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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Author: moominkiller

1. 흰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3 23:15:09

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도 피 냄새만은 씻어 내리지 못했다.

젖은 흙이 피를 먹어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졌다.

형장을 둘러싼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멀리 황궁의 붉은 담이 비안개에 잠겨,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

심월령은 그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무릎이 진흙에 반쯤 잠겨 있었다. 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두르던 황후의 무릎이었다.

봉황을 수놓은 대례복은 오래전에 벗겨졌다. 금관도, 비녀도 없었다.

남은 것은 죄인의 흰 홑옷 한 벌. 빗물에 무겁게 달라붙은 머리카락. 목에 걸린 나무 죄패 하나뿐이었다.

죄패에는 먹으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모 폐후.

먹은 비에 번졌으나, 그 네 글자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누군가 온 나라의 눈에 그 이름을 새겨 넣으려 한 것처럼.

역모라니.

월령은 웃음이 날 뻔했다.

아버지 심도윤은 평생 북녘 변경의 북문을 지킨 장군이었다. 흑령산맥 너머 삭원의 기마를 막느라 세 번의 겨울을 변경에서 보냈고, 그 추위에 손가락 둘을 잃었다.

오라비 심각은 위명서가 즉위하던 날, 반란군의 화살을 등으로 막은 사람이었다. 어린 아란은 아직 비녀도 제대로 꽂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런 심가가 역모를 꾸몄다 했다. 그런 심가의 딸이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 했다.

비가 돌계단을 두드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거짓을 세어 보는 소리 같았다.

"폐후 심씨."

높은 단 위에서 음성이 떨어졌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황제 위명서가 그곳에 서 있었다. 금빛 용포에는 비 한 방울 닿지 않았다.

내관이 받쳐 든 검은 우산 아래, 그는 단정했다. 오늘 처형되는 사람이 한때 제 곁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인임을, 잊은 사람처럼.

저 얼굴을 사랑했었다.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아득했다.

그가 처음 손을 내밀던 날, 대연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살구꽃이 바람을 타고 떨어지던 오후였다.

꽃그늘 아래, 그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그대가 곁에 있다면, 이 황궁도 외롭지 않겠소.'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녀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때의 살구꽃은 달았다. 눈앞을 희게 흐리고, 마음의 문턱을 소리 없이 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걱정도, 오라비의 긴 침묵도, 사람들이 낮게 삼키던 말들도 외면했다. 다정한 목소리 하나면 세상의 그늘을 다 가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된 뒤에야 알았다. 붉은 담 안의 등불은 밤마다 고왔으나, 그 불빛 아래에서 누가 소리 없이 지워지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위명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정하게 들리도록 태어난 목소리였다.

월령은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혀끝에 피와 빗물이 함께 고였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군중이 술렁였다. 위명서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오라비도, 아란도, 심가의 누구도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하라."

"폐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빗소리가 커졌다. 어쩌면 군중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위명서는 한참을 월령을 내려다보았다. 곤원전에서 밤늦도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는, 그 눈 안에 없었다.

거기에는 황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군주만 있었다.

"그대는 끝까지 짐을 실망시키는군."

월령은 그제야 웃었다.

목 안쪽이 찢어져 피 섞인 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입가가 조금 올라가는 것만으로, 형장의 사람들이 더 깊이 얼어붙었다.

"그대가 가만히 있었다면, 심가의 어린 목숨 하나쯤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란.

그 이름은 혀끝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대신 별궁의 연기가 먼저 떠올랐다. 불타는 처마, 재 냄새, 뒤돌아보지 못하고 끌려가던 제 팔. 불길 쪽으로 달려가던 작은 등 하나.

내관들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위명서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부터 월령은 밤마다 조금씩 비어 갔다.

오늘 형장에 오른 것은, 그 빈 껍데기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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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5. 정오의 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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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 종이

    조서는 얇았다.얇은 종이가 사람을 가장 깊게 베는 날이 있다.심가 대문에 걸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하인들은 감히 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부엌의 솥뚜껑은 평소보다 조용히 닫혔다. 종이 한 장이 집 안의 숨을 바꾸었다. 누가 지나가도 발끝이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웃다가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월령은 조서를 다시 펼쳤다.궁중 내지 유출.호부 군량 장부 조작.심가 여식.그 말은 일부러 넓었다.월령일 수도 있고, 서윤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넓은 말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 등불

    자녕궁에 가는 날, 경성의 거리에는 낮부터 등틀이 세워지고 있었다.상원절은 이미 지났지만, 대연의 봄에는 작은 등놀이가 자주 열렸다. 남쪽 수해지에서 올라온 장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종이등을 만들었고, 궁은 그것을 사들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양을 갖췄다. 거리의 아이들은 등불을 좋아했고, 어른들은 쌀값을 생각하며 그 빛을 보았다.빛은 늘 아름다웠다.그러나 빛을 밝히는 기름값은 누군가의 장부에 적혔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말이 없었다.오늘의 서윤은 옅은 연두빛 치마를 입었다. 한씨가 골라 준 옷이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9. 이름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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