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약을 막 다 마셨을 때, 조세율이 내게 말했다.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그러나 그 사람이 앙상하게 야윈 이백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저하, 이곳은 대윤국이 아닙니다.”“떠나지 않겠다면 오늘 밤 내 시신이나 거둘 준비를 하시오.”나는 하지언 일가 세 사람의 눈에 어린 애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대로 걸음을 옮겨서 떠나려고 하자, 하태석의 늙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남경아, 이 아비가 잘못했다. 내가 눈이 멀어서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말았구나.”하지언은 그저 냉소했다.“이미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된 주제에, 어찌 세자 저하의 아이를 밴 세자빈인 나와 견주려 드는 겁니까?”이백헌은 순간 크게 당황했지만 내 눈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이백헌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사람을 시켜서 하지언에게 탕약 한 사발을 억지로 먹였다.하지언은 곧바로 하혈을 했고 뱃속에 있던 아이도 유산되었다.이백헌이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대윤국에서 밀서가 전해졌다.왕의 병세가 위중한데, 이안대군이 병사를 동원해 궁궐을 포위하려고 하니 이백헌이 바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이백헌은 그날 밤 자신의 가슴을 갈라 심장 가까이에서 피를 한 사발이나 받아 냈다.그리고 신의에게 명하여 그 피를 약에 넣도록 했다.“남경아, 나를 미워해도 좋다. 나를 만나지 않아도 좋다. 허나 살아 있어야 나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겠느냐.”이튿날, 하태석은 영안골로 보내져서 광산에서 광물을 캐게 되었다.그리고 하지언과 심형단은 변경의 관기들이 머무는 곳에 던져졌다.나중에 들으니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둘 다 미쳐 버렸다고 했다.내 몸은 줄곧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고,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렸다.내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것을 본 조세율은 급기야 이백헌의 피를 섞은 약을 억지로 먹였다.그 뒤 보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조세율이 말없이 침묵하자 나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멀리 여빈족 촌 족장의 천막 안에서, 나는 온몸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 속에 눈을 떴다.낯선 사내 하나가 내 손을 잡고 있자, 놀란 나는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사내는 즉시 내 손을 놓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아가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는 여빈족의 새로운 족장 조세율이라 합니다.”“그대를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대윤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상처가 다 나은 뒤 사람을 붙여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습니다.”나는 의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으로 조세율을 바라보았다.“유모는 어디 있습니까?”조세율은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모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안으로 뛰어들어왔다.“아씨, 깨어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유모는 내 온몸의 상처를 꼼꼼히 살펴본 뒤에야 자신이 알아본 소식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알고 보니 앞선 늙은 족장은 정통성이 없는 자였고, 지금의 새 족장이야말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늙은 족장은 당시 제 욕심을 채우려다 후환을 뿌리 뽑지 못했다.뜻밖에도 새 족장의 일파가 불과 10년 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늙은 족장의 목을 베어 천막 앞에 높이 내걸었다.그러나 나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허나 어찌하여 저를 구한 것입니까? 이를 빌미로 대윤국을 겁박하려는 게 아닙니까?”그때 조세율이 천막 자락을 걷고 다시 들어왔다.“5년 전, 나는 여빈족 사신을 따라 대윤국에 조공을 바치러 갔었습니다.”“그러나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사졸로 여겨져 비무대에 올랐고, 하마터면 난장에 버려져 죽을 뻔했습니다.”“그때 지나가던 그대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의원을 불러 주었습니다. 덕분에 내가 오늘까지 살아남았고, 마침내 내 것이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눈앞의 장대한 사내와 그해 여위고 중상을 입었던 아이가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그래도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조세율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 지금의 나는 그 호
그러나 하지언은 나직이 중얼거리듯 물었다.“제가 바란 것은 처음부터 지위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저하였습니다, 세자 저하.”“어찌하여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두 하남경 그 천한 것만 바라보는 것입니까? 저하마저도 어찌 그러시는 것입니까?”“저는 하지언입니다. 정식으로 예를 갖춰서 저하께서 맞은 세자빈이란 말입니다. 그런 여자 따위는 감히 저와 견줄 수도 없단 말입니다.”그러나 하지언에게 돌아온 것은 정신이 흐릿한 이백헌의 목소리였다.몇 번이고 남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 미안하다고 빌었다.그리고 몇 번이고 약조했다.“내 이승에서는 오직 너 하나만을 연모하마. 다른 여인은 결코 두지 않겠다.”그 약조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 하지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가슴이 너무도 아파서 하지언도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남경아, 어찌 이리 일찍 일어났느냐?”이백헌이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지언은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은 찬 서리에 허리가 꺾어진 한 송이 흰 꽃과도 같았다.이백헌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창밖에서 햇살이 스며들면서 하지언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그 모습에서 어렴풋이나마 이백헌이 가장 사랑했던 이의 모습이 비쳤다.“됐다. 일어나거라.”그 말을 들은 하지언은 울음을 거두고 웃었다.용기를 내서 이백헌에게 친정으로 함께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이백헌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하지언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언니의 유품을 오늘 모두 태운다고 합니다. 저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그제야 이백헌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더니,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뒷모습에 하지언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물들었다.이백헌은 하지언을 기다려 줄 마음조차 없이, 혼자 말을 몰아서 하씨 가문 저택으로 들이닥쳤다.심형단은 마침 집사에게 명해서 하남경이
대전 안은 온통 죽은 듯 고요했다.이미 몇몇 대신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용상에 앉은 왕에게 조금이라도 불경한 기색을 들킬까 두려워서였다.그러나 이백헌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하지언을 가볍게 피했다.“네 언니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 더 늦으면 때를 놓치고 말 것이다.”바로 다음 순간, 공간 전체를 왕실 호위무사들이 에워쌌다. 이백헌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몸을 돌리고 무릎을 꿇었다.“소자를 보내 주시옵소서!”“돌아온 뒤에는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그러나 왕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모든 사람을 물렸다. 그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보좌 아래로 내려왔다.왕은 손을 들어 평생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들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세자빈이 목숨을 걸고 과인에게 고하지 않았더라면, 내 아들이 감히 남몰래 사람을 바꿔치기하려고 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네가 정녕 정신이 나갔구나! 감히 과인의 가장 정예 병사를 움직여서, 여빈족으로 화친을 보내는 한낱 바둑알 따위를 네 동궁으로 빼돌리려고 하다니!”이백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하지언이 이 일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왕에게 곧장 고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그러나 이백헌에게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고개를 든 이백헌의 목구멍에서 비통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아바마마, 제발 소자를 보내 주시옵소서!”“소자가 모든 것을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결코 여빈족에게 들키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왕은 차디찬 눈으로 이백헌을 바라볼 뿐이었다.대전 안의 호위무사들 역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경계하고 있었다.양쪽이 맞선 끝에 이백헌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던 절규는 끝내 울먹임으로 변했다.“하남경이 어찌 고작 바둑알이란 말씀입니까?”“하남경은 소자가 이 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소자가 어찌 두 눈을 빤히 뜨고 하남경이 죽으러 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그러나 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눈빛은 더없이
“네가 이곳에 있다면, 남경 쪽은 지키는 자가 있느냐?”그 말이 떨어지자 대전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무엄하구나!”왕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화가 치민 듯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왕의 곁에 서 있던 세자에게 내어 준 사병의 우두머리 역시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그제야 이백헌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왕은 이백헌이 하찮은 화친녀 하나를 호송하는 데 사병을 보낸 걸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었다.그 여인이 이백헌이 여러 해 동안 사랑해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이백헌은 실망이 어린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한번 바라보더니, 잡고 있던 하지언의 손을 놓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붉은 천 아래 가려진 하지언의 눈과 마음에는 감출 수 없는 통쾌함이 가득했다.하남경은 평생 하지언의 머리 위에 군림해 왔다. 그러나 하지언이 작은 꼼수를 부리자, 하남경이 잃은 모든 것들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하지언은 혼례를 치르는 날에 이백헌이 이토록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못마땅했다.하지만 어찌 되었든 죽은 사람이 어찌 자신과 견줄 수 있겠는가?어차피 대윤국의 세자빈은 하지언이었다. 훗날 만백성의 어미가 될 중전도 여전히 하지언이었다.그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 가는 사이, 하지언은 자신의 몸을 세게 꼬집었다.살이 붉어질 정도로 세게 꼬집자,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저하,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저하께서 이대로 가시면 오늘 저는 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저를 연모하지 않으신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저를 몰아붙이시는 것입니까?”하지언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이백헌의 마음도 한바탕 아렸다.그러나 이백헌은 단호하게 하지언의 손을 뿌리쳤다.“지언아, 남경도 너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언니가 아니더냐?”“나는 남경에게 일이 생기는 것을 두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볼 수도 없고, 또 그리해서도 아니 된다. 너 또한 같은 마음이라 믿
이백헌은 곧장 앞으로 다가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네 어머니께서 남기신 것이라면 당연히 네 것이니라.”“소인, 세자 저하께 감사드리옵니다.”나는 상처를 닦아주려는 이백헌의 손을 눈치채지 못하게 피한 뒤, 유모를 일으켜 세우고 궤짝을 챙겨서 밖으로 향했다.이 문만 나서면 된다.그러나 하지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이백헌의 옷소매를 붙잡고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제가 언니만 못한 건 제 팔자로 받아들이겠습니다.”“제 어미는 내세울 만한 가문도 없고 좋은 혼수도 마련해 줄 수 없으니, 저는 저하께 시집갈 자격이 없나 봅니다.”하지언의 울음에 이백헌의 마음이 온통 흔들렸다.“네게 모자란 것은 내가 모두 채워 주마. 누가 감히 너를 비웃는다면, 내가 그자를 죽일 것이다.”그러나 하지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저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제가 언니를 대신하여 화친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이백헌은 하지언의 입을 살며시 막고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고는 손짓을 한 번 했다.순식간에 호위무사가 내 손에 들린 궤짝을 빼앗아 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분명 제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백헌의 눈에는 다소 난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그냥 두고 가거라. 어차피 네가 가져가도 쓸 일이 없을 것이다.”이백헌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내게 약조했다.“내가 약조하마. 화친을 가는 길에는 사병을 붙여 너를 지키게 하겠다.”“3년이다. 네가 고생할 시간은 고작 3년뿐이니라.”“때가 되면 내가 친히 너를 데리러 가마. 이 물건들도 그때 모두 돌려줄 것이다.”‘3년 뒤라니.’그때는 이백헌이 왕위에 오르는 날이었다.나는 이백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소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내가 이렇게 나오자 이백헌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혼자 여빈족 촌으로 가고 싶다면 그리 해도 좋다. 본국의 법도에 따르면 정실만이 선산에 묻힐 수 있다.”“내가 특별