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살구꽃 향이 났다.
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
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
"아가씨!"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
아니.
칼이 아니었다.
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숨을 들이킬 때마다 장부 안쪽을 긁던 독. 마지막 순간까지 몸 안에서 문을 닫던 냄새.
그런데 손끝에 닿은 목은 멀쩡했다.
상처도 없었다.
쇠사슬이 쓸고 간 자국도, 죄패가 눌렀던 거친 흔적도 없었다.
월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황궁의 담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계단도 아니었다.
머리 위에는 옅은 청색 비단 천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비단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름무늬가 수놓여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살구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가지마다 연분홍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꽃잎 몇 장이 창살에 닿았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래로 떨어졌다.
탁자 위 향로에서는 은은한 침향이 피어올랐다. 먹 냄새와 마른 종이 냄새, 햇볕에 덥혀진 비단 이불의 냄새가 차례로 돌아왔다.
이 방을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심가의 동쪽 별채.
황후의 금관을 쓰기 전, 그녀가 열여섯 해를 살았던 방.
창가 낮은 서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이 남아 있었다. 붓끝은 흰 산수 화첩 위에 기대어 있었고, 그 옆에는 절반쯤 펼쳐진 병법서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전장에서 보내온 군보를 따라 그리던 산맥과 강줄기. 어린 아란에게 가르쳐 주다 만 바둑판. 흑돌 셋과 백돌 다섯이 끝내기 자리에서 묘하게 맞물린 채 멈춰 있었다.
이 방은 그녀가 가장 아름답게 꾸며지던 곳이 아니었다.
가장 오래 생각하던 곳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월령은 고개를 돌렸다.
침상 곁에는 어린 시녀 청아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직 양 볼에 젖살이 남아 있었고, 머리에는 값싼 비녀 하나만 꽂혀 있었다. 눈이 크고 손이 빠른 아이. 놀라면 먼저 입술을 깨물고, 그래도 손은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는 아이.
훗날 황궁 깊은 곳까지 따라와 끝까지 곁을 지키다, 누구도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채 사라졌던 아이.
그 아이가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월령의 손끝이 떨렸다.
"청아."
목소리가 낯설었다.
갈라지고 쉬어 버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직 한 번도 오래 울부짖느라 망가지지 않은, 어린 자신의 목소리였다.
"예, 아가씨."
"오늘이 며칠이냐."
청아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삼월 초엿새입니다. 아가씨께서 낮잠을 너무 오래 주무셔서 소인이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삼월 초엿새.
그 말이 방 안에 떨어지는 순간, 월령의 숨이 접혔다.
경화 칠년, 삼월 초엿새.
황후 간택의 이름이 아직 심가 문턱을 넘기 전. 서원당에 흰 천이 걸리기 전. 어머니의 기침이 병으로 불리기 시작한 날.
"거울."
"예?"
"거울을 가져와."
청아는 허둥지둥 화장대 위의 동경을 집어 들었다. 월령은 그것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거울 속에는 열여섯의 심월령이 있었다.
뺨에는 아직 핏기가 돌았다. 눈가에는 황궁에서 배운 미소의 흔적이 없었다. 먹빛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부드럽게 흘렀고, 흰 속적삼 위로 드러난 목선은 가는 옥필처럼 맑았다. 손등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누구든 저 얼굴을 보면 먼저 아름답다 말했을 것이다.
월령은 그 말이 오래 싫었다.
아름다움은 남의 눈에 걸리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그보다 안쪽에 있는 것들이었다. 붓을 들 때 흔들리지 않는 손. 바둑판에서 죽은 돌을 미끼로 전체 형세를 뒤집는 눈. 아버지의 군보 속 길목을 읽어 내던 어린 마음.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든 진짜 자신.
무엇보다 눈동자가 달랐다.
아직 세상을 믿던 얼굴 위에, 너무 먼 밤을 건너온 눈이 얹혀 있었다.
동경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청아가 놀라 받아 냈다.
"아가씨?"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봄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형태를 갖추었다. 검은 우산 아래의 높은 단. 위명서의 차가운 눈. 위지헌의 피 젖은 손. 그리고 빗소리 사이로 낮게 떨어지던 말.
나는 너를 택했다.
늦었을 뿐이다.
월령은 이불을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하얗게 솟았다.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감은 뒤 위지헌이 살아남았는지, 황제를 베었는지, 아니면 북경군과 함께 그 비 속에 남았는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왔다.
황제가 버린 자리로.
모두가 역적이라 부른 자리로.
"아가씨, 정말 의원을..."
"어머니는?"
청아가 멈칫했다.
"마님이요? 지금 서원당에 계십니다. 아침부터 기침이 심하셔서, 둘째 부인께서 몸에 좋은 탕약을 올리겠다고..."
"탕약."
월령이 낮게 중얼거렸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던 살구꽃 향 밑에서 아주 오래된 쓴맛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랬다.
그날 어머니 유씨는 둘째 부인 한씨가 보낸 탕약을 마셨다. 처음에는 감기 기운이 깊어진 줄 알았다. 다음 날부터 피를 토했고, 보름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 달 뒤 서원당 문에는 흰 천이 걸렸다.
그 흰 천은 심가의 첫 균열이었다.
어머니의 장례 뒤 아버지는 전장으로 떠났고, 집안 살림은 둘째 부인과 사촌 심서윤의 손으로 넘어갔다. 월령은 그때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틈에 문서는 바뀌었다.
사람들은 매수되었다.
황실은 천천히 심가의 목에 걸 밧줄을 꼬았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월령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옷."
"아가씨, 아직 몸이..."
"푸른 비단 말고, 흰 장삼. 머리는 단정하게만 묶어."
청아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 아이는 언제나 월령의 표정만 보고 움직였다. 작고 빠른 손이 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장삼을 꺼내고, 허리끈을 고르고, 머리끈을 물고 돌아서는 동작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서 끝내 너무 먼 곳까지 따라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주인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번에는 잃지 않겠다.
월령은 흰 장삼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앉자 청아가 머리를 빗어 내렸다. 빗살이 머리카락을 지날 때마다 월령은 숨을 골랐다.
당장 울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오라비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고, 어린 아란을 품에 안아 살아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위지헌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다.
왕야.
그 비를 기억하십니까.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눈물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살리는 것.
그리고 독을 가져온 자의 손목을 잡는 것.
"청아."
"예."
"오늘 서원당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기억하느냐."
청아는 빗질하던 손을 멈췄다.
"아침에 둘째 부인께서 오셨고, 서윤 아가씨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 뒤로 주방의 은매가 탕약을 달인다고 몇 번 왔다 갔고요."
은매.
그 이름을 듣자 월령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은매는 우물에서 건져졌다. 사람들은 젖은 돌을 잘못 밟았다 했다. 비가 왔으니 그럴 수도 있다 했다. 너무 쉽게, 너무 조용히.
이제 와 생각하면 입막음이었다.
"은매는 지금 어디 있지?"
"아마 약방에 있을 겁니다."
"좋아."
월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원당으로 가시게요?"
"아니."
월령은 창밖의 살구꽃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울며 탕약을 빼앗고, 둘째 부인을 의심한다는 티를 냈을 것이다.
그러면 손은 숨어 버린다.
증거는 사라진다.
은매는 오늘 밤 안에 우물가로 끌려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 열린 봄은 자비가 아니었다.
손잡이가 이쪽으로 돌아온 칼이었다.
"약방으로 간다."
심가의 약방은 동쪽 별채와 서원당 사이, 작은 후원에 있었다. 봄볕이 잘 드는 곳이라 약재를 말리기에 좋았다. 문 가까이에는 둥근 소쿠리들이 줄지어 놓였고, 그 위로 길경과 감초, 말린 귤껍질이 얇게 펼쳐져 있었다. 볕을 머금은 약재 냄새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쪽에는 불 위에서 오래 졸아든 탕약의 쓴 김이 섞여 있었다.
월령이 문턱을 넘자 안쪽에서 약재를 고르던 계집종 하나가 흠칫 몸을 굳혔다.
은매였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 눈꼬리가 처져 순해 보이고, 손끝에는 약재 물이 배어 있었다. 손마디가 거칠었고, 소매 끝은 오래된 물기로 어둡게 젖어 있었다.
예전의 월령은 그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머니를 병들게 한 독은 뒤늦게 알았으면서, 독을 들고 온 손은 보지 못했다.
"아가씨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은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월령은 천천히 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탕약을 보러 왔다."
"마님 약은 이미 거의 달여졌습니다. 곧 서원당으로 올릴 예정이었어요."
"그래?"
월령은 약로 위의 검은 사기그릇을 보았다.
뜨거운 김이 얇게 피어올랐다. 감초와 생강, 길경의 냄새가 먼저 났다. 겉으로는 평범한 기침약이었다. 병든 사람에게 올리기 알맞은, 따뜻하고 무해한 냄새.
그러나 그 밑에 아주 희미한 단내가 섞여 있었다.
달다고 하기에는 눅눅했고, 쓰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운 냄새. 혀가 아니라 피 속으로 먼저 스며드는 냄새.
월령은 그 냄새를 알고 있었다.
붉은 담 안쪽에서는 사람이 향으로 병들었다. 차로 잠들었고, 손수건으로 열이 올랐으며, 웃는 얼굴 아래에서 천천히 숨이 가늘어졌다. 그곳에서 배운 것들은 늘 늦었지만, 한 번 배운 냄새는 몸이 잊지 않았다.
적련초.
처음에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끓이면 피를 삭이고 장부를 망가뜨린다. 기침이 있는 사람에게 쓰면 병세가 깊어진 것처럼 보이기에 가장 들키기 어려운 독.
어머니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월령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은매."
"예, 아가씨."
"이 약은 누가 지어 주었느냐."
은매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
"둘째 부인께서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었다?"
"예?"
"네가 직접 받은 것이 아니냐."
은매는 입술을 달싹였다.
월령은 웃었다.
열여섯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손을 펴 보아라."
"아가씨."
"펴."
은매는 머뭇거리다 두 손을 내밀었다.
손톱 밑에 검푸른 가루가 끼어 있었다. 약재를 손질하면 흔히 남는 흔적처럼 보였다. 그러나 월령은 그것이 적련초의 뿌리 가루임을 알았다.
붉은 담 안에서 너무 늦게 배운 것들이, 지금은 그녀를 늦지 않게 했다.
"청아."
"예."
"문을 닫아."
청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손은 빨랐다. 문이 닫히자 약방 안의 김과 향이 한층 짙어졌다. 바깥의 살구꽃 향은 얇은 종이 한 장 너머로 밀려났다.
은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살고 싶으냐."
은매의 말이 뚝 끊겼다.
월령은 약로 곁에 앉아 조용히 불을 낮췄다. 타오르던 불길이 작아지자 사기그릇 안의 탕약도 깊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네가 이 약에 무엇을 넣었는지 안다."
"저는..."
"거짓말은 한 번만 허락하마."
월령이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부터는 네 혀를 믿지 않겠다."
은매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약방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숙여졌다.
"아가씨, 살려 주십시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누가 시켰느냐."
은매는 대답하지 못했다.
월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은 공포가 목을 조일 때 스스로 가장 약한 곳을 드러낸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 늦게 배웠다. 붉은 담 안의 여자들은 웃는 얼굴로 남의 숨통을 잡았고, 월령은 황후의 관을 쓰고도 늘 한 박자 늦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네 동생이 남쪽 별원에 있지."
은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병든 어미와 어린 동생. 네가 매달 은자 세 냥을 보내고 있고."
"아가씨께서 그걸 어떻게..."
"네가 입을 다물면, 오늘 밤 너는 우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은매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네 동생은 사라질 것이고, 네 어미는 약값이 끊겨 죽겠지. 너에게 이 일을 시킨 사람은 네 입을 살려 둘 만큼 어리석지 않다."
"아가씨..."
"하지만 네가 내게 진실을 말하면."
월령은 손끝으로 약그릇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뜨거운 사기그릇의 열이 손끝에 닿았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너를 살려 둘 수 있다."
은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월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얼굴을 믿었다가,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불쌍함은 죄를 지우지 않는다.
다만 쓸모를 판단할 이유가 될 뿐이다.
"저는 정말 이름을 모릅니다."
은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어떤 여인이 저를 불렀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검은 장막을 쓰고 있었고, 목소리도 낮게 깔았습니다. 이 약재를 넣으면 은자 열 냥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거절하면 제 동생을 팔아 버리겠다고..."
"그 여인이 남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은매가 품속에서 작은 비단 조각을 꺼냈다.
"약재가 싸여 있던 천입니다. 버리려 했는데, 무늬가 고와서..."
청아가 그것을 받아 월령에게 건넸다.
흰 비단 조각에는 연꽃 무늬가 은실로 수놓여 있었다. 아주 작고 섬세한 자수였다. 햇빛 아래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손바닥 안에서 기울어질 때마다 물 위에 뜬 꽃처럼 은빛이 살아났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고급 비단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월령은 알고 있었다.
심서윤은 늘 그런 연꽃 무늬를 좋아했다.
가련하고 깨끗해 보인다며.
월령은 비단 조각을 손안에 접었다.
예전의 그녀는 이 작은 무늬 하나도 보지 못했다. 서윤이 흘린 눈물만 보았고, 둘째 부인의 다정한 걱정만 들었다. 어머니의 기침 뒤에서 누가 웃음을 삼키는지 보지 못했다.
이제는 보인다.
너무 선명하게.
"이 약은 그대로 올리지 않는다."
은매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아가씨?"
"어머니께서 드실 약은 내가 따로 준비한다. 다만 모두가 이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월령은 약로 위의 사기그릇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서원당에는 둘째 부인과 심서윤이 올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탕약을 권하겠지.
그때 그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누가 어머니의 숨이 꺼지기를 기다리는지.
누가 약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지.
"은매."
"예, 예. 아가씨."
"네가 살고 싶다면 오늘 본 것을 잊어라."
월령은 손안의 연꽃 비단을 소매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누가 이 약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똑똑히 보아라."
은매가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약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느린 걸음.
마치 병문안을 온 귀한 손님처럼 조심스러운, 그러나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였다. 문밖의 햇빛이 발치에서 한 번 흐려졌다. 누군가 문 앞에 섰다.
청아가 숨을 멈췄다.
월령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
심서윤.
봄이 문을 연 첫날,
첫 번째 손님이 약방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태후전의 붉은 봉서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봉서의 가장자리는 아직 반듯했고, 압인은 선명했다. 마치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는 문서가 아니라, 흔한 혼례 절차를 적은 예부의 공문인 것처럼 단정했다.월령은 그 단정함이 싫었다.전생에서 그녀의 폐위 조서도 그랬다. 먹은 번지지 않았고, 글씨는 흠잡을 데 없이 바른 서체였다. 심가의 이름을 역적의 명단에 올린 문서도, 그녀의 처형일을 정한 문서도 모두 그랬다.사람은 피를 흘리는데 종이는 깨끗했다."북경군 호부라니요."청아가 숨을 죽인 채 중얼거렸다.그 말에 시종 하나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물건이었다. 북경군 호부는 섭정왕부의 심장이었다. 호부가 있어야 북경군이 움직였고, 북경군이 있어야 황실은 위지헌을 함부로 치지 못했다.태후는 혼인을 거절하지 않았다.대신 혼인의 이름으로 칼을 요구했다.위지헌은 봉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시선이 문장 사이를 느리게 훑었다.월령은 그 얼굴에서 무엇을 읽으려 했다.분노.멸시.망설임.그러나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순간에 가장 비어 보였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은 곳에 잠가 두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왕야."월령이 낮게 불렀다.위지헌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내놓으실 생각입니까."그제야 그의 시선이 올라왔다."내가 뭘 내놓는지 알고 묻습니까.""압니다.""모릅니다."짧은 부정이었다.월령의 입술이 다물렸다.위지헌은 봉서를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호부는 쇳조각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손에 있는 동안, 황실은 내게 칼을 겨누기 전에 세 번 계산합니다. 예부에 들어가는 순간 계산은 한 번으로 줄어듭니다.""그 한 번은요.""나를 죽일 수 있는가."청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월령은 고개를 들었다.그가 너무 평온해서, 그 말이 오히려 몸 안쪽을 베었다."그럼 안 됩니다."위지헌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전각 안의 침묵은 오래 갔다.위지헌이 무릎을 꿇은 채로 올린 혼서 한 장이, 옥좌 아래의 공기를 전부 바꾸어 놓았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붉은 기둥 아래 늘어선 대신들의 소매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백단향은 숨 막힐 만큼 진했다.섭정왕이 무릎을 꿇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릎은 항복이 아니었다. 칼을 뽑지 않은 선전포고였다.심월령은 그 곁에 서 있었다.자신의 이름이 적힌 혼서가 황실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하얀 종이 위의 먹빛 세 글자는 낯설 만큼 또렷했다.심월령.전생에서는 폐후가 된 뒤에야 제 이름을 빼앗겼다. 사람들은 그녀를 폐후라 불렀고, 역모의 딸이라 불렀고, 죽어 마땅한 여인이라 불렀다. 이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판결문에 찍힌 흔적일 뿐이었다.그런데 지금, 누군가 그 이름을 황궁의 입구에서 빼앗기 전에 먼저 감싸 쥐었다.아니.감싸 쥔 것만은 아니었다.위지헌은 그 이름을 들고 황실의 목구멍 앞에 세웠다.태후 독고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섭정왕."그 한마디에 대신들의 허리가 더 낮아졌다.태후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웃음보다 더 서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분노할 때조차 품위를 잃지 않았다. 품위란 그녀에게 예절이 아니라 무기였다."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일이다. 더구나 황실의 일이라면 더욱 절차가 무겁지. 오늘 이 자리에서 급히 논할 만한 사안은 아니네."위지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래서 오늘 올렸습니다."짧은 대답이었다.태후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무슨 뜻인가.""늦으면 절차가 아니라 포획이 될 테니까요."전각 안의 공기가 한 번 더 차가워졌다.어떤 대신이 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위명서는 옥좌 아래 한쪽에 서 있었다. 아직 황제가 아니었으나, 황실의 피를 이은 황자답게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손가락 하나가 느
후궁 예비 명단.그 말이 동쪽 별채에 내려앉은 순간, 촛불이 한 번 낮게 흔들렸다.월령은 숨을 멈췄다.위명서는 하루를 내주었다.그리고 바로 그 하루의 값으로 그녀를 요구했다.곁에서 직접 보호하겠다.궁중으로 불러들이겠다.후궁 예비 명단에 올리는 일을 의논하라.말은 부드럽고 절차는 공손했다. 그러나 뜻은 명백했다. 섭정왕부에 있는 여자를 다시 황궁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 월령을 심가의 딸로도, 섭정왕의 동맹으로도 두지 않겠다는 것.황제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것.전생의 목줄을 다시 꺼낸 것이다.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젖은 소매에서 천천히 떨어졌다.그 움직임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방 안의 공기가 식었다.총관은 문밖에서 더는 읽지 못했다.월령은 위지헌을 보았다.그의 얼굴은 평온했다.너무 평온했다.그 평온함 아래서 무언가가 검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분노라고 부르기에는 차가웠고, 질투라고 부르기에는 깊었다. 오래 잠겨 있던 문이 안쪽에서 열리는 소리 같았다."조서를 들여라."위지헌이 말했다.총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감히 월령을 보지 못했다. 두 손으로 조서를 받쳐 올렸다.위지헌은 조서를 받아 들었다.읽지 않았다.찢지도 않았다.그는 촛불 가까이에 조서를 가져갔다. 붉은 인장이 빛을 받았다. 삼황자의 사인과 태후전의 부인이 함께 찍혀 있었다. 아직 황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명으로 만들 준비는 끝나 있었다.위지헌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웃음은 아니었다."겁이 많군."그가 낮게 말했다.총관의 어깨가 굳었다.월령은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았다.위명서.태후.그리고 자신을 빼앗기 전에 먼저 이름으로 묶으려는 모든 사람들."왕야."월령이 입을 열었다.위지헌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아침에 입궁한다.""상처가 열렸습니다.""닫을 시간은 있다.""저 때문이라면."그제야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왔다.차가웠다.그런데 그 차가움은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깊게 붙드는
위지헌은 새벽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다.월령은 그의 손목을 놓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잠든 사람의 손은 의외로 정직했다. 낮 동안의 명령도, 냉정한 계산도, 사람을 베듯 짧은 말도 없었다. 다만 손가락 끝이 때때로 그녀의 맥을 더듬었다.살아 있는지 확인하듯.월령은 그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비 맞게 두지 않겠다.그 말은 밤새 방 안에 남아 있었다.처형장의 비.전생의 마지막 품.그리고 지금, 동쪽 별채의 낮은 침상 위에서 상처를 안고 잠든 남자.그는 현생의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는 비 속에서 죽어 가던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늦었고, 놓쳤고, 그래서 이번에는 늦지 않으려 했다.월령은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이 사람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는 그녀가 칼을 쥐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 웃어도 되고, 단것을 좋아해도 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아란과 마당을 뛰어다녀도 되는 삶.그런데 그런 삶을 돌려주려는 방식이 피와 감시와 계책뿐이다.그래서 더 슬펐다.청아가 조용히 들어와 찬 찜질 물을 갈았다. 그녀는 침상 위의 위지헌과 그 곁의 월령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가가 붉었다."아가씨, 장부는 숨겨 두었습니다."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사본은?""말씀하신 대로 한 장만 옮겨 적었습니다."청아가 품에서 얇은 종이를 꺼냈다.독고가 서북 상단.흑수곡 보급 지연.심가 호송로 차용.그리고 작은 인장 하나.병부 부인.병부에서 정식으로 찍은 인장이 아니었다. 부인의 친정 쪽에서 쓰는 사인. 장부를 직접 움직이는 손은 독고가였지만, 병부 안쪽에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있었다.월령은 그 종이를 접었다.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독고가를 찌르기 전에, 심각의 출정 명부터 늦춰야 했다. 흑수곡에 병력이 움직이는 순간, 증거보다 부고가 먼저 도착할 것이다.월령은 위지헌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그를 깨울 수 없었다.그가 깨어 있다면
문밖의 목소리는 낮았다."안에 계신 분들, 태후마마의 명입니다. 문을 여십시오."월령은 위지헌의 품 안에서 숨을 죽였다.품 안의 장부는 얇았다. 그러나 그 얇은 종이 몇 장이 지금 그녀의 목숨보다 뜨거웠다. 독고가 서북 상단. 흑수곡 보급. 심가 호송로 차용. 전생에서 오라비가 죽었던 길이, 누군가의 장부에는 이익과 손실로 적혀 있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월령은 문을 열고 나가 모든 이름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그러나 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허리 뒤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었다.말보다 정확했다.월령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면 그의 턱선과 입술이 너무 가까웠다. 방금 전까지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가까웠던 거리였다. 그런데 거짓이어야 했던 그 열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다.위지헌이 낮게 말했다."문을 열어라."밖이 잠시 조용해졌다.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이다.문이 열렸다.등불이 다시 밀려 들어왔다. 금위위 병사 넷, 태후전 상궁 하나, 그리고 검은 장부함을 든 내관 하나가 서 있었다. 상궁은 고개를 숙였지만, 눈은 숙이지 않았다. 늙은 여인의 눈빛은 침상과 떨어진 비녀, 흐트러진 옷깃을 빠르게 훑었다.그 눈빛이 월령의 품 앞에서 멈췄다.위지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월령은 그의 등 뒤로 가려졌다.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가 그녀의 자리였던 것처럼."왕야."상궁이 예를 올렸다."태후마마께서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 외서고를 봉하라 하셨습니다.""봉해라."위지헌의 대답은 짧았다.상궁의 눈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 전에 안에 계신 분들을 확인하라 하셨습니다.""확인했겠지.""물건도 확인하라 하셨습니다."월령의 손이 장부 위에서 굳었다.상궁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그 순간 위지헌의 손이 뒤로 와 월령의 손등을 덮었다. 남들이 보지 못할 만큼 낮게, 옷자락 속에서. 그는 장부를 빼앗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눌렀다.그 손의 열 때문에
궁의 밤은 왕부의 밤과 달랐다.왕부의 밤은 차가웠다. 모든 그림자가 정해진 자리에 있었고, 발소리조차 명을 받은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궁의 밤은 달랐다. 낮 동안 웃음과 향과 비단으로 덮어 둔 욕망들이 밤이 되면 벽 틈으로 배어 나왔다.향 냄새.젖은 돌 냄새.멀리서 들리는 환관의 낮은 기침.그리고 아무도 없는 듯 보이는 회랑마다 숨어 있는 눈.월령은 검은 장막 아래에서 숨을 낮췄다.위지헌은 한 걸음 앞에 있었다. 검은 옷에 궁인용 외투를 걸친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그곳의 주인처럼 보였다. 심지어 남의 궁에 몰래 들어온 밤에도.그 사실이 불쾌해야 했다.그런데 월령은 그의 오른손에 감긴 천부터 보았다.자신이 묶어 준 것이었다.밤바람에 천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는 손을 소매 안에 숨기지 않았다. 보이게 둔 것은 아니겠지만, 숨기지도 않았다.그 작은 변화가 월령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전날 밤 이후, 둘은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짧은 입맞춤.멈춘 숨.놓지 않았던 손목.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선명했다."외서고는 저쪽입니다."월령이 낮게 말했다.위지헌은 대답 대신 시선으로 길을 재었다.그들은 회랑의 그늘을 따라 움직였다. 태후전 외서고는 궁의 북쪽에 있었다. 겉으로는 오래된 서책과 제례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었지만, 실제로는 태후 친정과 궁 안 사람들의 장부가 오가는 곳이었다.독고가 서북 상단.흑수곡.보급 지연.심가.피 묻은 군보 조각에 남은 글자들이 월령의 머릿속에서 하나씩 맞물렸다.외서고 문 앞에는 궁녀 둘이 서 있었다.위지헌은 멈추지 않았다.월령은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한 박자 늦게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피하지 않는다. 지나간다. 피하는 사람이 더 눈에 띄기 때문이다.궁녀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위지헌의 손이 월령의 허리 뒤 장막 자락을 잡아당겼다.강하지 않았다.그러나 월령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