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숙부."
위명서가 차갑게 불렀다.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피를 나눈 어른이 황명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군중과 관리들 앞에 더 또렷이 세우려는 목소리였다.
"그 여인은 역적이다."
폐후 심씨도, 황후도 아니었다.
그 여인.
위명서는 월령에게서 마지막 이름마저 벗겨 내듯 말했다. 위지헌은 피 묻은 검끝을 내리지 않았다.
월령을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받았다.
"황후께서는 역적이 아니시다."
폐후라 적힌 죄패가 월령의 목에서 빗물에 젖어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호칭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증좌는 모두 나왔다."
위지헌이 마침내 황제를 보았다. 그 눈빛에 군중이 한 걸음 물러났다.
신하가 군주를 보는 눈도, 숙부가 조카를 꾸짖는 눈도 아니었다. 오래 칼집 안에서 잠들지 못한 칼의 눈이었다.
"네가 내놓은 증좌겠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정확했다.
"찾았다. 네가 황후를 죽이려 덮어 둔 것들. 옥새의 붉은 자국도, 북문을 더럽힌 명부도, 심 장군의 이름을 훔친 글씨도."
월령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심가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황제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제야.
왜 하필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거짓이다!"
위명서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순간, 황제가 아니라 궁지에 몰린 사내가 먼저 드러났다.
"섭정왕이 역적의 딸에게 미혹되어 황명을 거역한다! 금군은 들으라, 당장 저자를—"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북경군의 화살이 일제히 금군을 겨눴다.
활시위가 빗속에서 낮게 울었다. 금군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위지헌은 그 소란 속에서 월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연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남자가, 진흙탕 형장 위에서 죄패를 건 여인 앞에.
"월령."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황후도, 폐후도, 심씨도 아니었다.
그 두 글자는 빗속에서도 이상하게 젖지 않았다.
"늦었습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 가까이에서 멈췄다. 닿기 전 한순간, 허락을 구하듯 숨을 멈추었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피와 빗물을 닦아 냈다.
차가울 줄 알았던 손은 뜨거웠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월령은 묻고 싶었다.
어디로요.
왜요.
왜 이제야 왔어요.
그러나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피였다. 위지헌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그제야 월령도 느꼈다.
칼날은 아직 목에 닿지 않았으나, 형장으로 끌려오기 전 삼킨 탕약이 이미 속을 태우고 있었다. 황제는 혹시 모를 손길마저 계산해 두었다.
죽음은 칼끝에만 있지 않았다. 이미 몸 안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문을 닫고 있었다.
"령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처음으로, 아무 예도 남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눈 감지 마. 나를 봐."
이상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월령은 힘겹게 손을 들어 그의 젖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검은 옷감 아래에서 낮은 약재 향이 희미하게 스몄다.
살구꽃은 아니었다.
달콤한 기억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향 아래에서는 숨이 조금 덜 흩어졌다. 위지헌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형장의 진흙도, 황제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 안에 든 몸이 너무 가벼운 듯, 그의 숨이 한 번 멎었다.
"나는 너를 택했어."
빗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짧고 낮았으나, 그 말은 황궁의 붉은 담보다 무거웠다.
"늦은 게 아니야. 내가 되돌릴 거야. 이 비도, 이 칼도, 네가 혼자 견뎌야 했던 모든 날도."
그는 그녀가 아직 들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한 글자씩 귀에 심었다.
"다시 봄이 오게 할게. 네가 그 꽃그늘 앞에서, 이번에는 다른 길을 고를 수 있게."
월령은 웃으려 했다.
다정하다 믿은 목소리는 그녀를 죽였고, 차갑다 여긴 침묵은 그녀를 살리려 황명을 거역했다.
어리석었다, 심월령.
너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위명서가 보였다. 검은 우산을 잃은 용포 위로 빗물이 흘렀다.
화려한 금실 문양 아래, 그의 얼굴만 이상하게 빈약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마지막 남은 체념이 천천히 식었다.
식은 자리에는 분노가 남았다.
만약.
만약 살구꽃이 한 번 더 피어난다면. 그 꽃그늘 아래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황후의 자리에 앉지 않으리라.
그의 손을 잡지 않으리라.
심가의 이름을 진흙에 묻은 자들을 — 소연화 뒤의 독고연화를, 자녕태후를, 심서윤을, 위명서를 — 하나도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남자.
제 마지막을 품에 안고도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위지헌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으리라.
"만약…"
월령이 피 섞인 숨으로 속삭였다. 위지헌이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봄이… 한 번만 더 온다면…"
"온다."
위지헌의 팔이 떨렸다.
"내가 오게 할게."
월령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는, 황후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빗소리가 멀어졌다. 형장의 비명도, 말발굽도, 황제의 외침도 물속에 잠기듯 흐려졌다.
세상은 멀어지는 등불처럼 하나씩 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위지헌의 목소리였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둠의 문턱에 손을 걸고 끝내 닫히지 못하게 버티는 사람처럼.
그리고 침묵이 내렸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월령은 문득 살구꽃 향을 맡았다.
너무 먼 봄의 향이었다.
북에서 첫 서신이 온 것은, 위지헌이 떠난 지 열흘째였다.파발이 왕부에 닿았다. 겉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다만 봉함 자리에, 흰 바둑돌 자국 하나가 눌려 있었다.받을 사람만 아는 봉함이었다.월령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만졌다. 지난겨울, 두 돌이 서로를 알아보던 봉함이었다.*안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북의 봄은 아직 멀다. 그러나 나는 봄 안에 있겠다.'짧은 글이었다. 전장의 서신은 길면 늦었고, 길면 새어 나갔다. 그는 늘, 어렵게 두지 않고 한 줄로 말했다.월령은 그 한 줄을 오래 보았다.봄 안에 있겠다는 말은, 지난가을 계례에 그가 남긴 살구나무 비녀의 말과 같았다. 그때 그는 봄에 먼저 피는 나무를 깎아, 봄 하나를 미리 두고 갔다. 지금 그는 북의 겨울 속에서, 그 봄을 다시 약속하고 있었다.월령은 그 한 줄을 접어, 지난겨울 그가 보낸 첫 서신 곁에 두었다. 서신이 이제 둘이 되었다. 종이 두 장이, 넉 달을 떠나 있던 사람과 한 달을 떠나 있는 사람을 잇고 있었다.전생에는, 그가 어느 전장에 있는지도 몰랐다. 서신 한 장 오간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봄마다 한 줄씩 그의 겨울이 도성에 닿았다.*파발은 서신 말고도, 짧은 군보를 함께 가지고 왔다.북경군이 흑령이 넘은 골짜기 하나를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저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싸움이 겨울보다 길다 했다. 겨울에 하루로 끝낸 것을, 이번 봄에는 여러 날이 걸리고 있었다.월령은 그 군보를 읽고, 검은 바둑돌을 만졌다.군보의 글씨는 담담했으나, 담담한 글씨 아래에서 월령은 사람이 상하고 있음을 읽었다. 하루로 끝나던 싸움이 여러 날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병사가 눕는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 걱정을, 답신에 옮기지 않았다. 걱정을 적어 보내면 북에 있는 사람이 그 걱정까지 짊어졌다. 그는 이미, 도성을 떠난 사람의 무게를 홀로 지고 있었다.늦지 말라는 말도, 이번에는 적지 않았다. 적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가 무엇을 세고 있는지 알았다.
봄이 깊어질 무렵, 궁에서 왕부로 첩지 하나가 들었다.황후 하문정이 내명부 봄 다회에 섭정왕비를 청한다는 것이었다.섭정왕이 북으로 나간 사이였다. 왕비가 홀로 궁에 드는 것은 아직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그러나 청한 이가 황후였다. 지난겨울 국청에서, 월령의 곧음을 본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첩지를 받았다.*청화각을 지날 때, 옅은 유자 향이 회랑을 따라왔다.혜귀인 류담희의 처소였다. 지난겨울 간택된 젊은 후궁으로, 요즘 황제의 밤 부름이 잦다 했다.마침 류담희가 처소 앞 뜰에서 유자를 까고 있었다. 손톱 끝에 봉숭아 물이 옅게 남아 있었다. 섭정왕비가 지나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만 무릎 위의 유자를 굴렸다."어머."류담희가 웃음을 반쯤 삼키다, 삼키지 못했다.월령도 옅게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궁 안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감출 것이 없다는 뜻이거나, 감추지 않아도 될 만큼 영리하다는 뜻이었다.어느 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월령은, 그 밝은 얼굴 하나를 눈에 담아 두었다.봄볕이 청화각 뜰의 유자 껍질 위로 내렸다. 노란 껍질에서 옅고 단 향이 피어올랐다. 궁 안에서 그 향만은, 아무 셈도 섞이지 않은 냄새였다.*황후의 다회에는, 내명부의 여러 얼굴이 모였다.숙비도 있었다. 옥반지 없는 손을 소매에 넣은 채, 예전보다 아래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순검이 섭정왕에게 돌아간 뒤로, 자녕궁의 자리가 반 뼘 낮아져 있었다.황후는 월령을 제 가까이에 앉혔다."섭정왕이 북에 나갔다지.""예, 마마.""홀로 왕부를 지키기 외롭지 않으냐.""외로울 틈이 없습니다."월령이 낮게 답했다."지킬 것이 많으면, 외로움은 뒤로 물러납니다."황후가 부채 너머로 옅게 웃었다. 지난겨울, 자리를 탐내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가장 잘 지킨다던 그 사람이었다.다회 내내, 월령은 말을 아꼈다. 다만 누가 누구의 곁에 앉는지, 누구의 잔이 누구의 손에서 채워지는지를 보았다.
월령은 그 이름을 장부에 적은 뒤로, 사흘을 뒤척였다.석중. 성 밖 옛 역참에서 '연'의 통을 거두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전생에, 그 이름은 금군의 교위였다. 폐위된 그녀를 냉궁으로 끌고 간 자. 그날의 억센 힘을, 월령은 팔목에 오래 기억했다.이번 생에, 석중은 아직 그 일을 하지 않았다.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폐위되지 않았고, 냉궁의 문은 열린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연'의 심부름을 하는 성 밖의 한 사내였다.그 사내가 누구의 발이 되어 움직이는지를 따라가면, '연'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월령은 강무진을 통해, 석중의 걸음을 멀리서 지켜보게 했다.쫓지는 않았다. 위지헌의 말대로, 쫓으면 저쪽이 눈을 잃은 것을 알았다. 다만 멀리서, 그 사내가 어디에 들고 어디에서 자는지를 세었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석중은 성 밖 역참과 저잣거리 셈방을 오갑니다. 사흘에 한 번, 남쪽 옛 절터에 듭니다.""절터에는 누가 있지.""아직,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석중이 그 앞에서는 늘 갓을 벗습니다."갓을 벗는다는 것은, 그 앞에 윗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월령은 그 절터를 장부에 적었다. '연'이라는 이름 아래, 남쪽 절터 한 줄이 더해졌다.석중이라는 사내는, 낮에는 여느 저잣거리 장사꾼과 다르지 않았다. 소금과 기름을 지고 골목을 돌았고, 저녁이면 셈방에서 술 한 잔을 걸쳤다. 그 걸음 어디에도, 전생에 사람을 냉궁으로 끌고 가던 자의 그늘은 없었다.월령은 그것이 더 서늘했다. 사람을 해칠 자가 아직 해칠 일을 만나지 못해, 장사꾼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다. 만나면, 그 얼굴이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며칠 뒤, 청아가 저잣거리에서 돌아와 목소리를 낮췄다."마마님, 그 남쪽 절터요. 요즘 저잣거리에서 소문이 자자해요.""무슨 소문이.""절터에 향 대는 어른이 계신다고. 병을 낫게 해 준다고요. 앓던 사람이 향 한 대 쐬고 나았다고, 다들 몰려간대요."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향 대는 어른. '연
북으로 가는 길은, 봄을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도성에서 살구꽃이 지던 날 북문을 나선 군은, 사흘 만에 다시 겨울로 들어섰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봄이 얕아졌고, 삭원에 이르자 땅은 아직 서리를 물고 있었다.위지헌은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검은 갑주 위로, 북의 찬 바람이 서늘하게 미끄러졌다.지난겨울, 그는 이 길을 한 번 지났다. 그때는 흑령의 겨울을 하루로 끝내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저들이 봄을 기다렸다가 먼저 국경을 넘었다.같은 길이었으나, 저들의 셈이 달라져 있었다.군은 말이 없었다. 봄을 등지고 겨울로 드는 길이라, 병사들의 입김이 다시 희게 서렸다. 갑주 스치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사이로, 누구도 노래하지 않았다.지난 출정에는, 도성을 벗어나며 군가 한 자락이 오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오르지 않았다. 하루로 끝난 겨울과, 여러 날이 걸릴 봄의 차이를 병사들도 몸으로 알았다.*닷새째, 북문군의 진영에 닿았다.심도윤이 진문 앞에 나와 있었다. 딸을 왕부로 보낸 장인이자, 국경을 얇게 막아 온 노장이었다. 갑주 위에 마른 피가 앉아 있었고, 눈 밑에는 여러 밤의 그늘이 짙었다."오셨습니까.""오래 버티셨습니다."위지헌이 말에서 내렸다.심도윤이 잠깐, 도성 쪽을 보았다."…그 아이는.""잘 있습니다. 왕부를 지키고 있습니다."심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낸 아비의 물음은, 그 한마디로 족했다.*두 장수는 막사 안 지도 위에서 나머지를 나눴다.심도윤이 지도를 짚었다. 흑령이 넘은 골짜기 둘과, 그 뒤로 이어진 마을들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이번에는, 노략이 아닙니다."노장이 낮게 말했다."약탈하고 물러나던 자들이, 이번에는 마을을 태우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다. 땅을 가지려는 움직임입니다."위지헌의 눈이 지도 위에서 서늘해졌다.노략은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었다. 땅을 가지려는 것은, 겨울 너머를 보는 것이었다. 흑령의 뒤에서 누군가, 저들에게 겨울 너머를 셈하게 하고 있었다.흑령이 스스로 담 쌓는 법
출정은, 닷새 뒤로 정해졌다.경화제는 끝내 군량 결재를 내렸다. 다만, 절목의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북변의 군권은 섭정왕에게 주되, 도성 순검은 그가 없는 동안 다시 예부와 나누어 둔다는 줄이었다.한 손으로 군량을 내리고, 다른 손으로 순검을 반쯤 거둔 셈이었다.위지헌은 그 줄을 읽고, 더 청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는지, 그는 오래 아는 형의 속을 읽었다.*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왕부의 살구나무 아래에 섰다.꽃이 진 자리에, 이제 푸른 열매가 맺혀 있었다. 지난봄에 핀 꽃이, 여름을 향해 익어 가고 있었다.지난겨울, 이 나무는 헐벗은 가지였다. 봄에 꽃을 피웠고, 그 꽃이 지고 이제 열매를 맺었다. 한 나무가 한 해에 세 얼굴을 지나는 동안, 두 사람도 이별과 재회와 혼례를 지났다."지난겨울에는, 제가 봄을 셌어요."월령이 말했다."이번에는요?""이번에는, 봄을 세는 대신 다른 걸 해요."월령이 소매 안에서 검은 바둑돌 하나를 꺼냈다. 지난겨울, 그가 흰 돌을 가져가고 그녀에게 남긴 돌이었다."이 돌을, 이번에는 제가 쥐고 있을게요. 문밖에서 기다리는 대신, 문 안에서 셈을 할게요. 연이라는 이름이 누구인지, 왕야가 북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 손으로 알아낼게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혼자 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지난겨울에 이미 보았다."위험한 셈이다.""알아요."월령이 낮게 웃었다."그래서 왕야가 돌아올 자리를, 제가 지켜 둘게요."*닷새 뒤, 북문에 다시 북경군이 도열했다.지난겨울과 같은 아침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월령이 심가의 딸이 아니라 왕부의 안주인으로 그 자리에 섰다.위지헌이 말에 올랐다. 그의 품속에는, 지난겨울과 같은 흰 바둑돌이 들어 있었다.다만 이번의 두 돌은, 지난겨울과 짝이 달랐다. 지난겨울 검은 돌은 심가의 딸이 소매에 넣었고, 이번 검은 돌은 왕부의 안주인이 방첩 장부 곁에 놓았다. 같은 두 돌이, 다른
봄이 반쯤 깊었을 때, 북에서 두 번째 파발이 들었다.첫 파발은 첩보였다. 두 번째는,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흑령이 삭원 너머 골짜기 둘을 넘었다. 겨울에 잃은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국경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심도윤의 북문군이 얇게 막고 있었으나, 오래 버틸 셈은 아니었다.지난겨울 흑령을 하루로 끝낸 것은, 눈이 저들의 방패가 되어 준 살구골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봄에는, 그 방패가 저들에게 없었다. 그러나 국경 안쪽은 지형이 달랐다. 저들이 안으로 들수록, 이번에는 지형이 저들의 편이 되었다.첫 파발과 두 번째 파발 사이가, 짧았다. 저들의 발이 빠르다는 뜻이었다.*위지헌은 그 파발을 어전으로 가지고 들었다.경화제 앞에, 북변의 군량 절목이 다시 올랐다. 지난달 비워 둔 결재 칸이, 아직 그대로 비어 있었다."폐하."위지헌이 말했다."흑령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군량 결재를 내려 주십시오."경화제는 그 절목을 오래 보았다.돌려준 순검패와, 비워 둔 결재 칸이, 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황제는 섭정왕에게 자리를 돌려주었으나, 그 자리의 군량은 아직 제 손에 쥐고 있었다."북에 다시 나가려느냐."경화제가 물었다."제가 아니면, 흑령을 아는 장수가 없습니다.""가례를 올린 지, 한 달이다."황제의 목소리에, 국사 아닌 것이 잠깐 스쳤다.경화제는 정치에서는 절제된 성군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만은, 형의 목소리가 잠깐 앞섰다. 늦둥이 아우가 오래 혼자였던 것을 아는 형이었다. 이제 겨우 곁에 사람을 둔 아우를, 한 달 만에 다시 북으로 보내는 자리였다.위지헌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제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그 자신도 무겁게 알았다. 흑령을 아는 장수가 그뿐이라는 것은, 이 집을 또 비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날 밤, 위지헌은 안채로 늦게 들었다.월령은 그가 무슨 말을 가지고 왔는지, 얼굴을 보고 먼저 알았다."북에, 다시 가시는군요.""…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