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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금리승소
이백헌은 곧장 앞으로 다가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네 어머니께서 남기신 것이라면 당연히 네 것이니라.”

“소인, 세자 저하께 감사드리옵니다.”

나는 상처를 닦아주려는 이백헌의 손을 눈치채지 못하게 피한 뒤, 유모를 일으켜 세우고 궤짝을 챙겨서 밖으로 향했다.

이 문만 나서면 된다.

그러나 하지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이백헌의 옷소매를 붙잡고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제가 언니만 못한 건 제 팔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어미는 내세울 만한 가문도 없고 좋은 혼수도 마련해 줄 수 없으니, 저는 저하께 시집갈 자격이 없나 봅니다.”

하지언의 울음에 이백헌의 마음이 온통 흔들렸다.

“네게 모자란 것은 내가 모두 채워 주마. 누가 감히 너를 비웃는다면, 내가 그자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하지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제가 언니를 대신하여 화친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이백헌은 하지언의 입을 살며시 막고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고는 손짓을 한 번 했다.

순식간에 호위무사가 내 손에 들린 궤짝을 빼앗아 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분명 제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백헌의 눈에는 다소 난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냥 두고 가거라. 어차피 네가 가져가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백헌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내게 약조했다.

“내가 약조하마. 화친을 가는 길에는 사병을 붙여 너를 지키게 하겠다.”

“3년이다. 네가 고생할 시간은 고작 3년뿐이니라.”

“때가 되면 내가 친히 너를 데리러 가마. 이 물건들도 그때 모두 돌려줄 것이다.”

‘3년 뒤라니.’

그때는 이백헌이 왕위에 오르는 날이었다.

나는 이백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소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나오자 이백헌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

“혼자 여빈족 촌으로 가고 싶다면 그리 해도 좋다. 본국의 법도에 따르면 정실만이 선산에 묻힐 수 있다.”

“내가 특별히 아바마마께 청하여 네 어머니만큼은 선산에서 이장하지 못하도록 어명까지 받아 두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이백헌의 말을 듣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웃다 보니 눈물이 흘렀다.

몇 번이고 이백헌을 믿었던 어리석었던 내가 우스웠다.

전생에서 별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병으로 쓰러졌다.

그때 유모가 호위무사가 뽑아 든 칼날에 자신의 몸을 그대로 던졌다.

사람이 죽을 지경으로 일을 크게 벌이고서야 겨우 내게 어의를 불러올 수 있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유모를 지킬 것이야. 어머니의 유해도 지킬 거야.’

“좋습니다. 저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유모, 가자.”

사람의 발길마저 끊긴 행궁에서의 나날은 별궁보다도 고달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흘만 지나면 이백헌과 하지언의 혼례일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빈족 땅으로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하지언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줄은 몰랐다.

하지언은 장차 세자빈이 될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나를 연회에 불렀다.

나는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백헌의 호위무사가 몸소 나를 데리러 왔다.

그제야 갈지 말지는 이미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뜰 안으로 들어서자 잇따른 비웃음이 들려왔다.

“세자 저하께서는 참으로 사람을 보는 눈이 밝으시구나. 지언 아씨처럼 사랑스러운 분을 택하셨으니 말이야.”

“남경처럼 날마다 얼굴을 빳빳이 들고 고고한 체하는 사람과는 다르지.”

“그러고 보니 정숙한 척만 했던 게지. 그 늙은 사내까지 꾀어내려고 했다지 않아.”

눈을 내리깔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시녀가 건넨 술잔을 받아 들고 허리를 숙여 올렸다.

그리고 하지언은 놀란 토끼라도 된 듯 황급히 술잔을 받아서 단숨에 비웠다.

“언니께서 어찌 제게 술을 올리십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백헌은 하지언이 다 비운 술잔을 웃으며 받아 들었다.

“내일이 지나면 천하에서 가장 귀한 여인이 될 터인데, 무엇이 몸 둘 바를 모를 일이냐?”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지언은 입에서 피를 토하더니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이백헌의 품으로 쓰러졌다.

이백헌은 홱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감추지 않은 분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여봐라, 하남경을 잡고 어의를 들라 하라!”

모든 사람이 우르르 무릎을 꿇었고, 내 주변에는 나를 향한 칼날이 가득했다.

“저하, 이 독은 여빈족에서 쓰이는 기이한 독입니다.”

“독을 쓴 자의 심장 가까이에서 피를 받아야만 해독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옷깃을 풀었다.

이백헌 역시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곧바로 단도를 들어 내 가슴을 갈랐다.

마치 내가 범인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가슴에서 받아 낸 피가 천천히 한 사발을 채웠고 하지언도 깨어났다.

눈앞이 캄캄해졌던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윤경을 빠져나가는 마차 안이었다.

눈시울이 새빨개진 유모가 삼계탕 한 사발과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아씨, 이번에는 아씨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네요.]

[지언 아가씨가 이번에 벌인 일도 그저 세자 저하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저지른 것이니, 한낱 깊은 연정에서 비롯된 일일 뿐이죠.]

나는 유모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고 삼계탕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이튿날, 혼례가 열렸다.

붉은 혼례복을 차려입은 이백헌이 세자빈이 될 여자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왕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똑똑히 본 순간, 한 생을 건너 이루어질 소원이 순식간에 믿을 수 없는 현실로 뒤바뀌었다.

“어찌하여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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