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살구꽃 향이 났다.
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
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
"아가씨!"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목은 멀쩡했다. 상처도, 쇠사슬이 쓸고 간 자국도, 죄패가 눌렀던 흔적도 없었다.
월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황궁의 담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계단도 아니었다.
머리 위에는 옅은 청색 비단 천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창 너머로 살구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가지마다 연분홍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바람이 지날 때마다 몇 장씩 창살에 닿았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 방을 알고 있었다.
심가의 동쪽 별채.
황후의 금관을 쓰기 전, 그녀가 열여섯 해를 살았던 방이었다. 창가 낮은 서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이 남아 있었다.
절반쯤 펼쳐진 병법서, 아버지의 군보를 따라 그리던 산맥과 강줄기, 아란에게 가르쳐 주다 만 바둑판. 흑돌 셋과 백돌 다섯이 끝내기 자리에서 묘하게 맞물린 채 멈춰 있었다.
이 방은 그녀가 가장 아름답게 꾸며지던 곳이 아니라, 가장 오래 생각하던 곳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의원을 부를까요?"
월령은 고개를 돌렸다.
침상 곁에 어린 시녀 청아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직 양 볼에 젖살이 남은, 눈이 크고 손이 빠른 아이.
훗날 황궁 깊은 곳까지 따라와 끝까지 곁을 지키다, 누구도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채 사라졌던 아이. 그 아이가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월령의 손끝이 떨렸다.
"청아."
목소리가 낯설었다.
갈라지고 쉬어 버린 목소리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오래 울부짖느라 망가지지 않은, 어린 자신의 목소리였다.
"예, 아가씨."
"오늘이 며칠이냐."
청아가 눈을 깜빡였다.
"삼월 초엿새입니다. 아가씨께서 낮잠을 너무 오래 주무셔서, 소인이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삼월 초엿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월령의 숨이 접혔다.
경화 칠년, 삼월 초엿새.
황후 간택의 이름이 아직 심가 문턱을 넘기 전. 서원당에 흰 천이 걸리기 전.
어머니의 기침이 병으로 불리기 시작한, 바로 그날. 월령은 화장대 위 동경을 끌어다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열여섯의 심월령이 있었다. 뺨에는 핏기가 돌았고, 눈가에는 황궁에서 배운 미소의 흔적이 없었다.
손등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다만 눈동자만이 달랐다 — 아직 세상을 믿던 얼굴 위에, 너무 먼 밤을 건너온 눈이 얹혀 있었다.
봄이 다시 문을 열었다.
검은 우산 아래의 높은 단.
위명서의 차가운 눈.
위지헌의 피 젖은 손.
그리고 빗소리 사이로 낮게 떨어지던 말.
내가 되돌릴 거야.
다시 봄이 오게 할게.
그는 왔다.
황제가 버린 자리로, 모두가 역적이라 부른 자리로.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 그녀는 두 해를 거슬러,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가씨, 정말 의원을…"
"어머니는."
청아가 멈칫했다.
"마님이요? 서원당에 계세요. 아침부터 기침이 심하셔서, 둘째 부인께서 몸에 좋은 탕약을 올리겠다고…"
"탕약."
월령이 낮게 되뇌었다.
부드럽던 살구꽃 향 밑에서, 아주 오래된 쓴맛이 고개를 들었다. 그날 어머니 유씨는 둘째 부인 한씨가 보낸 탕약을 마셨다.
처음엔 감기가 깊어진 줄 알았다. 다음 날부터 피를 토했고, 보름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 달 뒤 서원당 문에는 흰 천이 걸렸다. 그 흰 천이, 심가의 첫 균열이었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월령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옷을 다오. 푸른 비단 말고 흰 장삼으로. 머리는 단정하게만 묶어 다오."
청아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 아이는 언제나 월령의 표정만 보고 움직였다. 그래서 끝내, 아무것도 모른 채 너무 먼 곳까지 따라왔다.
주인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번에는 잃지 않는다.
흰 장삼으로 갈아입는 동안, 월령은 당장 울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를 보고, 오라비의 이름을 부르고, 어린 아란을 품에 안아 살아 있느냐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눈물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살리는 것.
그리고 독을 가져온 손목을 잡는 것.
"청아. 오늘 서원당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기억하느냐?"
청아가 빗질하던 손을 멈췄다.
"아침에 둘째 부인과 서윤 아가씨가 함께 오셨고요, 그 뒤로 주방의 은매가 탕약을 달인다고 몇 번 왔다 갔어요."
은매.
그 이름을 듣자 월령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장례 사흘째, 은매는 우물에서 건져졌다.
사람들은 젖은 돌을 잘못 밟았다 했다.
너무 쉽게, 너무 조용히.
이제 와 생각하면 입막음이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울며 탕약을 빼앗고, 둘째 부인을 의심한다는 티를 냈을 것이다.
그러면 손은 숨어 버린다.
증거는 사라지고, 은매는 그날 밤 안에 우물가로 끌려갈 것이다. 다시 열린 봄은 자비가 아니었다.
손잡이가 이쪽으로 돌아온 칼이었다.
"약방으로 가자."
북에서 첫 서신이 온 것은, 위지헌이 떠난 지 열흘째였다.파발이 왕부에 닿았다. 겉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다만 봉함 자리에, 흰 바둑돌 자국 하나가 눌려 있었다.받을 사람만 아는 봉함이었다.월령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만졌다. 지난겨울, 두 돌이 서로를 알아보던 봉함이었다.*안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북의 봄은 아직 멀다. 그러나 나는 봄 안에 있겠다.'짧은 글이었다. 전장의 서신은 길면 늦었고, 길면 새어 나갔다. 그는 늘, 어렵게 두지 않고 한 줄로 말했다.월령은 그 한 줄을 오래 보았다.봄 안에 있겠다는 말은, 지난가을 계례에 그가 남긴 살구나무 비녀의 말과 같았다. 그때 그는 봄에 먼저 피는 나무를 깎아, 봄 하나를 미리 두고 갔다. 지금 그는 북의 겨울 속에서, 그 봄을 다시 약속하고 있었다.월령은 그 한 줄을 접어, 지난겨울 그가 보낸 첫 서신 곁에 두었다. 서신이 이제 둘이 되었다. 종이 두 장이, 넉 달을 떠나 있던 사람과 한 달을 떠나 있는 사람을 잇고 있었다.전생에는, 그가 어느 전장에 있는지도 몰랐다. 서신 한 장 오간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봄마다 한 줄씩 그의 겨울이 도성에 닿았다.*파발은 서신 말고도, 짧은 군보를 함께 가지고 왔다.북경군이 흑령이 넘은 골짜기 하나를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저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싸움이 겨울보다 길다 했다. 겨울에 하루로 끝낸 것을, 이번 봄에는 여러 날이 걸리고 있었다.월령은 그 군보를 읽고, 검은 바둑돌을 만졌다.군보의 글씨는 담담했으나, 담담한 글씨 아래에서 월령은 사람이 상하고 있음을 읽었다. 하루로 끝나던 싸움이 여러 날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병사가 눕는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 걱정을, 답신에 옮기지 않았다. 걱정을 적어 보내면 북에 있는 사람이 그 걱정까지 짊어졌다. 그는 이미, 도성을 떠난 사람의 무게를 홀로 지고 있었다.늦지 말라는 말도, 이번에는 적지 않았다. 적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가 무엇을 세고 있는지 알았다.
봄이 깊어질 무렵, 궁에서 왕부로 첩지 하나가 들었다.황후 하문정이 내명부 봄 다회에 섭정왕비를 청한다는 것이었다.섭정왕이 북으로 나간 사이였다. 왕비가 홀로 궁에 드는 것은 아직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그러나 청한 이가 황후였다. 지난겨울 국청에서, 월령의 곧음을 본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첩지를 받았다.*청화각을 지날 때, 옅은 유자 향이 회랑을 따라왔다.혜귀인 류담희의 처소였다. 지난겨울 간택된 젊은 후궁으로, 요즘 황제의 밤 부름이 잦다 했다.마침 류담희가 처소 앞 뜰에서 유자를 까고 있었다. 손톱 끝에 봉숭아 물이 옅게 남아 있었다. 섭정왕비가 지나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만 무릎 위의 유자를 굴렸다."어머."류담희가 웃음을 반쯤 삼키다, 삼키지 못했다.월령도 옅게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궁 안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감출 것이 없다는 뜻이거나, 감추지 않아도 될 만큼 영리하다는 뜻이었다.어느 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월령은, 그 밝은 얼굴 하나를 눈에 담아 두었다.봄볕이 청화각 뜰의 유자 껍질 위로 내렸다. 노란 껍질에서 옅고 단 향이 피어올랐다. 궁 안에서 그 향만은, 아무 셈도 섞이지 않은 냄새였다.*황후의 다회에는, 내명부의 여러 얼굴이 모였다.숙비도 있었다. 옥반지 없는 손을 소매에 넣은 채, 예전보다 아래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순검이 섭정왕에게 돌아간 뒤로, 자녕궁의 자리가 반 뼘 낮아져 있었다.황후는 월령을 제 가까이에 앉혔다."섭정왕이 북에 나갔다지.""예, 마마.""홀로 왕부를 지키기 외롭지 않으냐.""외로울 틈이 없습니다."월령이 낮게 답했다."지킬 것이 많으면, 외로움은 뒤로 물러납니다."황후가 부채 너머로 옅게 웃었다. 지난겨울, 자리를 탐내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가장 잘 지킨다던 그 사람이었다.다회 내내, 월령은 말을 아꼈다. 다만 누가 누구의 곁에 앉는지, 누구의 잔이 누구의 손에서 채워지는지를 보았다.
월령은 그 이름을 장부에 적은 뒤로, 사흘을 뒤척였다.석중. 성 밖 옛 역참에서 '연'의 통을 거두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전생에, 그 이름은 금군의 교위였다. 폐위된 그녀를 냉궁으로 끌고 간 자. 그날의 억센 힘을, 월령은 팔목에 오래 기억했다.이번 생에, 석중은 아직 그 일을 하지 않았다.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폐위되지 않았고, 냉궁의 문은 열린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연'의 심부름을 하는 성 밖의 한 사내였다.그 사내가 누구의 발이 되어 움직이는지를 따라가면, '연'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월령은 강무진을 통해, 석중의 걸음을 멀리서 지켜보게 했다.쫓지는 않았다. 위지헌의 말대로, 쫓으면 저쪽이 눈을 잃은 것을 알았다. 다만 멀리서, 그 사내가 어디에 들고 어디에서 자는지를 세었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석중은 성 밖 역참과 저잣거리 셈방을 오갑니다. 사흘에 한 번, 남쪽 옛 절터에 듭니다.""절터에는 누가 있지.""아직,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석중이 그 앞에서는 늘 갓을 벗습니다."갓을 벗는다는 것은, 그 앞에 윗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월령은 그 절터를 장부에 적었다. '연'이라는 이름 아래, 남쪽 절터 한 줄이 더해졌다.석중이라는 사내는, 낮에는 여느 저잣거리 장사꾼과 다르지 않았다. 소금과 기름을 지고 골목을 돌았고, 저녁이면 셈방에서 술 한 잔을 걸쳤다. 그 걸음 어디에도, 전생에 사람을 냉궁으로 끌고 가던 자의 그늘은 없었다.월령은 그것이 더 서늘했다. 사람을 해칠 자가 아직 해칠 일을 만나지 못해, 장사꾼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다. 만나면, 그 얼굴이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며칠 뒤, 청아가 저잣거리에서 돌아와 목소리를 낮췄다."마마님, 그 남쪽 절터요. 요즘 저잣거리에서 소문이 자자해요.""무슨 소문이.""절터에 향 대는 어른이 계신다고. 병을 낫게 해 준다고요. 앓던 사람이 향 한 대 쐬고 나았다고, 다들 몰려간대요."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향 대는 어른. '연
북으로 가는 길은, 봄을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도성에서 살구꽃이 지던 날 북문을 나선 군은, 사흘 만에 다시 겨울로 들어섰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봄이 얕아졌고, 삭원에 이르자 땅은 아직 서리를 물고 있었다.위지헌은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검은 갑주 위로, 북의 찬 바람이 서늘하게 미끄러졌다.지난겨울, 그는 이 길을 한 번 지났다. 그때는 흑령의 겨울을 하루로 끝내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저들이 봄을 기다렸다가 먼저 국경을 넘었다.같은 길이었으나, 저들의 셈이 달라져 있었다.군은 말이 없었다. 봄을 등지고 겨울로 드는 길이라, 병사들의 입김이 다시 희게 서렸다. 갑주 스치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사이로, 누구도 노래하지 않았다.지난 출정에는, 도성을 벗어나며 군가 한 자락이 오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오르지 않았다. 하루로 끝난 겨울과, 여러 날이 걸릴 봄의 차이를 병사들도 몸으로 알았다.*닷새째, 북문군의 진영에 닿았다.심도윤이 진문 앞에 나와 있었다. 딸을 왕부로 보낸 장인이자, 국경을 얇게 막아 온 노장이었다. 갑주 위에 마른 피가 앉아 있었고, 눈 밑에는 여러 밤의 그늘이 짙었다."오셨습니까.""오래 버티셨습니다."위지헌이 말에서 내렸다.심도윤이 잠깐, 도성 쪽을 보았다."…그 아이는.""잘 있습니다. 왕부를 지키고 있습니다."심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낸 아비의 물음은, 그 한마디로 족했다.*두 장수는 막사 안 지도 위에서 나머지를 나눴다.심도윤이 지도를 짚었다. 흑령이 넘은 골짜기 둘과, 그 뒤로 이어진 마을들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이번에는, 노략이 아닙니다."노장이 낮게 말했다."약탈하고 물러나던 자들이, 이번에는 마을을 태우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다. 땅을 가지려는 움직임입니다."위지헌의 눈이 지도 위에서 서늘해졌다.노략은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었다. 땅을 가지려는 것은, 겨울 너머를 보는 것이었다. 흑령의 뒤에서 누군가, 저들에게 겨울 너머를 셈하게 하고 있었다.흑령이 스스로 담 쌓는 법
출정은, 닷새 뒤로 정해졌다.경화제는 끝내 군량 결재를 내렸다. 다만, 절목의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북변의 군권은 섭정왕에게 주되, 도성 순검은 그가 없는 동안 다시 예부와 나누어 둔다는 줄이었다.한 손으로 군량을 내리고, 다른 손으로 순검을 반쯤 거둔 셈이었다.위지헌은 그 줄을 읽고, 더 청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는지, 그는 오래 아는 형의 속을 읽었다.*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왕부의 살구나무 아래에 섰다.꽃이 진 자리에, 이제 푸른 열매가 맺혀 있었다. 지난봄에 핀 꽃이, 여름을 향해 익어 가고 있었다.지난겨울, 이 나무는 헐벗은 가지였다. 봄에 꽃을 피웠고, 그 꽃이 지고 이제 열매를 맺었다. 한 나무가 한 해에 세 얼굴을 지나는 동안, 두 사람도 이별과 재회와 혼례를 지났다."지난겨울에는, 제가 봄을 셌어요."월령이 말했다."이번에는요?""이번에는, 봄을 세는 대신 다른 걸 해요."월령이 소매 안에서 검은 바둑돌 하나를 꺼냈다. 지난겨울, 그가 흰 돌을 가져가고 그녀에게 남긴 돌이었다."이 돌을, 이번에는 제가 쥐고 있을게요. 문밖에서 기다리는 대신, 문 안에서 셈을 할게요. 연이라는 이름이 누구인지, 왕야가 북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 손으로 알아낼게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혼자 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지난겨울에 이미 보았다."위험한 셈이다.""알아요."월령이 낮게 웃었다."그래서 왕야가 돌아올 자리를, 제가 지켜 둘게요."*닷새 뒤, 북문에 다시 북경군이 도열했다.지난겨울과 같은 아침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월령이 심가의 딸이 아니라 왕부의 안주인으로 그 자리에 섰다.위지헌이 말에 올랐다. 그의 품속에는, 지난겨울과 같은 흰 바둑돌이 들어 있었다.다만 이번의 두 돌은, 지난겨울과 짝이 달랐다. 지난겨울 검은 돌은 심가의 딸이 소매에 넣었고, 이번 검은 돌은 왕부의 안주인이 방첩 장부 곁에 놓았다. 같은 두 돌이, 다른
봄이 반쯤 깊었을 때, 북에서 두 번째 파발이 들었다.첫 파발은 첩보였다. 두 번째는,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흑령이 삭원 너머 골짜기 둘을 넘었다. 겨울에 잃은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국경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심도윤의 북문군이 얇게 막고 있었으나, 오래 버틸 셈은 아니었다.지난겨울 흑령을 하루로 끝낸 것은, 눈이 저들의 방패가 되어 준 살구골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봄에는, 그 방패가 저들에게 없었다. 그러나 국경 안쪽은 지형이 달랐다. 저들이 안으로 들수록, 이번에는 지형이 저들의 편이 되었다.첫 파발과 두 번째 파발 사이가, 짧았다. 저들의 발이 빠르다는 뜻이었다.*위지헌은 그 파발을 어전으로 가지고 들었다.경화제 앞에, 북변의 군량 절목이 다시 올랐다. 지난달 비워 둔 결재 칸이, 아직 그대로 비어 있었다."폐하."위지헌이 말했다."흑령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군량 결재를 내려 주십시오."경화제는 그 절목을 오래 보았다.돌려준 순검패와, 비워 둔 결재 칸이, 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황제는 섭정왕에게 자리를 돌려주었으나, 그 자리의 군량은 아직 제 손에 쥐고 있었다."북에 다시 나가려느냐."경화제가 물었다."제가 아니면, 흑령을 아는 장수가 없습니다.""가례를 올린 지, 한 달이다."황제의 목소리에, 국사 아닌 것이 잠깐 스쳤다.경화제는 정치에서는 절제된 성군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만은, 형의 목소리가 잠깐 앞섰다. 늦둥이 아우가 오래 혼자였던 것을 아는 형이었다. 이제 겨우 곁에 사람을 둔 아우를, 한 달 만에 다시 북으로 보내는 자리였다.위지헌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제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그 자신도 무겁게 알았다. 흑령을 아는 장수가 그뿐이라는 것은, 이 집을 또 비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날 밤, 위지헌은 안채로 늦게 들었다.월령은 그가 무슨 말을 가지고 왔는지, 얼굴을 보고 먼저 알았다."북에, 다시 가시는군요.""…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은호였다.은매가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는 거의 소리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은호야. 그 두 글자가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매는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동생이 깰까 봐 참는 울음이었다.은호는 작았다.일곱 살이라 들었지만, 마른 몸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손목에는 회색 실이 묶여 있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침을 참을 때마다 혀끝으로 이를 쳤다. 딱, 딱. 작은 소리는 방 안 사람들의 숨을 매번 붙잡았다.왕부 의원은 은호의 맥을 짚고 오래 말이 없었다.청아는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
은매가 사라졌다는 말은 밤공기보다 먼저 월령의 손끝에 닿았다.청아는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으나, 마지막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숨은 목구멍에서 가늘게 부서지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서원당 뒤뜰의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가 삐져나와 달빛을 받았다."제가 문을 잠갔습니다."청아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분명히 안에서 잠그고, 바깥 고리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월령은 먼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열쇠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짓말하는 손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제 잘못을 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