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
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
한때의 월령도 몰랐다.
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
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삼켜도, 그곳은 계속 비어 있었다.
"전하."
월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명서는 웃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황궁은 많이 외로운 곳입니까?"
뜻밖의 물음이었는지, 그의 눈동자에 아주 얇은 파문이 생겼다.
곧 사라졌다.
"높은 담 안에 있으니, 때로는 그렇지요."
"그 외로움을 사람 하나에게 모두 맡기셔도 되는 것입니까?"
회랑 뒤에서 서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월령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겉으로는 예를 잃지 않은 채, 손끝만 소매 안에서 가만히 접었다.
"소녀는 아직 제 집안의 근심도 다 품지 못합니다. 병중의 어머니가 계시고, 북문을 지켜 온 아버지가 계시고, 아직 어린 식구들도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들을 두고 누구의 외로움을 달래러 갈 만큼, 제가 넉넉한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위명서의 미소가 옅어졌다.
예전 같았다면 월령은 이쯤에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외로운 황자의 마음을 밀어냈다는 생각에 밤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가슴에 남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너는 외로워서 나를 원한 것이 아니었지.
심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군권,
오라비의 충성,
북문관 너머 눈보라와 경안 저잣거리의 잠자리까지 묶어 둔 심가라는 이름.
그리고 황궁의 빈자리를 가장 아름답게 채워 줄 장군가의 딸.
"그 말씀은."
위명서가 낮게 물었다.
"나를 거절한다는 뜻입니까?"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 소녀에게 무엇을 청하셨습니까?"
위명서의 눈빛이 멈췄다.
그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다만 운명처럼 들리는 문장을 던졌을 뿐이다.
상대가 스스로 의미를 얹고,
스스로 마음을 내어 주기를 기다리는 방식.
위명서는 늘 그랬다.
문을 열어 놓고, 들어온 사람의 발을 탓했다.
한때의 월령은 그 문턱을 제 발로 넘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청하신 것이 없다면, 소녀가 감히 물릴 것도 없겠지요."
잠시 바람이 멎었다.
위명서는 월령을 바라보았다.
흥미인지,
불쾌감인지,
더 깊은 계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그의 눈 안쪽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처럼 웃을 줄 알았다.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로, 늘 다음 수를 두었다.
마침내 그가 웃었다.
"심 아가씨는 생각보다 어렵군요."
"소녀가 전하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요."
위명서가 고개를 저었다.
"도리어 지나치게 잘 헤아리는 듯합니다."
그 말이 월령의 등 뒤를 차갑게 스쳤다.
그는 눈치챘을까.
그녀가 그를 어려워하는 것이 단순한 예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향한 두려움 속에, 빗물과 독향과 높은 단의 붉은 그림자가 섞여 있다는 것을.
그때 연회장 쪽에서 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전하."
위명서의 호위가 회랑 아래에 멈춰 예를 올렸다.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위명서의 시선이 월령에게서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섭정왕 전하께서 곧 심가에 드신다고 합니다."
공기가 바뀌었다.
정말로 그랬다.
봄빛은 그대로였고, 살구꽃도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정원의 색이 한 겹 낮아졌다.
섭정왕.
위지헌.
월령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형장의 비 속에서 자신을 안고 있던 남자.
모두가 그녀를 역적이라 부를 때,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놓지 않았던 사람.
숨이 멀어지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말라 하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닿았다.
지금의 위지헌은 그 밤의 위지헌과 다르다.
아직 그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알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다시 열린 이 봄이 조금은 말이 된다.
그런데 왜.
그 밤에는 없던 걸음이, 왜 오늘 심가로 오는가.
"섭정왕께서?"
위명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러나 월령은 그 안에 스친 날카로움을 들었다.
"예. 북경군 군무와 관련해 심 대장군께 전할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위명서는 잠시 침묵했다.
"알겠다."
그는 다시 월령을 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월령은 예를 올렸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다음.
그 말은 늘 그랬다.
잡지 않는 척하면서 길을 남겼다.
끝내 상대가 그 길을 제 발로 밟게 만들었다.
위명서가 돌아서자,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정원에 남은 것 같았다.
언젠가 다시 목을 감아 올 실.
월령은 그것을 보았다.
끊어야 했다.
완전히.
그녀는 회랑 그림자 뒤에 선 서윤을 보았다.
서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방금 대화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위명서가 월령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
월령이 그 관심을 그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까지.
서윤은 아이인데도 어른의 얼굴을 만들 줄 알았다.
한씨가 손님 앞에서 보여 주던 걱정의 눈매,
상처받아도 예의를 잃지 않는 딸의 입술,
모두 조금씩 빌려 와 제 얼굴 위에 얹었다.
그러나 손끝은 아직 숨길 줄 몰랐다.
하늘빛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 관심은 언제고 서윤의 마음을 찌를 것이다.
어디로 흐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월령의 발을 붙드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위지헌.
그가 왔다.
대문 앞은 이미 조용한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삼황자가 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 사람들은 들뜨고 기뻐했다.
지금은 모두가 숨을 낮췄다.
하인들은 허리를 굽힌 채 눈을 들지 못했고, 친척들은 말을 삼킨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위지헌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오면 사람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숨을 세었다.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검은 옷의 군사들이 먼저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칼집 하나,
신발 끝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뒤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월령은 숨을 잊었다.
위지헌.
그 밤보다 젊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차가웠다.
검은 장포 위로 은실 구름무늬가 희미하게 빛났고, 허리의 장검은 장식처럼 얌전히 걸려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장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웃지 않았다.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빨리 걷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야 할 자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들어왔다.
위명서가 향처럼 스며드는 사람이라면,
위지헌은 그림자처럼 먼저 길을 막는 사람이었다.
"섭정왕 전하를 뵙습니다."
심도윤이 예를 올렸다.
위지헌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심 장군."
그 목소리.
월령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 들었다.
칼을 치우라 명하던 소리.
늦었다고, 그러나 아직 눈 감지 말라던 소리.
월령은 자신도 모르게 반 걸음 물러났다.
위지헌의 시선이 움직였다.
곧장 그녀에게 닿았다.
너무 곧장.
마치 처음부터 다른 누구도 보지 않았던 사람처럼.
월령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그녀를 보았다.
길게.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 시선을 알아차릴 만큼.
그러나 무례하지는 않았다.
낯선 여인을 탐하는 눈도,
오래전 정인을 만난 눈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것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의 눈.
월령은 숨을 삼켰다.
말도 안 된다.
그가 알 리 없다.
알아서는 안 된다.
이 기이한 봄을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다면, 세상은 너무 쉽게 금이 갈 것 같았다.
위지헌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심 장군."
"예, 전하."
"서재로."
명령은 짧았다.
심도윤은 군례로 답했다.
"모시겠습니다."
위지헌은 심도윤을 따라가려다 문득 멈췄다.
시선이 다시 월령에게 닿았다.
"저 아이가."
모두의 눈이 월령에게 쏠렸다.
위지헌이 낮게 물었다.
"따님인가."
"예. 제 딸 월령입니다."
월령.
그 이름이 심도윤의 입에서 나오자, 위지헌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리 내어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월령은 보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낯선 글자가 아니라, 오래 묻어 둔 물건처럼 더듬는 것을.
"그렇군."
그뿐이었다.
짧은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서윤은 옆에서 얼굴을 굳혔고, 한씨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눌렀다.
위명서의 호위는 안색을 살피듯 고개를 낮췄다.
월령은 문득 생각했다.
위명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얼굴을 했을까.
아마 웃었을 것이다.
더 다정하게.
그는 자신이 버린 것을 누군가 아까워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월령의 마음속에서 차가운 결론 하나가 내려앉았다.
위명서가 그녀를 붙잡으려 한다면.
그 손을 피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가 함부로 빼앗지 못할 손을 잡는 것이다.
대연에서 그런 손은 하나뿐이었다.
섭정왕 위지헌.
위험했다.
너무 위험했다.
위지헌은 그녀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랑은 감옥보다 깊고, 어떤 손은 칼보다 뜨겁다.
특히 위지헌 같은 남자의 마음이라면 더욱.
그래도 월령은 이미 죽음보다 더 찬 바닥을 밟아 보았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많지 않았다.
위지헌이 심도윤과 함께 서재로 들어간 뒤, 연회장은 조심스럽게 다시 소란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섭정왕이 왜 왔는지 수군거렸고, 하인들은 무언가 들은 척하지 않으려 더 바쁘게 움직였다.
월령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아가씨."
청아가 뒤따라왔다.
"어디 가세요?"
"서재 뒤뜰."
청아의 얼굴이 하얘졌다.
"대장군과 섭정왕 전하께서 계신 곳 아닙니까?"
"그래."
"아가씨, 그곳은 함부로 가시면..."
"함부로 가는 거 아니야."
월령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찾아가는 거야."
청아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소매 안의 먹끈을 만지고, 월령의 치맛자락이 돌길에 끌리지 않도록 한 번 접어 올렸다.
겁은 눈에 있었고, 손은 여전히 야무졌다.
서재 뒤뜰에는 오래된 측백나무가 있었다.
나무 아래 작은 돌길을 따라가면 후문이 보였다.
어린 월령은 그 길을 잘 알았다.
아버지가 전장에서 돌아오면 종종 그곳에서 군보를 읽었고, 그녀는 몰래 떡을 들고 찾아갔다.
오늘 그 길 끝에 위지헌이 있었다.
정확히는, 월령이 그를 기다리기도 전에 그가 먼저 서 있었다.
측백나무 그림자 아래.
혼자였다.
아니, 혼자처럼 보였다.
나무 높은 그늘 어딘가에서 검은 끈 하나가 바람 없이 흔들렸다가 멎었다.
위지헌의 눈길이 아주 잠깐 위로 스쳤다.
그뿐이었다.
월령은 걸음을 멈췄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달려가고도 싶었다.
그 밤의 젖은 검은 장포,
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묻어 있던 손,
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월령은 그것들을 삼켰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그를 찾아온 이유는 사랑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심가를 살리기 위해서다.
"섭정왕 전하."
월령은 예를 올렸다.
위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깊어서, 월령은 자신의 마지막 숨까지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심월령."
그가 마침내 이름을 불렀다.
위명서는 이름을 소유하듯 불렀다.
위지헌은 이름을 잃어버린 물건처럼 조심스럽게 만졌다.
월령의 손이 아주 작게 떨렸다.
"제 이름을 아십니까?"
"방금 들었다."
거짓말.
월령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캐묻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전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위지헌의 눈썹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내게."
물음이라기보다 확인이었다.
"예."
"심 장군의 귀를 비켜 온 말이군."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심 장군께도 이르지 못한 일인가."
너무 빠르다.
월령은 숨을 골랐다.
위명서가 사람의 마음을 더듬어 유리한 말을 끌어낸다면,
위지헌은 곧장 마디에 칼끝을 댔다.
숨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황궁에서 심가를 보고 있습니다."
위지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가 먼저 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뒤뜰은 밀실이 아니다."
월령의 입술이 멈췄다.
그제야 보였다.
측백나무가 많다는 것은 그림자도 많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위지헌을 찾느라 그 그림자 안에 숨은 눈을 세지 않았다.
그 침묵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측백나무 그늘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내려왔다.
"거두었습니다, 왕야."
월령은 숨을 멈췄다.
기척도 없던 사내였다.
"기윤."
위지헌은 이름 하나만 불렀다.
그림자 속 사내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먼 회랑 끝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급히 멀어지고, 측백나무 뒤편의 잎이 한 번만 떨렸다가 멎었다.
뒤뜰은 그제야 비어 보였다.
"이제 말해도 된다."
그는 이미 보고 있었다.
그녀가 오기 전부터.
위지헌이 반 걸음 더 가까이 왔다.
검은 장포 자락이 월령의 치맛자락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닿은 곳은 없었다.
그런데도 뒤뜰의 바람이 조금 낮아졌다.
"이 안이면."
그는 눈을 내리지 않은 채 말했다.
"말은 새지 않는다."
월령은 그 말이 단순히 목소리의 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그림자 안에 들면, 누가 보더라도 입 모양도 손끝도 읽을 수 없다.
그것을 자신은 계산하지 못했다.
"누구의 손이지."
"삼전하입니다."
위지헌은 놀라지 않았다.
그 사실에 월령은 오히려 놀랐다.
동시에, 자신이 또 너무 빨리 이름을 꺼냈다는 것도 깨달았다.
위지헌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꾸짖음은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 이름은 아직 네 소매 안에 둬라."
그는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월령은 입술을 다물었다.
"증거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나를 찾았다."
"증거를 만들기 전에 심가가 먼저 물릴 수 있으니까요."
위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월령은 소매 안에서 작은 비단 조각을 꺼내려 했다.
연꽃 무늬가 수놓인 비단,
검게 변한 손수건 일부,
은매가 건넨 종이 조각.
"소매."
위지헌의 말이 짧게 떨어졌다.
월령이 멈췄다.
"닫아라."
"전하."
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월령의 숨이 아주 짧게 끊겼다.
힘은 세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목은 조금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검을 쥐는 사람의 굳은살이 얇은 살갗 위에 닿았고, 그의 엄지가 맥이 뛰는 곳을 정확히 눌렀다.
맥이 들킨 것 같았다.
위지헌은 그녀의 손목을 비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소매로 그녀의 손등을 덮어, 막 꺼내려던 물증을 바깥 시선에서 가렸다.
"잃기 싫은 것은 먼저 보이지 마라."
월령은 그제야 깨달았다.
뒤뜰의 바람,
나뭇잎 사이의 눈,
지나가는 하인 하나.
그 작은 것들만으로도 물증은 사라지고, 심가가 먼저 물릴 수 있었다.
그녀는 위지헌의 손 아래에서 조용히 소매를 닫았다.
그제야 그는 손을 거두었다.
닿았던 자리에 열이 남았다.
"어머니의 탕약에 독이 들어갔습니다. 심가 안의 손이 움직였고, 그 뒤에는 황궁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젯밤 남쪽 연못에서 궁식 매듭을 한 사내를 붙잡았습니다."
"남쪽 담의 사내."
월령은 숨을 멈췄다.
"알고 계셨습니까?"
"심 장군이 매듭을 보였다."
"그럼..."
"주인의 자리는 남겨 두었지."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를 붙잡았다.
"네가 방금 그 자리에 이름을 앉혔고."
월령은 입술을 다물었다.
실수였을까.
아니, 어차피 그에게 말하려고 왔다.
위지헌을 이용하려면 최소한의 패는 보여야 했다.
"황자의 이름은 아직 이르다."
위지헌의 목소리는 낮았다.
"칼끝이 그자에게 닿기 전에, 네게 먼저 돌아온다."
월령은 손끝을 접었다.
"알고도 올렸나."
"그러니 전하께 왔습니다."
스스로도 낯선 말끝이었다.
차갑게 세운 문장인데, 마지막 음절이 어린 날 무언가를 청하던 때처럼 조금 젖었다.
월령은 곧 입술을 다물었다.
"내 이름을 첫 수에 올릴 생각이군."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의 소매에 닿았다가 돌아왔다.
"그 값은 누가 치르지."
차가운 질문이었다.
그 밤의 마지막 고백을 들은 뒤라서인지, 그 말이 더 아팠다.
첫 수.
그는 그녀의 간청보다 먼저 허점을 보았다.
이름을 너무 일찍 꺼낸 것.
증거를 너무 쉽게 보이려 한 것.
숨어 있는 눈을 먼저 세지 않은 것.
월령은 죽음의 냄새를 기억했다.
독과 향과 궁중의 웃음을 기억했다.
하지만 기억과 판세는 달랐다.
그녀는 아직 수순을 알지 못했다.
월령은 천천히 무릎을 접으려 했다.
"그만."
위지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무릎이 돌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월령의 팔꿈치 아래를 받쳤다.
붙잡았다기보다 멈춰 세웠다.
그러나 월령은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손바닥은 차가웠고, 손끝은 놀랄 만큼 뜨거웠다.
"바닥은 차다."
명령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더 아팠다.
"서서 말해."
위지헌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왔다.
"무릎은 담보가 아니다."
그는 월령이 완전히 설 때까지 팔꿈치를 놓지 않았다.
월령은 천천히 다시 섰다.
뜻밖의 말과 닿은 손 때문에 심장이 작게 흔들렸다.
동정은 아니었다.
예의도 아니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사람의 말이 얼마나 쉽게 남의 것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헐값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월령은 낮게 말했다.
"대신 저를 쓰십시오."
위지헌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쓴다."
"전하께서도 삼전하를 견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걸 네가 어찌 아나."
"황궁은 이미 갈라지고 있습니다. 태후와 삼전하, 전하의 북경군 사이에 심가가 놓였습니다."
월령은 소매 안의 손을 접었다.
"제가 가진 단서는 전하께도 쓸모가 있을 거예요."
위지헌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령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언젠가."
위지헌의 눈이 어두워졌다.
"이미 금이 갔다."
월령은 숨을 멈췄다.
그녀가 먼 날의 균열이라 여긴 일을, 그는 오늘의 소리로 듣고 있었다.
"저는 심가를 지키고 싶습니다."
월령은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오라비를, 아란을 살리고 싶어요."
마지막 말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그리고 그 뒤에, 더 작은 이름들이 따라붙었다.
"은매와 그 아이가 지키려던 사람들도요."
월령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많이 드러냈음을 알았다.
심가를 지키겠다는 말이 아니라, 제발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먼저 새어 나와 버렸다.
"그 값으로."
"제가 아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많이 아나."
말할 수 없는 밤 하나만큼.
돌아갈 수 없는 길 하나만큼.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을 겁니다."
위지헌은 웃지 않았다.
"많음은 값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순서가 값이지."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정확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꺼내고,
무엇을 숨기고,
누구에게 어떤 이름을 맡겨야 하는지는 아직 서툴렀다.
위지헌은 그 서툰 곳만 정확히 보았다.
긴 침묵이 지나갔다.
그 사이 월령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높은 단 아래에서 그가 늦었다고 말하던 순간.
그의 팔이 떨리던 감각.
자신이 끝내 잡지 못했던 손.
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을 내민다.
그 손이 칼이어도.
그 손이 감옥이어도.
위지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월령의 앞에.
검고 긴 손가락.
검을 쥐는 사람의 굳은살.
차갑지만 흔들리지 않는 손.
놓쳐 버린 손이 다시 놓여 있었다.
월령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잡아도 되는가.
한때 그녀는 위명서의 손을 잡고 죽음으로 갔다.
이번에 위지헌의 손을 잡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
구원일까,
더 깊은 불길일까.
하지만 이미 선택했다.
월령은 천천히 손을 올렸다.
손끝이 닿는 순간, 위지헌의 손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뜨거웠다.
그 밤 마지막으로 닿았던 그 손처럼.
그는 필요 이상으로 오래 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급함은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월령의 손등을 가만히 눌렀다.
도망을 막는 듯도 했고,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듯도 했다.
월령은 자신의 숨이 너무 가까이 들릴까 봐 입술을 다물었다.
위지헌은 그녀가 휘청이지 않을 만큼 붙들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순간에야 천천히 놓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붙잡을 수 있으면서도 당장 가두지 않는 남자.
"삼황자의 그늘을 피해 내 그림자에 들겠다."
월령은 숨을 삼켰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내 이름을 앞에 세우고."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요."
말끝이 뜻밖에 부드러웠다.
허락을 구하는 사람처럼.
위지헌의 눈이 그 짧은 말끝에 머물렀다.
"허락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위지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다른 길의 끝도 붉은 담인가."
"아닙니다."
대답은 즉시 나왔다.
너무 빨랐는지 월령은 스스로 놀라,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곳으로는 가지 않겠습니다."
위지헌의 시선이 월령의 얼굴을 훑었다.
"않겠다."
그가 낮게 되뇌었다.
"긴 말보다 낫군."
월령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위지헌은 웃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 안쪽에는 높은 단 아래서 보았던 감정의 아주 희미한 그림자가 있었다.
분노인지,
안도인지,
오래 묻어 둔 집착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빛.
"좋다."
그가 말했다.
"그럼 짧게 묶어."
월령의 숨이 풀렸다.
그러나 다음 말에 다시 굳었다.
"대신."
"말씀하십시오."
위지헌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월령의 등 뒤에는 측백나무가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물러나면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위지헌은 끝내 그녀를 나무에 몰아붙이지 않았다.
딱 한 뼘을 남겼다.
빠져나갈 수는 있으나,
빠져나가고 싶다면 먼저 선택해야 하는 거리.
그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내 이름은 반만 쓰는 물건이 아니다."
월령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접을 생각이면 지금 접어라."
"전하."
"그리고 심월령."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세상이 조용해졌다.
봄빛도,
먼 연회의 소리도,
청아가 멀리서 숨을 멈추는 기척도 모두 사라졌다.
위지헌은 아주 낮게 말했다.
"내 손을 놓지 마라."
월령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명령처럼 들렸으나, 안쪽에는 아주 낮은 부탁이 있었다.
마치 지난번에는 그녀가 다른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마치 그 선택의 끝에서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월령의 손끝에는 아직 위지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측백나무의 높은 그늘에서, 기윤은 아주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은 한순간, 두 사람이 놓은 손 사이의 빈틈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듣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나 들은 사람처럼.
월령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는 처음 내민 손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놓쳐 버린 손의 온도를 묻고 있었다.
위명서는 언제나 알맞은 때에 왔다. 너무 이른 듯하지만 무례라 말하기 어려운 시각. 너무 걱정스러운 듯하지만 속셈이라 몰기 어려운 얼굴. 황자의 신분으로 장군가의 문 앞에 서 있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이 낮아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걸음. 심가의 대문 앞에는 이미 하인들이 모여 있었다. 아침 물을 뿌리던 아이는 물동이를 놓은 채 얼어 있었고, 늙은 문지기는 허리를 숙였으나 눈은 조심스럽게 위명서의 뒤쪽을 보았다. 황자의 뒤에는 호위 둘과 내관 하나뿐이었다. 많은 사람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배려처럼 보였다.월령은 그 배려가 더 무서웠다. 소문은 손이 적을수록 더 날래게 움직일 때가 있다."이른 걸음이었습니다." 위명서가 심도윤 대신 마중 나온 둘째 숙부에게 말했다. "그러나 밤새 심가 안에 흉한 말이 돌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둘째 숙부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께서 걱정해 주실 일이 아닙니다." "심가는 나라의 북문을 지킨 집입니다. 그 집 여식의 이름이 흔들리면, 백성들도 나라의 마음을 의심하겠지요."위명서는 북문이라는 말을 참 부드럽게 했다. 그 말은 늘 심가의 자랑을 어루만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목에 걸리는 줄처럼 느껴졌다.월령은 조금 뒤에 서 있었다. 서윤은 나오지 않았다. 한씨도 방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원당에서 상황을 듣고, 월령에게 사람을 너무 많이 들이지 말라는 말만 전했다. 어머니의 말은 짧았지만 정확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집은 집이 아니게 된다.위명서의 시선이 월령에게 닿았다. "심 아가씨." 그는 한 걸음 물러나 예를 갖췄다. 황자가 장군가의 딸에게 보이는 지나친 예. 모르는 사람은 감동할 것이다. 아는 사람은 숨이 차가워진다.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 "놀라셨겠지요." "아직 놀랄 일이 많아, 어느 것부터 놀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말은 부드러웠다. 가시도 없었다. 그러나 위명서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멈췄다. "심 아가씨께서는 가끔 아주 어린 얼굴로 어려운 말을 하십니다." "어렵게 들렸
한씨는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서원당 옆 작은 방에는 따뜻한 물이 놓였고, 청아가 급히 데운 죽도 한 그릇 놓였다. 이번 죽은 타지 않았다. 청아는 그것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상 위에 올렸다."이번에는 바닥까지 살아 있습니다."그녀가 낮게 말했다.은호가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봐도 됩니까.""너는 이제 감별관이니?""어제 제가 맞았습니다."청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은매가 아주 작게 웃었다.그 웃음은 눈물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월령은 그 작은 소리를 마음에 담았다. 밤새 편문 앞에서 본 것들, 한씨의 무너진 얼굴, 서윤의 떨리던 손, 잘린 붓끝에 묻은 예부의 붉은 실이 아직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청아는 죽의 바닥을 확인했고, 은호는 그 확인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그 사소함 덕분에 아침은 겨우 아침다웠다.서윤은 한씨 곁에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손을 잡지는 못했다. 대신 이불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붙잡고 있었다. 한씨는 그 손을 보았고, 보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서윤아."한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서윤의 어깨가 움찔했다."예, 어머니."그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어제와 달랐다. 어머니 마음에 들려고 꾸민 어른의 말이 아니라, 다칠까 봐 조심하는 딸의 말이었다.한씨는 오래 침묵했다."어미가 너를 아낀다."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예.""그 말로 네가 다친 것이 없어지지는 않겠지."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한씨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밤새 울지 않은 눈은 오히려 더 붉었다."나는 네가 뒤에 서는 것이 싫었다. 내가 평생 그렇게 서 있었으니, 너는 앞으로 가길 바랐다."그녀의 시선이 월령을 향했다가 곧 떨어졌다."그러다 네 등을 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윤의 손이 이불을 더 세게 쥐었다.한씨는 그 손을 보았다."어젯밤 네가 월령이를 사람이라 했지."서윤은 고개를 숙였다."예.""어미는 너도 사람이라는 걸 자꾸 잊었다."방 안이 조용
남쪽 편문은 낮에도 어두운 곳이었다.담장이 높고, 늙은 측백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웠으며, 문 아래 돌계단에는 햇빛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곳의 흙은 늘 조금 눅었다. 집 안에서 버린 물이 몰래 흘러드는 자리라 했다.밤에는 그 어둠이 더 깊어졌다.등불 하나가 멀리 회랑 끝에서 흔들렸고, 편문 앞에는 사람 그림자 셋이 서 있었다.월령은 걸음을 늦췄다.위지헌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뛰지 마라.혼자 앞서지 마라.그 말을 정치적 수로 이해하려 애썼지만, 몸은 그보다 먼저 기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불안을 꾸짖는 소리가 아니라, 넘치는 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주는 듯한 소리였다.월령은 숨을 고르게 했다.서윤은 편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잠옷 위에 급히 걸친 외투가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머리도 제대로 묶지 못했다. 어른스럽게 꾸민 얼굴이 아닌, 잠을 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한씨가 서 있었고, 문밖에는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있었다.금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떨고 있었다.문밖의 여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손은 숙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굳어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아니라, 비단 끈과 열쇠를 오래 다룬 손이었다.궁녀의 손.문상궁의 사람."숙모."월령의 목소리는 낮았다.한씨의 어깨가 움찔했다.서윤은 돌아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언니."그 한마디에 죄책감이 먼저 묻어났다.월령은 서윤을 보았다."춥겠다."서윤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예?""밤공기가 차. 외투를 여미렴."서윤은 손을 들어 외투를 여몄다. 손이 떨렸다.한씨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도 단정했다. 급히 나온 사람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단정함이 오히려 더 절박해 보였다. 무너질 사람은 때로 가장 반듯하게 앉아 무너진다."큰아가씨."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밤중에 여기까지 오다니, 몸이 상합니다.""숙모께서도 밤중
새벽이 오기 전의 집은 가장 솔직했다.낮에는 예법이 사람을 세우고, 밤에는 두려움이 사람을 눕힌다. 그러나 새벽 직전의 어둠에는 누구도 완전히 서 있지도 눕지도 못한다. 닫힌 문 안쪽에서는 잠든 척하는 숨이 얇아지고, 깨어 있는 등불은 심지를 낮춘 채 오래 버틴다.월령은 서원당 곁 작은 서실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낮췄고, 탁자 위에는 서윤의 오래된 글과 허도겸이 보낸 등초, 문상궁의 먹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종이와 먹과 사람의 손. 전부 말이 없는데도, 방 안은 너무 많은 말로 가득 찬 듯했다.그녀는 위조된 글의 마지막 획을 다시 보았다.받겠다.그 끝이 유난히 무거웠다.서윤은 끝을 그렇게 누르지 않는다. 서윤의 글은 끝에 이르면 오히려 가벼워졌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손은 마지막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이 글은 마지막에서 힘이 들어갔다.누군가 결말을 꼭 눌러 닫은 것이다.마치 도망갈 문을 막듯이."잠을 자지 않았군."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월령은 숨을 멈추었다가, 곧 자신을 꾸짖듯 천천히 내쉬었다.위지헌이었다.그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먹색 대창포 자락에는 새벽 안개가 아주 희미하게 묻어 있었고, 젖은 돌을 밟고 온 듯 신 끝이 어두웠다. 감송향이 서실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월령은 일어나 예를 갖췄다."왕야.""앉아 있어라."말은 낮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그는 곧 자신이 너무 짧게 말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덧붙였다."네가 일어서면 종이가 날린다."월령은 잠시 멈췄다.그 말이 명령인지 배려인지 구별하지 못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그는 탁자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그녀가 숨을 더 조심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감송향은 이미 가까웠다. 월령은 그 향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먹을 보았느냐.""예.""무슨 생각을 했지."월령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자녕궁의 종이, 서윤의 글씨, 문상궁의 먹. 세 가지가
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았다.심가의 안채에는 등불이 오래 남았다. 서원당 처마 아래 작은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약방 쪽에도 낮은 불빛이 흔들렸다. 하인들은 평소보다 발소리를 낮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전체가 숨을 작게 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월령은 목갑 속 먹을 다시 닫았다.문상궁이 두고 간 먹과 같은 냄새.그 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궁의 물건은 여러 손을 지난다. 문상궁이 들고 왔다고 해서 문상궁이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태후의 뜻이라 해도 태후가 직접 먹을 갈았을 리 없고, 위명서가 필요로 했다고 해서 그가 손끝에 먹을 묻혔을 리 없다.궁의 명은 대개 남의 손끝에 묻어 왔다.손끝은 씻기 쉽고, 명은 더 쉽게 사라졌다."언니."서윤이 아주 낮게 불렀다.월령은 고개를 돌렸다.서윤은 아직 붓함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얇게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다시 접지 못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걸,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있었겠지."월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래서 월령은 말을 낮췄다."하녀가 보았을 수도 있고, 숙모께서 보셨을 수도 있고, 글씨를 가르치던 사람이 기억했을 수도 있어.""그럼 제가...""아니야."월령은 서윤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네가 누군가에게 칼을 준 것이 아니야. 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칼로 갈았을 뿐이야."서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하지만 조금 덜 무너진 얼굴이었다.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그때 청아가 조심스럽게 낮은 상 위에 찻잔을 올렸다."차는 아니고 보리물입니다.""왜 그렇게 작게 말하니.""궁에서 차가 나오면 늘 일이 생겨서요."청아는 아주 진지했다."소인은 당분간 차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은호가 작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리도 볶으면 검습니다."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런 말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을 잃은 아이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려 보였다. 조금 전까지 찹쌀떡 접시를 들고 어른스러운 말을 고르던 입술은 이제 색을 잃었고,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방 안에는 눌어붙은 죽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창을 열었는데도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불에 닿은 곡식의 냄새는 사람의 옷자락보다 오래 방 안에 머문다. 궁에서 온 글 한 줄도 그랬다. 읽히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곳마다 얇게 달라붙었다.심월령은 기윤이 전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심월령은 황실의 은혜를 달게 받겠다.그 글씨가 서윤의 손과 닮았다고 했다.닮았다.같다고 못 박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칼보다 얇은 말이었다.서윤의 손끝이 떨렸다."저는 쓰지 않았어요."목소리가 작았다."언니, 저는 정말...""알아."월령은 너무 빨리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급한 믿음은 때로 믿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는 서윤의 손을 보았다. 찹쌀가루가 아직 손톱 가장자리에 희게 끼어 있었다. 궁의 종이를 만진 손이라기보다, 부엌에서 반죽을 조금 망친 아이의 손이었다."네가 쓰지 않은 것 알아."서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런데 왜 제 글씨와 닮았을까요."그 물음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부끄러움이 있었다.월령은 그 부끄러움을 알아보았다.서윤은 늘 남의 마음에 드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말투, 어른들이 기특하다 여기는 자세, 태후가 눈길을 줄 만한 글씨. 자기 이름을 쓰기 전에 남의 눈이 좋아하는 선을 익힌 아이였다."혹시."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적이 있어요."방 안이 조용해졌다.청아는 놀라 숨을 삼켰고, 은매는 은호의 어깨를 조금 더 감쌌다. 기윤은 문가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으나, 그 침묵도 들은 사람의 침묵이었다.월령은 서윤을 재촉하지 않았다."어릴 때요. 큰어머니께서 언니 글씨가 곱다 하셨고,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