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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약방

Autor: moominkiller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5-23 23:37:14

심가의 약방은 동쪽 별채와 서원당 사이, 봄볕이 잘 드는 작은 후원에 있었다. 문 가까이 둥근 소쿠리마다 길경과 감초, 말린 귤껍질이 얇게 펼쳐져 볕을 머금었다.

부드러운 약재 냄새 안쪽에, 불 위에서 오래 졸아든 탕약의 쓴 김이 섞여 있었다. 월령이 문턱을 넘자, 안에서 약재를 고르던 계집종 하나가 흠칫 몸을 굳혔다.

은매였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 눈꼬리가 처져 순해 보이고, 손끝에는 약재 물이 배어 있었다.

예전의 월령은 그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머니를 병들게 한 독은 뒤늦게 알았으면서, 독을 들고 온 손은 끝내 보지 못했다.

"아가씨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은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탕약을 보러 왔어요."

월령은 천천히 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님 약은 거의 달여졌습니다. 곧 서원당으로 올릴 참이었어요."

월령은 약로 위의 검은 사기그릇을 보았다.

얇은 김이 피어올랐다.

감초와 생강, 길경의 냄새가 먼저 났다. 겉으로는 병든 사람에게 올리기 알맞은, 따뜻하고 무해한 기침약이었다.

그러나 그 밑에, 아주 희미한 단내가 섞여 있었다. 달다 하기엔 눅눅하고, 쓰다 하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 혀가 아니라 피 속으로 먼저 스며드는 냄새.

월령은 그 냄새를 알고 있었다. 붉은 담 안쪽에서는 사람이 향으로 병들었다.

차로 잠들었고, 웃는 얼굴 아래에서 천천히 숨이 가늘어졌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늘 늦었지만, 한 번 배운 냄새는 몸이 잊지 않았다.

적련초.

처음에는 몸을 데우는 약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끓이면 피를 삭이고 장부를 망가뜨린다.

기침이 있는 사람에게 쓰면 병세가 깊어진 것처럼 보여, 가장 들키기 어려운 독. 어머니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월령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은매. 이 약은 누가 지어 주었느냐."

은매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둘째 부인께서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었다."

월령이 조용히 되받았다.

"직접 받은 것이 아니냐."

은매는 입술만 달싹였다.

월령은 옅게 웃었다.

열여섯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손을 펴 보아라."

"아가씨."

"펴라."

은매가 머뭇거리다 두 손을 내밀었다. 손톱 밑에 검푸른 가루가 끼어 있었다.

약재를 손질하면 흔히 남는 흔적처럼 보였으나, 월령은 그것이 적련초의 뿌리 가루임을 알았다. 붉은 담 안에서 너무 늦게 배운 것들이, 지금은 그녀를 늦지 않게 했다.

"청아. 문을 닫아라."

청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손은 빨랐다. 문이 닫히자 약방 안의 김과 향이 한층 짙어졌고, 바깥의 살구꽃 향은 종이 한 장 너머로 밀려났다.

은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살고 싶으냐."

은매의 말이 뚝 끊겼다.

월령은 약로 곁에 앉아 조용히 불을 낮췄다. 타오르던 불길이 작아지자, 사기그릇 안의 탕약도 깊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네가 이 약에 무엇을 넣었는지 안다."

"저는…"

"거짓은 한 번만 봐주마."

월령이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부터는, 네 혀를 믿지 않겠다."

은매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약방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숙여졌다.

"아가씨, 살려 주십시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누가 시켰느냐."

은매는 대답하지 못했다.

월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은 공포가 목을 조일 때 스스로 가장 약한 곳을 드러낸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 늦게 배웠고, 황후의 관을 쓰고도 늘 한 박자 늦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남쪽 별원에, 병든 어미와 어린 동생이 있지."

월령이 나직이 말했다.

"네가 매달 은자 세 냥을 보내고 있고."

은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께서 그걸 어떻게…"

"네가 입을 다물면, 오늘 밤 너는 우물에 빠져 죽는다. 동생은 사라지고, 어미는 약값이 끊겨 죽겠지. 이 일을 시킨 자가, 네 입을 살려 둘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

은매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허나 네가 내게 진실을 말하면."

월령은 손끝으로 약그릇 가장자리를 쓸었다. 뜨거운 사기의 열이 손끝에 닿았다 사라졌다.

"나는 너를 살려 둘 수 있다."

은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월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얼굴을 믿었다가,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 눈물이 죄를 지우지는 못했다.

월령은 다만, 이 떨리는 손을 어디에 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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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4. 북에서 온 글자

    북에서 첫 서신이 온 것은, 위지헌이 떠난 지 열흘째였다.파발이 왕부에 닿았다. 겉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다만 봉함 자리에, 흰 바둑돌 자국 하나가 눌려 있었다.받을 사람만 아는 봉함이었다.월령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만졌다. 지난겨울, 두 돌이 서로를 알아보던 봉함이었다.*안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북의 봄은 아직 멀다. 그러나 나는 봄 안에 있겠다.'짧은 글이었다. 전장의 서신은 길면 늦었고, 길면 새어 나갔다. 그는 늘, 어렵게 두지 않고 한 줄로 말했다.월령은 그 한 줄을 오래 보았다.봄 안에 있겠다는 말은, 지난가을 계례에 그가 남긴 살구나무 비녀의 말과 같았다. 그때 그는 봄에 먼저 피는 나무를 깎아, 봄 하나를 미리 두고 갔다. 지금 그는 북의 겨울 속에서, 그 봄을 다시 약속하고 있었다.월령은 그 한 줄을 접어, 지난겨울 그가 보낸 첫 서신 곁에 두었다. 서신이 이제 둘이 되었다. 종이 두 장이, 넉 달을 떠나 있던 사람과 한 달을 떠나 있는 사람을 잇고 있었다.전생에는, 그가 어느 전장에 있는지도 몰랐다. 서신 한 장 오간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봄마다 한 줄씩 그의 겨울이 도성에 닿았다.*파발은 서신 말고도, 짧은 군보를 함께 가지고 왔다.북경군이 흑령이 넘은 골짜기 하나를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저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싸움이 겨울보다 길다 했다. 겨울에 하루로 끝낸 것을, 이번 봄에는 여러 날이 걸리고 있었다.월령은 그 군보를 읽고, 검은 바둑돌을 만졌다.군보의 글씨는 담담했으나, 담담한 글씨 아래에서 월령은 사람이 상하고 있음을 읽었다. 하루로 끝나던 싸움이 여러 날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병사가 눕는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 걱정을, 답신에 옮기지 않았다. 걱정을 적어 보내면 북에 있는 사람이 그 걱정까지 짊어졌다. 그는 이미, 도성을 떠난 사람의 무게를 홀로 지고 있었다.늦지 말라는 말도, 이번에는 적지 않았다. 적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가 무엇을 세고 있는지 알았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3. 청화각의 유자

    봄이 깊어질 무렵, 궁에서 왕부로 첩지 하나가 들었다.황후 하문정이 내명부 봄 다회에 섭정왕비를 청한다는 것이었다.섭정왕이 북으로 나간 사이였다. 왕비가 홀로 궁에 드는 것은 아직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그러나 청한 이가 황후였다. 지난겨울 국청에서, 월령의 곧음을 본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첩지를 받았다.*청화각을 지날 때, 옅은 유자 향이 회랑을 따라왔다.혜귀인 류담희의 처소였다. 지난겨울 간택된 젊은 후궁으로, 요즘 황제의 밤 부름이 잦다 했다.마침 류담희가 처소 앞 뜰에서 유자를 까고 있었다. 손톱 끝에 봉숭아 물이 옅게 남아 있었다. 섭정왕비가 지나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만 무릎 위의 유자를 굴렸다."어머."류담희가 웃음을 반쯤 삼키다, 삼키지 못했다.월령도 옅게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궁 안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감출 것이 없다는 뜻이거나, 감추지 않아도 될 만큼 영리하다는 뜻이었다.어느 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월령은, 그 밝은 얼굴 하나를 눈에 담아 두었다.봄볕이 청화각 뜰의 유자 껍질 위로 내렸다. 노란 껍질에서 옅고 단 향이 피어올랐다. 궁 안에서 그 향만은, 아무 셈도 섞이지 않은 냄새였다.*황후의 다회에는, 내명부의 여러 얼굴이 모였다.숙비도 있었다. 옥반지 없는 손을 소매에 넣은 채, 예전보다 아래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순검이 섭정왕에게 돌아간 뒤로, 자녕궁의 자리가 반 뼘 낮아져 있었다.황후는 월령을 제 가까이에 앉혔다."섭정왕이 북에 나갔다지.""예, 마마.""홀로 왕부를 지키기 외롭지 않으냐.""외로울 틈이 없습니다."월령이 낮게 답했다."지킬 것이 많으면, 외로움은 뒤로 물러납니다."황후가 부채 너머로 옅게 웃었다. 지난겨울, 자리를 탐내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가장 잘 지킨다던 그 사람이었다.다회 내내, 월령은 말을 아꼈다. 다만 누가 누구의 곁에 앉는지, 누구의 잔이 누구의 손에서 채워지는지를 보았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2. 이름을 따라

    월령은 그 이름을 장부에 적은 뒤로, 사흘을 뒤척였다.석중. 성 밖 옛 역참에서 '연'의 통을 거두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전생에, 그 이름은 금군의 교위였다. 폐위된 그녀를 냉궁으로 끌고 간 자. 그날의 억센 힘을, 월령은 팔목에 오래 기억했다.이번 생에, 석중은 아직 그 일을 하지 않았다.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폐위되지 않았고, 냉궁의 문은 열린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연'의 심부름을 하는 성 밖의 한 사내였다.그 사내가 누구의 발이 되어 움직이는지를 따라가면, '연'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월령은 강무진을 통해, 석중의 걸음을 멀리서 지켜보게 했다.쫓지는 않았다. 위지헌의 말대로, 쫓으면 저쪽이 눈을 잃은 것을 알았다. 다만 멀리서, 그 사내가 어디에 들고 어디에서 자는지를 세었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석중은 성 밖 역참과 저잣거리 셈방을 오갑니다. 사흘에 한 번, 남쪽 옛 절터에 듭니다.""절터에는 누가 있지.""아직,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석중이 그 앞에서는 늘 갓을 벗습니다."갓을 벗는다는 것은, 그 앞에 윗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월령은 그 절터를 장부에 적었다. '연'이라는 이름 아래, 남쪽 절터 한 줄이 더해졌다.석중이라는 사내는, 낮에는 여느 저잣거리 장사꾼과 다르지 않았다. 소금과 기름을 지고 골목을 돌았고, 저녁이면 셈방에서 술 한 잔을 걸쳤다. 그 걸음 어디에도, 전생에 사람을 냉궁으로 끌고 가던 자의 그늘은 없었다.월령은 그것이 더 서늘했다. 사람을 해칠 자가 아직 해칠 일을 만나지 못해, 장사꾼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다. 만나면, 그 얼굴이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며칠 뒤, 청아가 저잣거리에서 돌아와 목소리를 낮췄다."마마님, 그 남쪽 절터요. 요즘 저잣거리에서 소문이 자자해요.""무슨 소문이.""절터에 향 대는 어른이 계신다고. 병을 낫게 해 준다고요. 앓던 사람이 향 한 대 쐬고 나았다고, 다들 몰려간대요."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향 대는 어른. '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1. 북으로

    북으로 가는 길은, 봄을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도성에서 살구꽃이 지던 날 북문을 나선 군은, 사흘 만에 다시 겨울로 들어섰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봄이 얕아졌고, 삭원에 이르자 땅은 아직 서리를 물고 있었다.위지헌은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검은 갑주 위로, 북의 찬 바람이 서늘하게 미끄러졌다.지난겨울, 그는 이 길을 한 번 지났다. 그때는 흑령의 겨울을 하루로 끝내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저들이 봄을 기다렸다가 먼저 국경을 넘었다.같은 길이었으나, 저들의 셈이 달라져 있었다.군은 말이 없었다. 봄을 등지고 겨울로 드는 길이라, 병사들의 입김이 다시 희게 서렸다. 갑주 스치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사이로, 누구도 노래하지 않았다.지난 출정에는, 도성을 벗어나며 군가 한 자락이 오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오르지 않았다. 하루로 끝난 겨울과, 여러 날이 걸릴 봄의 차이를 병사들도 몸으로 알았다.*닷새째, 북문군의 진영에 닿았다.심도윤이 진문 앞에 나와 있었다. 딸을 왕부로 보낸 장인이자, 국경을 얇게 막아 온 노장이었다. 갑주 위에 마른 피가 앉아 있었고, 눈 밑에는 여러 밤의 그늘이 짙었다."오셨습니까.""오래 버티셨습니다."위지헌이 말에서 내렸다.심도윤이 잠깐, 도성 쪽을 보았다."…그 아이는.""잘 있습니다. 왕부를 지키고 있습니다."심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낸 아비의 물음은, 그 한마디로 족했다.*두 장수는 막사 안 지도 위에서 나머지를 나눴다.심도윤이 지도를 짚었다. 흑령이 넘은 골짜기 둘과, 그 뒤로 이어진 마을들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이번에는, 노략이 아닙니다."노장이 낮게 말했다."약탈하고 물러나던 자들이, 이번에는 마을을 태우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다. 땅을 가지려는 움직임입니다."위지헌의 눈이 지도 위에서 서늘해졌다.노략은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었다. 땅을 가지려는 것은, 겨울 너머를 보는 것이었다. 흑령의 뒤에서 누군가, 저들에게 겨울 너머를 셈하게 하고 있었다.흑령이 스스로 담 쌓는 법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0. 다 세지 못한 봄

    출정은, 닷새 뒤로 정해졌다.경화제는 끝내 군량 결재를 내렸다. 다만, 절목의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북변의 군권은 섭정왕에게 주되, 도성 순검은 그가 없는 동안 다시 예부와 나누어 둔다는 줄이었다.한 손으로 군량을 내리고, 다른 손으로 순검을 반쯤 거둔 셈이었다.위지헌은 그 줄을 읽고, 더 청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는지, 그는 오래 아는 형의 속을 읽었다.*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왕부의 살구나무 아래에 섰다.꽃이 진 자리에, 이제 푸른 열매가 맺혀 있었다. 지난봄에 핀 꽃이, 여름을 향해 익어 가고 있었다.지난겨울, 이 나무는 헐벗은 가지였다. 봄에 꽃을 피웠고, 그 꽃이 지고 이제 열매를 맺었다. 한 나무가 한 해에 세 얼굴을 지나는 동안, 두 사람도 이별과 재회와 혼례를 지났다."지난겨울에는, 제가 봄을 셌어요."월령이 말했다."이번에는요?""이번에는, 봄을 세는 대신 다른 걸 해요."월령이 소매 안에서 검은 바둑돌 하나를 꺼냈다. 지난겨울, 그가 흰 돌을 가져가고 그녀에게 남긴 돌이었다."이 돌을, 이번에는 제가 쥐고 있을게요. 문밖에서 기다리는 대신, 문 안에서 셈을 할게요. 연이라는 이름이 누구인지, 왕야가 북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 손으로 알아낼게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혼자 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지난겨울에 이미 보았다."위험한 셈이다.""알아요."월령이 낮게 웃었다."그래서 왕야가 돌아올 자리를, 제가 지켜 둘게요."*닷새 뒤, 북문에 다시 북경군이 도열했다.지난겨울과 같은 아침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월령이 심가의 딸이 아니라 왕부의 안주인으로 그 자리에 섰다.위지헌이 말에 올랐다. 그의 품속에는, 지난겨울과 같은 흰 바둑돌이 들어 있었다.다만 이번의 두 돌은, 지난겨울과 짝이 달랐다. 지난겨울 검은 돌은 심가의 딸이 소매에 넣었고, 이번 검은 돌은 왕부의 안주인이 방첩 장부 곁에 놓았다. 같은 두 돌이, 다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49. 북에서 온 파발

    봄이 반쯤 깊었을 때, 북에서 두 번째 파발이 들었다.첫 파발은 첩보였다. 두 번째는,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흑령이 삭원 너머 골짜기 둘을 넘었다. 겨울에 잃은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국경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심도윤의 북문군이 얇게 막고 있었으나, 오래 버틸 셈은 아니었다.지난겨울 흑령을 하루로 끝낸 것은, 눈이 저들의 방패가 되어 준 살구골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봄에는, 그 방패가 저들에게 없었다. 그러나 국경 안쪽은 지형이 달랐다. 저들이 안으로 들수록, 이번에는 지형이 저들의 편이 되었다.첫 파발과 두 번째 파발 사이가, 짧았다. 저들의 발이 빠르다는 뜻이었다.*위지헌은 그 파발을 어전으로 가지고 들었다.경화제 앞에, 북변의 군량 절목이 다시 올랐다. 지난달 비워 둔 결재 칸이, 아직 그대로 비어 있었다."폐하."위지헌이 말했다."흑령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군량 결재를 내려 주십시오."경화제는 그 절목을 오래 보았다.돌려준 순검패와, 비워 둔 결재 칸이, 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황제는 섭정왕에게 자리를 돌려주었으나, 그 자리의 군량은 아직 제 손에 쥐고 있었다."북에 다시 나가려느냐."경화제가 물었다."제가 아니면, 흑령을 아는 장수가 없습니다.""가례를 올린 지, 한 달이다."황제의 목소리에, 국사 아닌 것이 잠깐 스쳤다.경화제는 정치에서는 절제된 성군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만은, 형의 목소리가 잠깐 앞섰다. 늦둥이 아우가 오래 혼자였던 것을 아는 형이었다. 이제 겨우 곁에 사람을 둔 아우를, 한 달 만에 다시 북으로 보내는 자리였다.위지헌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제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그 자신도 무겁게 알았다. 흑령을 아는 장수가 그뿐이라는 것은, 이 집을 또 비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날 밤, 위지헌은 안채로 늦게 들었다.월령은 그가 무슨 말을 가지고 왔는지, 얼굴을 보고 먼저 알았다."북에, 다시 가시는군요.""…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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