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살려 주십시오."
월령이 속삭이자, 위명서의 눈에 옅은 빛이 스쳤다. 끝내 그녀가 무너졌다고, 사랑이 아니어도 두려움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는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월령은 진흙 속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흰 소매 안쪽으로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
"아란을. 그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위명서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이미 늦었구나.
황제는 처음부터 누구도 살릴 생각이 없었다. 목숨을 저울에 올려 흥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울 자체를 손에 쥔 사람이었다.
"시각이 되었습니다, 폐하."
형부상서가 젖은 관복을 끌며 머리를 조아렸다. 위명서는 더 이상 월령을 보지 않았다.
소매 끝에 묻은 먼지를 털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 손짓 하나에 처형인이 움직였다.
월령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보리라 했다.
자신을 버린 황제의 얼굴을. 충신의 피를 먹고도 태연한 붉은 담을.
그리고 기억하리라.
눈을 감아도 잊지 않으리라.
칼날이 들어 올려졌다.
빗물이 칼등을 따라 흘렀다. 그 얇은 빛이 눈앞에 닿는 순간, 형장 밖에서 땅이 울렸다.
처음에는 천둥인 줄 알았다. 그러나 천둥은 그렇게 일정하게 달려오지 않는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말의 콧김과 군화의 진동을 데려오지 않는다.
"북경군이다!"
누군가 외쳤다.
군중이 갈라졌다.
검은 갑옷의 기병들이 형장으로 밀려들었다. 우산이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검을 뽑았고, 형부의 관리들이 젖은 종잇장처럼 질려 물러났다.
그 선두에 한 남자가 있었다.
위지헌.
대연의 섭정왕.
선황의 아우이자 현 황제의 숙부.
북쪽 변경을 침묵시킨 왕.
황궁 안에서조차 이름을 낮춰 불러야 하는 사람. 월령이 황후로 있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을 놓고 마주한 적 없는 남자.
그가 빗속을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흑마가 계단 앞에서 앞발을 들었다.
위지헌은 말이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검은 장포는 빗물에 무겁게 젖었고, 허리의 장검은 이미 뽑혀 있었다.
"위지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군사를 이끌고 드느냐!"
위명서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위지헌은 황제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월령에게 박혀 있었다. 월령은 그 눈을 보고 숨을 멈췄다.
그는 늘 차가운 사람이었다. 황제 앞에서도 등뼈를 굽히지 않는 왕.
연회에서 누구와도 쉽게 잔을 나누지 않던 사람. 그녀가 황후가 된 뒤에도 예를 다했으되, 그 예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무너지는 순간까지 자세만은 흐트러뜨리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늦었다는 것을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칼을 치워라."
낮은 목소리였다.
처형인의 손이 떨렸다.
"짐의 명이다. 폐후 심씨의 형을 집행하라."
위명서가 이를 악물었다.
처형인이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빗속에 은빛 선 하나가 그어졌다.
월령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칼날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처형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손목에서 솟은 피를 빗물이 곧장 돌계단 아래로 끌고 갔다.
위지헌은 어느새 월령의 앞에 서 있었다.
검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한 번만 더 황후께 손을 대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 형장에 살아 돌아갈 자는 없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월령은 그 넓고 곧은 등을 바라보았다. 피와 철 냄새가 뒤엉킨 한복판에서, 이상하게도 아주 낮은 향이 스쳤다.
젖은 나무와 식은 차, 오래된 약재 같은. 꽃향을 부르지 않는 서늘한 기척이었다.
그가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심가가 무너질 때도, 그녀가 곤원전에서 끌려 나올 때도, 아란이 불길 속으로 사라질 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있었는데, 그녀가 황제만 바라보느라 — 제 벼랑으로 데려간 손을 끝까지 붙잡고 있느라 — 보지 못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검은 말의 발굽 아래에서 궁문 밖 돌가루가 튀었다.북영의 문이 열리자 정무가 투구끈을 조이며 계단을 내려왔다. 안장에는 이미 활과 짧은 창이 묶여 있었다. 말 이백 필이 영 안을 가득 채운 채 콧김을 뿜었다. 가죽 고삐와 쇠 재갈이 부딪칠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위지헌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두 장의 패를 던졌다.마구간 쪽에는 주인 없는 말 세 필이 따로 묶여 있었다. 한 필의 안장에는 검붉은 피가 넓게 말라붙었고, 다른 말의 갈기에는 부러진 화살대가 얽혀 있었다. 말은 사람이 다가갈 때마다 흰자를 드러내며 뒷발을 굴렀다.위지헌이 가장 가까운 말의 콧등에 손을 얹었다. 거칠던 숨이 손바닥 아래에서 잠시 가라앉았다. 그는 갈기에 박힌 나무 가시만 뽑아 바닥에 버렸다."회암 옛길은 네가 맡아라. 남원 골짜기에는 오십을 먼저 보낸다."정무가 패를 받아 허리춤에 나누어 찼다."죽은 자는 건드리지 말고, 숨이 붙은 자부터 옮기겠습니다.""삭원의 화살을 지닌 자가 보이면 쏘지 마라.""살려 잡으라는 말씀이십니까.""입을 열게 해야 한다."정무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영문이 다시 벌어졌다. 선두의 말이 땅을 박차자 이백 필의 발굽이 한꺼번에 울렸다. 둥, 둥. 북영의 낡은 기와에서 마른 먼지가 흘러내렸다.위지헌의 검은 말도 그 뒤를 따라 나섰다가 갈림길에서 고삐를 꺾었다.병사들이 저잣길을 가르자 좌판의 등불이 세찬 바람에 한쪽으로 누웠다. 늦은 장꾼들이 벽에 붙어 길을 비켰고, 떡을 찌던 솥에서는 흰 김이 기병의 등 뒤로 길게 찢어졌다.기병이 남문 밖으로 빠져나갈 무렵, 같은 흙먼지가 심가의 남쪽 담 밑에도 길게 눌어붙어 있었다.허도겸은 남원 별원의 문턱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뒤따른 서리 둘이 장부함과 먹통을 들었다. 문을 지키던 늙은 하인이 입술을 깨물며 열쇠를 내놓았다."마지막으로 문을 연 때가 언제요?""사흘 전입니다. 바람이 세어 창을 살폈습니다."자물쇠가 철컥 열렸다.문 안에서는 오래 닫힌 집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기윤이 비단의 네 귀를 모았다.세 갈래 화살촉과 두 돌이 한 겹의 천 안에서 서로 닿지 않게 놓였다.위지헌이 손바닥에 묻은 검은 쇳가루를 엄지로 문질렀다."정무에게 기병 이백을 주어라. 회암 옛길과 남원 골짜기를 닫고, 살아 있는 자는 모두 데려온다.""명 받들겠습니다.""화살의 문양은 탁본해 병부와 진북대장군에게 같은 시각에 보내라."기윤이 비단을 품에 넣었다.정전 문 안에서 고 내관이 나왔다."폐하께서 왕야를 부르십니다."위지헌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햇빛을 등진 검은 장포가 넓은 어깨에서 발목까지 흐트러짐 없이 떨어졌다. 옥대는 곧은 허리를 단단히 감았고, 옥관 아래의 검은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곧은 콧날과 매끈한 턱선이 빛에 선명했다.회랑 끝에서 백자 그릇을 받치던 나인 둘이 몸을 낮췄다.한 사람은 그가 지나간 뒤에야 손에서 미끄러진 옥색 수건을 보았다. 백자 뚜껑이 받침 위에서 달각거렸고, 곁의 나인이 급히 손을 포갰다.위지헌은 돌아보지 않았다.목깃 사이에서 목울대가 한 번 느리게 움직였다. 화살촉을 쥐었던 길고 단정한 손에는 검은 가루와 마른 피가 함께 묻어 있었다.경화제는 정전 뒤 작은 편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탁자 한쪽에는 새로 봉한 밀서함이 놓였고, 그 곁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어보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손을 펴 보아라."위지헌이 손바닥을 보였다.손바닥 한가운데에는 화살촉 끝이 눌린 가느다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심월령이 사흘을 청했지.""예.""네게 바로 답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사흘 뒤에 답하겠다 했습니다."경화제가 마지막 음절을 마치자마자 대답이 돌아왔다.경화제의 손가락이 밀서함 위에서 멎었다."거절당한 셈이구나.""거절하지 않았습니다."편전 밖에서 늙은 내관이 숨을 삼켰다.경화제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예부가 아우의 혼처를 올리기 시작한 뒤로 여러 해가 지났다.종친의 딸과 문벌가의 장녀, 공주의 벗까지 명단에 올랐다. 어느 집도 난색을 적어
정전 밖의 햇빛은 눈이 시릴 만큼 밝았다.월령은 계단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긴장이 빠져나간 다리가 뒤늦게 떨렸다. 소매 안의 두 돌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심월령."위지헌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그는 사람들 앞에서 더 다가오지 않았다. 검은 장포가 빛을 먹은 듯 서늘했고, 은실 구름무늬만 어깨를 따라 희미하게 살아났다."숨."월령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후우…."위지헌의 시선이 소매 안에 감춘 손으로 내려갔다.월령은 그 눈길을 따라 천천히 손을 폈다.흰 돌과 검은 돌이 손바닥 위에 놓였다. 살갗에는 둥근 자국 두 개가 깊게 남아 있었다.위지헌의 손이 소매 밖으로 나왔다가 한 뼘 앞에서 멎었다.그 붉은 자국을 제 엄지로 천천히 펴 주고 싶었다.차가운 손바닥을 제 손안에 감추고 입김으로 데우고 싶은 욕망이 목 안을 뜨겁게 태웠다.월령의 아래 속눈썹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그것까지 손등으로 훔쳐 버리고 싶어 손가락이 한 번 움직였다.곁을 지나던 예부 서리가 고개를 더 숙이자 위지헌은 끝내 닿지 않았다.위지헌은 작은 비단 천을 기윤에게 건넸다."받쳐라."기윤이 천을 펼쳤다. 월령은 그 위에 두 돌을 내려놓았다.손이 비자 바람이 바로 닿았다."왕야."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내려왔다."제가 왕야의 곁에 서겠다고 정하면."월령의 말끝이 작게 흔들렸다."왕야께 너무 큰 짐이 되겠습니까."회랑에서는 황후의 행렬이 멀어졌다. 강무진은 일곱 명패를 들고 예부 서리를 따라갔다. 바닥에는 연무의 쇠사슬이 긁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위지헌은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월령만 보았다."짐이 아니다."말보다 숨에 가까운 목소리였다.위지헌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네 마음은 내가 명하지 않는다."그의 손이 다시 올라왔다가, 이번에도 닿지 않았다."네가 오면,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월령의 눈가에 고였던 물기가 아래 속눈썹을 적셨다. 눈동자는 흐려지지 않았다."사흘 뒤에 답하겠습니다.""기다리겠다."그는 더 묻지
위지헌은 월령을 한 호흡 동안 보았다.눈썹 사이가 잠깐 좁아졌다. 다문 입술에도 힘이 들어갔다.이내 그 기색을 지웠다.혼사가 사흘 늦어지는 것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병풍 쪽으로 고개를 느긋하게 까딱였다."그리하겠습니다."월령의 손 안에서 두 돌이 조금 느슨해졌다.경화제의 옥필이 위지헌의 이름 옆에서 멈췄다."기다리겠느냐."위지헌이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이번에는 턱 끝이 짧게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곧게 다문 입술 끝이 굳었고, 옥대 위에 얹힌 엄지가 은실 구름무늬를 천천히 눌렀다.경화제의 시선이 그 엄지에 잠깐 머물렀다.황제는 옥필을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굴렸다."사흘이 모자라면 닷새를 주마."위지헌의 눈이 천천히 들렸다.경화제는 붓끝을 벼루에 가지런히 고르고 있었다. 입가에만 엷은 웃음이 걸렸다.위지헌의 발끝은 월령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어 있었다.그는 발을 바로 놓고 옥대에서 손을 뗐다.당장 데려가고 싶은 열은 손바닥 안에 남았다.정전의 서리 하나가 붓을 들었다가, 적을 말이 없어 다시 내려놓았다.숙비가 눈을 내렸다.위명서의 손안에서 소맷단이 더 깊이 구겨졌다.경화제가 옥필을 내려놓았다."좋다."내관들이 고개를 더 낮추었다.두 거짓 군령은 진북대장군의 장계에서 떨어져 나와 묵련과 오상궁의 진술 아래 봉해졌다.묵련과 동생의 이름에는 황후전의 푸른 보호패가 놓였다.회암역 기록의 빈칸에는 `군량 쉰세 대와 호송군을 구함`이라는 먹줄이 들어갔다.숙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위지헌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심가 대문의 붉은 봉인에는 거둘 시각이 적혔다.그 아래로 예부와 호부의 인이 나란히 찍혔다.남쪽 별원과 독고 상단 창고에는 검은 봉함패가 내려졌고, 달아난 병부 참의의 초상은 성문 네 곳으로 향했다.연무의 얼굴이 굳었다.오상궁과 연무의 이름은 서로 다른 심문방에 적혔다.오상궁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왔다. 온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빠진 듯했다.마지막으로 나라의 조문금이
월령은 일곱 명패부터 보았다.그 곁에는 피 묻은 군보, 묵련의 베낀 글, 금이 간 가짜 패와 검은 독환이 놓여 있었다.오상궁의 감긴 손목과 연무의 부러진 손도 같은 빛 아래 있었다.향로에서는 침향이 타고 있었으나, 물건들 가까이에는 마른 피와 젖은 볏짚, 의원이 바른 약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일곱 명패에서는 오래 손을 탄 나무 냄새만 났다.철컥.연무가 묶인 손을 당겼다."소녀가 확인한 물건과 사람은 모두 이 자리에 있사옵니다."경화제가 물었다."무엇을 청하느냐."월령은 병풍 아래의 밀서를 보았다.그 곁에 일곱 명패가 있었다.예부의 기록지에는 `심월령의 청으로 섭정왕이 군을 움직였다`는 줄 바로 아래 혼사 답을 적을 빈칸이 남아 있었다.월령은 그 빈칸 위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마지막 명패 뒤의 작은 새를 두 손으로 바로 세웠다.새의 날개 한쪽은 자주 만진 듯 반질거렸다.그 패를 새겨 준 사람은 아직 군량 수레가 몇 대였는지도, 어느 인장이 거짓이었는지도 모를 터였다."죽은 이들의 집부터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누군가는 오늘 저녁 빈 밥상을 받게 될 터였다.작은 새를 새긴 손은 명패가 돌아오는 까닭부터 들어야 했다.월령의 입술에는 핏기가 옅었으나 젖은 눈동자는 흐려지지 않았다."그 뒤에 제 이름으로 답하겠습니다."경화제의 옥필이 빈칸 위에서 멎었다.월령은 손가락 셋을 포개 일곱 명패 앞에 놓았다."사흘을 청합니다."정전 안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연무가 쇠사슬을 끌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강무진의 피 묻은 손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허도겸은 남원 별원과 독고 상단 장부를 적은 쪽지를 접어 옥필 아래 밀었다.쪽지 가장자리에는 장부에서 급히 찢긴 푸른 실밥이 붙어 있었다.독고 상단의 출입란은 어젯밤 한 줄만 비어 있었고, 그 아래 찍힌 창고 인주는 아직 손에 묻어날 만큼 새것이었다.연무의 어깨가 낮게 떨렸다.숙비 뒤에 선 문상궁의 엄지도 소매 안에서 한 번 움직였다.형부 도위는 병부 참의의 빈 출석패를 두 손으
경화제의 물음이 정전 안에 오래 남았다.월령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손바닥 안에서 흰 돌이 검은 돌 가까이로 굴렀다. 두 돌이 닿기 전 손가락 하나가 사이에 놓였다.황후의 부채 끝이 조금 내려갔다.숙비의 빈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접혔다.위명서는 월령을 보았다. 후원과 별궁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빛은 없었다. 입술이 한 번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혔다.설련은 숙비의 그림자 안에서 숨을 죽였다.문상궁은 두 손을 소매 안에 모았다. 오상궁을 실은 들것 곁에서는 의원이 맥을 짚고 있었고, 연무의 부러진 손목을 묶은 나무판 아래로 핏물이 한 줄 말라 갔다.위지헌만 바닥을 보고 있었다.그의 턱 아래 그림자가 짙었다. 한 호흡이 옷깃 안으로 들어갔다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월령은 그 모습을 보았다.자녕궁 문밖에서는 그녀가 나오기만을 보던 사람이었다. 회암역으로 군을 보낼 때는 제 이름부터 군보에 적게 했다.지금은 눈길 하나도 보내지 않았다.월령의 젖은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갔다가 들렸다.그 작은 움직임이 위지헌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어른거렸다.고개를 돌려 젖은 눈을 보는 순간, 그녀가 답하기도 전에 제 모든 것을 내어놓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는 바닥의 금 간 돌 하나를 칼끝보다 오래 바라보았다.전생의 정전은 비가 새는 듯 어두웠다. 남이 정한 글이 먼저 읽혔고, 그녀는 정해진 자리로 걸어갔다.붉은 예복은 무거웠고, 머리 위의 봉관은 고개를 들 때마다 이마를 눌렀다. 그날 누구도 월령에게 무게를 견딜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오늘 병풍 아래에는 `본인의 뜻`이라 적혀 있었다.일곱 이름도 같은 상에 있었다.월령은 숨을 들이켰다.목 안쪽이 말라 첫 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혀끝에 아까 삼킨 미음의 옅은 단맛이 남아 있었다. 자녕궁 문밖에서 식지 않게 갈아 온 그릇과, 심가 대문에서 옥잠을 바로 세워 주던 어머니의 손이 차례로 떠올랐다.위지헌의 손이 옥대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손바닥을 편 채 허벅지 옆에 두었다.손마디에는 칼을 오래 쥔 굳은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