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도 피 냄새만은 씻어 내리지 못했다.
젖은 흙이 피를 먹어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졌다.
형장을 둘러싼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멀리 황궁의 붉은 담이 비안개에 잠겨,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
심월령은 그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무릎이 진흙에 반쯤 잠겨 있었다. 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두르던 황후의 무릎이었다.
봉황을 수놓은 대례복은 오래전에 벗겨졌다. 금관도, 비녀도 없었다.
남은 것은 죄인의 흰 홑옷 한 벌. 빗물에 무겁게 달라붙은 머리카락. 목에 걸린 나무 죄패 하나뿐이었다.
죄패에는 먹으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모 폐후.
먹은 비에 번졌으나, 그 네 글자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누군가 온 나라의 눈에 그 이름을 새겨 넣으려 한 것처럼.
역모라니.
월령은 웃음이 날 뻔했다.
아버지 심도윤은 평생 북녘 변경의 북문을 지킨 장군이었다. 흑령산맥 너머 삭원의 기마를 막느라 세 번의 겨울을 변경에서 보냈고, 그 추위에 손가락 둘을 잃었다.
오라비 심각은 위명서가 즉위하던 날, 반란군의 화살을 등으로 막은 사람이었다. 어린 아란은 아직 비녀도 제대로 꽂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런 심가가 역모를 꾸몄다 했다. 그런 심가의 딸이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 했다.
비가 돌계단을 두드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거짓을 세어 보는 소리 같았다.
"폐후 심씨."
높은 단 위에서 음성이 떨어졌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황제 위명서가 그곳에 서 있었다. 금빛 용포에는 비 한 방울 닿지 않았다.
내관이 받쳐 든 검은 우산 아래, 그는 단정했다. 오늘 처형되는 사람이 한때 제 곁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인임을, 잊은 사람처럼.
저 얼굴을 사랑했었다.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아득했다.
그가 처음 손을 내밀던 날, 대연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살구꽃이 바람을 타고 떨어지던 오후였다.
꽃그늘 아래, 그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그대가 곁에 있다면, 이 황궁도 외롭지 않겠소.'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녀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때의 살구꽃은 달았다. 눈앞을 희게 흐리고, 마음의 문턱을 소리 없이 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걱정도, 오라비의 긴 침묵도, 사람들이 낮게 삼키던 말들도 외면했다. 다정한 목소리 하나면 세상의 그늘을 다 가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된 뒤에야 알았다. 붉은 담 안의 등불은 밤마다 고왔으나, 그 불빛 아래에서 누가 소리 없이 지워지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위명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정하게 들리도록 태어난 목소리였다.
월령은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혀끝에 피와 빗물이 함께 고였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군중이 술렁였다. 위명서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오라비도, 아란도, 심가의 누구도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하라."
"폐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빗소리가 커졌다. 어쩌면 군중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위명서는 한참을 월령을 내려다보았다. 곤원전에서 밤늦도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는, 그 눈 안에 없었다.
거기에는 황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군주만 있었다.
"그대는 끝까지 짐을 실망시키는군."
월령은 그제야 웃었다.
목 안쪽이 찢어져 피 섞인 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입가가 조금 올라가는 것만으로, 형장의 사람들이 더 깊이 얼어붙었다.
"그대가 가만히 있었다면, 심가의 어린 목숨 하나쯤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란.
그 이름은 혀끝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대신 별궁의 연기가 먼저 떠올랐다. 불타는 처마, 재 냄새, 뒤돌아보지 못하고 끌려가던 제 팔. 불길 쪽으로 달려가던 작은 등 하나.
내관들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위명서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부터 월령은 밤마다 조금씩 비어 갔다.
오늘 형장에 오른 것은, 그 빈 껍데기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출정의 아침, 도성의 북문 앞에 북경군이 도열했다.순검패를 잃은 섭정왕이 도성을 비운다는 말에, 대신들의 얼굴이 갈렸다. 흑령을 막을 사람이 그뿐이라 보내야 한다는 쪽과, 순검권도 없는 자가 군을 끌고 나가면 도성이 빈다는 쪽이 나뉘었다.위지헌은 그 갈린 말들 한가운데를 지나, 말에 올랐다.검은 갑주 위로 아침빛이 서늘하게 미끄러졌다. 비어 있던 옥대 자리에는, 오늘 대신 흑옥 군패가 걸렸다. 순검패는 잃었으나, 군패는 그의 것이었다.기윤이 곁에 섰다."도성은 어찌합니까.""강무진을 남긴다."위지헌이 말했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심가를 지켜라. 앞에는 서지 마라. 순검패 없는 왕부 군사가 심가 앞에 서면, 그것이 새 흠이 된다. 그림자로만 있어라.""봄의 부름은요."위지헌의 눈이 잠시 남쪽 궁성 쪽으로 향했다."그 문은 내 칼이 못 연다. 그 안에서는, 그 사람이 혼자 서야 한다."그는 그 말을 하며 손끝을 한 번 굽혔다.혼자 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문밖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문이 닫혀도 그녀가 나올 문을 지키는 것뿐이라는 것.*북문 성루 아래, 배웅하는 사람들 틈에 월령이 있었다.정비가 될 사람이 출정하는 약혼자를 공공연히 배웅하는 것은 아직 일렀다. 그래서 그녀는 심가의 딸로, 아버지의 군영에 겨울 군량을 보태는 사람의 자리에 섰다.북문군의 수레에는 심가가 마련한 쌀과 소금이 실려 있었다. 저잣거리 값 그대로 판 그 소금의 남은 몫이었다.위지헌의 말이 성문을 지나기 전, 그의 시선이 그 수레 곁의 푸른 옷자락에 닿았다.두 사람은 서로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다만 위지헌이 말 위에서 아주 짧게 고개를 숙였다. 예를 갖추는 것도, 명을 내리는 것도 아닌 움직임이었다.봄 안에 있겠다는 약속을, 그는 그 한 번의 끄덕임에 다시 담았다.월령도 고개를 숙였다.늦지 말라는 말을, 그녀는 그 한 번의 숙임에 다시 실었다.
계례는 가을 아침에 조용히 치러졌다.서원당 마당에 자리가 깔리고, 유씨가 큰손을 맡았다. 땋아 내렸던 월령의 머리가 처음으로 올려져 쪽을 이루었다. 유씨의 손이 어머니에게 받은 백옥 비녀를 그 위에 꽂았다.빗살이 마지막으로 지날 때, 유씨의 손이 잠시 떨렸다."이제 너는 여인이다."유씨가 낮게 말했다."어미가 지켜 주던 자리에서, 네가 서는 자리로 옮겨 간다."월령은 고개를 숙였다.계례가 끝난 뒤, 그녀는 위지헌이 두고 간 흰 비단을 폈다. 살구나무 비녀를, 어머니가 올린 백옥 비녀 곁에 나란히 두었다.봄에 먼저 피는 나무라 했다. 가을에 올린 성년의 머리 곁에, 봄 하나가 놓였다.*출정 전날 밤, 위지헌이 심가에 왔다.이번에는 대문 안까지 들지 않았다. 서원당으로 난 협문 밖, 달빛이 닿는 담장 아래에 섰다. 내일 북으로 떠나는 사람이, 계례를 마친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러 온 걸음이었다.월령이 협문을 열고 나왔다.올린 머리 위에 백옥 비녀가 맑은 빛으로 남아 있었다. 위지헌의 시선이 그 비녀에 잠시 머물렀다."여인이 되었구나.""예.""곁에서 보지 못했다."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아쉬움이 옅게 배어 있었다.월령은 소매 안에서 살구나무 비녀를 꺼냈다. 계례에 함께 두라던 그 비녀였다."곁에 계셨습니다. 이것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위지헌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담장 아래 달빛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거리를 하얗게 비췄다.닿기 전의 거리가, 오늘은 유난히 짧았다.계례를 마친 여인과, 내일 전장으로 가는 남자였다. 둘 사이를 막던 많은 것들이 오늘 밤에는 얇아져 있었다.위지헌의 손이 올라왔다. 월령의 뺨 옆, 비녀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에 손끝이 닿을 듯 다가왔다.그러나 그는 그 손을, 머리카락 대신 그녀의 손 위에 내렸다."돌아온다."낮은 목소리였다."반드시 돌아온다. 봄이 오기 전에."월령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전생에도 그는 늦게 왔다. 그녀가 이미 다 잃은 뒤에야, 빗속의
계례를 사흘 앞둔 새벽, 북에서 급보가 왔다.말 한 필이 도성의 북문을 넘어 곧장 왕부로 달렸다. 말의 다리에는 마른 흙이 두껍게 엉겨 있었다. 진북 관문 너머, 삭원과 흑령산맥 쪽에서 온 흙이었다.위지헌은 급보를 새벽빛에 펼쳤다.흑령의 부족들이 겨울을 앞두고 국경의 봉수대 둘을 태웠다. 진북대장군 심도윤이 북문군으로 막고 있으나, 병력이 얇았다. 군량은 지난 회암의 소란으로 이미 축이 났다.위지헌의 눈이 급보의 마지막 줄에서 멎었다.'섭정왕의 친정을 청함.'기윤이 곁에서 낮게 말했다."조정이 전하를 부를 것입니다. 북경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전하뿐입니다."위지헌은 급보를 접었다.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는 첫 줄에서 이미 알았다. 다만 지금은 때가 나빴다. 순검패를 잃은 몸으로 도성을 비우면, 그 빈자리로 자녕궁의 손이 들어온다. 봄에 있을 내명부의 부름 앞에, 월령은 혼자 남는다.그리고 계례가 사흘 뒤였다.*같은 새벽, 심가에도 북문에서 온 전갈이 닿았다.진북대장군의 짧은 서찰이었다. 딸의 계례를 축하하는 말은 한 줄뿐이었고, 나머지는 군량과 병력과 겨울에 관한 것이었다.유씨는 그 서찰을 읽고 오래 창밖을 보았다."네 아버지가, 이번 겨울은 길겠다 하시는구나."월령은 어머니 곁에 앉았다.아버지의 글씨는 여전히 곧고 좁았다. 급한 군보에서도 마지막 획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이번 서찰의 끝 획 하나가, 평소보다 조금 짧았다. 손가락 둘을 잃은 손이 오래 쥐고 있었던 붓의 흔적이었다.월령은 그 짧은 획을 손끝으로 짚었다.전생에도 이 겨울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북에서 겨울을 났고, 봄이 오기 전에 도성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멀리 있는 사이, 심가의 담장 안으로 손들이 들어왔다.이번에는 그 손들을, 아버지 없이 그녀가 막아야 했다."어머니.""말해라.""왕야께서 북으로 가실 겁니다."유씨가 딸을 보았다."어찌 아느냐.""흑령이 봉수대를 태웠다면, 북경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왕야뿐입니다. 조
납채 봉서가 든 뒤, 심가에서는 먼저 계례를 의논했다.혼례에 앞서 여자는 성년의 문턱을 넘어야 했다. 땋아 내린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가, 여아를 혼인할 수 있는 여인으로 세우는 의례였다. 가례는 종친부가 살피지만, 계례는 가문이 주관하는 집안일이었다.유씨는 병색이 옅어진 손으로, 오래 간직한 비녀함을 열었다.함 안에는 유씨가 시집올 때 어머니에게 받은 백옥 비녀가 있었다. 세월에 빛이 조금 죽었으나, 옥의 결은 그대로였다."이걸로 하자."유씨가 말했다."금비녀도, 산호 떨잠도 있다. 그러나 네 계례에는 어미가 어미에게 받은 이것을 올리고 싶구나."월령은 그 비녀를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지위를 보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미의 손을 타고 딸의 손으로 오는 물건이었다. 전생에는 이 비녀를 올려 보지 못하고, 남이 정한 봉관부터 이마에 얹었다."어머니께서 올려 주세요.""내가?""계례의 큰손은 집안의 어른이 맡는다 들었습니다. 제 어른은 어머니십니다."유씨의 눈가가 붉어졌다.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딸의 땋은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 보았다. 오래 빗어 준 머리였다.*같은 날 저녁, 위지헌이 심가에 들었다.약혼이 어전의 봉서로 열린 뒤, 그가 심가의 문으로 정식으로 드는 첫걸음이었다. 순검패를 잃은 몸이라 수행은 단출했다. 기윤과 윤백만 대문 밖에 두고, 그는 혼자 서원당으로 들었다.유씨 앞에서, 위지헌은 몸을 낮추어 예를 갖췄다."심 부인. 늦게 왔소.""왕야께서 이 집의 문을 낮추어 드시니, 도리어 이 집이 높아지는 듯합니다.""낮춘 것이 아니오. 이 집이 본디 높소."유씨가 낮게 웃었다."딸을 데려가려는 사람의 말치고는, 값을 후하게 치르시는군요.""값이 아니라 사실이오."위지헌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 안에, 오래 눌러 둔 무엇이 있었다.월령은 문가에 서서 그 대화를 들었다.어머니 앞에서 그는 늘 말을 낮추었다. 황제 앞에서도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던 사람이, 유씨 앞에서만은 먼저 예
자녕궁의 봄은 문상궁 없이 열렸다.봉함이 그어진 뒤로 문상궁은 방 하나에 머물렀고, 그 자리를 설련이 조금씩 대신했다. 찻잔을 살피던 손이 이제 향안의 기록까지 살폈다.숙비는 그 손을 지켜보았다."설련아. 네 손이 요즘 부지런하구나.""고모님께 누가 될까 하여, 배우는 중입니다.""누가 되는 것이 두려우냐."설련의 손끝이 잠시 멎었다.숙비는 그 멎음을 보았다. 이 아이는 늘 누가 될까 두려워하며 산다. 두려움이 큰 아이는 다루기 쉽다. 두려움을 준 손만 바라보기 때문이다."두려워 마라. 봄에 네게 맡길 일이 있다.""제게요?""황후께서 정비가 될 아이의 부덕을 살피시겠다 하셨다. 심가의 딸을 내명부로 부르는 자리다. 그 자리에 네가 함께 든다."설련의 눈이 흔들렸다."제가 무엇을…""보기만 하면 된다. 그 아이가 어떤 얼굴로 서는지, 어디를 먼저 보는지, 무엇에 손이 떨리는지. 너는 겁이 많으니, 겁 많은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겁이 잘 보인다."숙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설련은 고개를 숙였다."예, 고모님."대답은 순했다. 그러나 대답을 하면서, 설련의 시선은 향안 위에 놓인 낡은 명패 하나로 갔다. 지난 국청에서 돌아온 물건들 틈에 섞여 온, 작은 새가 새겨진 나무패였다.죽은 군졸의 것이었다. 가족을 찾아 돌려보내야 할 패가, 아직 자녕궁 한쪽에 남아 있었다.설련의 눈이 그 새에 오래 머물렀다.정비라는 두 글자보다, 그 작은 새가 설련에게는 더 오래 남았다.*봄의 부름이 있으리라는 말은, 그날 저녁 왕부에도 닿았다.위지헌은 그 소식을 듣고 오래 말이 없었다.내명부의 문은 섭정왕의 칼도 열지 못했다. 황후가 부르면, 정비가 될 사람은 혼자 그 문 안으로 들어야 했다. 그가 궁문 밖에 서던 날들이 다시 올 참이었다."기윤.""예, 전하.""황후전에 내 편이 있느냐."기윤이 잠시 말을 골랐다."황후마마께서는 지난 국청에서 심 소저의 곧음을 보셨습니다. 마마의 마음은 아직 어느 쪽도 아니지만, 숙비 쪽은 분
삼황자부의 밤은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위명서는 남문 게시문의 필사본을 태우지 않고 두었다. 그 옆에는 예부에서 흘러나온 납채 봉서의 사본이 있었다. 심월령의 이름과 위지헌의 이름이 한 줄에 적힌 종이였다.그는 그 두 이름을 오래 보았다.후원에서, 별궁에서, 그는 그 아이를 다듬으면 쓸모 있겠다고 여겼다. 곁에 두면 황좌의 문이 넓어질 것이라고. 지금 그 아이의 이름은 다른 이름 곁에 적혀, 어보의 빛을 받고 있었다.다듬어질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제 발로, 다른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가 섰다.위명서의 손끝이 봉서 사본 위에서 멎었다.그가 지금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이름 붙이지 못했다.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오기인지, 이용하려다 놓친 패에 대한 분함인지. 세 가지가 같은 온도로 섞여, 어느 하나로 갈라지지 않았다.*주란이 새 차를 들고 들어왔을 때, 그는 봉서 사본을 덮지 않았다.주란의 시선이 그 종이 위의 두 이름에 닿았다.심월령.그녀는 그 이름을 알았다. 저하가 태우지 않고 남겨 둔 게시문도, 밤마다 오래 보는 종이도, 모두 그 이름과 닿아 있었다.주란은 차를 따랐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봉서가 심가에 들었다고 들었습니다.""들었느냐.""저하께서 태우지 않으신 종이가, 요즘은 늘 그 이름을 향하고 있어서요."위명서가 고개를 들었다.주란은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제가 저하 곁에 있는 것은, 저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부르지 않으셔도 저는 옵니다. 다만…"그녀의 목소리 끝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부르지 않는 이름 곁에서, 부르고 싶어 견디는 이름을 밤마다 보는 건, 조금 아픕니다."위명서는 답하지 않았다.답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주란도 이제 알았다. 그녀는 빈 잔을 거두려 손을 뻗었다.그때 위명서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주란의 숨이 멎었다. 저하가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처음이었다."주란."그가 그녀의 이름
조서는 얇았다.얇은 종이가 사람을 가장 깊게 베는 날이 있다.심가 대문에 걸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하인들은 감히 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부엌의 솥뚜껑은 평소보다 조용히 닫혔다. 종이 한 장이 집 안의 숨을 바꾸었다. 누가 지나가도 발끝이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웃다가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월령은 조서를 다시 펼쳤다.궁중 내지 유출.호부 군량 장부 조작.심가 여식.그 말은 일부러 넓었다.월령일 수도 있고, 서윤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넓은 말은
자녕궁에 가는 날, 경성의 거리에는 낮부터 등틀이 세워지고 있었다.상원절은 이미 지났지만, 대연의 봄에는 작은 등놀이가 자주 열렸다. 남쪽 수해지에서 올라온 장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종이등을 만들었고, 궁은 그것을 사들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양을 갖췄다. 거리의 아이들은 등불을 좋아했고, 어른들은 쌀값을 생각하며 그 빛을 보았다.빛은 늘 아름다웠다.그러나 빛을 밝히는 기름값은 누군가의 장부에 적혔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말이 없었다.오늘의 서윤은 옅은 연두빛 치마를 입었다. 한씨가 골라 준 옷이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