이었다."네가 쓰지 않은 것 알아."서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런데 왜 제 글씨와 닮았을까요."그 물음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부끄러움이 있었다.월령은 그 부끄러움을 알아보았다.서윤은 늘 남의 마음에 드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말투, 어른들이 기특하다 여기는 자세, 태후가 눈길을 줄 만한 글씨. 자기 이름을 쓰기 전에 남의 눈이 좋아하는 선을 익힌 아이였다."혹시."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적이 있어요."방 안이 조용해졌다.청아는 놀라 숨을 삼켰고, 은매는 은호의 어깨를 조금 더 감쌌다. 기윤은 문가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으나, 그 침묵도 들은 사람의 침묵이었다.월령은 서윤을 재촉하지 않았다."어릴 때요. 큰어머니께서 언니 글씨가 곱다 하셨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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